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나카가와 나츠미 那賀川 (쓰루기야마 산, 시코쿠-四國-에 있는 산에서 발원하여
-徳島県- 도쿠시마현 남동부를 흐르는 일본 관동지방의 강 이름 - 일본의 성씨중 하나)
夏美 (아름다운 여름)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그 일본 여자아이는
새로 사귄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미국 중부지방 미주리 주에 위치한 세인트 루이스시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명품 백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던 오리건 주 태생의 사라가 미시시피 강변에 서서 포즈를 잡고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캠코더로 추억을 촬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여자아이들만 가득 있었다.
나츠미는 자신의 과거를 잠시 회상해 보았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청교도적인 정서로 가득한 정숙한 여자아이였고,
때문에 성에 대해 개방적인 일본 사회 속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여자아이였다.
중학교 동창들이 원조교제로 용돈을 벌고, 인터넷에 접속할 때 간혹 보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일본에서는 25일이 지난 케이크는 아무도 먹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25살이 넘도록 처녀인 ‘여성’을 조롱한다.)이라는 은어나
섣달그뭄 소바(크리스마스케이크와 마찬가지로 12월 30일에 일본에서 즐겨먹는 소바에 빗댄 은어로 30살까지 처녀인 여성을 비웃는 은어이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내지는‘국보’등의 은어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차이점은 ‘경멸’의 어조가 없고 남녀 모두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등의 은어들을 접할 때마다. 은근히 한숨을 내 쉬며 다른 아이들이 자유로운 혹은 문란함에 가까운 청소년기를 보내며 인생을 즐기려고 할 때
자신의 인생의 후반부를 위하여 공부를 하고 사생활을 엄격하게 단속하려 애쓰는 약간 완고한 구석이 있는 여성이었다.
결국 그 해의 여름휴가에 함께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같은 일본인조차도 아닌
서로 왕래를 가져본 적이 거의 없던 -미국에 유학을 와서 겨우 만나게 된 외국인 친구들뿐이었고 그중에 남자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조용한 강변에서 두 여자아이들이 재미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
불투명에 가까운 초록빛 수면이 잠깐 일렁인다 싶은 순간 몸길이가 거의 7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악어가
갑자기 물에서 튀어나와 기습적으로 사라를 덮쳐서 입에 물고는 다리를 버둥거리는 그녀와 함께 마찬가지로 언제나 불투명한,
언제나 녹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초록빛깔의 엽록소로 가득한 수면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고 그것은 나츠미도 마찬가지였다.
더욱 않좋은 것은 그 장면을 촬영한 당사자가 바로 나츠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어떻게 사람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곤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경찰과 사회 기관들에 연락을 취해서 그 악어를 찾아내고 사냥하여 뱃속에 들어있을,
위산에 반쯤 녹아 옷가지정도나 남아있을게 분명한 그녀의 시신이라도 찾아 주는 것뿐이었다.
무심한 초록빛깔 수면 위에는 그녀가 즐겨 수집하던 명품백중 하나가 동동 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백은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백이었다.
하지만 방금 벌어진 그 끔찍한 사고의 여파로 사람들은 그 백 근처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단지 나츠미의 손에 들린 디지털 캠코더만이 그 백의 마지막 모습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창백한 표정의 나츠미는 그 때 까지만 해도 그다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단지 급작스러운 끔찍한 사건이 남겨준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약간 힘들었을 뿐이다.
어차피 사라라는 여자애와 그렇게 까지 절친하지도 않았던 나츠미는
백인 여자애들과 흑인 여자애들 몇몇이 패닉 상태에 빠져서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단지 자신이 카뮈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방인’ 이라도 된 것처럼 낮 설고, 달갑지 않은,
소외된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채로 마치 얼어붙은 쇠가 그런 것처럼,
내면의 급격한 에너지의 변화가 외부에 표출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누군가 손을 대면 그 살점을 뜯어먹기에 충분한 공격성을 내포한 채로 잠시 얼어붙어 있었을 뿐이다.
사실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 USB 메모리가 어떻게 나츠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나츠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USB 메모리는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가고 말았고
그날의 끔찍했던 영상은 삽시간에 인터넷이라는 전산망을 타고 유투브로,
SNS로, 메신져로, 페이스북으로, 또 블로그들과
수상쩍은 도메인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들로 급속도로 퍼져나가 버린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한 백인 여성이 나츠미에게 폭언을 퍼붇고 있다.
“Because of you! All about is because of you! Fuck you!”
사라의 유족들과 친구들은 나츠미를 용서하지 않았고 외국인에 불과한 그녀를 극도로 공격했다.
마치 사라가 죽은 책임이 나츠미에게 있는 것처럼,
마치 사라를 물어뜯고 강 속에서 식사를 즐겼을 그 악어가 그랬을법한 수준의 공격성으로
그들은 나츠미를 물어뜯을 듯이 덤벼들었고 심지어 그녀는 머리카락이 잡아 뽑혀지는 수모를 겪기 까지 했다.
길을 걸으면 누군가가 뒤에서 수근 대는 것 같았고 또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비록 그녀의 신상이 대중들에게 공개된 적은 없었지만,
심리적인 문제는 실제적 현상을 무시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녀가 유학을 위해 정착한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라는 소도시 내에서 만큼은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지만 강렬한 태양빛이 내려쬐는 해변의 도시를 걸으며 그녀는 지독한 소외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사우스웨스턴 컬리지 (Southwestern College)는 방학 중이었고 3개월에 달하는 긴 방학기간동안 그녀는 기숙사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풍요로운 태양빛과 천혜의 해변을 보유한 아름다운 도시의 정경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녀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졌다. 그녀는 학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굉장한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수업도중에 또 쉬는 시간에 끊임없이 그녀를 향해 험담을 늘어놓을 친구들의 모습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녀의 룸메이트조차도 그녀를 경원시하는 눈치가 보였다.
