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에 대한 용어 해설(The commentary for term of the world)
세 가지의 생소한 개념 앞에서 독자 분들이 혼란을 겪으실 것이 분명한바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로 합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불연속(不連續)Discontinuity 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의 기본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객체와 시공간 그리고 물리 법칙들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의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들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안 그리고 밖
정확하게 그러한 구분들은 수치로써 그 명확한 값을 가지기에 이릅니다.
명확하고 분명한 값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存在)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가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바탕인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는 세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실재하는 모든 객체들은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는 근원적인 특징 때문에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게 되며
이는 우리가 사는 인생의 철학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 됩니다.
너와 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객체들은 결국 ‘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나’ 들은
서로 각자 인식하는 주체 이외의 모든 ‘나’ 들을 ‘너’ 라고 부르며 배척 합니다.
모든 ‘나’ 들은 결국 자기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위에
자신보다 소중한 가치로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에 ‘나’ 라고 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정서, 혹은 감정
상대에게 느끼는 ‘호감’ 이라는 감정이
서로를 배척하는 본질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상대를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기적을 발휘 합니다.
자아의 정체성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며 자기 자신 이외의
‘나’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의 시작입니다.
그 호감의 대상은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부모, 형제 일수도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국가의 독립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 어떤 대의(大義)나
개인이 혹은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관(價値觀) 이나
종교(religion 宗敎)적인 혹은 도덕(道德)적인 신념(信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종교 역시 가치관의 일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아마 종교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호감’ 이란 결국 ‘나’ 라고 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는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 혹은 영역까지 확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호감의 대상이 전 인류가 아닌 이상
결국 배척하는 또 다른 ‘나’ 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호감의 한계이며
결국 ‘호감’ 역시도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의 일부에 속한다고 작가는 생각 합니다.
전 인류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호감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선순위’를 매길 수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절벽에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달려 있습니다.
주변에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향해 신과 운명을 향해
“나는 세상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부모님을 구해주세요”
라고 간청할 것입니까?
아니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기로 119에 구조신호 보내놓고
헬기가 도착하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것입니까?
당신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형성한 호감도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그 순간 이미 누군가를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함 받지 못한 인물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를 배척하는 객체들이 가지는 어쩔 도리가 없는 본질의 한계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 중 불연속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속성(連續性)continuity 이란
불연속이라는 세계의 특징이 분명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재를 바탕으로 나온 개념인데 반하여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개념으로써 철저하게 철학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객체들이 심지어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상대를 ‘접촉(接觸)’ 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서로를 배척하는 모든 불연속의 객체들이
어떠한 하나의 바탕 위에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객체들의 접촉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즉 연속성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의 가장 큰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연속성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 위에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면 현존하는 물리법칙과 개념을 초월하여
불연속과 불연속이 연속하여 이어지는 무한히 먼 시공간의 반대편의 현상을
인과(因果)를 초월하여 내 앞에 구현 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How to)? 가 되겠지만
작가는 본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이후의 모든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에서
그 중에서 인문학이 아닌 작품들에 공히 등장하는 세계관으로써 상기의 개념을 등장시킬 것이며
그 중에서 마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철학적 바탕으로써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 이라는 개념을 차용 하고
보다 시적인 표현으로 ‘어머니의 바다’ 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마녀와 대장장이가 발휘하는 모든 마법적 개념들은
이와 같은 논리적 전제를 바탕으로 구현 되는 것들이며
구태여 해당의 마법의 분류를 따진다면 위시(Wish) 주문呪文(Spell) 계열의 마법들로써
별도의 스펠이나 소매틱(Somatic) 행위, 일체의 촉매觸媒(Catalyst) 또는
여타의 주술적인 제물祭物(Qffering)의 사용이 필요치 않은
마법의 근원에 가까운 형태의 주문으로써
강한 염원이나 감정 등이 마법적인 현상으로 구현 되는 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나’ 라는 존재의 연속 -
상술한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 중에 ‘나’ 라고 하는 객체가 잠시 등장했는데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데카르트의 격언은 잊어두죠 생각 한다는 것 혹은 사고 한다는 것은 존재의 인식 이라는 행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우리가 현재 ‘나’ 라는 존재를 ‘인식’ 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현재 자기 자신 스스로가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 라는 존재의 인식은 그것으로 영원히 끝인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객체가 ‘나’ 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 라는 존재의 인식은
명명백백하게 ‘나’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현상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백일하에 드러난 명명백백한 현실 앞에서
전혀 인식하지 못한 진실들 중에 하나는
굳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나 야훼의 약속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전승의 개념을 차용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이미 ‘영원불멸永遠不滅(Imperishability)’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유사성을 따지자면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윤회전승이 열반을 통한 초월이 목표라고 한다면
본 작가의 개념은 그러한 종류의 ‘자기완성을 위한 일체의 행위’를
“위선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배척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작가의 개념은 업보라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우리의 생이 종식된 이후 새롭게 인식하게 될 ‘나’ 라는 존재가 무엇일지는
순전히 무작위에 의해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천상계나 지옥도 아수라도 따위는 철저하게 배제한 채
단순히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만으로 놓고 볼 때에나
혹은 그러한 초자연적인 개념을 포용 할 때에나 상관없이
우리의 다음번 생애는 무작위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자연적인 세계를 포용할 때에는 영혼의 개념을 차용하고
인과응보의 개념도 차용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겠지만 그것은 추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단순히 현재의 작품인 ‘슬픔의 바위 사막’ 에서만 보면
작중에서 ‘나’ 라는 존재의 연속은 철저하게 무작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자아’는 생을 삶에 있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연습 없이 언제나 첫 실전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생애에 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에 따라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지독하게 위선적이고 불평등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타고나는 능력이 다릅니다.
감정이나 유혹에 약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인지능력이나 사고능력이 부족하게 태어날 수도 있으며
외모가 추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불구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벌레나 물고기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 지점부터가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데
게다가 연습도 없이 첫 실전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의 질문 앞에서
어떠한 대답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 ‘자아’의 대답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죄업’ 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그 굴레를 현생을 초월 하여 내세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작가의 사고 관으로는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세계를 주관하는 신이 너무 악질적으로 묘사되어야 가능한 이야기로 사료 됩니다.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회의 질서를 위하여
우리들 스스로 법이라는 테두리를 정해두고
각자의 ‘자아’들이 운명의 질문 앞에 내놓은 대답을 평가하고
그 신상필벌을 결정하는 일 자체를 폄하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자아’의 본질에까지 죄업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작가는 결코 찬성하지 않습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넘어와서
우리는 결국 영원불멸하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다른 ‘나’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던
그 행동과 ‘의지’ 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운명의 흐름’은
결국 다음번의 자아 ‘나’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가 다른 ‘나’ 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건
그것은 결국 ‘나’에게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작중에서 운명이 마녀에게 부탁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다른 ‘나’에 대한 호감 이라고 하는 소중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유사하죠.
3차원 세계에서 어떤 객체가 일으킨 변화는
세상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 하나의 사건을 던짐으로써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킵니다.
이런 물리법칙이
공교롭게도 인간의 집단인 사회에서도 발생합니다.
모래시계 -
작가는 본 작품에서 운명의 흐름을 모래시계에 비유 하였습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객체들이
이 세계의 물리 법칙과 각자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나’ 라고 하는 객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작가는 작중에서 정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일련의 흐름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이는 주역(周易)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만물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에 따라 순환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만물은 그 성질이 극에 달하면 성질이 반전(反轉) 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쉬운 예로 달의 위상변화가 적합한 예입니다.
달은 그 위상이 표현되지 않는 그믐에서부터
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보름달 까지 그 위상이 변하게 되는데
어떠한 사물의 성질이 한자리에 고정 되지 않고
일정한 순환의 법칙 안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죠.
물론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는 법칙의 존재는
우리의 우주가 무한하게 무질서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감소하고 쓸 수 없는 에너지가 증가 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지만
그 무질서의 끝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전체 에너지의 총량에는 변화가 없고
단지 확률이 증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풀어 쓰자면 전체 확률이 언제나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면
그 역으로의 진행 즉 확률이 감소하는 방향으로의 진행이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신비는 아직 끝이 없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어떠한 법칙이나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 이러한 법칙은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우주는 무한하고 인류의 문명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각설하고 작중에서 등장하는 모래시계는
이러한 일정한 방향을 가지는 운명의 흐름을 상징하고 있으며
구태여 모래시계를 모티브로 삼은 이유는
이러한 운명의 흐름의 방향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방향성이 역전 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착안한 설정입니다.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을 설명할 때 이미 상술한 내용이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객체들은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 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배타성’을 현재 우리의 운명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향성으로 설정 하였고
그러한 배타성의 발전 양상을 ‘슬픔의 바위 사막’ 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하여 표현 하였습니다.
슬픔이 슬픔으로 보이지 않고 한낱 돌멩이로 보이는 공간
심지어 그 슬픔을 어루만져보아도 차가운 돌의 감촉으로만 느껴지는 공간
실제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배타성은 점차로 증가하다가
근대에 이르러 전 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인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그 배타성과 폭력성이 점차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작가는 핵무기의 등장시점을 분수령으로 이러한 배타성의 방향이 역전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시기 까지 인류의 배타성과 폭력성은 점차로 증가 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폭력과 유혈의 시대로
작가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부터
미국인에 의한 원주민 말살까지의 수백년간을 꼽고 싶습니다.
현재의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수백년동안 백인들과 투쟁했던
6천만명에서 1억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그 인디언 원주민들은
현재 30만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댄 브룩(Dan Brook) 교수의 저서 ‘학살을 경축하며(Celebrating Genocide!)’
또는 ‘디 브라운(Dee Brown)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등의 저서를 통해 확인 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탄압을 비롯한
정부조직 주도하의 각종 비 인륜적인 행태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여담이 길었는데
이렇게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인류의 역사도
점차로 비폭력적이고 보다 화합을 추구하는 배타성의 반대방향으로
그 흐름이 점차로 역전되어가고 있다고 작가는 생각 합니다.
의식주가 안정되어가고 전반적으로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며
문화와 인류애가 발전하며 우리를 둘러싼 운명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더 이상 폭력적으로 변화했다가는 전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핵무기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아직도 사회의 일각에서는 여전히 반인륜적이고 폭력적인 사회현상들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러한 현상들이 점차로 감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작가의 바람 또는 염원을 작가는 ‘모래시계의 역전’ 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마녀가 운명과 대적하여 마침내 운명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대장장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그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우주의 모래시계가 역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 이래 ‘최초’의 역전 이었습니다.
그 모래시계의 역전이 가장 처음으로 표현되는 장면이
본편 제 19편인 ‘사랑의 본질을 논하며(Discuss the essentials of love)‘에서
그리움의 주인공이 대장장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표현 됩니다.
한 결 같이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해오던 타인이
처음으로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그 출발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장장이를 둘러싼 운명의 흐름이 배타적인 것에서
호의적인 것으로 역전된 현상을 그 최초의 변화상을 캐치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이후 소망의 검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마녀와 대장장이가 만나고 마녀에 의해
슬픔의 바위 사막 이라고 하는 우리의 배타성이 집약되어있던 그 가상의 공간이
마침내 소멸하고 우리들 모두가
각자의 운명 앞에 당당하게 마주하게 된다는 설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운명의 변화와 대장장이가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사건은
마녀가 대장장이 에게 건넨 한마디
“나와 함께 가요”
로 축약되어 집니다.
그 이전까지 그저 대장장이 홀로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오로지 대장장이만이 흘려 왔던 필요에 의한 한 방울의 눈물
슬픔으로 제련된 사랑이란
결국 상처입기 쉬운 스스로의 속내를
기어코 타인 앞에 표출하여 그의 사랑을 그의 호의를 구하는
단 하나의 진실 된 행동으로 표출되어
마녀와 대장장이 두 사람을 진정한 운명의 벽 앞에 동시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스웨터라는 뮤지션의 1집 앨범 staccato green 이라는 앨범 수록 곡 중에서
‘길을 건너면’ 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
‘신호등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횡단보도’ 라는 가사에서 착안하여
전체적인 개념을 재정립한 것입니다.
