전깃불(Electric lamp)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17편(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17)
함박눈이 유난히 쏟아지던 지난 겨울밤
내가 그 날 달빛이 쏟아지던 그 하얀 눈밭에
감히 발자국을 남길 수가 없었던 이유는,
그곳에 자신 있게 드러누워
진정성 가득한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어설프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밀폐된 창문이 없는 방 안에서
도저히 전깃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소름끼치도록 진저리 처지는
막연하게 다가와 마음을 잠식하는 두려움,
단 1초도 견디고 싶지 않은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것
나는 도저히 그 완전한 어둠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 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에
반드시 가로등이 켜진 길 아래를 골라 다니려고 하는 것은
용기의 부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노란 나트륨등이 비추는 세상 밖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목소리를 내어 나를 부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눈으로 본 것도 아니었고
귀로 들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호감을 가지게 된 여성인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불가해의 악마의 목소리인 것도 같았다.
나는 달도 뜨지 않은 완벽한 어둠 속으로 한걸음을 내딛어야만 했다.
하지만
단순히 막연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나의 자아에 향하여
내가 딛고 있던 노란 나트륨등의 세계를 위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너와 인연을 맺은 적도 없었던 그러나 네가 약간의 호감을 가지게 된 여성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와
네가 발 딛고 있는 세상 전부를 없애버리게 될 운명을 서로 맞바꾸어 봐라.
네가 그녀에게 고백한다고 해서 그녀가 너를 받아 줄지는 알 수 없지만
네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네가 지금껏 발 딛고 서 있던 노란 나트륨등 같은 세상은 확실하게 없어질 거다.“
그는 교묘하게도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고작 고백 따위를 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고백 따위를 하기 위해서 세상을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뭐랄까, 절대로 해서는 않되는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어두운 밤길에 웬만하면 불이 켜진 장소를 골라 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노란 나트륨등 아래에 계속 서 있기로 결정한 순간
나트륨등도 꺼져버리고
눈앞에서 나에게 손짓하던 무엇인가도 사라져 버렸다.
아니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온갖 소름끼치는 소리들로 무엇인가를 능욕하고
잔인하게 고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것이 용기 없는 네 선택의 결과다”
안타까움에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으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헤치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저 멀리에 다른 나트륨등이 켜진다.
나는 다시 본능적으로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주위를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돌아서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
나트륨등은 다시 꺼지고
또다시 무엇인가가 어둠속에서 고통 받는 소리가 들려온다.
결국 나는 불이 켜진 길로 다니려던 애초의 결심과는 반대로
불이 꺼진 어둠속만을 뱅글뱅글 맴돌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무언가에 긁혀
몸뚱이에 상처만을 한가득 얻게 되었다.
나는 억울했다.
나는 용기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내 주변의 다른 존재들보다 하찮게 여겼던 것이 절대 아니라고
무엇인가의 멱살을 붙들고 항변하고 싶었다.
사기꾼에게 휘말려버린 것 같은 어둠의 시간들
나는 더 이상 내 주변에 켜지는
그 어떠한 불빛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어둠속을 오가는 알 수 없는 존재들 중 일부가 나에게 다가와
갑작스럽게 눈앞에 전깃불을 들이대고는
눈이 부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둠속을 기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능욕당하고 고문 받는 것 같은 소리들이
누군가가 확성기로 증폭시킨 것처럼 고막을 때리고
어둠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의 팔다리를 거칠게 잡아끌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야기 했다.
“믿어”
밑도 끝도 없는 선문답 같은 말들
나는 더욱더 고집스럽게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끝없는 고독의 시간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진실은
나에 대한 호의가 없는 인연을 향하여
내가 애정을 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의 진실성의 여부를 떠나서
상대가 나의 진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기를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혹 이 우주에 자아를 가진 존재가
오로지 ‘나’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자아(自我)’ 란,
그토록 이나 고독(孤獨)한 존재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그녀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여전히 그 눈부신 전깃불 너머의
어둠속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또한 전깃불이 무엇인지조차도
여전히 전혀 알 수가 없다.
*이 시는 소설 ‘전짓불’ 에 등장하는 대사
“어느 편이냐?”
라는 질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시입니다.
해당 소설은 최근 손석희 앵커님의 방송에서 잠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이었고
하루는 남측 군이 하루는 북측 군이 서로 점령지를 재탈환 하는 일이 빈번했던 시기였습니다.
갑자기 민가에 들이닥쳐 한밤중에 밝게 빛나는 전짓불을 들이밀고
그들은 외쳤다고 합니다.
“어느 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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