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악마의 심장에서 돋아난 붉은(赤) 모란(嫫蘭)의 꽃잎으로 만든 오르골
(The music box made of the petals of red peony sprouted from the heart of an ancient demon)
슬픔의 바위 사막 제 11편(Rock desert of sorrow part. 11)
마녀의 여행은 단조로웠어.
비가 내려 질척해진 땅 위를
걷고 또 걸었지
‘아무도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그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지?’
태양은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고
작은 우산 하나 말고는
비를 피할 곳도 없는 드넓은 광야
막막한 심정을 억누르며
마녀는 누군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어.
분명히 누군가는 가는 길을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걷고 또 걸었어.
밤이 찾아 들었어.
검푸른 물감을 붓으로 칠해놓은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화가가 그 붓질의 결마저 느껴지는 거친 터치로,
단 한 호흡에 그려낸 것 같은 신비스러운 밤하늘 가득히
드문드문,
검은 얼룩들 같은 구름들 사이사이로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어.
한밤중 비는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고
마녀는 몸을 누이고 쉴 곳을 찾지 못해 초조해졌어.
이대로 밤이 새도록 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끝도 없이 펼쳐진
작은 굴곡 하나조차도 허락지 않는 지평선 위로
간혹 작은 별들이 그 지평선에 기대어 누워 쉬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마녀는 그것을 사람들이 사는 집의 불빛이라고 착각하고는 했어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배인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처음 마주하게 되는
모든 여행객들이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었어.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본 채로 아무데도 갈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끈기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만날 수 없는 어떤 우연의 도움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원동력이야
세상은 혼자서 사는 곳이 아니고
내가 길을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다른 목적으로 다른 길을 걷던 사람과
정말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은,
그것은 사실 그 시점에서,
절대 우연이 아닌 필연이지.
서로가 각자의 길을 걷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서로가 각자 혼자서만 사는 세상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마침내 셀레네가 밤하늘을 가로지르기 위해 출발했을 때
마녀는 자신이 살던 숲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던,
그 순결하고 새하얀 마법의 달빛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어.
그리고는 마법의 배낭에 숨겨 놓았던 백일몽의 불씨를 꺼냈어.
불씨는 마녀의 오두막을 기억하고 있었어.
언제나 자신의 위에 얹혀져 있던 가마솥과
작은 벽난로도,
그녀의 연구실에 가득한
그 알 수 없는 수많은 유리병들 속에는,
요정의 첫 키스와
첫사랑의 설렘과
앙증맞은 소녀의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
고래의 수염과
어느 늦은 오후의 햇살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담겨있었고
탁자 위에는
고대의 악마의 심장에서 돋아난 붉은(赤) 모란(嫫蘭)의 꽃잎으로 만든 오르골과,
작은 요마의 장난이 불러낸 사소한 화재가 담겨져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 담겨있는 액자도 놓여 있었어.
고대의 악마의 심장에서 돋아난 붉은 모란의 꽃잎으로 만든 오르골의 소리는
그 소리의 날카롭기가 거의 철판에 대고 칼날을 그어버렸을 때 발생하는,
그 생생하고도 소름끼치는 끔찍한 소리에 필적해,
그리고 그 오르골은
그 고대의 검은 악마의 심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돋아나온
신비로운 붉은 모란의 꽃잎과 받침 그리고 꽃대를 깎아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그것은 그 고대의 악마를 저주했던 누군가의 바람일까?
아니면 신이 고의로 그 악마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필이면 그 악마의 심장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사실 그것은 마녀도 그 악마도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르는 일이야.’
악마는,
자신의 심장에서 자라난 신비스러운 붉은 보석 같은 적 모란의 꽃을 피어나게 하는 과정에서,
그 붉은 모란의 뿌리가
그 고대의 검은 악마의 모든 혈관을 타고 들어가
그 악마의 모든 피를 마시고,
모든 혈관을 막아버려서,
그만 산채로 피가 말라서 죽게 되었다는 신비스러운 전설이 함께 전해지는 그런 오르골이야.