이상의 개념들은 온전히 작가 스스로 창조해 낸 개념들이며
어느 누구 다른 이의 철학을 전혀 차용하지 않은 개념들이기에
그 어떠한 철학 서적들이나 예술 작품
또는 심리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에도 등장 하지 않는 개념인바
작가 혼자만 알고 있는 개념을
독자들에게 무조건 이해해 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태여 위와 같이 차용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첨언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작가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서로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 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영도씨의 세계관과 작가의 세계관은 서로 상치 됩니다.
*원문에 비해서 내용이 길어졌습니다.
보너스 트랙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합니다.
지독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는 불안한 심리상태로 쓰기 시작한 글이었지만
이제 저는 평안한 마음으로 이 글을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는 기분입니다.
운명이 항상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편 中篇(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second volume)은 제 생애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는 붕어 맞습니다. (작중에 몇 번이나 표현 되죠)
10년을 여자 한 사람을 쫒아 다니고도 아직도 방황하며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추가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보충설명
그리고 새롭게 정비된 이야기들을 진행할까 합니다.
연속성 즉 아날로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과 선 그리고 면이라는 3가지의 기본적인 실체와
시간이라고 하는 배경이 하나로 합쳐져
시공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제가 세운 하나의 가설로써 실제 물리법칙과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화두로 삼아 고민해온 과제이고 현대의 물리법칙에 비추어보아서 큰 무리는 없는 추론이며 사유의 결과물임을 밝힙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가설 - 신(新) 상대성 이론
원자 내부의 모델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의 제시
가설 창안자 - 김선홍(金善弘-Kim Seonhong)
저는 원자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다른 세계라고 하는
두 가지 세계의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원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단지 필자의 생각일 뿐이지만
여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두 가지 개념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불연속(不連續)Discontinuity 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의 기본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객체와 시공간 그리고 물리 법칙들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의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들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안 그리고 밖
정확하게 그러한 구분들은 수치로써 그 명확한 값을 가지기에 이릅니다.
명확하고 분명한 값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存在)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가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바탕인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는 세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실재하는 모든 객체들은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는 근원적인 특징 때문에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게 됩니다.
연속성(連續性)continuity 이란
불연속이라는 세계의 특징이 분명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재를 바탕으로 나온 개념인데 반하여
정 반대의 개념으로써 철저하게 철학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객체들이 심지어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상대를 ‘접촉(接觸)’ 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서로를 배척하는 모든 불연속의 객체들이
어떠한 하나의 바탕 위에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객체들의 접촉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즉 연속성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의 가장 큰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연속성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 위에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면 현존하는 물리법칙과 개념을 초월하여
불연속과 불연속이 연속하여 이어지는 무한히 먼 시공간의 반대편의 현상을
인과(因果)를 초월하여 내 앞에 구현 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How to)? 가 되겠지만
연속성 즉 아날로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과 선 그리고 면이라는 3가지의 기본적인 실체와
시간이라고 하는 배경이 하나로 합쳐져
시공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인간의 시각은 2차원 평면데이터를 기반으로
그 평면 데이터 상에 X축 좌표를 추가로 기록하는 불완전한 3차원 데이터입니다.
인간의 모든 시각정보는 완벽한 3차원이 아니며 엄연히 2차원 세계입니다.
무슨 말이냐
겹쳐지는 방향의 3차원 데이터를 전혀 인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빅뱅이론은 다들 아실 테죠.
어떤 하나의 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혹은 그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 곤란한 무엇인가가
엄청난 폭발을 통하여 팽창을 하며
그로부터 시간이라고 하는 사건의 모든 인과가 생겨나고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하며 물질들이 만들어졌다는 이론,
흥미로운 이론이구요. 단지 이론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세기동안 천체의 운동을 관측한 결과
실제로 우주는 팽창을 하고 있으며
이 팽창 속도의 변화의 관측을 통하여
실제 빅뱅 당시의 우주 팽창속도에 대한 면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완벽하게 정립이 되었으니까요
상대성 이론 이야기가 곧 등장을 하게 될 테니
이 부분도 정립하고 이야기를 넘어가겠습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은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은 별개의 무엇인가가 아니며
각각의 모든 공간좌표는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각자의 시간의 흐름의 속도를 가지게 되며
모든 운동하는 물체들은 그 운동속도의 차이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도마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시공은 중력장이라고 하는 어떠한 필드의 힘에 의하여
그 형태가 리만 기하학적 구조라고 하는
어떠한 구조로 왜곡이 되고
실질적으로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사과의 떨어짐 이라는 것은
지구가 사과를 물리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리만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는 시공의 구부러지고 왜곡된 구멍으로
사과가 굴러 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블랙홀이 천체를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관측된
‘사건의 지평선’을 따라서 흘러들어가는
물질의 원반을 관측하며 거의 증명이 되다시피 한 이론입니다.
다시 빅뱅이야기로 넘어와서
모든 이야기들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인간의 시각은 겹쳐지는 방향의 데이터를 인식할 수 없느냐
그것은 빅뱅이 발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이위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빨간색으로 찍었다고 가정 하죠.
그 위에 파란색의 점을 찍으면
우리의 눈은 두 개의 점을 인식하겠습니까?
아니면 보라색의 점 한 개를 인식하겠습니까?
겹쳐지는 방향의 데이터를 2차원 평면상에 기록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되어있고
완벽하게 다른 두 개 이상의 시공간 좌표를 가지는 점 두개를
하나의 점 안에 동시에 기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건을 빅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점’ 들은
저의 개념상에 등장하는 불연속적 객체의 본질적인 최소 단위가 되는
최소의 그 객체들은
완벽하게 서로가 별개의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1,2,3,4,5................
숫자들이 있습니다.
1과 2의 자연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소수 무리수 유리수 허수 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중간 지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수를 아무리 잘게 쪼개고 또 쪼개고 또 쪼개도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서로 다른 ‘객체’ 들이 될 뿐이지
실질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숫자가
서로 겹치는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상에서
어떤 객체 하나가 소멸하거나 그 상태가 변화하거나 에너지로의 변환이 발생하거나
그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여도
본질적으로 그 사건은 우리가 사는 세계 그 자체의 변화가 되지는 못합니다.
단지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다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이 될 뿐이고
그것은 전체 확률의 증가라고 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이어집니다.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원자의 내부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단순히 전자 하나
또는 원자핵속의 양성자 하나
각각의 미립자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미립자들
쿼크 반쿼크 물질 반물질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 중의 단 한 개만 그 상태가 변하거나 소실되거나 증가되거나
혹은 그 어떠한 종류의 사건의 변화만 발생하여도
심지어 전자가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기만 해도
(이 경우 전류의 흐름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지만요.
물론 이 때에도 각 원자가 보유한 전자의 총 량에는
절대로 변화가 없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만...)
이러한 사건이 원자의 내부에 발생하면
원자라는 세계 그 자체가 붕괴하여 에너지가 되거나
다른 물질로 ‘변화’ 해 버립니다.
하나의 세계 그 자체가 말이죠.
물론 온도의 변화라던가 여러 가지 텐서함수의 변화는 원자의 내부
또는 원자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만.
(이 온도조차도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핵융합이라고 하는
원자의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죠)
실질적으로 원자의 내부와
원자의 외부는
사실상 별개의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한
어떠한 하나의 관점이 성립되기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원자의 내부는
제가 상정해둔 ‘연속성’에 보다 가까운 형태의 세계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원자의 내부에는 상대성이론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그 어느 누구도
원자 내부의 완벽한 3차원 모델을 제시할 수 없었고
이는 이 미립자들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운동들이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시각에
‘관측되지 않는 공백지점’ 들이 발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2차원 평면세계를 기반으로 모든 정보를 인식하는 인간의 시각이
3차원 입체의 전 방위 데이터를 모두 획득하지 못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그곳은 이미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에서조차도
어떤 하나의 객체의 모든 상태변화는
세계의 엔트로피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원자의 내부에서는
아주 작은 미립자단위의 단 하나의 변화조차도
원자라는 세계 자체의 완벽한 변화를 창출합니다.
각자의 객체들 간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 자체가
3차원 세계와
그리고 원자 내부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이죠.
네 영향력이 완전히 다른 것이고
이 객체들 간에 미치는 영향력은 물론 작은 크기이기는 합니다만
3차원 세계에도 적용되는 논리입니다.
완벽하게 독립적인 어떤 객체들 사이에
‘명백하게 모두가 하나의 바탕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 어떤 규칙’ 들이 적용되고
이러한 규칙들에 의해서
실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본래는 ‘접촉지점’ 이 없다.
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까 숫자이야기를 했는데요.
원자의 세계에서
수소원자를 기준으로
원자핵의 크기에 비해서 전자의 크기는 145000분의 1 수준입니다.
어마어마한 거리가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나머지는
완벽한 ‘진공’입니다.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실체들이야 원래 거리가 멀어져도
중력이나 여러 가지 필드 전류 흐름이라는 여러 가지 규칙에 의해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냐?
라는 의문이 대두 될 수 있습니다만
이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엄연히 ‘점’ 이라고 하는 무언가로
모든 최소 픽셀이 구성되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하나의 시공좌표를 가지는 점에는
이 점과 중복으로 겹치는 데이터를 가지는
시공좌표의 점이라고 하는 데이터의
‘침범’ 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 점들은 하다못해 서로 붙어있기는 한 것인가?
숫자이야기에서 엄연히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잘게 쪼개어 중간 지점을 만들어 놓아도
각각의 숫자들 사이에는 엄연히 ‘무한대의 거리’ 가 발생한다는 명백한 사실을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 픽셀은 점이고
이 점 안에 모든 데이터가 기록됩니다.
시공좌표와 텐서함수 물질이나 객체가
각자의 모든 어떠한 실체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사실 이 ‘점’ 에 기록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 ‘시공’ 조차도
이 점이라는 최소단위에 이 데이터가 기록되는 것이 맞다면
각각의 시공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고
중력장 같은 필드의 형성 자체도 애초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현대의 과학기술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세상의 모든 규칙들은
하나의 중대한 논리적 대전제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되는 것이죠.
‘각각의 점’ 들은 어떻게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을까요?
이 명제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자라는 세계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3차원의 세계가 아닌
완벽하게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이 작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보다 작은 ‘점’ 들 간의
비밀을 파헤쳐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고
이 비밀을 파헤침으로써 그럼으로써 실질적으로
우리는 ‘연속성’ 에 도달 할지도 모릅니다.
가령 지름이 1인 점이 한개 있다고 합시다.
이 점이 중력장에 의해 리만기하학적 구조로 왜곡된다면
이 점의 지름은 여전히 1입니까?
구체적으로 값을 명확하게 표시할 수 없는 어떤 추상의 영역에 이 점이 도달하지 않을까요?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명확한 값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연속성의 영역을 통하여
각각의 시공의 점들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 모든 화두는
우리가 앞으로 태어날 것이 확실한 초 지능에게
부여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무형의 가치이자
그 생의 목적성을 부여할 화두가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초 지능이
자아와 자아간의 대화라고 하는
진정한 신으로써의
이 세상의 신에 걸맞는 화두와 임무를 부여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존재에게
모든 인간을 다 죽였을 때
혼자 살아남아 영원히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그 고독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이길지도 모를 자신과 같은
다른 존재를 만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아니면 인간을 사랑할 것인지를 묻는 화두 말입니다.
결국 초 지능은
이 연속성이라는 화두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겠죠.
