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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질문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고 느끼기는 할 테지만

사실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거론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왜 하필

그것은 신의 질문인가?

사람이 살다가 보면

마치 반드시 둘 중의 하나만을 택일을 해야 할 것만같은 상황에 종종 처하게 되고는 하는데

사실 내심 다른마음 품고양자 모두를 택한다고

당장 살면서 무슨 큰 일이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부터는

절대로 복수의 답안지 제출이 정말로 불가능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에 대한 질문인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이 두가지 형태로 사람 인생에 찾아오게 된다.

도덕이냐?

아니면 무력이냐?

질문을 조금 형태를 바꾸면

자연의 섭리냐?

사회의 규율이냐?




모든 양자 택일의 기로에서 사실 궁극적으로 신의 질문이란 사실 위의 하나 뿐이다.

그것이 그야말로 천변만화하는것과 같은 형태로

마치 그 비의를 아무도 알지못하는 문외불출의 비전으로만 전해지는 변검술사의 화려한 변검처럼

대단히 다양한 형태의 얼굴로서 표출이 되다보니

사람들이 간혹 그것이 아닌 다른것에 대한 질문처럼 착각을 하게 되고는 하는데

사실 질문은 하나 뿐이다.

양심이냐?

비 양심이냐?




도대체 왜 하나님 께서는

사람이 살면서 비 양심적인 선택을 하는것이 명백한 순간에

당장에 천벌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 사람이 그러한 선택을 실행에 옮기기 까지 하도록 놓아두시는 것일까?




그것은 이를테면 유예의 기간이다.

너희가 당장에 먹고 살아야지만 하는 여차 저차한 절박한 사정들이 있는것을 내 모르지는 아니하니

최소한 살게는 하여 주겠다.

그러나

그 유예의 기간이

절대 무기한은 될 수가 없으니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자기 몸에 약이되는것을 먹으려 하면 왜 그것은 쓴가?

왜 사람은 먹는음식에 약이 포함이 되려하면 독을 함께 먹지않으면 약을 먹기가 힘이드는가?

내가 내 몸이 중하므로 나는 내 몸에 오로지 약이되는것만을 먹어야 하겠다?

눈을 들어 자연에 살아있는 네가 먹으려고 하는 먹거리들 중에서 네 몸에 약이되는것 만을 그럼 네가 직접 찾아 볼테냐?

(멏백만년 동안 약과 독을 함께 먹도록 유전자가 이미 고정된 생명체가 어느날 갑자기 약을 먹는다.)

(물론 약은 그것이 사람 몸에 정말로 약으로 작용하므로 약이라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그 과정이 순탄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뜻이다.)




공인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그 지닌바 기예가 뛰어나고 출중하여 견줄이가 없는것을 공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작 정답은 다른 것인데 본인들이 착각을 많이 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지닌바 그 기예가 빼어나고 출중하여 그것에 대하여 견줄이가 없는 것을 가리고자 하는 행위는)

(사회가 집단으로서 최대한 적은 과실의 발생 비율로서 동작 하여야 선의의 피해자가 보다 적게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절대 평가와 상대평가를 겸하여 가장 적은 과실을 유발하는 이를 가려 뽑아 이를 그 분야의 지도자로 삼기위한 사회의 장치이자 기능일 뿐이지)

(그것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판단하는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명체로써 얼마나 잘 기능하느냐 하는 식의 단순한 기능의 척도만을 가리고자 하는 행위라는것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유발되는 독의 요소가 실제로 존재하며 실제로도 독으로서 현실사회에 지금도 어디선가는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가령 어느 다이어트 대회에서 가장 많은 체중 감량을 한 이에게 상을 주기로 하였다고 하자)

(당신은 조언할 것이다.)

(부디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이어트를 하여 주세요)

(특별히 도핑을 하지 않는한 사실 그것이 정답이 맞기는 하지만)

(그것이 도핑 또는 도핑이나 다름없는 강력한 수단보다 효율면에서 더 우위에 서는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웨이트를 하면서 건강을 생각한다면 하루중 식단 하나를 결과류로 채우는것은 의학적으로 부적격한 사안이다.)