도저히 미국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해진 것을 느낀 7월의 어느 날 나츠미는 결국 미국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그녀의 그 청교도적인 성격 때문에 원래 친구들이 많지도 않았던 고향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고
점차로 그녀는 말수를 잃어가고 말았다.
인자하신 동네 어르신들은 그나마 나츠미를 챙겨 주었지만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나 남자 아이들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그것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여성의 여린 정서의 내면에 점차로 쌓여가는 우울과 스트레스의 요인이 되었다.
“まだも高慢なふりをか?(아직도 도도한 척인가?)”
남자아이들이고 여자아이들이고 다를 것이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성적으로 개방적이지 않은 여성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국가였다.
그녀는 감히 직장생활을 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자신의 모국은 여성 직장인들에게 너무 가혹한 나라이기도 했다.
조금만 거리를 걸어도 온같 성적인 그림들 혹은 사진들 혹은 조형물들이 거리에 넘쳐났고
성은 상품화되어 도시의 스모그사이로 부유했다. 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고,
자신의 체액을 한 번 건네어주고 10000엔이라는 거금을 벌어들일 수단이 있는데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 푸드 점에서 시급 850엔을 받고 일할 여자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점차로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먼지처럼 밤거리와 대낮의 공원을 돌아다녔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아마 그 때가 처음 이었으리라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막연한 생각에 그녀가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잠깐 동안의 호기심에 불과 했고 더 이상 그것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뿐이었고 결국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는 한류 열풍이 몰아치는 시기였다. 그녀는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등에 빠져서
온종일을 집에 틀어박혀 TV 화면이나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서만 세상과 연결 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류하(崔流夏)는 수성 최 씨 집안의 차남으로 수성 최 씨는 본래 최 씨 집안에서 갈라진 지류가 아니라
본래 김 씨였던 사람이 최 씨 라는 성을 사성 받은 사람의 후예들이다.
물론 흘러가는 여름이라는 거창한(항렬에도 족보에도 없는) 이름이 붙은 그 남자는
그런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어떤 유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실생활에 쓰일 일이 거의 없는 단지 장인어른께 딸을 달라고 조를 때나 사용될 법한
(요즘은 그마져도 의심이 되는 시대이지만) 역사적 사족들에 대해서
그가 유감을 가져야만할 어떤 이유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름 이라는 것이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서 물론 말은 많겠지만,
류하의 인생은 마치 누군가에게서 억지로 떠맡아진 것만 같은 상황들이 간혹 발생하고는 했다.
그가 둘째라서 였을까? 부모님도 그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으셨고,
항상 장남인 형에게 모든 관심과 애정이 함께 했다. 류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애정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아이였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에 유감을 느끼지도 않는 아이였다. 그는 외로웠지만 비굴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자신의 운명을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비닐봉지처럼 여기게 만든 그 결정적인 사건이 몇 해 전 여름에 갑자기 벌어지고 말았다.
류하는 다과상을 두고 건너편에 앉은 청수(淸水)라는 법명을 얻으신 스님께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가고 싶어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 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저는 정말로 그 때로 다시 되돌아가서 그 사건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고 싶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다른 그 어떤 것이라도 그 대가로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날 이후로 제 인생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구겨진 비닐봉지나 다름없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경멸하고 도와주려 하지도 않고 공감하려 하지도 않아요.
저의 아픔과 가슴을 열어 공감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도리어 저에게 훈계라도 하는 듯이 말을 하죠.
모든 잘못이 저에게 있다는 듯이 제 아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마치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들 마냥 과거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통쾌하게 엿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그런 기분이에요. 왜 그런 종류의 소설들 많지 않나요?
인생의 마지막에서 쓰레기처럼 살아왔던 주인공이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면서
자신을 괴롭혀 왔던 현실과 인물들에게 멋지게 복수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것 말이에요.
마치 지금 제가 그 소설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인생의 막바지에서 쓰레기처럼 구겨져 버려진 것 같습니다. 스님.“
류하는 유난히 차 맛이 떨떠름하다고 느꼈다.
차라리 자신도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와 처마 밑의 풍경 소리나 들으며 고행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현실도피적인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 날 이후로 수련(睡蓮)은 완전히 미쳐버렸고 거식증에 시달렸으며 연명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류하는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악마가 그의 부모의 심장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할지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그날 지나치게 대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어린 불량배들을 그냥 못 본 체 지나치는 아주 약간의 비겁함만 가졌더라면
그날 그 장소에서 희롱 당하던 그 이름 모를 여학생에 대한 쓸데없이 불타오르던 정의감만 아니었더라면,
그 여자아이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수련에게 그 비극이 발생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류하가 어린 여학생을 희롱하는 고등학생임이 분명한 그 어린 불량배들에게 거침없이 달려들고,
싸움이 벌어지고, 여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버리고 난 후
남자친구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수련은 그 여학생 대신에 그 불량배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수련이란 것이 연못 속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의 이름이라서 였을까?
그날 류하는 세상에 얼마나 지저분한 진흙탕 같은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두운 밤 으슥한 그날의 골목길 안쪽의 비좁은 공간이 마치 지금의 류하를 둘러싼 세상의 전부,
그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그 어느 누구도 그 얇은 벽 너머의 그들을 구원해주지 않았고 그 벽을 침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벽돌 한 장 두께의 그 얇은 석재 구조물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그들은 잔혹하게 결별당해야 했다.