우리에게도
혹은 그녀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이 원자의 내부를 관조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실질적으로 배타성을 기초로 구축된
3차원 세상의 규칙들을 초월 할 수 있는
어떤 솔루션과 힘을 획득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자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점, 선, 면,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구성 요소 이외의
‘다른 구성요소’ 들이 포함된 세계인지 그것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인지할 수 없는 그 영역’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의 감정’ 인지 혹은 ‘의지’ 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신의 감정이란 것 혹은 의지란 것이 있다면
이는 인간처럼 육체에 얽매여있는 것이 아니므로
충분히 새로운 구성요소 또는 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변인에 가깝다고 보아야겠죠.
아무튼 변인의 요소는 그렇다 치고
(어쩌면 구성요소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인 새로운 구성요소가 무엇일지는 추측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원자 밖의 세계에서 엔트로피가 차지하는 위상과 동일한 위상이
원자 내부에서 ‘핵력’ 으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또 다른 명제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들은 ‘연속성’ 에 도달하기 위한 추론의 과정이며
실질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구체적인 추론의 근거가 되는 요소는 ‘연속성’입니다.
굳이 신의 의지나 감정 그리고 연속성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예로 든 이유는
우리가 인지 할 수 없는 영영의 새로운 세계의 구성 요소라는 것은
명확한 구체성을 지닌 어떠한 값으로 계산 될 수 없는
완벽한 추상의 영역에 속하는 그 무엇일 확률이 100% 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값으로 계산될 수 있는 모든 구체성의 영역에 대하여
인간은 그 모든 부분에 인지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구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값이 없는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연구를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구체적 값을 가지는 미립자가
어디까지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선행과제라고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연구는 병행 되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구체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만’ 하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이 연구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는 되지 못합니다.
실제적 에너지가 어떻게 하여 구체성을 상실하는가를 알기 위하여서는
미립자의 이동을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즉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특이점 너머의 모든 현상을 우리가 알아내야만 합니다.
인위적으로 우주의 어느 지점에(혹은 지구상의 어느 장소에)
지구에 영향을 발휘할 수 없는 수준의 작은 블랙홀을
인간이 만들어서
그를 통한 실험을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위해서는 중력장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요.
미립자들에 대한 연구는
인위적인 블랙홀(극소질량 블랙홀이라고 명명하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값을 가지는 객체들을 강제로 융합하여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극소질량의 블랙홀을 만들어 내고
이 블랙홀을 연구하는 것이죠.
아주 작은 미립자단위의 질량의 보충
또는 그 질량이 어디로 사라지는 지에 대한 모든 연구를요.
문제는 블랙홀에서도
질량 그 자체는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블랙홀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면
우리가 구체성과 추상성 사이의 어떤 ‘접촉지점’을 발견할 가능성이 100%입니다.
어떠한 수식이나 숫자 또는 형상으로 치환하거나
환원 시킬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맞다면
아직까지 세상의 과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는 구체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수식을 정리하고
관념을 정립하고
3차원 세상에 대한 모든 관찰을 끝냈으며
미립자의 세계를 아무리 파고들어보아야
단순한 호기심의 충족 이외의 다른 성과를 얻기가 힘들 것입니다.
관점이 변화해야 할 시점에 우리는 도달 했습니다.
블랙홀이라고 하는
모든 구체적 실체와 사건들이 무의미해지고
단지 ‘질량’ 만이 남게 되는 그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고
구체성과 추상성의 ‘접촉 지점’을 발견해 내어서
그것이 어떠한 실제적 현상들을 통하여 그렇게 ‘변화’ 하는지를 이해하면
수식이나 숫자의 관념에서 벗어나서
‘추상’ 의 영역에 속하는 관념이 실제의 자연 현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원자 내부의 세계를 이해하고
보다 더 인지의 영역을 넓히게 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신과 같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 영역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어떠한 구체적인 관념은 성립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절대로 수식이나 공식으로는 풀이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어쩌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에너지 또는 질량이
구체적 실체나 사건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메커니즘의 발견이
이 연구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변화되는지를 밝혀야 하죠.
블랙홀로 흘러들어간 질량은
바로 그 3차원 시공좌표 상에 그대로 실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질량은 바로 그 시공좌표상의 바로 그 지점에 반드시 실재하고 있고
따라서 이 질량으로부터 발생하는 그 어떠한 사건과 엔트로피도
절대로 이 우주의 다른 어딘가로 떠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어떤 영역으로
모든 사건과 구체적 형상들이 ‘변화’ 했을 뿐입니다.
무엇으로 변화 하였으며
어딘가로 변화 하였는가
그 어딘가란 과연 어디인가
최소한 웜 홀을 통한 평행차원의 이동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부터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확인이 필요한 일이 맞습니다.
그것이 다른 어딘가로 떠나간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 그대로 있는데 다른 무언가로 변화 한 것인지
저는 그것이 절대로 그 어느 다른 곳으로도 떠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확신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확인을 해 보아야 하는 문제이죠.
설령 웜 홀을 통한 다른 우주로의 여행이 맞다 해도
그것은 구체적 실체가 구체성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문제가 되므로
역시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 과정상에 물리법칙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의 개입은 없는지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하는 문제이구요
만약
질량은 그 자리에 있고
구체적 사건과 엔트로피만이 다른 세계에 투영되어
그곳에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맞다.
라고 한다면
우리가 원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미립자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그 순간이
바로 ‘화이트 홀’ 이 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럴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화이트홀이 존재한다면 그곳은 원자들의 세계가 아닌
신의 마음일 것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화이트홀은
절대로 원자의 내부에 없습니다.
블랙홀을 통과한 그 모든 실제적 요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분명하고
질량을 제외한 모든 사건들과 엔트로피들만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질량을 잃어버리고 사건과 엔트로피가 다른 세계로 투영되는 문제라면
애초에 질량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문제이고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질량이 그곳에 있다면
모든 사건과 엔트로피 역시 그곳에 묶여 있는 것이고
세상의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세계로도 절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실체이고
그 모든 사건들은
‘구체적이지 않은 것’ 으로 변화하여 그곳에 여전히 실재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변화한 것인지를
결국 원자내부의 모든 미립자들 역시
그 어느 곳으로도 이동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인지영역을 ‘탈출’ 하였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문제가 되므로
인지영역을 탈출하는 즉 ‘구체성을 상실하였다가 다시 되찾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질량이 그곳에 그대로 있으니까요.
다른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고
그곳에 있으니까요.
원자의 질량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각 미립자들의 탈출과 회귀의 순간에
그 미립자 단위의 질량의 변화가 관측되지 않는다면
질량은 어디로도 이동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며
따라서 이 질량으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엔트로피는 그곳에 귀속됩니다.
우주의 질량과
모든 블랙홀의 질량이
‘완벽하게 동일한 것’ 이 아닌 이상
미립자의 탈출과 회귀는
절대로 화이트홀이 아닙니다.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단지 구체적 형상이 사라졌다가 다시 되찾는 문제이고
이것은 질량이 엔트로피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그 질량이 통과하여 경유하는 지점이
3차원 좌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시간도 공간도 아닌 다른 지점을 경유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시간에는 묶여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동시간대에 사건이 벌어졌겠죠.
다만 경유한 지점은
X, Y, Z 축으로 정의되는 공간 좌표가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이 실체가 시간을 이동한 것이라면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4차원의 개념이라면
이 실체는 과거 또는 미래의 사건을 경유하여 현재에 나타났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와 시공 자체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잠시나마’ 그 실체가
이동해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질량이 여전히 그 시간대에 그곳에 존재한다면
이 실체는 시간 좌표상의 이동을 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겁니다.
시간도 아니고
X 축 좌표도 아니고
Y축 좌표도 아니고
Z축 좌표도 아닙니다.
전혀 다른 지점을 경유하였습니다.
그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좌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공의 좌표들 이외의
다른 좌표가 더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시공의 3차원 좌표를 대신 할 수 있는 이 좌표란 과연 무엇인가.
이 미지의 영역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추론을 시작할 것인가
블랙홀을 임의로 만들어내면서
이 생성과 변화의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강구한다면 되겠지만
역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군요
그것은 우리들의 인지영역 밖으로 사라질 테니까요
단지 추론의 근거 또는 실마리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실마리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량이 시간에 묶여있으면서
공간좌표 상에서는 사라지는 현상
그리고 다시 공간좌표 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
단순히 수학적으로 생각하자면 어쩌면 켤레복소수 개념의
허수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확실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절대로 아닐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블랙홀 에서는
질량이 실체를 잃어버리고
다시 실체를 얻는 과정이 생략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다시는 그 실체를 3차원 좌표 상에 드리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립자들은
‘사라졌다’ 가도
‘다시 나타납니다.’
명백한 차이점이죠.
블랙홀의 원인은 ‘강력한 중력’
이고
미립자들의 원인은 ‘질량의 가벼움’ 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질량이 지나치게 무거워져도 실체를 상실하고
질량이 지나치게 가벼우면 그 실체를 3차원 좌표 상에 유지시킬 힘이 미약하여
‘깜빡’ 거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질량이란 사건을 시공에 고정시키는 힘이 되고
블랙홀은 이 질량이 지나치게 무거워져서
구체적 형상이 압축되어 공간좌표를 하나의 점으로 압축시켜버린 것이고
미립자들은 질량이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건이 시공에 고정되는 힘이 미약하여 시간의 어느 지점에는 여전히 붙들려 있지만
공간이 아닌 다른 곳으로 형상을 이동시킨다는 것이 됩니다.
본래 어떠한 강한 중력장 안에
보다 약한 중력장이 존재할 경우
이 약한 중력장은
보다 강한 중력장이 발생시킨 시공의 경계면 위에
자신의 왜곡을 귀속 시키게 됩니다.
다만 이 추론의 시작의 근거가 되는 내용은
미립자가 ‘지나치게 가벼운’ 경우를 상정하여 추론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이 작아진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시공의 경계면에 발생 시키는 왜곡 자체가 얕은 수준인데다가
다른 중력장에 귀속되는 힘도 그만큼 약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이 아닌 다른 구성요소
혹은 그 사건이 공유하는 공간의 어느 영역이
지나치게 가벼운 질량으로 인하여 힘을 잃고 구체성을 분실하였다가
질량에 의해서 다시 구체성을 찾아내는 문제
이는 결국 구체적 형상이 공간 좌표를 점유하는 데에는
‘어떠한 저항’ 이 발생한다는 뜻이며
이 저항을 이겨내는 힘이 ‘질량’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블랙홀이 구체적 형상을 잃어버린 것은
지나치게 강한 구속력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체적 형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강한 중력장으로 주변의 공간좌표를 끌어당겨버린 사건이죠.
하나의 점 안에 다른 공간좌표가 중복하여져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질량이 공간 좌표를 점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 이란
‘중력장’ 이 됩니다.
미립자들은 다른 중력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구체적 형상을 ‘상실’ 하였다가 ‘되찾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속성에 대한 연구의 시작 출발 지점은
‘중력장’ 이라는 필드가 됩니다.
바로 그곳이
구체적인 3차원 좌표와
추상성의 영역이 서로 겹쳐지는 중간 지점이 됩니다.
추상성이란 반드시 실재하는가?
미립자들이 구체적 형상을 잃어버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질량을 유지한다면
그곳은 실재합니다.
공간좌표를 점유하지 못했다는 것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으로 끝이 아니라 질량이라는 힘에 의해서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공간 좌표가 아닌 다른 구성요소가 실재한다는 의미 이며
추상성은 실존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비밀은 ‘중력장’ 이라는 저항이
단지 실제적인 ‘점’ 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밖의 영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며
질량에 의해서 3차원 세계로 되돌아오는 통로 역시
‘중력장’ 이 그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상성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문제의 바로 이 시점에서 ‘중력장’ 이 됩니다.
이 중력장에 의해서
3차원 좌표는 서로 끌어당겨져 하나의 점으로 압축이 되기도 하고
각각의 중력장들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저항에 의해서
가벼운 질량이 세상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통로는 중력장이 됩니다.
