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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위 사막

머리말(낡은 그림) Preface(An old picture)

머리말(낡은 그림) Preface(An old picture)


 

열차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다 말고

나는 문득 내 방안 이젤위에 올려둔

낡은 화판과 그리다만 그림이 그려진

오래된 켄트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어디가 앞면이고 어디가 뒷면이었더라?

자칫 거친 뒷면에 그림을 그린다면

온통 색이 번지고 윤곽이 흐릿해질 텐데

 

라며,

 

정작 지금 당장 내가 손에 연필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뜬금없이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곤 하는 것이다.

 

그 종이가

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지는

사실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다.

 

낡은 종이는 곧 삭아서 바스라질것만 같았고,

밀실은 그 누구도 침입이 불가능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침인사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

바다 위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나는 갑자기 아무리 그것을 다시 떠올려 보려 해도

그 종이 위에 도대체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도무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바다라는 이름의 맑고 투명한 푸른 수면의 위에서,

 

나는 마치 허공에 건설된 레일을 달리는 기관차처럼

명정상태와 같은 환각 속에서 내 방안을 거닐었고

 

낡고 삭아 빛이 바랜 오래된 그 종이를

어떻게 해서든 힘 있게 똑바로 노려보기 위해서

있는 힘껏 두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이젤도 화판도 켄트지도

도리어 나와 싸우자고 마주 덤벼올 뿐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를 않았다.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바다위의 철길을 달리며

 

나는 문득,

집에 돌아가기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젤이화판이삭아서 바스라질 것 같은 켄트지가,

뾰족하니 깎은 4B 연필을 들고 나를 찌를 것만 같았다.

 

바다위의 철길이 끝나고

도시를 향해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거의 페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처럼

사방에 대고 승객들을 향해 고성을 질러대고 행패를 부려대었다.

 

결국 나는 다음 정차 역에서 역무원들과 경찰관들에게

팔짱을 깎지 끼인 채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때는 밝은 태양빛이 온통 가득한

그야말로 뙤약볕이 잔뜩 내려쬐는 한 여름의 대낮

 

낮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 반

따사로운 한 낮의 태양빛이 안겨주는 그 포근함에

 

몽롱하게 취한 기분이

 

또 반,

 

도대체가 모든 것이

이보다 더 명명 백백(明明白白할 수가 없을 만큼 너무나 환하고 밝은,

말 그대로 멀쩡한 백주(白晝)의 대낮에

 

모처(某處)의 어느 경찰서에서 하릴없이 조서를 꾸미다 말고

나는 문득 경찰관에게 연필이 혹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갑자기 조서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도저히 도착할 방법이 사라져 버린,

도달할 수도 없고 갈 수 있었던 모든 길조차도 사라져버린

버려진 방문 너머에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진

 

쓰이지 않는 이젤과 낡은 화판위의 너무나 오래된 그 켄트지 대신

 

깨끗한 사무실에서 프린트되기만을 기다리는

산뜻한 흰색의 새것 같은 A4 용지위에

그리다가 그만둔 바로 그 그림을

 

모든 것이 멈추어진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다시 그리고 싶어졌던 것이다.

 

당연히 경찰관은 나에게 연필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도대체 내 집이 어디였더라?

나는 알았노라고 대답해준 뒤

 

유리문을 손으로 밀치고 거리로 나와

비척비척,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조서위에 꾸며진 그 주소대로 가면

또다시 길을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