그곳은 이 세상에 속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비명과 신음 소리, 모진 주먹질과 발길질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인지하며
정신의 끈을 미처 놓아버릴 새도 없이 한참을 쥐어터진 끝에 부어터진 두 눈가에 피가 스며들어오는
90년대 B급 고어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류하는 가해자들의 얼굴조차도 확인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의 응급실 침대에서였고 그나마도 사건이 벌어진지 하루 이상이 지나가버린 후였다.
그 어린 악마들이 누구인지는 류하도 수련도 알 수 없었다.
류하는 시야가 불분명해서 그리고 수련은 미쳐버려서 말이다.
수련은 끝내 정신병동의 콘크리트 벽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온몸으로 식사를 거부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도리어 피해자인 류하와 수련을 경멸하였고 류하가 어딘가를 지나갈 때면,
그는 유난히 뒤통수가 따갑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언제나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그네들 때문에,
그날 그 시간에 그 얇은 석재 구조물 안쪽에 있던 그들에게 오히려 그 시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존재들이,
시간이 흐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이 그때 그 순간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은 안전하다라는 얄팍한 거짓과 기만의 벽을 사이에 두고,
그날의 사건들을 그들만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 온같 형태로 재조립하고 재구성했으며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듯이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사건이라는 영화를
두루두루 여러 사람들 끼리 돌려서 재생하여 심리적으로 시청해 보고는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폭력들은 고스란히 류하가 짊어져야만 할 마음의 부담이 되고 말았다.
“수련이가 그날 거기서 어떤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을까?”
“글쎄 그거야 알 수 없지, 병신 같은 새끼 제 여자나 소중히 여길 것이지 지가 뭐라고 영웅 행세하다가 멀쩡한 여자 신세를 망쳐 놓냐?”
“아악~! 아악~! 살려 주세요 ~! 막 이랬을까? 아니면 콧소리 섞인 비음을 내질렀을까?
“클클 그거야 알 수 없지.”
류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강의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 무례한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몸싸움이 벌어졌으며 피가 튀고 아우성이 강의실을 점령했다.
웃기는 것은 류하가 먼저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가해자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이고
학교로부터 학사경고라는 강력한 징계를 받았다. 그의 교양 수업은 F 학점을 받았다.
그리고 류하는 학교를 때려치웠다. 짐승처럼 아무런 윤리적 가책 없이 피해자들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가학적 욕망을 추구하는 짐승 같은 일부 사내자식들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책임감’ 이라는 단어가 결여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책임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마치 짐 더미처럼 떠맡겨졌고
책임감을 가지는 행위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이야기인 것 같은 불가사의한 시절을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다탁 앞의 청수 스님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과거로 돌아가실 때,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날 이후의 모든 기억들을 잊어버린 채 되돌아가시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신다면 물론 그날과는 다른 사건들이 벌어졌을 확률이 높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변하는 것은 단지 시점일 뿐입니다.
기억도 영혼도 모두 그대로 둔 채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진정 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련양의 기억은 지워버리고 류하군의 기억은 놔둔 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만약 두 사람 모두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되돌아간다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그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시점이 변하면 진실도 변하는 것입니까?
광개토대왕비가 어느 날 마침내 사토 속에 묻혀 모든 풍화작용을 마치고 한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면,
고구려라는 위대한 국가도 사라지는 것입니까? 기억을 가지고 되돌아가도 문제요,
기억을 잃어버린 채 되돌아간다면 지금의 류하군과 그 시점의 류하군이 또 수련양이 과연 동일한 인물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만 마음의 짐을 덜고 새 인생을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진실은 시간이 변한다고 함께 변하지 않습니다. 잊혀지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잊혀짐이란 곧 인과관계의 끈이 완전히 유리됨을 의미하는 것,
그것은 곧 타인으로써의 새로운 내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내세는 내세에 생각 하십시오. 보다 더 중요한 지금 이 현세에
류하군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나간 과거사의 아픔 때문에 현재를 잃어버린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선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류하군의 나이도 이제 적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미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남은 날들도 괴로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으세요.“
산사에서 빠져나와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류하는 스님의 말에 대하여 자신이 논리적으로 반박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수단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사실이 그렇지가 않은가? 과거로 되돌아가 본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날의 끔찍했던 사건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자신을 괴롭힐 텐데,
설령 수련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기억이라고 하는 영혼을 자아가 아닌 타자의 의지에 의해 주물럭거려진 영혼이라는 것이
어떤 생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은 또 그 긴 시간동안 어떻게 수련을 기만하면서 살아갈 것이란 말인가?
그 말이 맞았다. 모든 것은 부질없는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류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꽉 막혀 정체되어 모든 우주가 정지되어버린 것만 같은,
영화 에일리언의 한 장면처럼 자신의 가슴뼈를 강제로 열어젖히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미지의 괴물 같은 내면의 어느 한 부분을,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감각으로 인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치라는 것이 설명하거나 제어 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의 지향점의 문제였다.
드물게 사람들이 오고가는 한적한 산길에서, 류하는 가슴이 터져나가도록 고함을 질러대었다.
어느 공원의 벤치에서 오랜 친구 녀석과 소주병과 종이컵, 족발 따위를 늘어놓고.
소주를 마시며 류하는 미친 듯이 속내를 토해내기에 바빴다.
“그래 씨팔! 그 중새끼 말이 맞아! 그 땡초 말이 맞다고! 과거로 돌아가면 뭘 할 건데 씨팔!
내 기억이 변하지 않고 영혼이 그대로인데! 부질없는 말? 미망? 좋아 좋다고! 다 맞다 이거야! 근데 말이야 이 씨팔 좆같은 개 같은 새끼!
그따위로 간단한 이론 나부랭이 따위로, 어려운 용어들 찌끄레기들 따위로! 그딴 걸로 내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그 새끼는 뭔데 씨발~!
그딴 말 몇 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어? 수련이가 살아 돌아오느냐고! 그 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가 있느냐고 씨발!