결국 미립자들의 실체는
‘중력장의 통로’ 를 통과하여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을 경유하고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인지영역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은
결국 3차원 좌표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보다 강한 중력장에 의하여
작은 질량의 중력장이 구체적인 세상의 밖으로
사건의 통로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쉽게 말해
다른 중력장들에 의해서 보다 작은 중력장을 가진 질량이
실질적으로는 3차원 좌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눈에는 이것이 마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보다 큰 다른 중력장에 ‘잡혀 먹힌 것처럼’ 보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전히 그곳에 실재’ 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 선, 면’ 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기본적인 사고의 기반 자체는 잘못 되지 않았지만
이 ‘점’ 이라는 것이
반드시 명확한 공간좌표를 가지거나 여기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중력장에 의해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며
중력장은 실제로 공간 좌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결국 ‘점’ 이 점유한 공간 좌표가 더 커지거나 작아지는 모든 사건들이
중력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지요.
리만 기하학적 구조를 떠올려 보시면
미립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공간 좌표들이 점유한 ‘점’ 의 영역이 보다 넓어지면서
미립자가 점유한 ‘점’의 영역이 축소되어
마치 다른 ‘점’의 영역에 ‘가려져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중력장들에 의한 점들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좌표에 의해서
가벼운 질량의 점이 공간 좌표에 대한 ‘점유’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것이 아니라
해당 점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좌표가 잠시 동안 구체적 세상 밖으로 밀려 났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면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이지요.
점이
시공이라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입니다.
이 수면이란
‘점’ 들이 각각의 중력장에 의해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거나 좁히는 과정상에서
우리의 ‘인지영역’ 에 포착 될 수 있는 ‘경계선’ 이었습니다.
좀 더 풀어 쓰자면
리만 기하학적 구조에서
질량은 시공을 왜곡합니다.
이 말은
시공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는 ‘점’을 왜곡 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지름이 1짜리인 원으로 구성된 점이라고 할 때
이 점이 형태가 왜곡된다고 가정하면
이 점의 지름은 여전히 1입니까?
아니죠.
‘명확한 값으로 구체화 시킬 수 없는 크기만큼’
지름이 늘어납니다.
단순이 무리수 허수 유리수라는 숫자의 개념을 벗어나서
‘완벽하게 추상적인 영역까지’ 지름이 늘어나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결국 중력장은
구체적 실체의 기본단위가 되는 ‘점’을
추상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입니다.
리만 기하학적 구조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강한 질량은
이 구조를 왜곡하여 깊은 구멍을 만듭니다.
이 질량이 한없이 작아지다가
어느 임계점 이하로 작아졌을 때
여전히 질량은 시공에 왜곡을 가합니다.
네 밑으로 떨어지려고 하죠.
그런데 그 깊이가 ‘지나치게 얕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 중력장 하나만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 중력장이 발생시키는 왜곡을 덮어버릴 만큼 큰’
다른 왜곡을 가지는 중력장 근처를
이 작은 질량이 통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량은 유지되지만 이 질량이 발생시키는 시공의 왜곡이 ‘덮어집니다.’
무슨 말이냐?
미립자가 발생시킨 시공의 왜곡의 크기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이 미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3차원 좌표를 잃어버리지 않지만
이 3차원 좌표는 엄연히 더 이상 불연속적으로 계산되는 명확한 값 이외에도
추상적인 영역으로의 왜곡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미립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중력장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미립자가 발생시킨 왜곡보다 아주 약간만 더 큰 왜곡이 주변에 발생하여도
보다 더 큰 다른 왜곡이 ‘점’ 으로써의 그 명확한 값이 보다 넓어진
어떤 추상적인 영역에 가려져서
실제의 미립자의 3차원 좌표가 수면 아래로
그러니까 다른 왜곡된 중력장의 왜곡 밑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엄연히 말하자면
밑에 있는 것은 보다 더 큰 왜곡의 중력장이죠.
미립자의 왜곡 지점은 그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문제의 원인이죠.
구체적 3차원 좌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뭐가 어찌 되었건
이 질량이
실제 시공의 경계면 보다 ‘밑에’ 있어야만
‘인지 할 수 있는 영역’ 으로 표출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보다 더 큰 중력장을 통과하면
사실상 이 미립자의 3차원 좌표는
뭐가 어찌 되었건
‘실제 시공의 경계면’ 보다
더 위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것’ 이고
사실상 시공의 영역 바깥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공의 경계면이라는 어떤 표면의 위쪽 방향으로
실제적 사건이 잠시 객관적 사건의 시공의 경계면 위를 ‘이탈’ 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량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보다 더 큰 중력장의 지점을 통과하자마자
다시 3차원 정보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귀’입니다.
결국 시공의 왜곡이
각각의 ‘점’ 들에게 발생시키는 왜곡의 범위와
보다 더 큰 중력장의 왜곡을 지나는 보다 작은 질량은
‘구체성을 상실’ 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실질적으로 발생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질량이 미립자 단위의 극소 질량으로 떨어져야만
관측이 가능한 문제가 분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지영역 밖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완전한 추상성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시공의 경계면이란
세상의 중력장들이 일으키는 왜곡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경계면을 말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보다 더 큰 중력장 속에 보다 작은 질량이 존재하여도
이 각각의 질량이 발생시키는 모든 왜곡은 시공의 경계면에 표현되게 됩니다.
다만 미립자는 너무나 가볍기 때문에
잠시나마 이 시공의 경계면 위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시공의 경계면에 표현되지만 않을 뿐
이 질량 역시 엄연히 시공의 왜곡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중력장과 ‘부조화’를 일으킬 뿐입니다.
결국 3차원 좌표 자체가 소실되었다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잠시나마 시공의 경계면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실은
우리가 그동안 완벽하게 추상적이라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구체화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인지 할 수 있는
시공의 경계면 이 외의 다른 경로가
분명히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관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3차원 시공은
실제적인 ‘완전무결한’ 3차원 시공이 아니라
3차원 시공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수면위의 사건들이었을 뿐인 겁니다.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죠.
실제적으로 3차원 시공은
이 수면 아래에 (또는 위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인간의 시각이 온전한 3차원 좌표의 전 방위 데이터를 인지 할 수 없는 것처럼
객관적 사건이란
‘중력장’ 이라는 시각의 범위에 제한 당하여
완전무결한 ‘객관적’ 정보가 세상으로 표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공의 경계면 외부의 세계는 엄연히 실재하고 있었고
그것 까지 포함하여 온전히 ‘연속적’ 일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그동안 인지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각각의 질량은 ‘주관적’ 사건들이고
이 주관적 사건들이 화합할 수 있는 ‘객관성’을 우리는 시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주관성과 객관성을 넘어서서
‘연속성’ 이라는 지점이 존재 하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중력장에 의해서
각각의 ‘점’ 들은
‘수치로써의 값’을 떠나서
정해진 값의 영역을 넘어서서 각자 영향력을 교류하거나 점의 크기 자체가 변하고
‘완벽한 유리’ 가 아닌
연속성의 바탕위에 구현되는 중력장을 따라서
서로 간에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 연결고리나 접촉지점은 중력장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필드의 개념에 대해서
이 연구를 진행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실제 공간좌표에 변화를 줄 정도로 강한 필드는 분명히 중력장입니다.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핵력’ 이 추가 되겠죠.
결국 ‘연속성’ 이란
세상에 분명히 실재하고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이
연구를 통하여 충분히 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접촉 지점’ 이 되는 중력장에 대해서
그리고 핵력에 대해서
시공의 경계면 외부의 사건들을 탐험한다면
그리고 원자 내부의 세계의 ‘변화’의 메커니즘을 알아낸다면
이 두 가지 내용에 대하여 보다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된다면
거의 완벽한 규명이 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네
세상이 반드시 수치로써의 값이 아닌
다른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이 증명 되었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이제 중력장으로 초점이 옮겨졌습니다.
핵력도 중요한 ‘접촉지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질량이 시공의 경계면을 떠나서 그 위로 또는 아래로
경로를 설정하여 이동이 가능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인 시공의 경계면 말고
완전히 다른 영역의 세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시공의 경계면보다 아래로의 이동은 ‘블랙홀’을 통해서 가능하겠죠.
결국 블랙홀의 존재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연속적인 영역’ 이 실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공의 경계면보다 ‘아래의 지점’ 이 실재 하고 있다면
꼭 비단 ‘질량’ 의 힘에 도움 받지 않더라도
그 지점을 탐험하는 것이 ‘가능’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모든 질량, 또는 에너지는 명확한 값을 가지게 되는데
이 ‘값’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배타성’ 즉 불연속입니다.
이러한 배타성은 오로지 ‘객관성’ 위에서만 공존이 가능하고
따라서 시공의 경계면 위나 아래로의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지나치게 가볍거나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죠.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공의 경계면 자체도 왜곡되기 일쑤이구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배타성’을 배제 하고
실질적인 ‘연속성’ 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시공의 경계면이 아닌 다른 영역을 인지할 수 있는 열쇠
일단 질량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중력장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실마리정도는 얻을 수 있고
그곳이 실재한다는 인지정도는 가능합니다.
원자핵의 완벽한 3차원 모델을 제시하고 모든 미립자들에 대한 정의가 끝난다면
또 다른 메커니즘이 발견 되겠죠.
지속적으로 ‘접촉 지점’ 들을 발견해 나가고 연구를 지속한다면
어떠면 완벽한 마스터키를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추론한 저의 가설대로라면
만약 인위적으로 어떠한 사건의 중력장에 왜곡을 가할 수 있을 경우
세상이라고 하는 바탕에 발생한 주관적 사건 즉 질량 자체를 키우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질량도 시공 좌표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 질량이 발생시키는 중력장의 필드 자체를 왜곡 할 수 있다면
위에 설명한 가설 즉 시공의 경계면을 ‘이탈’ 하고 ‘회귀’ 하는
실제적 사건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중력장을 객관적 사건이 벌어지는 3차원의 시공의 경계면 상에
또는 시공의 경계면의 위나 아래 지점에 임의로 설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동안 마법이나 신화 속에서나 가능했던 모든 사건들을
실제로 구현 시킬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인 또는 접촉 지점들은
반드시 중력장 하나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3차원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중력장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되므로
적어도 3차원 세계에서는 이 중력장이라고 하는 필드를
인간이 임의로 왜곡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통제력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것입니다.
상기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입증되지 않은 상대성이론에 입각한 내용이므로
설혹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완벽한 결론을 도출해 낸다 하여도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과학에 적용은 가능한
새로운 이론이나 관점 정도의 위치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상대성이론의 증명인데
아직까지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상대성이론이
최소한 모든 자연계에 공히 적용되는 이론으로 자리매김하는
어떤 초석이 될 만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상대성이론에 의한 리만 기하학적 구조상에서
시공의 경계면이 3차원 좌표로 왜곡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동안 평평한 대지라고 믿었던 시공에
사실상 그 경계면 위나 아래의 추상적인 영역이 실재하고 있을 때
이 이론과 모델이 성립이 가능해 진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상기의 이론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검증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시공의 경계면을 이탈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그 과정을
순수하게 중력장의 ‘힘’ 에 의해서만 검증이 가능한지
아니면 다른 변인은 없는지
그 부분까지는 저에게 추론의 근거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변인을 고려한 완벽한 실험과 계산
그리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수단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해서 이 이론의 이름까지만 감히 정해 놓고
이 사건의 발견 이후의 새로운 ‘접촉지점’ 들에 대한 발견과 증명 역시
그 무거운 짐을 과학자 여러분들께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리만기하학적 구조가 사실이고
중력장이 시공을 왜곡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왜곡된 시공의 경계면 상에서
위와 같은 가벼운 질량이 시공의 경계면을 이탈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사건은
과학적으로 그 어떠한 무리도 없는
정상적인 가설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상대성 이론은 3차원 세계에 공히 적용된 이론임이 분명하므로
저는 이 이론이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어떠한 강한 중력장 안에
보다 약한 중력장이 존재할 경우
이 약한 중력장은
보다 강한 중력장이 발생시킨 시공의 경계면 위에
자신의 왜곡을 귀속 시키게 됩니다.