그렇게 죽어서 화석이 된 그 검은 고대의 악마의 주위로
그 곁을 마침 지나가던 아주 오래된 먼 옛날의 어떤 필리다 하나가
그 꽃 한 송이를 피어내기 위하여 자신의 심장을 바친 악마를 가엾게 여겨서,
공을 들여 그 꽃잎을 세공하여 불길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붉고 투명한 아름다운 꽃잎 풀피리를 만들게 되었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양떼가 머무르는 들판에서
들뜬 마음으로 그것을 연주해 보게 되었어.
하지만 좋은 일에는 항상 악운이 끼이는 것일까?
그것을 운명의 시샘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의 혹은 누군가들의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마법 같은 소리에 매료된 검은 요정들이
그 소리를 영원토록 보존하고 싶어지게 되었어.
요정들은 악마의 시체위에 피어나 요사스러운 붉은 빛을 흘리는
보석 같은 그 적 모란의 꽃을 꺾었고,
그 단단한 꽃잎과 꽃대와 수술과 꽃받침과 줄기와 가지와 잎과 뿌리를
제각기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세공하고 서로 다른 마법의 숨결을 불어넣어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오르골을 만들었어.
그리고 그 오르골이 첫 숨을 쉴 때,
검은 요정들에게 붙들린 가엾은 필리다는
원치 않는 불길한 연주를 그 오르골의 첫 숨결 속에 불어넣어야만 했었지.
마녀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이 오르골을 손에 쥐고 있던 그 검은 요정들 중 하나를
그녀가 잠든 사이에 백일몽의 불꽃으로 환상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대로 그녀의 기억을 흐리게 한 뒤,
그녀의 손으로부터 오르골을 되찾아왔어.
그 붉디붉은 모란꽃이 너무나 가엾은 마음에,
개화하여 열매조차 맺어본 적 없는 낭화의 아픈 마음에 대한 공감 때문에,
그 신비스러운 적 모란의 꽃을 피어내기 위하여
자신의 심장과 온몸의 모든 혈관과 자신의 단 한 방울의 피조차 남김없이 꽃에게 선물해 준,
그 고대의 검은 악마에게 측은지심을 느껴서,
마녀는 그런 여자였어.
마녀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부엌에 마련된 찬장의 문을 열어 보았어.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산딸기 잼
사슴의 고기로 만들어진 햄
호밀과 밀가루 따위의 음식들도 한가득 있었어.
마녀는 자신의 오두막이 완전무결하게 소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셀레네의 축복을 받은 빗방울로
요정의 날개가루를 대신해서
마녀는 오두막을 다시 불러내는데 성공했어.
사실 무엇으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마녀는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없던 일의 한계를 깨고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는 거야.
이제야 마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모든 역량을,
자신의 모든 가는 길 위에서 진실로 마음대로 꺼내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
일렁이는 백일몽의 불빛 속으로,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마녀는 꿈결속의 집으로 다시 되돌아왔지.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마녀는 그렇게 말했어.
내일은 마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악마의 날개 뼈로 만든 불길한 플루트 소리가 담긴 작은 오르골을 틀어놓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어.
흐르는 마녀의 눈물 한 방울이 보석이 된 어느 밤 이었어.
*필리다는 여자 양치기의 이름 혹은 여자 양치기를 뜻하는 대명사로도 쓰입니다.
(양치기 소녀)
*본래 모란의 한자는 저 한자가 아닙니다.
작중의 모란꽃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의 꽃입니다.
여성이 키가 크고 예쁘며 눈매가 아름답다는 뜻의 예쁠 모嫫 자와
난초를 뜻하는 란蘭자를 조합하여 작가가 임의로 만든 단어입니다.
작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뜻은 더 좋을 수도 있겠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단어와 꽃 자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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