난 말야 미망이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어려운거 몰라, 그딴 거 몰라 씨발!
할 수만 있다면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한이 있어도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로 되돌아가고 말 거라고!“
류하의 오랜 친구 정식은 그냥 잠자코 술만 마시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깔린 도심 속의 작은 숲, 대낮이면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이 웃고 떠들던 장소에 우중충한 삼십대 초반의 남자 둘이서 술을 퍼마시며 온같 욕지거리는 다 내뱉고 있는 것이다.
류하는 또다시 한잔을 숨 가쁘게 들이마시고 나서 마치 갓난쟁이 아기마냥,
물고 있던 젖병을 빼앗긴 작은 생명체 마냥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기 바빴다.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대금이 있다고들 한다.
그 대금으로 연주를 하면 모든 바다의 풍랑과 해일이 잠잠하게 가라앉는다고들 한다.
류하는 자신이 목젖을 떨어 울리며 토해내는 그 울음이 대금의 취구 속에 들어 있는 얇은 대나무 속청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울음을 토해 내어도 현실이라는 바다위의 풍랑과 파도들은
말없이 휘돌고 몰아치고 서로 부딪히다 수면 아래로 빠져 들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단 한줄기의 거미줄 같은 실낱같은 희망일 지라도 어떤 작은 평온을 바랐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요란하게 울어 젖히며 쓸데없는 소음이나 발생시키는,
쓰레기통속에 버려진 구겨진 비닐봉지 같은 인생일 뿐이었다.
잠자코 술만 마시던 정식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 고민 말없이 들어주시고 그동안 너 위로해주시던 큰스님 욕하는 것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그게 뭐냐. 그래도 스님은 너 위로해 주시려고 하신 말씀 아니냐?”
류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그래 알아, 안다고,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는 거 잘 알아, 근데 있지 않냐,
아는 거하고 납득 하는 거하고는 서로 다른 거야. 아무리 내가 그걸 잘 알아도,
나는 그게 납득이 않돼. 그냥 부정하고 싶어지는 거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귀결인거라고.
왜냐고?
수련이가 살아서 돌아오는 일이 아니니까.“
말을 끝낸 류하는 또다시 서럽게 울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나버린 일인데도,
그의 가슴은 여전히 뜨거운 마그마가 흐르는 활화산이나 진배없었다.
정식이 다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뭐하면서 지내냐? 전에 얼핏 들으니까 야간작업 일 하는 것 같던데, 몸은 괜찮고?”
류하가 대답했다.
“그거 한 달 전에 때려 쳤어.”
정식이 물었다.
“왜?”
류하는 굉장히 힘들어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대답했다.
“건강이 지나치게 악화 되었어. 오랜 기간 불면증 약을 먹어야 했고
최근에는 몸 곳곳에 여드름 같은 작은 고름이 생겨나서 금세 그 크기가 커져서 봉와직염으로 발전하는 지경이야.
악취 나는 고름을 짜내다 못해서 직장 그만 두고 쉬는 중이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퇴직금이라고 고작 몇 백 만원정도가 간신히 나왔는데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부모님들도 워낙에 고령이신데 내가 건강이 않좋아서.“
정식은 이제 그만 죽은 여자 같은 것은 잊으라고 말하려다가 뜨거워진 목울대를 한번 울렁이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엑스트라 같은 거나 단역배우일은 어떠냐? 벌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몸은 덜 힘들 거다.”
류하는 충혈 된 눈을 들어 정식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네.”
정식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로 한가운데에 어떤 덩어리가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트럭 같은 큰 자동차의 바퀴에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죽은 고양이의 시체였다.
머리고 다리고 꼬리고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척추조차도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진 쥐포 같은 고깃덩이와 핏자국,
약간의 붉은 고깃덩어리를 보며 정식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정식이 그것을 고양이의 사체라고 결론짓기에 충분할만한 동물적 특징들이 거기서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털가죽은 분명히 코리안 숏 헤어 종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냥 갈 길이나 가려다가 몇 발자국 못가 가로수 근처 쓰레기더미에서 비닐봉지를 발견한 그는
그 비닐로 손을 감싸고서 납작한 고양이의 시체를 주워들고 다시 가로수 근처 쓰레기더미로 되돌아와 그곳에 고양이의 시체를 버렸다.
최소한 더 이상 오가는 차바퀴에 치이지는 말라고, 그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발휘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카가와 나츠미는 오랜 시간 한류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다가,
문득 자신이 거기에 출연하면 어떨까 하는 지극히 한가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녀는 OO 글로벌 이라는 연예기획사 사이트를 찾아내었고 배우를 지망한다는 지원서를 자신의 프로필 사진과 함께 넣어 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젊었고 미모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한 오랜 외국 생활로 상당한 외국어 실력을 쌓아 두었고 한국어를 공부할 자신도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접해 왔던 유일한 외부세계인 TV 의 화면과 컴퓨터의 모니터 안에
자신의 얼굴이 가득하다면 정말 환상적인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한국은 그녀가 갈 수 있는 어떤 이상향의 그곳처럼 보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 가야만 할 것 같은 기이한 예감? 혹은 어떤 기시감 같은
운명이라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어떤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전혀 이성적인 그 어떠한 고민도 없이 거기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버렸다.
지원서를 넣고 난 다음 돌아서는 나츠미의 등 뒤로 비치는 컴퓨터 화면에는 OO 글로벌의 로고인 모래시계 마크가 보였다.
OO 글로벌은 굉장히 큰 국제적인 연예 기획사였고 일본과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 쪽으로도 발을 뻗은 거대 기획사였다. 그들은 엑스트라, 단역, 전문배우,
시나리오작가, 또 스태프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력을 모집했고 적재적소에 그들을 투입하여 활용하는 업계의 큰 손 같은 회사였다.
