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평론 -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사실 아래 해설을 쓸 때 당시는 역사적 사료에대한 접근이 좀 부족했었고
전두환정권시절의 하얀 안개와도같은 최루탄 연기들과
도로에 질질 끌려다니던 대학생들을 책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검은 잎은 침묵을 암시하는듯 하고(강요된 침묵)
이는 침묵은 하인들에게나 어울린다는 구절과도 그 의미가 얼추 상통하죠
강력한 독재자의 밑에서 스러져가는 민중들의 입 속에
마치 검은 잎과도 같이 목구멍 깊숙한 그곳까지 완전히 틀어막아 해야할 말을 말하지 못하게하는 공포와 침묵의 카르텔
그 속에서 실제로 죽어나가야만 했던 사람들
그리고 기형도시인 본인의 의문사
기자에서 시인으로 전향했던 그분의 전력....
해설
다음의 해설은 시 전체를 읽고
연역적 추론 방식에 따라서 본인이 추론한 시의 논리 전개이며
이것은 현대 예술이 예술을 감상하는 대중들의 주관적 해석의 차이를 용인하는 특성에 발원하여
순전히 본인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 한 것이므로 시의 원 저자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1.택시 운전사
그리고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우리는 보통 처음 가는 길을 지날 때
이미 그곳을 지나간 사람이 만들어둔 이정표를 참고한다.
택시기사는 그 이정표를 만들어둔 화자의 인생의 등대가 되어준 멘토
또는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향으로 풀이 된다
그러한 어떠한 위인들 혹은 멘토들을
현대 사회 에서는 보통 책에서나 접할까
실제로 만난 적 있는 사람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시 속에서 화자는 택시 운전사의 운전에 자아의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와
인생의 추진력 까지 모조리 맡겨버린 것으로 추측 된다
택시 기사가 이따금 지르는 고함에 놀라 사라지는 새들은
화자의 자아에 도달 하지 못하는
생의 의미가 되지 못하는 시시껄렁한 개똥철학을 주워섬기는
시시한 위인들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화자는 택시기사에게 운전을 맡긴 채
자신이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멘토를 사색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2.그 일이 터졌을 때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적나라한 고백의 순간
그동안 수면 아래에 감추어져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떠한 문제가
정반합의 순서로 도출되는 변증법의 논리구조를 따라서
세상에 그 문제의 본질을 표출하고
자신이 문제로써 의문으로써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화자와 대중들에게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고민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민
철학적 주제에 대한 화두
화자와 대중이 해답을 얻고자 고민하는 모든 본질에 대한 의문
그 답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그 길을 지나갔던 택시 기사가 제시한 내비게이션에 없는 그 무엇인가가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이라고 하는 얼굴로 다가와
화자와 대중들이 지금껏 옳다고 믿어왔던
그들이 발 디디고선 대지와 같은 땅바닥을 본질적으로 뒤흔들어버린 사건이다
그 일이 있었을 때
그러니까 화자가 아닌 택시기사에게 그 일이 들이닥쳤을 때
화자는 먼 지방의 먼지의 방이라고 하는 화자의 자아만이 머무르는 고독한 방 안에서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하여 관념과 철학 이상을 확립해 나가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 가득한 안개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본질에 대한 의문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화자에게 지우는 부담감이다
그 해의 여름
우리가 발 딛고 선 대지는
책과 검은 잎이라고 하는
죽어버린 관념들을 질질 끌고 다녔던 것이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튀어나온 흰 연기는
우리가 입는 옷들
화자가 대중들 앞에서 자신을 치장하는 옷가지들조차도
안개와 같이 모호한 것들을 그 안에 품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침묵은 하인에게나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이것은 화자가 책을 통하여 접한 근원적인 문제의 본질이다
그 사건이 터질 때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대하여서 어떠한 형태로든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하인이 되는 것이다.
글의 이 시점에서 화자는 신문을 통해 고개를 숙여 미쳐 알아보기 힘든 구도의 그의 얼굴을 접한다.