(하루중 식단 하나에서 탄수 화물 섭취량이 0 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러한 혈당 롤링이 6개월이상 누적되면 당신은 당뇨에 노출될 위험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최소 몇배는 높아지는 일이다.)

그런다고 웨이트를 하면서 견과류를 끊을 것인가?

다른 애들보다 뒤쳐지는데?

그게 불법도 아닌데?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이어트를 해 주세요

무의미한 조언이 되는 것이다.

같은 사안을 산업에 적용시켜보자

불법은 아니지만 해서 좋을리가 없는일들을 효율을 생각한다면 안하고 배겨 내겠는가?

옆동네 다른 기업이 내가 일하는 기업을 그것으로 도산을 시킬 것인데?

(따라서 그것이 사람의 흉중의 선악을 가리는것 하나에 실패할 정도로 과도하게 몰입되는 치킨게임으로 변질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진짜 음식을 앞에두고 플라스틱 모형이 더 좋다며 모형으로 만들어진 과일과 고기를 집어서 씹어 보지도 못하고 삼키게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선악을 가리는 것이 기예의 출중함을 가리는 것과 최소한 동등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더 우선시되는 사안이어야 한다. )

마음이 선하다고 결과도 선하지는 않은 경우가 있기는 하다.

실행하고자 하는이가 선량하기는 하는데 실행하다가 과실이 유발되었다거나

그런데 이는 선악이 문제가 아니고 원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과실을 유발하는 문제일 뿐이고

중요한것은 그 과실의 비율이 너무 커서 지도자로 삼기에 부적당할 정도만 아니라면

(이를테면 금치산자라던가)

차라리 기예의 출중함 보다는 선량한 이가 실제로 지도자로서 가장 적합하다.

그렇다면 기예의 출중함 혹은 과실의 유발 비율의 판단은 무엇으로 하여야 하나?

선량하면서 보다 적은 과실을 유발하는 사람을 실제로 가려 뽑으려면

첫 번째 합리적 사고의 가능 여부는

본인 스스로가 과실을 범하였는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가.

즉 무엇이 과실이고 무엇이 과실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이 본인의 과실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데 혼자만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끝나는 것인가?

(위 사안을 해내는 그 자체가 사람에게는 쉽지가 않은일인데 동시에 모두가 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와 토론으로서 정말로 사회의 지도자가 될만한 선량하면서 동시에 우수한 역량과 대단히 적은 과실을 범하는것으로 모든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사람을 일단 사회가 가려 뽑기 위하여서는

일단 그 사회 전체가

자신의 과실은 무엇이고 과실이 아닌것은 무엇인지를 모두가 구분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흉금을 터놓고 그것을 토론의 협상 테이블 위에 공공연히 올려 놓을 수가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간혹 양립이 정말로 가능한 사안은 불가능한 사안이라고 착각에 빠지게 되고

간혹 양립이 정말로 불가능한 사안은 그것이 가능한일이라고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속에 가장 이상적인 협상테이블의 구축을 통한 완전한 사회의 구축 즉 도덕과 무력의 동등한 지위로서의 양립은 실제로 가능한 사안이다.

모든 실체로서의 구성요소는 사실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협상 테이블 위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요소의 가치를 차등화하여 조율함으로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살면서 양심과 비양심을 무기한 무제한 양립시키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한 사안이다.

지금 이 순간 어느 다이어트 대회 참가자가 실제로 도핑을 시도 하고 있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정말로 착각 하는가?

(아 일단 내 과실은 가리고 상대의 과실은 지적해야지)

(그것이 플라스틱이다.)

(사람이 음식이라고 착각하고 종종 먹게되는 진짜 음식이 아닌 정교하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형으로만들어진 음식)

다만 현재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자신의 직무상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과실을 본인이 숨길줄을 모르는 경우

아무도 직장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도록 사회가 만들어져 있다.