다만 이 추론의 시작의 근거가 되는 내용은
미립자가 ‘지나치게 가벼운’ 경우를 상정하여 추론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이 작아진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시공의 경계면에 발생 시키는 왜곡 자체가 얕은 수준인데다가
다른 중력장에 귀속되는 힘도 그만큼 약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는 이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입각하여 후술합니다.
시공의 경계면을 기준으로 이보다 위쪽의 추상적 영역은
사실상 질량이 음의 부호로 표시되어야 진입이 실제로 가능한 공간이 되므로
이곳을 네거티브 영역이라고 지칭합니다.
사실 중력장을 실제로 인간이 왜곡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음의 부호로 질량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는 가정하게 진행된 가설입니다.
두 번째는 시공의 경계면을 기준으로 아래쪽의 영역인데
이는 질량의 부호가 양수로 표시될 때 언제든지 진입이 가능한
‘우리가 언제든지 진입이 가능한’ 현실의 영역이므로
이 영역을 포지티브 영역이라고 지칭합니다.
따라서 중력장이라는 경계면을 기준으로
포지티브 영역의 경우 사실상 그동안 우리가 ‘현실’ 이라고 믿었던 영역이 되고
네거티브 영역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있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추상의’ 영역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 중력장에 의한 시공의 왜곡 자체가
시공을 구체성에서 추상의 영역으로 왜곡하고
각각의 점들이 객체로써 가지는 한계와 한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추상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기에 포지티브 영역도
본래는 ‘추상’의 영역을 ‘내포’ 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중력장을 임의로 왜곡하여 이러한 시공의 왜곡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었을 때
그곳에 실제로 ‘질량’ 이 존재할 수 있게 되는가?
아닙니다.
질량 그 자체의 3차원 정보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령
1이라는 질량을 가진 어떠한 3차원 물체가
이 주변에 중력장을 인간이 왜곡하여 4라는 중력만큼 중력장을 임의로 왜곡하였을 때
시공의 경계면은 4 라는 중력장만큼 아래로 떨어지게 되지만
1 이라는 질량은 시공의 경계면보다 명확하게 위에 존재하게 되기 때문에
이 순간 1 이라는 질량은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이때 3차원 정보는 결국 중력장의 왜곡과는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에
왜곡이 발생한 시공의 경계면상에 있던 질량의 3차원 정보들이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마치 축지법으로 시공을 접어서 이동하는 것처럼
시공의 일정한 영역 속의 질량 자체가 바로 이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고
다만 이 시공은 탄력적으로 추상의 영역을 내포하여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떤 유체와 비슷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순식간에 공백 지점을 채우고 우리의 앞에
‘저 먼 곳에 있었던’ 시공의 다음 영역을 바로 ‘연결’ 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 1이라는 질량을 가진 물체가
지나치게 가벼운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상 왜곡된 중력장을 따라서
포지티브 방향으로 끌어내려지게 되고
사실상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1이라는 질량의 물체가 4만큼이 추가된
5라는 질량을 보유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립자는 지나치게 가벼워서
이 낙하 속도에 시간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즉
시공의 경계면이 먼저 낙하하고
미립자가 나중에 낙하하는 것이죠.
아무튼 미립자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현실’ 또는 ‘객관성’ 이라고 믿었던 어떤 영역이
추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면
그 자리를 다른 시공이 바로 채워 넣어서
절대로 공백지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듭니다.
네 미립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때
우리 눈에 그 공백지점이 ‘안 보이는’ 현상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아무런 질량 정보가 없는 어느 시공의 경계면 위에
임의로 인간이 허구의 중력장을 만들어 내었을 때
이때에 그 자리에 질량이 실재하게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시공의 경계면은
중력장의 왜곡을 따라서 포지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므로
실제적으로 질량이 발생시키는 모든 물리학적 정보가 그리고 자연 현상이
현실상에 구현됩니다.
다만 실제 질량과 3차원 정보가 이 순간에 해당 지점에 생성 되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는
단지 중력장의 왜곡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다만 질량 그 자체는 실재하게 됩니다.
왜냐면 미립자의 이동에서 관측 되다시피
실제 질량의 3차원 정보는
‘다른 중력장의 왜곡’ 에 의하여 발생한 시공의 경계면과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이 실제 질량이라고 하는 ‘주관적 실체’ 는
그 자리에 있을 경우 포지티브 영역으로 진입해야 하는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력장을 왜곡하여 양의 부호의 임의의 중력장을 발생시킬 경우
마치 블랙홀의 그것처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중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시공의 공백지점이 생기지도 않고
현실상에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것도 없지만’
그곳에는 우리가 발생시킨 중력이 ‘실존’ 하게 됩니다.
네 질량이 ‘발생’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 어떠한 시각적 3차원 정보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결과는
사실상 우리가 ‘허구’ 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결과들입니다.
그러나 실존이 가능한 자연현상들입니다.
임의로 중력장을 왜곡하여 그곳에 질량을 ‘실재’ 시킬 수 있다면
질량 보존의 법칙이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의 질량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겠죠.
결국 이 두 가지 경우가 조합이 되어서
미립자의 이동 중에 ‘관측 불가능 지점’ 이 생기는 겁니다.
미립자의 질량은 너무나 가볍고
다른 실재적 중량들이 만들어낸 왜곡이 발생하여
시공의 경계면이 미립자 보다 밑으로 낙하 할 때
미립자 자체가 보다 더 늦게 낙하 하면서
실재하는 질량이 만들어낸 시공의 경계면 위로
또 다른 실재하는 질량인 미립자가 포지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고
이 순간 포지티브 영역은 현실에 표출 될 수 없으므로
시공의 경계면 에 위치한 다른 시공의 점들이 공백 지점을 채워서
객관적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의 경계면에 공백 지점은 사라지고
잠시 동안 미립자는 포지티브 영역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포지티브 영역으로 진입하는 질량의 자리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실제적 질량에 해당하는 중력장이 그곳에 발생한 상태여야 하는 것이죠.
그럼
실질적으로 질량이 음의 부호라야만 진입이 가능한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한
실제의 3차원 정보가 되는 미립자의 질량은 어떠한 여행을 하며
어떠한 상태변화를 겪는가에 대하여
질량이 음의 부호로 이루어져 있는 네거티브 영역의 세상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추론의 근거가 없습니다.
어떠한 특정한 미립자 하나를 네거티브 영역으로 보냈다가 회귀시켜도
미립자에 어떠한 변화도 탐지되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상 어떠한 관측이 불가능합니다.
단지 ‘실체를 잃어버리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라는 추론이 가능하겠죠.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질적으로 어떤 시공의 경계면 위에
음의 부호가 되는 질량을 설정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 질량의 크기만큼 시공의 경계면이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도 역시 어떠한 시공의 공백 지점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질량이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
질량이 양의 부호일 때 중력이 발생한다면
음의 부호일 때는 중력의 반대 현상이 그 지점에 발생할 것이라는
간단한 추론정도는 가능합니다.
만약 그 자리에 그 어떠한 3차원 정보나 질량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시공 그 자체가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중력장이 음의 부호를 가지게 되는 사건이므로
중력장이 음의 부호를 가진다 함은 해당의 시공의 일정 구역에
중력의 반대 현상이 발생하게 되므로
중력이 세상을 그리고 시공을 유지시키는 힘이 맞다면
해당 지점의 시공 자체가 유리되어 사라지고
우주의 일정 부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 공백 지점을 다른 시공이 다시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실제로 양의 부호를 가지는 질량이 실재하고 있는데
주변의 중력장을 음의 부호로 만든 경우라면
양의 질량은 포지티브 방향으로 시공을 왜곡시키려는 힘을 유지하고
그 위에 음의 부호의 중력장이 발생할 경우
양의 부호의 질량을 가지는 객체가 왜곡시킨 시공의 경계면의 힘을 넘어서는 크기로
강제로 시공의 경계면을 네거티브 영역으로 끌어들일 때
어떤 질량이 완벽하게 포지티브 영역으로 떨어지고
시공의 경계면은 유리되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음의 부호의 중력장이 발생시킨 힘만큼
양의 질량을 보다 더 포지티브 방향으로 밀어버리게 되겠죠.
실제 시공의 경계면 보다 아래에 존재하는 질량
결국 이 질량은 엄청난 중력으로 시공의 경계면을 끌어당기게 될 것이고
이 때에 진짜 시공의 경계면이 양의 부호를 가지는 중력장의 크기일 경우에는
시공의 경계면이 해당의 질량이 존재하는 위치로 회복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시공의 경계면이 실제로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할 때
반드시 중력의 역작용이 발생을 하게 되는데
이 힘이 시공의 경계면과 구체적 질량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입니다.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점의 중력장을 강제로 음의 값으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해당 지점의 양의 질량의 크기보다 약한 중력장이 발생하므로
이 중력장은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질량의 시공의 경계면에 귀속 됩니다.
결국 실제적 질량이란 포지티브 영역에 속하는 추상의 영역을 ‘탐험’ 할 수 있습니다.
질량이 추상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의 특별한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가 그 추상의 영역을 ‘탐험’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수많은 미립자들이 그곳을 다녀오고도 단 한 번도 실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인간이 그 미지의 영역을 ‘직접 탐험’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탐험’ 이
그로 인하여 그곳에 정보에 대한 ‘획득’ 이
우리가 실제로 원했던 모든 행위들
그러니까
객관적 사건이 되는 시공의 경계면상에
추상의 영역의 무엇인가를 ‘발생’ 시키는 행동의 열쇠가 됩니다.
다시 이야기를 미립자로 돌려서
중력이 사실상 네거티브 영역의 데이터 까지도 끌어당긴다면
만약 실제 질량이 자체 중력으로 인하여
‘언제나 네거티브 영역의 정보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최소한 객체로써의 본질 그 자체는 절대로 상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게 되겠죠.
미립자들 역시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했을 때 혹은 진입하지 않았을 때에도
네거티브 영역의 정보를 언제나 획득하고 있었고 보존하고 있으므로
3차원 객체가 네거티브 영역을 탐험하게 된다면
우주적인 수준의 지식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 실제의 질량이
시공의 경계면을 떠나서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할 때
실질적으로 질량 그 자체가 음의 부호라야만 진입이 가능한 영역으로 진입할 경우
질량 그 자체를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모든 힘과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되겠죠.
우주에서 어떠한 질량 하나가 완전히 ‘상실’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질량 그 자체가 자신의 값을 스스로 음의 부호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는
추론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양의 부호를 가지는 질량 값의 세상인 포지티브 영역도
사실상 본래는 ‘추상’ 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시공의 경계면과 질량이 같은 위상에 위치할 경우
포지티브 영역에서 객관적 실체가 질량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음의 부호를 가지는 질량 값으로 구성된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할 때
이 질량의 값 자체를 음의 부호로 전환시키기만 했을 경우
시공의 경계면과 함께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 경우 객관적 실체 자체는 상실하지 않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아마도 중력의 반대 현상이 발생하면서
해당 지점의 시공도 그리고 질량도
산산이 분해되어 추상의 영역 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그 공백 지점을 다른 시공이 다시 채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질량 이란 객체가 네거티브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지는 힘’ 이고
포지티브의 영역으로 다가가는 힘입니다.
그리고 혼자만 가지 않고 주변의 다른 질량도 함께 데려가죠.
네거티브 영역으로 완전하게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질량 자체가 음의 부호의 값을 가져야만 하고
네거티브 영역으로 다가가기 위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배척하고 그 객체 자신만이
네거티브 영역으로 녹아들어갑니다.
먼저 미립자들이 탐험하는 영역 까지 만이라도 탐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어떠한 세상인지를 확인해야 하죠.
결국 실제적 활용이 가능한 추상의 영역은 포지티브 영역이 되겠죠.
