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초반부와 중반부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단지 하나 뿐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딴 귀신 도깨비같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거지?"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하는 의미들과 감정의 흐름이
각각의 지류들에서 하나로 합쳐지면서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감정 이입이 이루어질 때 즈음에야 제법 읽을만 하다고 느꼈다.
물론 뒷장들의 해설들은 읽다말고 책을 던져버리게 만들었지만.
솔직한 이야기로 말하자면
글을 단순히 이론 혹은 어떠한 원리에 입각해서 쓰려고 하면 감정은 이입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는 감정을 이입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인 것으로 비추어진다.
그 어떤 정교한 이론이나 법칙도 결국 인간이 만든 규율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이입에서 시작되지 않는 글들은 그래서 읽기가 불편하다.
채식주의자의 전반부가 그렇게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이입을 거부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 어느 정도 작가의 사고체계에 공감이 가면서
무리 없이 감정이 이입된다.
나는 한강이라는 작가가 스스로가 다룬 소설 속에서
스스로가 다루어온 정신세계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았거나
혹은 제시하거나 유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을 읽었을 때와 같다.
한강 이라는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속의 영혜와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끝까지 택시기사가 누구인지 또 입속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잎사귀와 같은
죽어버린 관념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해답은 무엇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무책임한 태도에 가까우리만치 시를 끝맺어버린 기형도 시인처럼
한강이라는 소설가는 나무라는 메타포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영혜와 마찬가지로
해답과는 거리가 먼 글을 풀어 놓았다.
화두라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단지 고요한 산사에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고민에 잠겨야만 화두가 아니다.
오히려 화두는 치열한 삶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과시하며
단지 일상을 영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삶을 살아가는 이의
나약한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는 괴물에 가깝다.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작가로써의 고뇌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런 글은 내게는 별로다.
고민만 가득하고 감정이 결여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가슴을 치고나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는
영화 에일리언의 한 장면 같은 생생한 감정의 격류가 없다.
그래서 첫인상부터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다.
나는 현대의 예술가들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이입을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쉬워 보이면 잡혀 먹힐 거라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인가?
진중권씨의 서양 미술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순한 노동자에 가까운 장인에서 벗어나
사회의 권력층에 보다 가까운 정신노동자의 대열에 합류 하고자 하는 몸부림인가?
감정의 이입이 결여되어가는 예술
그나마 채식주의자는 후반부라도 읽을 만했지만
여타의 다른 문학작품들이나 현대 예술 작품들은
솔직히 감상 자체가 고역이다.
자연스러운 감정 이입의 토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서울시' 같은 작품을 지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헐리우드 영화와 같은 상업성 예술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지만...
(솔직히 서울시 같은 거의 말장난에 가까운 작품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 자체가
이나라 교육과 사회가 얼마나 인문학으로부터 멀어져 버렸나를 반증하지만.)
순수한 예술을 감상하고 싶다.
자연 상태 그대로의 예술을 감상하고 싶다.
단지 먼지와 가스가 모여 이루어진 성운 같은 것이라도
거기에 그 어떠한 자연물을 상징할 수 있는 토대가 없더라도
자연의 예술은 그 자체로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은 쉽게 퇴색되지 않는다.
그런 자연스러운 예술을 감상하고 싶고 또 하고 싶다.
지나치게 큰 혹은 순진한 소망인 것일까.
본래부터 문학계에 인지도가 있는 작가였음에는 분명하지만
맨부커상의 수상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만한
그런 대작 소설이었을까 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보류하고 싶다.
누가 쓴 것인지 언제 발표된 것인지
대중들이 인지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러져가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작품들과 예술가들의 눈물 앞에서
나는 떳떳한 값을 치루고 책을 읽었다는 통쾌한 감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늦은 방학숙제를 막 끝낸 것 같은 의무감의 완수만이 나를 씁쓸하게 만든다.
의미나 사색에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감정이입이 결여된 글 혹은 그림 혹은 음악을
나는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단지 ‘대중매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술가가 어떤 논지를 풀어내기 전에
그 논지에 대하여 독자가 혹은 관객이 관심을 가져야 할만한 어떠한 '이유' 란 과연 무엇인가
현대의 예술가들이 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영혜의 뜬금없는 꿈과 육식의 거부는
독자들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만한 어떠한 '이유'가 부족한 시작이었음이 나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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