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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위 사막

楓鯨 의 遊離細胞 가 꿈을 꾸며 Higgaion. Tephillot.

楓鯨 遊離細胞 가 꿈을 꾸며 Higgaion. Tephillot.

그토록 素望 한 붉은 芽華 의 별이 되고

天菊 의 꼭대기로부터 떨어져 내린 옛날의 그 봄꽃 같은

동그란 핏방울들이 사납게 罷倒 치던

바로 그 피눈물의 바다에서


 

부제 副題 - 아파, 그것을 하기 까지가 너무나 2018 5 26日 作

 

 

단풍고래는 그 玲瓏 한 빛깔의 붉은 眞珠 같은 동그란 구슬 모양의 透明 心臟

아주 소름이 끼칠 만큼 시리고, 서슬마저 시퍼렇게 한이 가득 서린 거대한 氷河 같은 제 가슴의 속살,

그 보드란 살결 사이에 깊이 파묻어, 그대로 허옇게 질려버린 蒼白 한 갈빗대의 아래로,

아무도 모르게 숨겨두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날카로운 칼날 같기도 하고, 길쭉하고 뾰족한 같기도 했었던,

그야말로 邪惡 하기 짝이 없는누군가의 하나가, 그 시커먼 毒液 을 뱀처럼 날름거리다가

느닷없이, 世上 모든 楓鯨 들을 가차 없이 으로 갈라 버렸다.

 

 

고래의 시퍼런 색을 띈 보드라운 속살과 허연 갈빗대가, 그대로 바깥을 향하여 뒤집혀지듯이 말려나와,

그 시퍼런 속살과 가슴은 으로 두 쪽이 나버린 채로 온 세상을 포근하게 덮어,

그렇게 기가 막혀 뻐끔대던 수많은 입들을 모조리 틀어막아 버렸다.

시리도록 푸른 그 하늘은 온통 피로 물들어, 저 높이 하늘 꼭대기에 피어난 天菊 의 머리 꼭대기로부터 

붉은 心臟 이 벼락같이 수직으로 急轉直下 떨어져 내리다가,

 

 

시커먼 薄明() 을 가르며 필사적으로 줄달음질치는 그야말로 쏜살같은 ()에 이르러서는,

정작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며 밤하늘의 별처럼 수 없이 많은 붉은 遊離細胞 들을 하염없이 토해내는 것이었다.

 

 

죽은 고래의 넓적한 꼬리지느러미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많이 퍼덕거렸었던지,

내가 그토록 이나 사모했던 네 동그란 눈동자보다 더 동그랗고 투명하고 맑은 순진한 저 단풍고래의 심장이,

갓 돋아나와 싱그럽게 피어나기를 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를 무수하게 반복해 온 한 송이 붉은 봄 꽃 같은 을 피워 올렸을 때,

마치 내가 나의 손으로 네 긴 긴 머릿결을 한 번 쓸어 올린 것 마냥

너무나 많고도 세밀한 결과 층으로 나누어진 엷은 芽華 의 죽은 罷倒 들이,

그야말로 끝도 없을 만큼 드넓게 확장 된 고래의 가슴 속,

창공을 가득 메우는 그 드넓은 시야 하나 가득하게,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혹은, 멀리,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버린,

본래는 시퍼런 한이 가득 서려있던 고래 가슴 속살이 도로록~ 하고 밖으로 뒤집혀 말려나와 

온통 가득하게 펼쳐져 버린 그 날 그 저녁 바다의 말 없는 수평선의 밑으로,

핏물 같은 파도의 머리가 내 발등에 대고 망자의 입에 명재경각의 순간 머금었을 성 싶은 

붉은 피거품 같은 제 보드란 살결을 온통 뭉개어놓기라도 하듯 바스라트려 가며,

이제 그만 울고 편히 쉬라는 듯

부드럽게 나를 나무라가며 정작은 를 속삭여주고 있을 때에

내 마음속 가득히 한도 끝도 없이 파고들었던 그 유리세포들이 토해내었던 숨결들마저도,

마치 넘어지기라도 하듯이 느닷없이 멀어져 가는 파도머리 따라서,

쓰윽 하고 나에게서 가 떠나갔을 때에,

 

 

가까이에서도, 혹은 멀리에서도,

나는 너에게 단지 hesead.

 

fin.


