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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

문태준 맨발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진솔한 감성이 돋보이는 시 이다.

다만 시라고 하는 문학 장르의 특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란 기본적으로 운문이며 운율감이 없는 시는 시라고 볼 수 없다.

어떠한 운율에, 정해진 리듬과 박자에 맞추어 글을 짖고

그 안에 하고싶은 말을 담는것은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대조와 대구등의 기법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운율이 살아있지 않은 시는 읽기에 불편하다.

이 시는 분명히 운율감은 있으나 그 운율감이 일관되지 못하다

본인이 저 시를 손본다면 이렇게 손 볼 것이다.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개조개 라는 정감어린 소재와 그에 대입되는 부처의 이미지

탁발이라는 행위를 삶의 길을 걷는 고단함에 비유하는점 등은

분명히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비유가 부족하다.

깊이감이 부족하다.

감정의 이입은 용이하지만 이중구조나 삼중구조 이상의

논리구조를 통하여 깊이감을 더하는 역량이 부족하다.

모든 비유가 저마다의 사연만을 담고 있을 뿐

비유가 통일된 논리전개 속에서

또하나의 구조를 이루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 비유와 함축은 필수이다.

그것은 시인이 잘난척을 하기 위한 자기변명이 아니다.

보다 많은 의미와 보다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며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시만의 언어인 것이다.

현재 맨발이라는 시는 감상의 전달이라는 1차적 목표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 감상의 깊이감을 추구하는것에는 실패하였다.

이 시는 누가 보더라도 단순히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시 이며

그 속에 새로운 관념이 제시 되었다거나

보다 깊은 감상을 위해 다른 소재와 관념이 이입되어있다거나 하지 않은 시이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표현하는것은 시가 아니다.

다른것으로 그 슬픔을 보다 풍부한 의미와 깊은 감상으로 표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논리라고 하는 구조를 통해서 객관성에 근접한 기법으로 표현 할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작품의 의미가 온전히 객관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성에 근접하는 표현은 되어야 한다.

가령 나의 작품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석판화 속 주인공

뱃살과 젓통을 늘어뜨린 채 벌거벗은 시엔(Sien)이라는 창녀처럼

나는 결국 벌거벗은 모습으로 네 앞에 서게 되리라

너의 차가운 바람과 너를 품은 빙하의 바닷물 앞에서

불우한 우리들의 자녀의 손을 붙들고

좌초된 너의 자녀를 그리워하며

나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 것일까

 

이 시에 등장하는 석판화의 제목이 바로 슬픔(Sorrow)이다.

이 제목과 석판화를 보고 모두가 같은 감상을 느끼는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 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비록 석판화의 관념을 차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와는 다른,

복합적인 감상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 전체를 읽었을때 앞뒤 문맥과 연계되어

보다 더 깊은 사색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지나치게 맨발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다.

물론 논리적 개연성에 따라서 강조의 의미로 여러번 차용했다고 한다면 문제될것은 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맨발이란 그 의미가 너무 뻔하다.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이 읽는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어를

구태의연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시가 깊이감을 잃어버렸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가 충분한 깊이감을 가지고 있고

그 논리 구조가 이중 삼중으로 짜여져 촘촘할때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표현하는것은 충분히 시적 암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깊이감있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기에

결국 맨발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남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모든 맨발들을 각자 다른단어로 지칭하여 각 행과 연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맨발이라는 모티브가 보다 다채로운 사색거리를 제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령 부처의 맨발이 그런 일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그러한 색다른 모티브들을 보다 많이 차용했었어야만 했다.

그럼으로써 그 맨발이라는 소재를 보다 더 맛깔나게 풀어나갔어야만 했다.

스케이터의 맨발이라던지

노동자의 맨발이라던지

사무직 직원의 맨발이라던지

대기업 총수님의 맨발이라던지

예수의 맨발은 어떠한가?

공자님도 맨발이 있고

맹자님도 맨발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가난이라는 모티브 하나에 모든것을 걸은 시가 아닌가?

진솔한 감정은 전해져 오지만 좋은 시는 아닌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