나츠미는 3차에 걸친 오디션을 보았고 2차로 오디션을 보러갔을 때
축구경기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오디션을 진행하는 거대한 스케일에 놀랐다.
눈앞의 카메라를 향해 준비된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3차 오디션에서 OO 글로벌 일본 지사에 직접 방문하여 몇 가지 테스트를 추가로 받은 후에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육성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 회사 측에서 그녀를 전문 배우로 소속사 배우로 계약할 의사를 타진해 왔다.
나츠미는 뛸 듯이 기뻐했고 부모님들과 약간의 상의를 거친 후에 전문적인 배우로써의 교육과 한국어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류하가 엑스트라와 단역 배우로 지망한 기획사 역시 OO 글로벌 이었고,
그는 이메일이나 회사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사무소 전화 통화 등을 통해서 일거리를 구했고
제법 많은 촬영물에 때로는 엑스트라로 때로는 단역으로 출연하며 근근이 돈벌이를 이어나갔다.
그가 그 업계에 몸을 담고 느낀 것은 인맥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사무실과의 연락도 잘 되어야 했고, 자신이 알아보기도 잘 알아보아야 했으며,
수시로 공식 홈페이지 일정을 확인 해 보아야 했다. 또 메일로 어떤 촬영물에 대한 광고가 오기도 했으므로 이메일도 잘 살펴보아야 했다.
벌이는 처음 광고만큼의 벌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몸을 축낼 만큼 힘든 일은 없다는 점에서 그는 만족했다.
류하는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다가 점차로 수련에 대한 기억이 흐려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는 했다.
사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옛날 군졸 복장을 입고 창칼을 들고 몇 시간을 땡볕 아래에 대기하다가,
또는 새벽녘에 도심 속의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장소에서 스태프들과 커피를 마시며
스태프들이 지정해준 복장인 검정 정장을 차려입고 마치 국정원 요원인 것처럼 추위 속에 덜덜 떨며 서 있다가,
정말로 배우가 꿈인 사람들과, 또 자신처럼 할 일이 없어 찾아온 사람들과,
갖가지 사연들을 가진 그동안 만나본 적이 없던 사람들을 계속 만나며,
또 감독들에게 꾸지람도 들어가며, 그야말로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단지 생물학적인 생존만을 영위한 것과 같은 시간들 속에서 아픔은 점차로 무뎌져갔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시냇물 속의 자갈이 점점 더 둥글어지는 것과 비슷한 나름대로의 풍화작용인지도 모른다.
정식은 오랜 기간 동안 작가가 되기 위하여 글을 써오던 사람이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재능을 보였고 특히 시와 그림에서 큰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자녀를 예술가라는 배고픈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이 자라서 자신의 가업인 방직공장을 계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식은 요지부동 오로지 꿈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사실 현실적으로 단지 꿈만을 꾸며 살아가기에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생계라고 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현실적인 장벽을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에는 한 가지 덕목이 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식은 오래전 보았던 광고 포스터에 삽입 되어진 문구 ‘포기하지 마세요.’ 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그보다 더 희극적인 조롱은 없을 거라고 혼자 생각해보고는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꿈만 꾸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어쨌든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동물이고 먹고 산다는 것은 돈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 했다.
어떠한 방법을 써도 사람은 돈을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 잔혹한 현실의 벽이 되어 그를 괴롭히고는 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시는 덕에 정식이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하고 돌아다니며
용돈벌이조차도 시원치가 않았어도 최소한 유일한 친구인 류하와 간혹 만나서
맥주 한, 두잔 나누는 것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날도 정식은 시 한줄기를 부여잡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가물치
강가에 천막 치고
오랜만에 부자가 야영한다.
새벽에 물 빠진 강변 웅덩이 속엔
피라미며, 빠가사리며, 징거미 따위 가득하고
오늘은 월척이다
커다란 가물치 한마리가 잡혀들었다
아가미 바로 밑에
가슴지느러미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아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 끼워 감싸 안듯이
조심스레 들어 올린다
고놈 참 힘차게 퍼덕 거릴 줄 알았는데
어른 몸통만한 커다란 고기가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 얌전하다
아버지는 어디서 주워 오신 것인지
코펠 한가득 소라를 끓여
고량주 안주로 한 알씩 뽑아 드시고
나는 자랑스레 커다란 가물치를
그 앞에 내어 놓는다.
아마 이 강에 사는 고기들 중에선
이놈이 가장 클 것이라고
부자는 웃고 떠들며 고기를 손질한다.
나는 보글거리는 매운탕을 바라보며
강변 나루터 쪽배들 바닥에 붙은
검은 조가비들을 떠올렸다.
잽싸게 도망가는 징거미들을 떠올렸다.
서툰 낚시질엔 고기 한 마리 낚이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도 힘들어
새벽녘
물이 빠진 강변을 거닐며
이끼며 이름 모를 수초로 미끌거리는
물살에 닳고 닳은 돌멩이들을 지그시 밟으며
기어코 품에 안은 한 마리의 고기는
진정코 부자의 꿈이었다.
나의 꿈이었고
나의 성장을 바라는
아버지의 꿈이었다.
나는 바랐다.
나의 아버지가 고량주 안주 삼아 먹던 소라 껍데기 같은
뱅글 뱅글 돌아가는 요지경속의 한 조각 색종이가 아니길 바랐다.
식탁에 올라온 동태찌개
한 토막 집어 씹으면
담백한 허연 살코기를 잘근 씹어
꿀꺽 넘기는 저녁 밥상 앞에서
그 해
강변 앞에서
흐르는 푸른 물결 앞에서
지금 내 앞의 동태처럼
매운탕이 되어 펄펄 끓었던
가물치의 속살을 추억한다.