결국 화자는 스스로가 추구하는 멘토의 얼굴조차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이러한 난입은
글의 후반부의 논리전개를 위해 삽입된 문장으로 추측된다.
3.기어코 멘토에게 들이닥친 그 사건과 멘토의 죽음
비바람으로 번들거리는 장례식
불유쾌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신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관념이 그 자리를 요구할 때
우리는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자아를 부정당하는 그 불유쾌함이 번들거리는 비바람으로 묘사된다.
참을 수 없이 느리게 나아가는 운구차와
악착같이 매달리는 사람들
나부끼는 검은 잎들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재를 사람들은 쉬이 보내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고 악착같이 매달린다.
죽은 관념들이 나부끼는 잎사귀들처럼 온 세상 한 가득 흩날리고 있다
화자는 혀가 굳어가는 형상으로
더 이상 입을 열어 이야기할 자신을 잃어버린 소심한 자신을 드러내고
죽어버린 관념들에게 포위당한 멘토의 자녀들은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해 여름에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란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진 수만은 관념들이다
장례식을 치루어 과거 속으로 묻혀버린 지난 사건들이다
그 관념들은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사건이 가져다준 충격에 놀라버린 자들의 눈앞에 추억 혹은 미련의 형태로
유령이나 허깨비처럼 불쑥 불쑥 나타나고
거리에 흘러넘치는 망자의 혀로
화자는 사회가 받아들이고 수용하기를 망설이는 그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상징한다.
4.이따금 뒤를 돌아보아 화자에게 얼굴을 비치는 택시기사
화자는 여전히 그 택시를 타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재와 타인이 추구했던 이상에
자신의 자아의 정체성과 나가가고자 하는 방향과 그 추진력까지 내맡긴 채 무력하게 질주한다.
그 거침없는 질주 속에서 마침내 화자는 죽어버린 택시기사의 실체를 정면도 아니고 곁눈질 하듯이
전체상이 될 수 없는 거대한 어떤 것의 부분을 마주한듯한 기분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심연 같은 바닷 속에서
눈앞을 스쳐간 거대한 하얀 것을 보고
그것의 전체상을 보지 못했음에도
그것이 백경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과 비슷하다.
바야흐로 그 사건이 마침내 화자를 덥치기 직전
전조와도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본질의 그림자이자
화자가 알게 된 진실의 단편이다
화자는 그제서야 택시기사를 불신한다.
그는 더듬거린다.
검은 잎사귀 같은 죽은 관념들이 아직도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수만은 장례식의 침묵들이란
그가 죽음으로 인해서 함께 따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다른 관념들이고
그 사건이 사회에 던진 화자의 자아의 본질에 던진 충격의 크기다.
5.마침내 화자를 덥친 그 사건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마침내 화자는 자아의 정체성을 둘러싼 본질의 질문과 마주한다.
여기서 표현된 그 란 택시기사와 화자 자신의 자아 그리고 사회의 대중들을 뭉뚱그려 압축해 표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자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아의 정체성에 대하여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본질적인 그 질문 앞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근원적인 필요성을 비로소 직시하게 된 것이다
택시기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사회와 대중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그 사건이란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운명이 화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두겁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덥쳐올지 알 수 없는
마치 자연 재해와도 같은 사건인 것이다
적어도 자아라고 하는 작은 우주 안에서는
결국 화자는 가까운 지방이라고 하는 처음의 시작점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 시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끝끝내 화자는 그 사건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고
해답을 찾는 일을 먼 미래로 미뤄두어 버린다.
그가 마주친 모비딕의 거체 앞에서 그는 잔뜩 겁을 집어먹어 버린 것이다.
미지의 불가해성이라는 근원적인 공포 앞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 진정한 권리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체념하고 발걸음을 되돌려 버린다.
다음 구절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들이 나는 두렵다
이 구절이 바로 화자의 두려움을 상징한다.