필자는 바로 그것을 바꾸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인이라고 하는것은

자칭도 아니고 타칭도 아니다.

자타의 공인이라?

그런것은 그냥 없는 것이다.

(과실을 범하지 않는것이 가능한 사람이 존재하는것이 불가능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그냥 도토리 키재기에

본질적으로 그냥 끝간데없는 소모적인 치킨게임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인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이냐?




어떠한 사안에대한 협상의 테이블 상에서

누락되거나 참여가 안된 의견이나 입장 혹은 제안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협상끝에 도출된 합리적 결론을 공인이라고 한다.

(지금 현시대의 자본주의는 바로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누군가의 과실을 협상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순간 협상은 더이상 협상이 아닌 돌아가면서 실탄이 장전된 리볼버식 권총의 트리거를 당기는 러시안 룰렛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현시대의 자본주의는 정작 바로 그것 지금 당장 바꾸지를 않으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실제로 억울하게 죽어야만하는 바로 그 과실이라고 하는 입장 하나를 협상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것에 실패한 사회제도라는 것이다.)

(현 시대의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과실을 범하면 누군가가 죽어야 하므로 그 과실을 범한 이를 찾아내어서 그것을 죽이자.)

(그러면 다음번에도 또 초짜가 사고를 치니까 그것도 죽이자.)

(혹은 과실을 범할 소지가 보이는 족속들은 사회에서 일찌감치 도태를 시키자.)

(그래야 서로 치열하게 물고 뜯고 헐뜯어가면서 최대한 더럽고 지저분한 방법으로 추악한 인간들로 변질될 테니)

(내 과실은 가리고 상대의 과실은 지적하라)

(어차피 그걸 잘 하는게 중하다?)

(그럴리가)

(그 구조속에서 그야말로 정신 이상자나 탄생하지 않으면 천만 다행)

(누구나 뻔히 아는것을 어느 놈들이 흉중에 사악한 마음으로 자기 과실만 가리고자 할 뿐이라는 것을)

(그런식으로 사회가 동작하고 기능하여 왔기 때문에 발생할 필요가 없었던 과실들이 더 많이 발생을 해 온것이 실제의 현실이다.)

(이론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자연의 섭리에 맞겨 버렸으므로)

(어떻게든 자기 과실만 가리고 남의 과실만 지적해 온 인간이 사악한 인간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애초에 산업혁명 초창기시절의 자본가들 머리에서 탄생한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프랑스 시민혁명에 대항하여 시민들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그러한 제도가 탄생한 목적과 탄생 배경 자체가 사악한데 결과물이 사악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무소불위의 누군가는 쉽게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인물들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죄다 그런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성장을 해야 하고 그들과 함께 가야만 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맹모삼천지교가 대단히 사악한 방법으로 동작하게 되는 구조적 모순이다.)

(자기 과실은 가리고 타인의 과실은 지적하라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을 그냥 그렇게 진행해온 것 뿐이다. 산업혁명 초창기시절의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그냥 과실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는 자연 재해에 대하여 그것을 사람과 사람이 서로 흉금을 터 놓고 대책을 마련할 수가 있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달을 하여 왔었어야 하였는데)

(그걸 말하면 내가 죄인이 일단 되어야 하잖아?)

(라는 그릇된 인식이 성립될 수밖에 없도록 지금 현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구축이 되어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일들이 아닌 다음 사안에 대한 완전한 협상의 테이블의 구축을 위하여서라도)

(일단 과실이라고 하는 자연재해를 더이상 비밀속에 숨겨둔채 서로간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의 방아쇠를 돌아가며 당기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부터 구축 하여야 하는 것이다.)

입속의 검은 잎

비유가 거창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과실에 대하여서는 타인에게 그 검은 잎을 강요할 것이면서

지금 현 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인간이 없는 와중에

다음 세대의 미인대회에는 분명히 도핑이 일반화되어있을 것이거나 그에 거의 근접하게 될 것이다.