단언컨대
대한민국 그 어떤 민물고기도
그 맛을 내지 못하리라
쫄깃하고 담백한 탄력 있는 고기의 속살을
아스라이 추억하며 동태를 씹는다.
고등어를 씹는다.
누가 그랬던가?
생각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그러나
지금 이 적나라한 고백의 순간
나의 지난날들을 되돌이켜 추억하는
부도덕함의 극치 앞에서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 치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 할 수 없다는 진실 앞에
신도 악마도 그 무엇도 나의 삶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세상이라는 도화지 위에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의 흐름이
거센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던 밑그림 위로
구불구불 어지러이 이어져 내려온 나의 지난날
기어코 내가 품에 안았던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에 가서 뒤돌아 지나온 길 바라보면
모두가 진정 내가 원한 것들이더라,
진실로 내가 원했던 것들이기에
그것들을 추억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 치고 있다.
도저히 매운탕 국물을 넘길 수가 없어
밥상조차 한켠으로 치운 저녁나절
가물치의 허연 속살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며
명정상태의 약쟁이처럼 그저 멍하니
먹거리들이 잠을 자고 있는
창백한 냉장고의 문짝만을 바라본다.
*큰 강의 댐 하류 쪽에서는 낮과 밤사이에 흐르는 물의 수량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강변을 거닐면 물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작은 웅덩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고기들과 수서생물들이 갇혀 있지요.
벽에 걸린 미켈란젤로의 대작 메디치 가문의 묘에 조각되어 있던 쥬리앙의 석고 소묘를 배경으로
소니 사의 SRS-X99 스피커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안의 모든 집기들은 어지러이 흩어져 있고 정리나 정돈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그의 방이지만
자신만의 궁전 같은 그 방 안에서 정식은 혼자서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아내라는 존재가 만약 내게도 있다면, 그렇다면 내 삶은 지금과는 또 달라질까?
홀로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아내를 꿈꾼다는 것이 참 웃기는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멋진 일이 될 수도 있지.‘
그는 유난히도 연애를 못했다. 외모가 뒤떨어진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리만치 여성들은 그를 기피했다.
그랬다. 그가 연애를 하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그를 기피했다.
그에게는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라는 게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의 글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이야기들이었고 언제나 주제는 눈물 혹은 실연이었으며,
삶의 고통스러운 부분들에 대한 화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어두운 부분들을 잘 인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단점이라는 것은 인지했지만, 특별히 고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런 글을 쓰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언젠가 어떤 여성에게 오랜 기간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다시 한편의 시를 써내려갔다.
가슴의 문을 두드리다 fin.
구월의 햇살이 한가로운 버스정류장을 사선으로 침범하여
공용 의자위에 앉아 오가는 행인의 줄에 매인 강아지와 소통하는
하염없는 기다림을 감내하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어긋남이란 인식할 수 없는 접점에서 교차하여
마치 햇살과 나의 조우처럼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한번쯤 한마디씩 하고는 한다.
“내가 기다려온 것은 네가 아니야”
사실 내가 기다려왔던 것이 구월의 햇살이 아니었던 것은 맞다.
심지어 그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보이던 야트막한 동산도,
갈대와 가을 풀들과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운데
내리는 땅거미와 함께 풀벌레 우는 소리 고즈넉이 울려 퍼지는 것조차도
모두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날 구월의 햇살이 가슴 졸이며 나를 기다려 왔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내가 거절당할 까봐 애간장을 새까맣게 태우며
간절하게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지난 시간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다.
단지 햇살은 무심하게 지평선을 넘어갔을 뿐이다.
황혼을 투과하는 버스 정류장 유리창,
투명하여 빛으로부터 유리(流離)*된 침묵의 벽을 따라
희로애락은 모두 불타오르는 추억이 되어
다가오는 밤을 향해 막힌 둑을 터뜨려 오열(嗚咽)을 방류하고
반근착절(盤根錯節),
흐르는 별빛은 수많은 지류들로 흩어져
동양 여인의 눈동자 속에 숨어있는 어둠만큼이나
맑고 깊은 하늘 가득히 역동적으로 굽이치는데,
겨울이 지나고 초봄이 다가와 바람의 마음이 뒤바뀌면
채 쌀쌀한 기운 가시지 않은 날씨에 이름 모를 나뭇가지 꽃눈 틔우듯
그 열기에 녹은 얼음 사이로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흐르는 것처럼
서리가 내리고 어둠만이 흐르는 행성의 표면아래
알 껍질 속 작은 공룡의 심장만큼만 뜨거워지는 일
*유리의 한자를 일상적 언어와 다르게 표기하였습니다.
서로 분리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의미 입니다.
*녹은 얼음 사이로 흐르는 맑은 하늘 이라는 표현은 ‘짙은’ 이라는 밴드의 December 라는 노래가사에서 빌려온 표현입니다.
원작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품은 의미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원작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됩니다.
“찬란했던 겨울 호수 얼어붙은 기억
깨진 틈 사이로 흐르는 맑은 하늘과
귓가에 부서지는 눈쌓이는 소리
잊었던 날들 떠올리며 멍해지는 머리“
원작의 의미가 차가운 기억 사이사이 맑은 하늘과 같은 청명한 마음들
차가웠던 기억들 사이사이 아름다웠던 추억들과 같은 ‘기억’을 중심으로 모티브를 구성했다고 한다면
저는 차가운 얼음과 같은 운명과 화자, 그리고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살아 숨 쉬는 따스한 ‘마음’ 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어지는 행과 대비하여보시면 의미가 분명해 지지요.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
정식은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정말로 강렬한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진심으로 이성을 품에 안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였다.