또한 이 구절에서 시점이 변화하여
화자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라
자아의 정체성과 운명의 질문 앞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서는
나약한 현대인들의 나뭇잎사귀 한 장 만큼이나 가벼운 그들의 자아가 되어
그토록이나 얄팍한 허울 뒤에 본질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비겁한 자아를 인정하지 안으려 발악하는
우리들 자신 그 군상들이 되어 시가 마무리 된다.
총평
본인은 시에서 함축과 은유와 비유의 상징적인 기법들을
시의 본질이 아니라 시의 본질이라고 하는 요리 재료
그 식재료의 풍미를 돋워주는 양념이나 향신료와 같다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정의 된 시란
운문의 형태로써 일정한 운율을 따르는 문학으로 정의되어지며
본인은 이에 동의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시 문학 작품을 되돌이켜볼 때
노래의 형태로 기록된 서사시 길가메쉬 이야기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동양의 이태백 두보 등의 한시 작품들을 보면
5언 절구나 7언 절구
기타 어떠한 운율적인 요소들을 중시 했고
비유나 은유 상징 등의 기법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논리라고 하는 학문을 하나의 학문으로써 대중들과 사회의 식자들이 배우게 된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논리의 개념은 존재 하였고
이미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에 찬란한 철학의 문화가 꽃피워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비유나 은유 상징의 기법으로써 발전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은유나 비유 또는 상징과 같은 논리의 기법들은
시라고 하는 문학 작품의 본질이 가지는
그 식재료의 맛을 돋워주는 고급 향신료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후추가 발견 되고 민트나 정향 계피등으로 차츰 고기의 누린내를 잡고
샤프란이니 강황이니 육두구니 점차로 향신료가 발달하고
육수를 한번 빼내는 기법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숯불같은 연료의 문제 까지 고민하여 현대의 요리 문화가 발달한 것처럼
시에 있어서 논리라고 하는 개념의 등장은
단순한 감상의 전달에 그쳤던 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는 단순히 기법이다
물론 논리가 결여된 작품이 타인에게 결코 공감을 줄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식재료 자체가 될 수가 없다
누가 돈까스를 먹으면서 나에게 말하길
이게 소스 맛이지 돼지고기 맛이겠냐고 푸념을 하길래
어디 한번 소스만 찍어 먹어 보시라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음을 알게 되실 거라고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사설이 길었는데
결국 시에서 논리란
화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
논리나 의미가 시의 본질은 아니다
은유와 함축의 기법으로 의미를 감추어 두었을 때
의미가 시의 본질인 것이 아니라
그 감추어진 의미들이 모여 형성하는 감정이야 말로 진정 시의 본질이며
소스의 맛에 가리어진 돼지고기 등심이라는 실체다
김소월님의 진달래꽃은
시의 언어를
은유와 함축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시를 얼마든지 감상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상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추어진 시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더듬어 나가면 감추어진 의미들을 발견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처음의 감상과 감정이 더욱 고양되고 폭발되는 구조이다
진달래꽃 - 김소월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본인이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이라는 시가
단순히 사랑을 노래 한 시가 아니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요즘에는 단순히 사랑 이야기로 풀이되는 듯하다.
연약한 여성이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을 떠나가는 남성이라고 하는 가학적인 운명 앞에서
관동의 팔경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가
이것이 나이니 가시려거든 이것을 밟고 떠나주시오 라며
상대에게 상대 자신이 저지르는 그 가학적인 행위를 인식시킴으로써
도리어 이별 앞에서 분명한 자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련의 행위들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조선이라는 가련한 여인을 유린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만큼이나 연약한 존재 이지만
결코 눈물 흘리지도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요
너에게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겠다 라는 결연한 의지로 풀이된다...