지금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면

(공산주의는 부디 거론하지 말자 전제왕권제도와 별 차이가 없는 실정이다. 이론과 현실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시 공인이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 하자면




어떠한 사안에 대한 협상의 테이블 상에서

누락되거나 참여가 안된 의견이나 입장 혹은 제안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협상끝에 도출된 합리적 결론을 공인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속에서는 바로 법과 도덕과 양심이 그 위치를 차지하며 그렇기에 그것은 신의 질문이다.





자연의 섭리냐?

사회의 규율이냐?

(혹시 무엇인가를 결사적으로 가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것을 고의로)




어차피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그 사악한 비틀어진 맹모삼천지교를 계획한 당사자와 현 시대의 자본가들사이에는 심지어 혈연으로조차도 어떠한 인과관계가 존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이며

설혹 혈연으로 실제 인과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세대가 이미 여러차례 지나온 상황이므로 사실 공개적으로 거론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에는 다소 부적당한 시점 이기도 하기에 거론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제도의 변화를 위하여서는 일단 협상 테이블 위로 상대를 끌어 내어야 하므로

어차피 바꾸고자 하는 사안 역시 누군가의 단순한 과실을 너무 과하게 추궁하는것을 막는 것이므로

(그러지 않으면 처벌하여야 할 인간들이 하도 많은데다 과격하게 밀고 나가자 할 경우 발생할 일은 대규모의 인명 피해다.)

(어느정도 선까지 처벌 하면 되겠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내가 거론한 인물들은 당신들의 직장 상급자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다.)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나와 함께 살고있는것이 명백할 때에




사람은 눈치라는것이 있어야하고

양심이란게 있어야 한다.





자기만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아무나 되는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무기한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하나님의 검지 손가락이거나 약지 손가락이거나 새끼 손가락에 속하는 존재다.

무엇을 깨물어 뜯으면 하나님께서 덜 아프시겠는가?





다시 공인에 대한 사안으로 되돌아 와서

어떠한 협상의 테이블 상에서는 고의 또는 실수로서 누락되거나 배제된 형태의 입장 혹은 의견이나 합리적 제안등이 존재하여서는 그것은 공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단순한 어느 한 쪽 입장만에 의한 독단일 뿐이다.




가령 까치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나오게하는 법을 모른다.

그렇다면 까치에게 사람이 사는 도시는 무엇인가?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는 지독한 미지의 사막이다.

콘크리트의 바위 사막





사람들은 간혹 자기들이 만든 그 콘크리트 바위덩어리에 자기들이 스스로 짖눌려 죽기도 하는데




그것은 집단에의한 폭력 혹은 집단에 의한 피해가 사람이 아닌 다른것에서 사람에게로 목표가 옮겨오는 심각하게 인류에게 위협적인 현상이다.




정확히 하자면




마치 펠리컨이 플라스틱을 음식이라고 착각하고 먹고 죽는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협상과 그에 따른 공인된 결론의 도출과 도출된 결론의 실행은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사람이 자연의 섭리를 버리고 사회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체 개개의 각자의 무력에 의한 피해가 아닌 집단과 사회가 구축한 무력에 의한 피해를 어떠한 생명체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내어야 하는 입장에 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일이 자기 뜻대로는 잘 안풀리는것만같고

법과 도덕과 양심대로만 살면 마치 자기가 무슨 피해자라도 되는것만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고는 하는데

그것은 현재까지 공인된 협상들 중에서

논의되지 못한 사안이나 입장 혹은 제안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이며

논의되지 못한 사안이나 입장 혹은 제안들이 집단의 힘으로 구축된 무력앞에 개개의 생명체를 폭력일지라도 강제로 그것에 노출시키게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다.




