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무에 꽃이 피다 fin.(Bloom in steel wood fin.)
슬픔의 바위 사막 외전 제 3편(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3)
휴거헐거(休去歇去) 철목개화(鐵木開花)*
나는 쇳덩이에 피어나기를 소망하는
가녀린 선모(腺毛)에 새벽이슬 가득 머금은
연보랏빛 나도송이풀의 꽃이다.
나의 지난 생애란 차가운 금속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이 없는 영양분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 하지만
삶은 죽음과 탄생을 반복 하지만
가까스로 머금은 색채에
아침 이슬과 햇살이 세상을 반영으로 투영하여도
차디찬 강철로 이루어진 아무도 모르는 계곡에
아침 이슬조차도 이내 강철로 변하여 잎사귀에 무게를 드리우면
차디찬 미움이라는 햇살 아래에서 색채도 수분도 유기물질의 잎과 줄기도
회백질의 석회석의 가루 같은, 타고남은 숯의 재 가루 같은 화석(化石)이 되어간다.
두텁고 냉혹하며 영양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디찬 강철로 이루어진 계곡에
고사리 새싹 같은 회색 뿌리를 애처롭게 내려 박으려다 실패하고,
마치 바람이 노니는 남쪽 바다, 제주도 어느 바위 계곡에 피어난 풍란처럼
보드라운 껍질이 뒤덮인 송충이의 몸통 같은 뿌리들은,
단단하기 짝이 없는 그 강철의 겉 표면에 기어이 뿌리를 바싹 가져다 붙이더니
여린 뿌리가 무모하기 짝이 없게도 두터운 금속을 스스로 뚫으려다가
헤아릴 길 없는 그 모든 시도의 흔적들을 수많은 흉터로써 마음에 아로새긴 채로
내리는 빗물 방울과 아침이슬에 녹아있는 한줌의 영양분으로
임이 보아주기만을 바라는 색채를 머금고 가녀린 선모와 함께 어여쁜 꽃을 피운다.
들꽃은 그렇게 아름다운 화석이 되어간다.
식물이란 자아가 무간지옥 속에 갇혀있는 수인(囚人)이나 마찬가지 인지라
세상이 전해주는 모든 것들을 아침이슬에 맺힌 영롱한 빛으로
어렴풋이 꿈을 꾸듯이 지켜보기만 하고
정작 육체는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애만 태우는 미련한 생물인지라
차가운 강철 계곡에 뿌리라도 박으려다가
이제 그만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단단한 금속광택으로 이글거리는 강철 계곡의 표면에
유기물질의 화석을 남겨가고 있다.
차디찬 강철의 표면에 달라붙어 이제 뜨거운 여름 태양아래 말라붙어가는,
탄소 동위원소의 유기물질의 화석이 되어 남겨놓은 나의 시체위에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아침 햇살과 싱그러운 이슬이
그 화석의 잎사귀에 조심스레 맺힐 때
세상만큼 거대한 그 강철의 계곡 전체가
모두 나와 같은 유기물질의 화석으로 화한다 할지라도
임을 그리며 맺힌 꽃잎과 줄기와 잎의 색채만큼은
붉게 녹이 슬어 강철이 되어버린 가짜 유기물질들의 세상 속에서
그 빛깔과 색채와 선모에 맺힌 그대의 눈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이슬마저도
죽은 화석의 남은 모든 생명을 쥐어짜내어 다시 한 번 햇살 아래 꽃피우리다.
쇳덩이가 된 유기물질의 화석에 다시 한 번 꽃을 피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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