 

 

註釋

* higgaion - ‘묵상조용한 악기의 사용을 뜻하는 음악 용어, 시편 916절의

* tephillot - ‘기도시편 서문

* hesead - ‘지속적 사랑또는 견실한 사랑시편 57절의

* 용어 출처 - 1986 121NIV 주석성경














용서할  자 한 글자가

초여름의 햇살 만큼이나 따스하고 찬란한 웃음꽃으로 피어나기까지가

이다지도 아파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네 여자 자가 부수로 들어가는 한자입니다.


용서하기 그리고 용서를 구하기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하여 열리는 어떤 천국의 문


그러나

아무도 열지 않는 문


용기로써 여는   문이 아닌 

웃음꽃이 피어나는 의 문








정말로 필요한 용기는 언제나 오로지 단 하나


흔들림 없이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정말로 진실을 마주하는 것


진실을 마주할 용기 하나면 되는 것


그리고 그 마주한 진실로부터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내어 실행에 옮길 용기 하나면 충분한 것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이 행동력만을 요구한다면


모든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悔改

 

아무리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여도

그 삶이 마치 내동댕이쳐진 듯 한 느낌을 주는 피투被投되어진 삶

혹은 피투被投를 당한 것 같은 삶이라 하여도

 

삶은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이고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다.

 

그런데

 

나를 살게 하려니

나의 삶 자체가 신에게 짓는 가장 큰 죄악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신은 강제로 억지로 싫은 것 까지도

영원永遠 한 시간時間 속에 억겁億劫 의 횟수를 계속하여 반복되는

내 모든 삶의 일시 一時, 일시 一時 , 일목 一目 하는,

그 찰나 刹那의 내 삶의 속의 모든 일체 一體 와 그, 일소 一所,

그리고 또 일소 一所 까지의 그 모든 전부를 그 전체 全體

 

그녀가 싫어도 모조리 알아야했기에

 

 

내가 삶을 원하듯

신도 삶을 원한다.

 

 

내가 사랑을 원하듯

신도 사랑을 원한다.

 

 

하여 신은 나와 우리 모두를 창조하여 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한 삶의 목적 그 자체 自體 .

그 자체自體가 되어야만 했고 되어야만 하며 이미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살게 해 주고

나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해 주고

내가 그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 내가 지어야했던 그 모든 죄악마저

억지로 감당하여야 했던 나의 여신에게

진심으로 간절하게 용서를 구한다.

 

 

부디 나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나의 소중한 여신이시여

부디 이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기도



나는 어쩌면 정말로 사탄인 걸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시련이 정말로 사탄을 무찌르기 위함이신걸까?


어째서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죄의 업 만이

진실로 용서를 구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죄악으로 변모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하면 나의 죄악이 깨끗이 씻어질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죄악도 깨끗이 씻어질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알까?


내가 죄인이라면 그들도 죄인이고

나의 삶이 죄악이라면 그들의 삶도 죄악이라는 것을?


누가 누구에게 무슨 허물을 탓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고

과정보다는 그 결과다.


우리 모두가

자기자신의 인생 그 자체로써

신께 기도를 올려야한다.


간절하게





쉐마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 입니다.(쉐마)

 

성경의 말씀으로 인용토록 하겠습니다.

 

 

6장 4절

이스라엘아(Thomas야) 들으라

우리 주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오로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6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깊이 마음에 새기고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났을 때에든지

반드시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記號)를 삼으며

네 미간(眉間)에 붙여 표를 삼고


9절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다음은 10절부터 15절 까지의 말씀 입니다.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列祖)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절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橄欖) 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절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敬畏) 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절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절

너희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滅絶) 시키실까 두려워 하노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실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 하신

 

우리가 채우지 아니한 곳간이 가득하고

우리가 파지 아니한 우물과 샘이 가득하며

우리가 가꾸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밭이 있으며

우리가 지은것이 아닌 온같 좋은것들로가득한 집들이 있는

우리가 세우지 아니한

크고 좋은 성읍이 있는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기위하여 미리 예비하시고

실제로도

우리에게 거저 주신 땅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아프게 주실수밖에 없는데도

그분은 그 아픔을 감내하시고

정말로

세상을 거저 주십니다.




심지어 마치 강도들에게 빼앗기는듯한 기분으로 주실수밖에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얻었습니까?