(요즘 제도권 교육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어서 오랜만에 진달래꽃을 검색 하다가 무척 당황 했었다)
아무튼 그 감추어진 의미와 표면상의 감정은 서로 다르고
그러한 구조를 선택한 이유가
당시의 시대상이 시인들에게 그들이 품은 이상을 진솔하게 표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억압된 사회였다는 것이 그 본질적인 이유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글의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시의 구체적인 형태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서
단초를 발견하고
논리와 시의 언어로써 더듬어 나가서
감추어진 의미들과 마주하고
그 감추어진 의미들의 흐름이 엮어내는
감상의 진체와 마주하여 더 큰 감동을 추구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형도님의 입속의 검은 잎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시의 언어와 논리의 기법으로만 점철된다.
감추어진 의미들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분명 논리의 흐름이 있고
그것들이 원초적인 두려움 이라는 큰 감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지만
처음 글을 읽을 때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해주는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 난해한 기분만을 느끼게 할 뿐
감상을 추구하려는 독자들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힘든 구조이다
시의 언어를 논리의 언어를
그 전문가들만이 향유하는 기법을 모르면
결코 감상이라는 본질에 도달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양념 맛이 너무 강해서
식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렵고
먹는 행위가 불유쾌한 음식이 되어버렸다
지나친 상징과 은유의 기법들을 따라가다 보면
화자가 두려움 이라는 감상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는 되지만
그냥 두렵다는 한 줄의 텍스트를 읽었을 때와 비교하여서 가슴에 다가오는 두려움의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다
진정코 독자로 하여금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데는 실패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철학적인 사색적 구조 속에서 이런저런 의미들을 추론 해 볼 수는 있겠으나
결정적으로
기나긴 호흡으로 이끌어온 그 철학적 화두마저도
화자는 해답을 제시 하지 않는다.
그 해답이 무엇인지 혹여나 비유나 상징의 기법으로 표현된 것을 혹여 놓친 것은 아닌가 되짚어 보지만
어떠한 장면이나 구절로써 해답을 유추 할 수 있도록 암시된 부분은 없다
차라리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 보다도 못한 논리구조라고 생각한다.
해당 애니메이션이 비슷한 철학적 구조를 가지는데
해당 작품은 바로 그 화두에 대하여 직접 언급이 아닌
작품 전반에 걸쳐 표현되는 장면들과 등장인물들의 행동들로 이미 해답을 제시 해 놓고서
모르는 척 시침 뚝 떼고 이게 뭐게? 하고 독자들에게 의뭉스럽게 질문한다.
재미있는 논리구조다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데 못 찾겠네...
하고 얼버무려 버리는 것은 좀 무책임 하지 않나...
그것이 실제로 진정한 정답이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로 삼아서 긴 호흡에 걸쳐서 그것을 사색하게 만들어 놓고
어떠한 사소한 암시조차도 제시 하지 안는 것은 무책임 하다
물론 작품의 본질은 그 거대한 미지의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묘사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텍스트를 적어가며 논리 구조 더듬어가며 진땀나게 의미를 찾다보면
감상은 이미 사라지고 텍스트만 그 자리에 남게 된다.
왜냐하면 글에 전반적으로 사용된 단어들이 공통의 감성 이라고 하는 뿌리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각각 개별적으로 담고 있는 의미들만이 서로 상통할 뿐 각각의 단어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의 통일성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꾼 위인들이 사회 전체의 반대와 직면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진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라고 한다.
(대륙 이동설 이야기로 지식 채널 e에서 다룬 소재다)
작품이 만약 처음 글을 읽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어떠한 분명한 감정의 흐름으로 부터 출발했다면
그 의미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조차도 감동 속에서 진행되어
마침내 마주한 진실 앞에서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고
마치 현대 예술의 불우한 추락을 보는 것 같아 쓸쓸한 감상을 자아낸다.
꼭 정답이 될 수 없다 할지라도
분명한 어떠한 의견이 제시 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찬성이나 거부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의사표현의 이유를 짚어 나가는 것으로써 토론은 시작 된다
본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문은
그 의문이 제시되는 그 시점에 해답도 같이 제시된다고 굳게 믿는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
의문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이미 그 논리의 전제에 해답 이라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논리적으로 해답이 없는 의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아직 그 답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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