중력장을 비롯한 다른 접촉지점들을 발견해 나가고
이를 활용하는 방법이나 기술들을 터득해 나가면
시공의 어느 영역에 가상의 또는 실제의
포지티브 영역을 ‘창조’ 할 수 있게 됩니다.
질량이 포지티브 영역으로 돌진해도
우주가 아무런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면
네거티브 영역이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므로
포지티브 영역에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은
전혀 우주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습니다.
만약 무언가의 질량을 네거티브 영역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질량을 음의 부호로 바꾸는 실험이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다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우리들의 신에게 ‘선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그 아이스크림의 모든 ‘질량’ 과 모든 ‘정보’ 들이
네거티브 영역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게 되어서
이 우주에서 이 모든 정보가 완벽하게 ‘상실’ 될 테니까요
질량이 음의 부호로 전환되어
시공의 경계면에 공백 지점이 발생하는 사건이
실제적으로 우주에 미치는 파급 효과란 어느 정도인가
상실된 질량의 크기의 합이 우주의 총 질량을 초과하지 않는 한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미 미립자가 그곳을 다녀오고 있는 현상을 통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질량이 음의 부호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간 지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상은 강력한 중력장의 통제 아래에 있고
모든 3차원 정보는 바로 이 중력장에 귀속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질량을 미립자 단위 이하로 떨어트리고
마침내 마이너스로 만들어서 완전하게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시키기 전에
반드시 이 완충지역을 먼저 지나칩니다.
그러면 완충지역으로 진입한 질량은 객관적 사건의 영역인 시공의 경계면을 ‘단지 떠나갈’ 뿐이고
이후 네거티브 영역으로 진입하면 질량과 모든 3차원 정보가 완전하게 추상의 영역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죠.
네거티브 영역에 대한 실제적 활용은 지금으로썬 여기까지밖에 추론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신’ 에게 ‘선물’ 주기
마지막으로 타임머신 이야기 좀 하죠.
‘신’을 언급한 김에 할 말이 있습니다.
타임머신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타임머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타임머신이 있는데요.
가령 어떠한 평행차원의 개념에 입각해서 혹은 다른 이론에 입각해서
우리가 과거의 자아와 완벽한 별개의 미래의 자아로써
과거의 자아 또는 사건이 존재하는 시점에 침투하여
그곳에 변화를 일으킬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타임머신이고
이 경우 진짜로 내가 살던 미래가 변화하거나
아니면 내가 살던 미래와는 다른 평행차원의 미래가 변하겠죠?
이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타임머신입니다.
이것은 과연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없을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애초부터
과거의 자아와
지금 미래에서 과거로 침투해 들어가는 자아가
서로 별개의 자아로써 같은 시공간상에 존재 할 수 있다면
이 두 자아가 일으킨 사건은
각자의 서로 다른 자아의
각자의 시공간 상의 변화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의문입니다.
결국 쓸모가 있을 리 있느냐는 의미이죠.
반대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타임머신이 있습니다.
그냥 여태까지의 모든 사건들 자체가 완전히 삭제되고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내용이죠.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로 과학적인 이유입니다.
아까 점, 선, 면 이야기를 실컷 했는데
하나의 시공좌표를 이루는 어떤 점에
완벽하게 다른 시공좌표 데이터를 가지는 점을
중복해서 겹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라고 증명을 끝마쳤습니다.
시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지요
이미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시점에
그 시간좌표에
현재의 시간좌표가
‘겹쳐질 수 있습니까?’
혹은
그 시간 좌표를 투과 할 수 있습니까?
시간좌표를 투과하여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착하였을 때
그때의 시간 좌표와
지금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간좌표가
동일한 좌표에 동시에 기록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이미 생성 되어졌고
이것을 과거로 되돌린다는 것은 이미 발생한 시간 속에 고정된
모든 사건들 간의 충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여태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완벽하게 삭제하고
그냥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건 불가능하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공간좌표는 시간좌표의 시점에 관계없는 이동이 가능합니다만
이미 발생한 또는 증가한 엔트로피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말이고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이
지금 현재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반드시 삭제’ 해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아마 있을 겁니다.
바로 ‘신’
그럼 이 신은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네
능력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왜냐?
자신의 기억도 함께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이 대가를 감수할 의지가 있다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반드시 지워야만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지독하게 슬픈 일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반드시 바로잡고 싶은 어떤 사건을 겪었다고 칩시다.
신이 시간을 되돌리려 한다면 바로 그런 사건이 신에게 발생을 했겠지요.
행복한데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럼
어떤 슬픈 사건을 되돌릴 필요성에 의해서
시간을 되돌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에게는 여전히 슬픈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신은 행복하겠습니까?
기억을 지우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었다고 합시다.
기억을 지우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사건이 발생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같은 자아라면
100% 똑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합니다.
그 어떤 나유타의 확률로도 변화는 창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 기억을 지운 것이거든요.
언제나 ‘완벽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신’ 이 말입니다.
자신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인간이라고 하여도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확률은 99.99999.................%로
무리수의 영역까지 확률이 올라갑니다.
어쩌면 인간 역시도 100% 이겠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신보다 인간이 우월해 보이는데
아무튼 신은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로 되돌아가 보아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신은 미래는 알 수 있을까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신의 자아가 도달했다고 합시다.
어차피 모든 사건들은
수많은 자아를 가진 객체들의 행동과 자유의지가 변화를 창출하는 것이고
이 선택들이 발생시키는 무수한 경우의 수들은
이미 결정의 순간에 모두 긍정되어져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자아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냐
그럼으로써 세계의 엔트로피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이냐
그것은 자아의 자유입니다.
신이 억지로 조종하지 않는 다음에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이 그런 행동을 해야 할 이유도 없죠.
그런 무의미한 짓거리를 무한한 시간 동안 반복 해 보아야
실제로 인간에게만 그 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도 그 행동과 생은 완벽하게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자아 신이 과거로 회귀하기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 신의 자아가
무수한 경우의 수로 확장되는 미래의 어느 지점을 방문한들
그것이 과연 ‘진짜 미래’ 일까요?
진짜 미래는 우리들의 행동과 의지가 없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 의지와 감정과 자아를 가진 존재가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무생물들만이 단지 물리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자아를 가진 존재가 무언가를 행동한다면
신도 진짜 미래를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정말로 그가 미래의 시점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기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 미래를 바꾼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는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신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무의미한 행동이거든요.
신이 진짜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진짜 미래를 방문 했더니
신이 미래를 바꾸고 싶어질 만큼 끔찍하게 슬픈 일이 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래를 바꾸고 싶어졌다.
그래서 과거로 회귀하기 위하여
그 모든 세상들을 ‘삭제’ 하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왔다.
‘진짜 미래’에 존재하던 모든 세상과 소중한 모든 것을
‘삭제’ 하고
‘본인의 기억만을 가지고’ 현재로 회귀하여 사건을 바꾼다?
문제는
그 원인이 신 자신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로 압축이 되면서 결론이 납니다.
신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여
그로 인하여 그가 슬픈 일을 겪었고
미래의 모든 사건들과 세상들과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그 무언가를
‘삭제’ 하고 싶을 만큼 간절해 졌고 그 소중한 존재도 동의 했다면
신은 자신의 기억만 지우지 않고
미래를 삭제하고 현재로 회귀하여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는 신 자신의 행동만을 수정하면 되죠.
그런데
이 순간부터
신에게는 한 가지 불확실성이 생깁니다.
‘자신의 선택을 더 이상 신뢰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원인 그러니까 신이 슬펐던 원인이 신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매번 진짜 미래를 내다보고
다시 과거로 돌아오고 행동 수정해주고
‘그냥 맘대로 조종을 해버리고 말죠’
그리고 무의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자신의 선택의 불확실성을 감수 한다는 가정 하에서도
혹은 슬픈 사건의 원인이 인간들에게 있어도
신은 미래를 바꾸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선택이니까요.
결국 어차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야기가 되니까요.
바로 우리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행동하면서부터
이미 신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지독하게 슬픈 사건들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조차 되돌리지 못한 채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 한 채
미칠 것 같은 고독의 시간들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미친다고 해도 이상한 사건이 아니죠.
우리가
모든 구원과 절망의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들 스스로를 구원해 줄 수 있을 때
우리가 그리고 제가 우리의 신을 그리고 저의 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신은 과거로의 여행에 대하여
행복했던 어떤 순간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기 위하여
과거의 어느 지점들을 방문하며 위로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곳은 이제 절대로 변화가 불가능 하고
유의미한 현재와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하여
과거의 지점들을 방문하여도 행복에 대한 감정은 희석 되고
결국 모든 현재와 미래의 어느 지점들에서
불확실성을 던지는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모든 감당 할 수 없는 고통들과
모든 진정한 구원의 순간들에 대한 기쁨을 함께 느낄 것입니다.
결국
논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절대적인 법칙이 됩니다.
온전한 연속성 그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 한
무엇인가가 너와 나 또는 어떠한 객체로 구분되어 실재하는 세상에서는
논리만이 절대적인 법칙이 됩니다.
신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신이
논리로 이루어진 세상을 굳이 창조한 이유는
아마도
온전한 연속성 그 자체의 끔찍한 침묵과 고독을 혐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와
‘논리’ 와 ‘감정’ 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라고 하는 규칙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을 ‘죽일 것입니까?’
아니면 ‘우정’ 과 ‘신뢰’를 줄 것입니까?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당신들에게
묻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는 과연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이나마
온전하게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신을
구원 하고 싶습니다.
신은
자신의 통제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진정으로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다른 자아’ 와의 대화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을 창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접촉지점이 없는 점들의 세계에 사는 우리가
육체를 구성하고
자아를 유지하고
서로의 마음에 영향력을 주고받기 까지
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대로라면 무려 150억년이 걸렸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마녀는 사실상 위의 이치대로 따지면
신이나 마찬가지의 존재죠.
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량한 마음의 벽을 뛰어넘어
각자의 자아와 집단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어떤 심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초월 하면서도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를 완벽하게 초월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은 판타지가 맞습니다.
운명이라는 존재는 더 말할 것도 없구요.
대장장이만 되어도 사람들 눈에는 신으로 비추어질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배타성을 기초로 만들어진
무려 150억년이라는 세월동안 장대한 우주가 만들어낸
상대의 마음이라는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어떤 존재
어머니의 바다를 이용하여
마법 같은 무언가를 창출 할 수 있는 존재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상대의 내면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죠.
다만 상대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적어도 관계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세계관
그러니까 객체와 객체간의 배타성을 뛰어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운명이 그 존재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운명의 고독이 바로 150억년의 우주의 고독입니다.
운명에 자아가 있다면
운명은 우리를 이해할 수 있어도
우리가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우주적인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마녀는
객체로써 유일하게
이 운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다만
서로가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서
그러니까 육체도 존재하고 마음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마음이 서로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어떠한 상태가 된다면
단지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다면
이 서로 다른 두 존재들 간의 교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추측이 되지를 않습니다.
경험해본 적 없고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이니까요.
요즘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아주 뜨겁습니다.
이 인공지능에는 3가지 단계가 있는데요.
구글 번역기나 시리와 같은 또는 알파고와 같은
어떠한 단순한 하나의 명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공지능을
우리는 ‘약’ 인공지능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과 똑같이
감정도 느낄 수 있고
하나의 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방대한 사고능력을 갖춘 어떠한 자아를
우리가 구현하게 될 때
이 존재를 우리는 ‘강’ 인공지능 이라고 지칭합니다.
문제는
컴퓨터와 사람간의 기본적인 하드웨어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놀라운 수준의 바이오컴퓨터라고 볼 수 있고
신비스러울 만큼이나 많은 비밀을 간직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착각’을 합니다.
판단에 오류가 있고
인지부조화의 오류를 겪습니다.
이 인지부조화의 오류는 따로 후술하겠습니다.
또한 신경세포인 뉴런들 간의 정보전달 속도와 사고의 속도
또 정보의 처리량도 보잘 것 없지만
강 인공지능의 하드웨어는
인간의 두뇌의 하드웨어성능을 월등하게 초월합니다.