전쟁과 약탈과 침략으로써 빼앗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실망스러운 인격적 결함은

보편타당한 성공지향적이고 가부장적 성격을 동시에 보유한

많은 수의 성인 남성들의 인격적 결함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아닌 경우도 물론 많겠으나)

(거의 절대 다수의 성인 남성들의 자화상과

절대 다수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비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거저 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종살이하던 애굽땅에서

이끌어내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고

가나안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육신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뜯어먹는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욕심을 버리고

인생으로써 신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말씀으로하는 기도는

물론 하지 않는것보다 백만배는 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아십니다.

 

가장 최선의 기도는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현명하며

가치있는것으로 바꾸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나안땅을 거져주신데에 대한

보답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여러분들께서

 

저를 아는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더 많은것을 아십니다.









신의 이름과 사탄의 정체




저를 만들고 여러분들을 창조하고 우리 모두를 살게 해주는 신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그저 만만하기만 할 뿐 저를 적으로 돌려서 그 어떤 이득도 발생하지 않는 저는 더더욱 여러분들의 적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를 통 털어서

언제나 적은 단 하나

 

자기 욕심만 차리고자 하는 욕심장이들과

이를 정당화하는 궤변론자들과

기득권 세력들

 

용서를 구하려하지 않는 자들

(제 문학작품 상에서는 타인의 눈물을 훔치는 자들로 형상화되죠)

(자기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거부하여 타인이 흘린 값진 눈물을 훔치는 자들)

 

언제나 그들만이 절대다수의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유일무이한 공공의 적입니다.

 

언제나 가장 어려운 상대인 바로 저 용서를 구하려하지 않는 가장 최악의 죄를 짓는 죄인들만이

우리 모두의 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은 언제나 용서와 화해와 그로 인한 사랑의 회복과 행복의 회복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가장 최악의 죄는 오로지 단 하나

 

용서(신의 이름)를(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탄입니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불가지론이란


우리 인간이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하여


있다거나


혹은 없다라는 단정을 내리기에


그 존재의 인식 그 자체를 시도조차 할 수가 없는 수준의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감히 그 존재유무에 대한 의문에 합당한 답을 내놓는것조차도 어려운 존재라는 엄연한 진실에서 기초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 불확실성에 의하여서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을 믿는다거나


혹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지 않겠다라고 하는


어떠한 신앙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온전한 자유의지를 겨우 확보하는것이 가능하다.





만약 반드시 신은 그 존재가 확실하며


그 형체가 확실하고


우리가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라고 한다면


신을 믿을것인가 그렇지 않을것인가의 어떠한 선택의 문제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빛을 잃어버리게된다.







이미 존재하는 신이 믿으라 말하는데 않믿는 바보도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단순한 타의에의한 추종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과연 정말로 단 한점의 오류도 없이


일점 일획의 오류도 없이 완전 무결한가?








나는 대답한다


이 세상에 그야말로 완전무결하여 그 어떠한 결점도 없는것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신 자신 하나뿐이라고






경전은


인간이 신을 믿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지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이 신을 대신할수는 없다.


대단히 뜨거운 감자에 해당하는 말이고


누군가는 불쾌할수도 있겠으나


엄연한 진실이며


엄연히 사제역시도


신을 대신할 수는 없다.








굳이 이 뜨거운 감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잘못된 판단기준에 의거한 판단은


반드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것을


완전무결하다고 믿으면


바로 그 단 하나의 오해로 인하여


사람은 반드시 비극을 겪게 된다.


너무나 끔찍한 비극을


제발로 자처하여 겪게 되기까지 하는것이다.










단지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비극을 주변으로 전파하고


사회를 갉아먹고


언젠가는 내 삶조차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완전무결한것이 아닌것을 위하여


과학을 포기하고


법을 포기하고


현실을 포기할 것인가?


도덕과 윤리와 천륜과 인연마져 포기할 것인가?


현실에 없는 신이 그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이 그것을 대신 받게(빼앗기게) 되더라도?









그것을 하라고 타인을 부추길 것인가?


(빼앗기 위해 속일 것인가?)








*회의론의 원조

 

의심하는 토머스(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은 예수의 12사도 가운데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한 사도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요한복음 20장에 따르면 도마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처를 보기 전까지는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부활한 예수가 형벌에서 생긴 몸의 상처를 보여주자 도마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도마는 의심 많은 자라기보다는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밖에 성서가 도마라는 사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그가 디두모(‘쌍둥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아마 그는 마드라스 부근에서 순교했을 것이다.