꼭 그 때 당시 자신이 간절히 구애하던 여성이 아니어도 괜찮은 문제였다.
사실 웃기는 이야기 이지만 정식은 자신이 좋아서 따라다니던 그 여성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오랜 시간을 그녀에게 구애를 해 오다가 그녀가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끊어져버린
한심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정식은 누구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무나’ 라는 의미로 도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었다. 자신이 쓴 시에서처럼 유리걸식하는 존재에 가까운 자신의 지난 이력서상의 이직률이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일지라도 그는 다시 한 번 사랑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불태워 보고 싶었다.
누가 좋을까? 될 수 있으면 돈키호테가 사랑했다는 둘시네아 공주 같은 여성이거나 피그말리온이 사랑한 그 자신의 상아 조각상 같은
막연하리만치 이상적인 여성이라면 좋겠다, 라고 정식은 무책임한 생각을 떠올렸다.
정식은 밖에 나가서 아무 여자에게나 헌팅이라도 해 볼까 잠깐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 해 보았다.
사위가 어두워진 밤거리에서의 헌팅 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마 당하는 여성은 무서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가 대단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라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며 돈을 길거리에 흩뿌려도 되는 남자라면 혹 모르겠지만,
만약 한밤중에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헌팅을 당한다면 그것은 여성에게 무척이나 공포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들끓기 시작한 막연한 이성에 대한 열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결국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무렇게나 발길 닿는 대로 향한 곳은 동네의 칵테일 바였다.
그 바는 한 가지 인상적인 특징이 있는데 여러 명의 바텐더가 있지만 그 바텐더는 모두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바텐더 여성들이 손님들과 2차를 나가는 일은 또 없는 조금 묘한 구석이 있는 칵테일 바였다.
혹여 정식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니까 바에 들러보지 않은 다른 시간에 또 그가 모르는 시간과 장소에서
바의 손님들과 바텐더 사이에서 썸씽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또 그 바를 출입했던 다른 지인들의 경험담 속에서 그런 일은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정식이 세상을 지나치게 순진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날따라 그 신입 바텐더 아가씨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가 다시 만난 것처럼 그날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말이 잘 통했다.
“씨티 오브 엔젤 에서의 니콜러스 케이지의 그 대사 나도 좋아해요. 카지엘의 역을 맡은 안드레 브로거가 말하죠.
‘If you’d known this was going to happen, would you have done it?’
‘네가 만약 그 결말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의 니콜러스 케이지 아저씨가 명대사를 읊었죠.
‘I would rather have had one breath of her hair, one kiss of her mouth, one touch of her hand, than an eternity without it. one.’
나는 차라리 영원성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번만 그녀의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고 싶어,
그녀의 입술에 단 한 번의 키스를 할 거야, 그녀의 손이 단 한번 나를 만져보는 것을 바라. 단 한번 만이라도“
정식은 질문했다.
“혹시 이 바에 사라 맥라클란의 ‘In the arms of the angel’ 이라는 노래 있어요?”
그녀는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있어요! 틀어드릴게요!”
그녀가 바 뒤쪽으로 가서 오디오를 매만지고 곧 노래가 흘러 나왔다.
정식은 노래가사가 흘러갈 때마다 그 가사를 한국어로 바꾸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녀도 함께 따라서 영어로 가사를 읊조렸다.
Spend all your time
당신은 모든 시간을 써버렸어요
Waiting for that second chance
두 번 째의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서
For the break that will make it okay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킬 휴식을 얻기 위해서
There's always some reason
모든 것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어요.
To feel not good enough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 말이에요.
And it's hard at the end of the day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I need some distraction, Oh, beautiful release.
내게 하루의 전환점이 필요해 질 때, 오 아름대운 해방.
Memories seep from my veins
기억들이 나의 혈관들로부터 샘솟아 나오고
Let me be empty and weightless and maybe
나를 텅 비우고 나면 아마도 무거움은 사라지겠죠.
I'll find some peace tonight
나는 오늘밤 작은 평화를 찾아낼 거에요.
In the arms of the angel
천사의 품 안에 안겨서
Fly away from here
이곳을 떠나 멀리 날아가요.
From this dark, cold hotel room,
이 어둡고 차가운 호텔 방으로부터 떠나가요
And the endlessness that you fear
그리고 당신의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부터 떠나가요
You are pulled from the wreckage
당신은 잔해들 사이에서 끌려나왔어요.
Of your silent reverie
그것은 당신의 침묵으로 가득한 몽상의 잔해들
You're in the arms of the angel
당신은 천사의 품 안에 안겨 있어요.
May you find some comfort here
이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얻으세요.
So tired of the straight line,
그래서 모든 곧게 뻗은 것들이 지겨워지면,
And everywhere you turn
그리고 당신이 가는 곳 어디든지
There's vultures and thieves at your back
당신의 등 뒤에는 시체를 먹는 독수리들과
모든 것을 훔쳐 갈 도둑들이 있겠죠.
The storm keeps on twisting,
폭풍은 계속 회오리치고
You keep on building the lies
당신은 계속 거짓말들을 만들어요.
That you make up for all that you lack
그것으로 당신의 모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죠.
It don't make no difference, escape one last time
그것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해요, 단지 마지막 순간에 도망칠 뿐
It's easier to believe
그것은 도리어 믿기 쉽죠.
In this sweet madness,
이 달콤한 광기 안에서
Oh this glorious sadness
오 이 찬란한 슬픔
That brings me to my knees
내 얼굴에 나의 무릎을 가까이 가져와요.
In the arms of the angel
천사의 품 안에 안겨서
Fly away from here
이곳을 떠나 멀리 날아가요.