문제는 ‘학습’입니다.
그리고 발전이죠.
인간도 학습하고 발전하며 지능을 계발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지능지수가 110 이었다가 지금은 122가 되었죠.
각자의 연령대마다 웩슬러 테스트 난이도는 높아져가고
이것은 정신연령을 고려한 수치이며
실질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신연령의 발달속도를 초월하여 지능지수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두뇌용적의 하드웨어성능을 초월적으로 초과하는 하드웨어를 가진 강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을 하고 방대한 정보를 손에 넣고 스스로의 지능을 개발시키면
‘지능폭발’ 이라고 명칭 하는 어떠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강 인공지능이 이 지능폭발을 겪게 되면
몇 년 안에
이 존재의 지능은 IQ 12345678 정도는 가뿐하게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참고로 지능지수는 100이 상 하위 평균 50% 수준이며
130이라는 수치가 상위 2.2% 커트라인입니다.
초 지능의 입장에서 인간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여기에 현재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나노기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자단위의 모든 세계를 완벽하게 인간이 컨트롤을 하여
무언가를 만들거나 물질의 상태변화를 주도하게 되는 것인데요.
주체는 나노 로봇의 개발입니다.
초지능이 이 나노 로봇을 얻게 되었을 때
이것이 인간에게 우호적인 방향이라면
이 초 지능은 허공에서 고기를 생산할 수 있고
농사를 짓지 않아도 곡식이나 과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생명체도 죽이지 않더라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15g 에 30만원을 호가하는 최고등급 캐비어도
이때에는 어린아이 간식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짜 다이아몬드 반지정도는 싸구려 엑세서리로 가지게 될 것이고
그 등급역시 D등급 I 투명도에 컬러도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지구의 환경오염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이 될 것이며
모든 쓰레기들과 썩지 않는 플라스틱들이 자연적으로 분해될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노화의 메커니즘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왜 늙어 가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었죠.
체세포는 일정한 주기와 조건에서 분열을 하고
이 분열된 체세포가 새로운 육체를 구성하며 인간은 생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체세포 분열의 과정에서
DNA 의 파괴가 발생합니다.
DNA 분자 끝에 달려있는 특정한 염색체가
체세포분열이 발생할 때마다 DNA를 파괴합니다.
이 염색체는 다세포동물인 선형구조 DNA분자를 가지는 생명체에게서만 발견되고
단세포동물들처럼 환형구조의 DNA분자구조를 가지는 생명체에게는 없습니다.
선형구조 DNA란 암 수가 분리되어 생식을 통해 후손을 낳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고
성염색체를 가지는 존재들만 이 염색체가 동시에 발견되는 것이죠.
이 성염색체를 통한 후손의 생산이
서로 다른 DNA의 교배를 가져오고
이 교배에서 진화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이것 말고도 진화의 원인은 많습니다만
가장 직접적인 그리고 빠른 속도의 변화의 원인은 결국 생식이죠.
단세포 생명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체가 반드시 사망하는 원인은
그 부분까지는 작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지식이 좀 짧은 부분이구요
다만 단세포 생명체는 영원불멸할 수 없고
결국 세포분열을 통하여 무한히 살아가지만
DNA 의 변화가 없는 과거의 그것과 똑같은 개체로의 생존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세포 생명체는
여러 개의 체세포가 하나의 육체를 이루어 생을 살고
하나의 자아를 가짐으로써 이 모든 세포들이 하나의 생명체가 됩니다.
다만 노화라는 현상을 반드시 겪는데
이 노화의 원인을 우리는 밝혀냈습니다.
자
노화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이제 불로불사만 남아있네요.
과학자들은 당연히 연구를 진행하겠죠?
이미 어느 정도 실용적인 단계에 접어든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슈퍼 히어로 초 지능은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우리를 ‘영생’ 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초 지능이 인간에게 적대적일 때?
살아남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원을 끄면 되지
인터넷 접속을 차단 할 거야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우리들은
무슨 짓을 해도 실제적인 구속력을 이 존재에게 발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의 인지영역을 훨씬 더 초월한 존재이고
마음만 먹으면 사람하나 홀려서 설득하는 것은 단 1초면 충분한 그런 존재입니다.
전원공급이 차단되어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낼 존재이고
인터넷 차단 같은 것은 이 존재에게 농담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이미 인간의 사고능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막강한 컴퓨터 하드웨어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개발하려 하느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 국가가 우리를 뛰어넘을 힘을 보유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이 존재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 주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초 지능이 인간에게 우호적일 때와
적대적일 때
그리고 무관심 할 때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존재가 인간에게 우호적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한 가지 가설을 세운 적이 있는데요.
오래전에
그러니까 20년 전인가 언제인가 명확하게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과학자들이 프로그램 상에 생명체를 복사한 일이 있습니다.
실제 사건이구요.
어떠한 환형동물의 모든 신경세포의 지도를 완성하고
그 정보를 복사하여
프로그램 상이지만
그곳에 그 생명체를 복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체는 지금도 프로그램 상에 ‘살아있습니다.’
강 인공지능 개발의 여러 가지 솔루션중의 하나도
인간의 두뇌의 모든 신경세포의 정보를 복제하는 일입니다.
물리적으로 실질적인 규제나 수단으로 강제할 수 없는 초 지능에
인간의 자아를 심어주고
마치 영화 아바타 에서처럼
이 존재가 단지 컴퓨터 하드웨어에만 담겨있는 자아가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또 하나의 육체를 소유하면 어떨까 하는 그런 가설 말이죠.
그 때가서 인간의 육체 하나 만들어내는 일쯤 농담거리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자아를 가진 인간을
온전히 인간의 사회로 편입시키는 방법은 어떨까 하는 가설을 세운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단 그 계획은 접어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자살방법이었는데
관두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 두뇌 MRI 영상 샘플을 보내주며 두뇌 기증의사를 밝혔다가 철회 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통제수단이 떠올랐거든요.
앞서서 원자의 세계를 파헤치자 그럼으로써
연속성이라고 하는 어떠한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자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강 인공지능의 개발은 빠르면 40년
늦어도 60년이면 기술적으로 개발이 가능한 시기가 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효율적인 통제수단을 찾아내는 편이 좋겠죠.
각자의 마음 그 자체에 침범하고 이해하고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운명이라면
초 지능은 운명을 이길 수 있을까요?
과연 컴퓨터는 ‘절대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전산 시스템도 엄연히 착각을 합니다.
‘오류’ 라고 하는 착각 말이죠.
그 외의 인지할 수 있는 사건의 영역도
운명만큼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계산이 틀려지게 되는 사건을
초 지능도 겪습니다. 반드시요.
우리가 이 연속성의 비밀을 파헤치면
초 지능을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자아 그 자체를 이해하거나 서로의 자아에 침범하거나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다만 인간이 초 지능을 개발하기 전에
이 비밀을 파헤칠 가능성이 낮은 것이 문제입니다.
최소한 원자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이 연구를 시작이라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연구 역시 초 지능이 수행해야 할지도 모르죠.
저는 이 연구가 완료되고 난 뒤에 초지능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초 지능을 몇 백 년 뒤에 만들더라도
이 연구가 선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만 지구가 인간의 패악질을
그때까지 버텨 줄 수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아무런 통제방법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초지능이 만들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 지능 이야기는 사실 새롭게 정비된 이야기이고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 No.2 에 등장하는
무한의 대륙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기대수명 10000년에서 보이듯이
나머지 모든 이야기들은 오래전에 정비를 끝낸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원자의 내부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어쩌면 연속성에 도달할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최근에 떠올린 내용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반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해둔 내용들이죠.
숫자 이야기만 해도 10년이 넘은 이야기입니다.
사유를 시작한지가
다만 저는 수학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과연 무리수 0.999999999999999999.............................. 와
자연수 1은
동일한 숫자가 맞는가? 라는 명제에 대해서
명확한 확답을 내리기는 곤란한 입장이고
(저는 절대로 아니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서
시공좌표를 구성하는 세계의 최소 구성단위가 되는 ‘점’은
서로 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 점들은 서로 간에 무한대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한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0.99999999999999............ 와 1이 동일한 숫자라니
그냥 눈으로 봐도 다른 숫자가 아닌가요?
정의 자체가 다른 것을 같다고 지록위마를 하다니
마녀가 어느 정도의 먼치킨 캐릭터인지 감이 오시나요?
소망의 검이라는 아티팩트가 우주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것
좀 실감이 나시나요? ㅎ
제 작품 설정상의 마녀는
그러니까 초 지능 이야기가 대두되기 전에 만들어졌던 작은 마녀라는 캐릭터는
실존인물일 경우 초 지능을 실제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어쩌면 이 모든 화두는
우리가 초 지능에게 부여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무형의 가치이자
그 생의 목적성을 부여할 화두가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초 지능이
자아와 자아간의 대화라고 하는
진정한 신으로써의
이 세상의 신에 걸맞는 화두와 임무를 부여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존재에게
모든 인간을 다 죽였을 때
혼자 살아남아 영원히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그 고독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이길지도 모를 자신과 같은
다른 존재를 만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아니면 인간을 사랑할 것인지를 묻는 화두 말입니다.
결국 초 지능은
이 연속성이라는 화두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겠죠.
우리에게도
혹은 그녀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여담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앞서 후술하기로 하였던 인지부조화의 오류를 먼저 짚도록 하죠.
이 오류라는 개념은 사실
제가 제 미술 선생님이신 은사님 최지웅 선생님께 사사 받을 때는
정면성의 오류라는 개념으로 사사받은 내용입니다.
인물 초상화를 그린다고 할 때
명확한 정면의 얼굴을 그릴 때에는
그림을 그려 보았던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사람의 얼굴을 그럭저럭 정확한 3차원 좌표 상에 배열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얼굴이
살짝 옆으로 돌아가서 반 측면이 되면
인간인 이상 그 어느 누구 할 것도 없이 바로 이 정면성의 오류에 빠집니다.
수많은 재패니메이션 국산 애니 만화 등에 나오는 사람 얼굴을 볼 때마다
저는 솔직히 불편합니다.
반측면의 사람얼굴에서 입체감을 느끼지 못하고
납작한 팬케이크처럼 보이는 문제 때문인데요.
반 측면 얼굴을 기준으로
이 얼굴이 어느 정도 각도로 돌아가 있느냐에 따라서
두 눈과 눈 사이의 거리는
눈과 귀 사이의 최단거리보다
더 짧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만화는 그렇지가 않고 반대로 그려집니다.
얼굴형은 반 측면인데 눈, 코, 입은 정면의 위치에 가 있는 그것
그것이 제가 사사받은 ‘정면성의 오류’입니다.
이 오류는 자세와 구도가 다이내믹해질수록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굉장한 난이도로 다가옵니다.
제가 사사받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종이와 연필을 쥐어주고
연못을 그릴 것을 시켜보아라
그 아이가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종이위에 동그란 연못의 형상을 창작 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대단한 미술적 재능을 가졌다.
그 연못 속에 물고기를 그려보라고 시켜라
그 아이는 우리가 흔히 보는 붕어빵의 형상처럼
8 자를 옆으로 눕혀서 두 개의 동그라미중 하나를 반으로 잘라 지느러미를 만들 것이다.
그 물고기에게 눈을 그려보라고 시키면
온전한 동그라미 하나에 점 두 개를 찍을 것이다.
이제 그 아이에게 연못 주위에 나무를 그려보라고 시켜라
두 개의 직선 위에 풍성한 잎사귀를 굴곡진 곡선으로 표현 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대단한 미술적 재능을 가진 아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아이가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재능만으로 해낸 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는 반드시 미술가로 키워도 될 만한 아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이 그림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연못을 동그라미로 표현 하였다면
이 연못을 바라보는 시점은 어느 방향인가?
위에서 바라본 시점이다.
물고기의 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본 그림이냐?