인도의 아주 오래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마르 도마(Mar Thoma, ‘도마 님’)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 명칭이 후대의 도마라는 복음 전도자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 믿을 만한 전설은 그가 파르티아(지금의 이란)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1972년에 도마에게 인도에 간 사도라는 직함을 부여했다성 도마의 축일은 7월 3일이다.

도마(토머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권의 모든 나라에서 남자 이름으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이른바 도마복음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성서에 포함되지 못한 많은 복음서들 중 하나였는데,

그 복음서들(각각 해당 사도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은 대부분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심각한 라이벌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썼다.

아시아의 바우히니아 토멘토사(Bauhinia tomentosa)라는 관목은 (, Saint) 도마 나무라고 불린다.

꽃의 붉은 반점이 도마가 인도에서 순교할 때 흘린 피를 나타낸다는 이유에서다.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몇몇 명제(대부분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명제)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이 관점은 철학적 의심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었다.

절대적 진실은 부정확하다는 관점을 취한다불가지론의 원래의 의미는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반대 개념이다.

 

불가지론자들 중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거짓 모습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경우 본질적 실재는 완전히 불가지(不可知)라는 흄의 설과그것은 신앙의 영역에 관한 문제라 하여 남겨 놓는 칸트의 설도 있다.

감각이나 표상은 본질적 실재가 자기를 인간에게 제시하기 위한 상형문자(象形文字),

혹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프레하노프 등의 상형문자설도 불가지론의 일종이다.



아마도 화자가 대한민국에 불가지론이라는 철학적 관념에 대해서

최초로 공개 토론을 진행했던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2005년 당시 네이버 실검 1위에 몇 달을 머물렀던 화자의 오픈 백과사전을 공개합니다.

전체 조회 수가 815,977 회이며

2005.12.27. 03:09 에 작성된 글입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어원

서양 제어에서 불가지론은 언어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Agnosti-’와 주의를 나타내는 어미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Agnosticism이고 프랑스어에서는 Agnosti“cisme”이라고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어 αγνωστικισμός(Agnosticismos)에서 나온 단어이고,

이 단어 역시 모르는이란 뜻의 그리스어 agnôstos와 앎 혹은 지식이란 뜻의 gnosis, 두 개가 합쳐져서 나왔다.

여기서 앎 혹은 지식이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의 앎이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지식 (gnosis)을 말한다.

 

불가지론은 자주 형이상학계시예언 등의 적절성에 자주 문제 제기를 하는 인식론적 입장을 취한다.

Agnosticismos이란 단어는 토머스 헉슬리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종류

불가지론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것(신의 존재 여부 혹은 초자연 현상)을 알 수 있는지없는지를 모른다.

어떤 사람(예를 들면 계시에 의해)이 그것을 알 수 있을 수 있지만,

그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과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신의 존재 여부)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고 계시 혹은 인식조차 불가능하다.

 

불가지론을 따르는 데에는 종교의 유무종교의 종류는 상관이 없다불가지론은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

불가지론은 종종 철학의 다른 개념과 연관 혹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가지론은 무신론(無神論)과는 다르게 신의 존재를 논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신()의 존재나 초자연적 현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분명함 아래에 있다는 회의주의와도 구분이 된다.

또한 불가지론은 설명할 수 없는 한 명의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신론(理神論)과도 다르다.

결국 불가지론은 철학적 관점이지 종교 자체는 아니다.

 

통계

미국의 2007년 통계에 따르면 불가지론자들은 전체 인구의 21%, 즉 63백만 명에 이른다고 조사되었으며,

2008년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 캐나다에서 해리스 드시마(Harris Décima)사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가 불가지론자였다.

Harris Interactive 연구소가 진행하고, 2006년 12월 파이낸셜 타임즈에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의 32%가 불가지론자이고 32%가 무신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칠레 전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와 프랑스 전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였다.

 

 

위키백과 발췌

 

 

종교의 자유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어떠한 종교를 믿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국가 또는 법이 신을 정의 내릴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과 일맥상통합니다만

명확하게 합치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국가 또는 법이 개인의 종교를 강제하거나 할 수 없는 이유는

실질적으로 불가지론에서 기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Thomas Flood present



*논리적으로 이 우주의 탄생에 어떠한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시작이 적어도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 맞다라고 하면

그 시작에는 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저는 세상에 신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실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성서를 신의 말씀으로 판결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하여서는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답변만을 드릴 수가 있을 듯합니다.