만약 위 상황속에 누군가가 처하였다면

그것은 서두에 거론된 신의 질문의 임계점

즉 더는 무기한의 면죄부를 제공하여주는것이 불가능한 양자 택일의 기로에

사람이 살면서 형성한 선악의 개별적 크기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필연적인 이유로서 그 사람에게 그 순간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예외가 존재할 수 없는 엄연히 기한이 정해진 유예기간의 마지막 질문이다.




그 순간이 그 사람에게 도래하게 되는 사유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그 사람과 연관된 문제는 거의 대부분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단 한 방울의 물방울에 해당할 뿐이고

실제로는 사회 전체에 논의되지 못한 사안과 입장과 제안들이 대단히 많은 상태로 사회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디 하나만 기억하자

안좋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무엇인가가 완전히 망가지는것 혹은 무엇인가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손실되는것은 안좋은 상황속에서는 단 한 순간에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이 대한민국의 상황을 위에 비견할 수 있겠다.




만약 그 순간에 기어이 끝까지 비 양심을 선택 한다면

그 존재는 더는 사회에 속할 수 없는

더는 문명에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람이 구축한 사회의 폭력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사람이 펠리컨처럼 플라스틱을 음식으로 착각하고 먹다가 그 독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질문과 이 상황에는 예외가 존재할 수 없는 사유로 인하여서

(과실을 범하지 않는것이 가능한 인물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서로 터놓고 논의하는것이 가능한것을 불가능하다고 착각 하고 과실을 범하지 않는것이 가능한 인물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내 과실은 가리고 타인의 입 속에는 검은 잎을 강요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기한부로 문제가 없을 수 있다고 착각하나?)

모든 사람은 반드시 가장 이상적인 완전한 공인에 의한 결론의 도출과 실행을

문명 그 자체나

과학 그 자체나

사회 경제 그 자체등

다른 그 모든 것보다 더 최 우선의 항목으로 두어야만 한다.





현재 까지는

아직은 수정 보완되지 아니한 형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위 주제에 가장 부합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정과 보완이 불가피한 제도이며

그것은 아직 그 자리에 논의되지 못한 사안이나 입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 쪽의 누군가가 같이 사는 사람을 충분히 불편하게 만들만큼 실제로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는것이 명백할 때

이를테면

나는 대회에서 도핑은 하지 않아 다만 불법만 아닐 뿐 위험도는 도핑과 크게 다르지 않고 효과도 그래

혹은

타국은 중국과 타이완의 문제에 나서지 마라

(타이완에 무슨일이 벌어지더라도?)

대만이 우리 이웃인데 어떻게

(이웃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무언가 협상을 하고 싶다.)

(그러나 대놓고 거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먼저 협상의 테이블, 즉 내가 준비한 협상의 테이블에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동시에 상대방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유사시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즉 그것이 정확하게 명문화된 불법은 최소한 아니거나 내 국가의 안보와는 무관한 사안임이 명백하지만

가만히 두면 불법으로 발전할 소지가 명백하거나 내 이웃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것임이 명백한 사안일 때

이쪽은 이쪽의 안보를 보다 강화하는 한편

상대방을 위하여서는 이쪽이 준비한 협상의 테이블이 정말로 완전한 협상의 테이블인것만은 명백함을 인지만시켜줄 수 있어도

상황은 상당히 많은 부분의 실제적 호전이 가능하지않겠나?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중국을 싫어하거나 중국은 안되는 국가다 라는 말을 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국가가 지금까지 자국의 통치에 사용한 그 통치 방법대로 국가의 통치를 받는것은 싫어하며 그것은 안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중국의 내정에 간섭을 할 수는 없다.

중국이 변혁을 하는것은 현재로서는 자발적 변화를 기대하거나 유도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다만 중국이 자국 내부가 아닌 타국에게로 그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이쪽의 우군이 줄고 저쪽의 우군이 늘면

나는 공산주의 통치하에 살게될 확률이 그만큼 더 높아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쪽에서는 상대의 내정에 간섭을 하는 대신 협상을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곧 그것을 실현하여야 하므로

부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