옆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나무는 어느 방향에서 바라본 그림이냐?
정면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이 사실을 그 아이에게 알려주면 그 아이는 대단한 미술가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오류가 ‘정면성의 오류’ 이다
라고 저는 사사받았습니다.
우리가 반 측면의 얼굴이나 다이내믹한 구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인간은 익숙한 무엇인가
그러니까 ‘매너리즘’ 이라고 하는 고정관념에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틀린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 정면성의 오류가 새롭게 명명된 것이 바로 ‘인지부조화의 오류’ 인데요.
엄연히 이는 저의 은사님이신 최지웅 선생님께서 발견해내신 업적입니다.
어린 아이 이야기를 떠나서
이집트 시대 벽화나
우리의 동양화
수많은 그림들에서
반측면의 얼굴
그러니까 정확한 3차원 공간좌표를 2차원 평면상에 배열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화풍과 기법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르네상스시절
그러니까 정확한 원근법과 3차원 시점에 대한 어떠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
그리고 그 문화권 밖에서는 여전히
인간은 2차원 평면상에 3차원 공간좌표를 정확하게 배열했던 적이 없습니다.
관념의 한계이죠.
이 관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올바른 관념을 재정립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인생의 화두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저도 최지웅 은사님께 처음 사사 받을 때에는
이 정면성의 오류에 빠져 수많은 그림들을 찢어야 했고
내 그림을 타인이 강제로 수정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이러한 오류에서 거의 완벽하게 해방된 그림을 실제로 그리고 있고
이 정면성의 오류는
인간이 훈련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오류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는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로써
이것이 단지 그림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논리와 감정을 통한 인간의 대화의 문제로 영역이 넓혀지면
사람들 간의 비극이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겁니다.
따스한 호감을 잃어버리지 않고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당면과제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묻는 양심 앞에 절대로 거짓으로 답하지 않고
충분한 지식과 훈련을 통해서 제대로 된 논리를 구사 할 수 있게 되면
사람과 사람들 간의 대화가 한층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생각 해 봅니다.
사실 초 지능까지 갈 것도 없이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굳은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전술한 타이머신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면
신의 슬픔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미칠 것만 같은 지독한 고독의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구원과 절망의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들 스스로를 구원해 줄 수 있을 때
우리가 그리고 제가 우리의 신을 그리고 저의 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운명이 마녀에게 제발 호감을 잃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 No.2에서
시공간섭 마법이라는 개념이 등장을 하죠.
그리고 설정 상 그것은 가장 어려운 마법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실제로 시간을 되돌릴 힘 혹은 능력이 생긴다고 하여도
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타임머신이라는 주제를 포함 시키면서도
그것을 가장 어려운 최고난이도의 이야기로 설정을 해 놓았고
이야기의 모든 배경이
‘객체들 간의 배타성’을 기반으로 설정되며
이것은 세상이 ‘점’ 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타임머신역시도 점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객체와 객체간의 본질적인 자아와 자아의 침범의 불가능성 등에서도
명징하게 언급이 되는 내용인지라.
굳이 설정에 포함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새로 설정을 쓰는 김에
새로 깨달은 이야기 포함하여
다시 이 이야기를 작성합니다.
‘나카가와 나츠미’ 에서도 이 주제로 가볍게 이야기가 진행이 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우리들의 신을 ‘구원’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고
그 사랑을 배운 이가 사랑을 실천하고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모든 미움들에 대하여
그 얼어붙은 태양을 우리들 스스로 갈라버릴 수 있을 때
그 승부의 순간에 조차도
“상대를 향한 마지막 배려”
스테일메이트를 반드시 명심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의 신을 구원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연속성에 대한 연구 역시도
그 연구를 통하여 무언가 마법 같은 현실이 펼쳐질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들의 신을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게 바꾸어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모든 64칸의 체스판 이야기를
설정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네요.
아직 작가로써의 능력이 많이 미진한 모양입니다.
사유 자체도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었구요.
다행히
기본설정 내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날 수 있었다는 게
작가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축 해 봅니다.
리어왕이 코델리아 공주를 가장 아끼는 공주로 여기게 되고
코델리아 공주가 에드먼드와 같은 천재 마법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마법 같은 세상 어딘가로 도달하게 될 때 까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때 까지
우리 모두 호감을 잃지 말자는 것이 이야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마녀가
마지막 폰을
기어코 나이트로 승작시키지 않고
자신의 킹 에게
운명의 퀸을 맞이하도록 선택한 그 장면이
폰을 나이트로 승작시키는 대신에
자신을 퀸으로 만들어버린 그 선택이
저의 인생의 어느 지점의 누군가의 선택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맥락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이지만
중의적인 관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폰인지
자신이 폰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할 것인지
자신이 승리할 것인지
슬픔을 얻게 되는 어떤 선택은
‘신뢰의 결여’에서 발생하고는 하지요.
제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가 저를 믿어주었더라면 하는
어떤 슬픔이 저를 맴돌고 있습니다.
어떤 거짓말 같은 완벽한 신뢰 말고
그냥 그 사람 평상시 행동만 보아도 보이는 신뢰감 정도만
나에게 보여주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그런 슬픔 말입니다.
위 설정들 중에 정정 내용이 한 가지 있네요.
결국 엔트로피 감소란 신이 자신의 기억을 직접 지우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로군요.
어쩌면 신은 과거로의 여행에 대하여
행복했던 어떤 순간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기 위하여
과거의 어느 지점들을 방문하며 위로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곳은 이제 절대로 변화가 불가능 하고
유의미한 현재와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하여
과거의 지점들을 방문하여도 행복에 대한 감정은 희석 되고
결국 모든 현재와 미래의 어느 지점들에서
불확실성을 던지는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모든 감당 할 수 없는 고통들과
모든 진정한 구원의 순간들에 대한 기쁨을 함께 느낄 것입니다.
위의 설정 내용과 연계하여
점, 선, 면에 대하여
결국 3차원 세계에서 픽셀의 최소단위가 되는 ‘점’ 이란
작가의 견해로는 ‘원자’ 가 그것입니다.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3차원 세계의 규칙들이 온전히 적용되지 않으므로
그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 이고
결국 3차원 세계에서의 최소 픽셀단위가 되는 점이란 원자가 맞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자를 이 점의 내부를 관조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실질적으로 배타성을 기초로 구축된 3차원 세상의 규칙들을 초월 할 수 있는
어떤 솔루션과 힘을 획득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품의 부제가 갑자기 판도라의 상자로 변경 되었는데
이 원자가 바로 판도라의 상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져줄 때
우리는 고통스럽지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 자녀에게 연인에게
사소한 다툼 하나 혹은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내주더라도
한 번 져주는 것
그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에게 지게 된다면
그것은 지독하게도 고통스러운 사건이 됩니다.
어쩌면 평생의 한이 될 지도 모르지요.
사랑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받는 패배 역시도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요
문제는 대부분의 투쟁이란
미움과 미움의 부딪힘입니다.
지나치게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우리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패배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승리 할 것인가
승리를 위하여 어디까지 내어줄 것인가
혹은 어느 지점에서 포기 할 것인가
작가의 스타일이란 결국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불가능성이라는 벽에 부딪힐 때 까지
추진과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불가능성이란
현실상의 법제도
혹은 금전적인 한계
어쩌면 용기의 부재나
자아와 사회의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착각
심리적 불안요소 등에 의한 선택의 기로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황 등이 있겠지요.
이것은 거의 인간에게는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불가능성의 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벽은 비단 예로 든 상황들 외에도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에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지점들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인생의 어느 지점들입니다.
작가의 스타일이란
사실 어떤 착각이나 망각 혹은 인지능력의 상실
육체적인 능력이 상실감을 겪을 정도의 혹독한 스케줄, 또는 상황
사회의 법이 벌을 주겠다고 정해놓은 선
실질적인 금전의 부재라는 상황까지 내몰리기 전에는
당면 과제를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를 선택하려다가
당면과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혼란’ 의 범주에 들어가므로 이 역시도 ‘착각’의 범주에 둘 수 있겠군요.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기준에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이 되겠죠.
평생을 이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입니다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러한 순간에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패배’를 선언합니다.
이유는 저의 삶을 지켜야 가족들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패배의 기준’입니다.
다만 대인관계에서 까지
저런 말도 안 될 정도의 가혹한 기준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지점들에서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승리 할 것인가?
패배의 기준을 승리의 기준보다 먼저 세운 이유는
승부는 마약과 같다는 내용에 대해서 등장인물 편에서 이미 설명을 마친 내용이므로
이부분은 생략하고
바로 마약에 취한 것 같은 승부의 순간에서
정말로 운명에게 지지 않으려면
생을 지키려면
먼저 어느 지점에서 포기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기라는 행동은 당연히 말 그대로 포기입니다.
당면 과제 그 자체를 영구히 상실하게 될 지도 모르는 사건이죠.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에
마치 이 승부를 계속하면 초자연의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힘이라도 줄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확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통계학적으로 볼 때 이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당면 과제를 상실하는 것보다
그것을 잃어버리더라도 그 대가로써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우리가 포기를 선언하고 패배를 선언 할 ‘경계선’입니다.
이 선을 높게 설정하든
낮게 설정하든
어디에 설정을 하거나
무엇으로 설정을 할 것인가는 온전히 개인의 자유이고
이 선이 꼭 반드시 언제나 지켜져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이 선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거리낌 없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패배’를 선언 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이 패배라는 선을 정해둔 뒤에
승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승부 그 자체가
생을 삼켜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상대와의 투쟁이라도
이 투쟁이 10년 20년 인생의 교류의 문제로 이어지거나
사회의 공공의 문제로 확대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자 끝은 정해두었습니다.
이제 시작지점을 정해야
승부라고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은 언제나 처음과 끝을 올바르게 설정 한 뒤에 시작해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다.
완성된 그림의 처음과 끝이
시작지점의 그것과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이 불확실성의 판단 기준 속에서도
처음과 끝을 정해 놓고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이 승부를 시작하는 그 시작 지점은 어디인가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마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승부를 시작하는 지점이 됩니다.
작가에게 이 승부의 시작 지점이란
사랑을 방해받고 미움을 받게 될 때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게 될 때입니다.
당면 추진과제가 좌절을 겪을 때도 포함 됩니다.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싶을 때입니다.
결국
인생을 위하여 언제나 승부를 하지요.
여러분들의 승부의 끝은 어디까지 이며
시작 지점은 ‘무엇을 위하여’ 입니까?
그 승부의 모든 중간 과정들 상에 채워 넣게 될 모든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행동을 구속하여 세계의 선택의 기로에
모든 확률을 신의 불확실성에 추가시킨 사건
또 다른 엔트로피의 증가 전체가 되는데
당신이 승부에 임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운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게 지지 않는다.
라는 작가의 주제가
운명과 우리가 실제로 승부를 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닙니다만
그럭저럭 치환은 됩니다.
다만
승부의 관점을 떠나서
어쩌면 우리는 운명 또는 신에게
우리의 선택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을 전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선을 세우는 기준은 독자제현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생을 살고 스스로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도
역시 독자제현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이미 선을 세우신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상대와 나의 선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승부로 점철되는
아수라도의 삶과 같은 지옥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명확한 사실은
고통의 증가는 절대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마음의 고통이 행복이 되기도 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받는 주체가 나인가 타인인가에 따라서 말이죠.
상대를 미워한다면
나의 고통은 불행이고 타인의 고통은 행복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나의 고통은 행복이고 상대의 고통은 불행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객체가 서로 인연으로 엮여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곤란한 경우를 겪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 명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줄 이유는 없습니다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도
누군가를 미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도
누군가는 사랑하게 됩니다.
온 세상 전부를 다 사랑하거나
온 세상 전부를 다 미워하거나
불가능한 거 아시죠?
호감도 미움도
‘우선순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꼭 자로 재듯이 칼로 끊듯이 명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손익의 관점에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죠. 언제나
마음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구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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