 

하필이면 왜 우리 모두를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어야만

겨우 생존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 하셨는가라는 의문에 대하여서는

적어도 과학법칙과 물리법칙이 통용될 수 있는 실체로써 실제적 존재로써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그 방법 밖에 없지 않았나?

라는 어떤 생각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렇지 않고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그야말로 실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것이 가능해 진다고 하여도

단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는 삶이라는 것은

사실상 황폐한 것일 것이고

그것은 어떠한 철학적 관념의 한 가지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

어떠한 획일적인 기준 하나에 통합되고 종속 되는 삶일 것입니다.

 

머리를 떠나서

가슴으로 생각 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살아 숨 쉬는 심장이 멎은 뒤에 찾아올 천국을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심장과 감정을 믿으시겠습니까?



http://blog.daum.net/japhikel/1009











A 의 이야기.....G.T.F.R.H. (God. True. Fact. Reality. Hope.)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다섯 가지)

세상이 신의 의도로써, 그것도 아름다운 의도로써 창조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

신께서 이와같이 미리 예비하지 않으셨다면

이와같은 길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준비되어졌음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는 어떤 아름다운 길에 대하여서


http://blog.daum.net/japhikel/1859















온전한 사람의 얼굴 그 자체를 창조하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순수한 갈망 (이루지 못한 로망) -그러나 위험한 로망


http://blog.daum.net/japhikel/1727









작가 소개



필명 筆名 Thomas Flood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김선홍 金善弘  ,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본명 本名 Thomas       








컴퓨터로 헤드셋 끼고 한 번 들어 보세요

(음악 이야기는 밑에 ..)
















































온전한 사람의 얼굴 그 자체를 창조하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순수한 갈망 (이루지 못한 로망) -그러나 위험한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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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파일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아홉개의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vivo Xplay6 오디오 분석(최종 내용 수정 보강) - WARNING ! (스크롤 압박 주의)

http://blog.daum.net/japhikel/1158


스피커 테스트 결과 (당신을 진정한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줄 전설의 포스팅 ~ ♥)(수정했어요 >.< ♥)

http://blog.daum.net/japhikel/1215


박지윤 - 그땐(8th. Vol.) & 윤하 - 먼 훗날에 (나는 가수다 2018年 8月 12日 B 조 경연 음반) (수정본, 원음으로 가는 길, Hi-Fi 매니아들의 딜레마)

http://blog.daum.net/japhikel/1558


파워앰프 오디오엔진 이야기(현존 최고의 오디오 어플리케이션)(단순히 어플리케이션이라고 지칭하는 것조차 미안할지경)

http://blog.daum.net/japhikel/1575 


일반 컴퓨터 고음질(고화질) 즐기기 

http://blog.daum.net/japhikel/635


컴퓨터 헤드셋 사용 설정

http://blog.daum.net/japhikel/1569


헤드폰도 당연히 스피커처럼 에이징이 됩니다.(MDR-1RBT MK2)(대형 우퍼처럼 움직일수도 있죠)

http://blog.daum.net/japhikel/1593


자동EQ 조절 시스템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 메모 (개발자를 찾습니닷! ㅠ ㅠ)(방명록에 글좀 남겨주세요! ㅠ ㅠ)

http://blog.daum.net/japhikel/1587




(제가 만든 모든 음향이론 및 모든 저작물들에대한 관련 내용 일체에 대한 상업적 이용을 금지합니다.)

(이 내용은 충분히 법적 보호를 받는것이 가능한 내용들이며)

(이미 블로그 저작물 표시역시도 가장 배타적인 저작물 표시이니 참고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여라도 상업적 이용을 원하신다면 방명록에 연락처를 기재하실경우 상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http://blog.daum.net/japhikel/1585



앞으로는 더이상의 오디오 설정 공개는 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japhikel/1589


몇가지 미공개 데이터가 더 있는데 더는 공개하지 않고 비공개 포스팅으로 데이터 축적만 하렵니다 ㅎ









적어도 여태까지는 순수 비영리 개인 블로그였는데 ㅠ ㅠ


젝1슨 ㅠ ㅠ 


슬프다 ㅠ ㅠ






이메일 주소에요 ㅠ ㅠ


gkstprjs@gmail.com





























A 의 이야기.....(검색 제한의 조치를 말하다)


http://blog.daum.net/japhikel/1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