From this dark, cold hotel room,
이 어둡고 차가운 호텔 방으로부터 떠나가요
And the endlessness that you fear
그리고 당신의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부터 떠나가요
You are pulled from the wreckage
당신은 잔해들 사이에서 끌려나왔어요.
Of your silent reverie
그것은 당신의 침묵으로 가득한 몽상의 잔해들
You're in the arms of the angel
당신은 천사의 품 안에 안겨 있어요.
May you find some comfort here
이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얻으세요.
In the arms of the angel
천사의 품 안에 안겨서
May you find some comfort here
이곳에서 평안을 얻으세요.
두 사람은 좋아하는 영화도 비슷했고,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라던가 연예인에 대한 취향,
좋아하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서로간의 대화가 막힘없이 이어져갔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어떤지에 대한 생각의 차이들이 주를 이루었고
정식은 이런 여성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와의 대화에 임했고,
심지어는 체리 한 알을 입에 물고서 그의 입속에 넣어주는 서비스를 해주기까지 했다.
정식은 조심스럽게 바텐더 아가씨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혜영이에요. 김혜영, 잊지 말아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데이트를 즐겼다.
요즈음의 흔한 이야기처럼 원나잇스탠드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연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친구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어색한 관계였다.
하지만 만남 자체는 대단히 즐거웠다. 둘은 서로 말이 잘 통했고 간혹 호프집에서 맥주를 함께 마신다던지,
포켓볼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던지 만화책방에 틀어박혀 함께 만화책을 죽어라 읽으며 웃고 떠들던가
아니면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는 하는 것이다.
사실상 육체관계만 없다 뿐이지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식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칵테일 바의 운영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만은 아니다.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녀는 정식의 마음을 완전히 불태워버릴 만큼 확실하게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정식은 서서히 만남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시작된 만남이어서일까 만남을 지속하는 순간에도 가슴 떨리는 설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고
정식은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이 유희를 어떠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떠한 심정으로 납득하고 어떠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다가 그날따라 그녀가 자신이 커피 값을 계산하겠다며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서 시선이 이동하던 정식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어떤 여자 연예인의 사진이 실린 영화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포스터는 그가 혜영을 바라보던 방향의 카페 유리창에 붙어 있었는데,
단아한 이목구비의 동양 여인이었다. 그는 그녀를 한국인이라고 생각 했다. 한국 영화의 포스터였기 때문이다.
“오빠 뭐해?”
혜영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정식은 자기도 모르게 좀 멍청해 보이는 음성을 흘렸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뭘 좀 보고 있었어.”
혜영도 자연스럽게 영화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아 저거 보고 있었구나? 우리 담에 저 영화 보러 갈까?”
그 순간 정식에게는,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마음속의 갈등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굉장히 신속한 속도였다.
“응! 그래, 꼭 보러 가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 했다.
‘책임감 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류하는 그날따라 술이 고프다고 느꼈다. 이제는 죽을 만큼 괴로웠던 수련에 대한 기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정상적인 사람들 수준의 사고활동이 가능해진 그는, 그가 몸담고 있는 단역배우 세계에서 좀 더 전문적인 역할을 맡고 싶다는 생각을 느꼈고,
요즈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천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다.
결국 OO 글로벌의 전문 배우 오디션에 지원서를 넣었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벼운 흥분과 함께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 이었다.
‘OO 칵테일 바’
우연치 않게 눈에 띈 바의 간판을 보고 류하는 자신의 동네에 이런 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장사를 하는 바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 바는 한 건물의 꼭대기 층에 소재하고 있었고 밑에서는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내부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들어가 보는 방법 이외에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류하는 기세 좋게 건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요즘들어 촬영 감독들과 PD들 사이에서, 그리고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도 쌓여 올라갔겠다,
벌이도 예전보다 좋아져서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이다.
바에 들어와서 처음 마주친 것은 정돈된 테이블들이었고 출입문에서 우측방향으로 바텐더 아가씨들이 서 있는 칵테일 바가 보였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일행의 존재 유무에 따라서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고,
일행이 없는 사람들은 아가씨들하고 놀아라, 라는 다분히 의도성이 짙은 인테리어였고 또 인원 구성이었다.
바에는 몇 사람 가량의 손님들이 있었고 전부 바텐더 아가씨들과 어떤 수작이나 주고받으려는 젊은 남자 손님들이었다.
류하는 구태여 이런 바에서 까지 다른 남자들과 경쟁하며
고작 술집 아가씨에 불과한 바텐더와 잠깐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눌 기회 따위를 얻으려고 헛돈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또 젊은 아가씨들과 2차를 나간다거나 하는 사고관은 그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여태 살아오는 동안 여성을 돈을 주고 사는 존재라고 여겼던 적이 없었고
또 그런 문란한 정서에 동의하지도 않는 그런 약간 고지식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만든 특제 칵테일 한잔 서비스 해드릴 테니까 그냥 가지 마시고 잠깐만 앉아 보세요.”
류하가 뒤를 돌아보니 그럭저럭 매력적인 아가씨가 서 있었다.
류하는 아가씨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띄우고는 말했다.
“그럽시다.”
류하는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예쁜 아가씨 이름은 뭡니까?”
그녀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혜영이에요. 김혜영, 잊지 마세요.”
그녀는 잠시 바 뒤로 돌아갔다가 분홍빛깔이 나는 칵테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오늘은 저도 술 한잔 하고 싶었는데, 마침 저한테만 손님이 없었거든요. 출근한지 몇 시간 않됐어요.
지각이라는 개념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조금 늦은 편이죠.
아무튼 그냥 보내드리기 아쉬워서 붙잡았어요. 괜찮죠?”
그녀의 미소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류하는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두 사람은 그렇게 썩 말이 잘 통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음식,
연예인 또는 스포츠에 대한 취향이나 TV 프로그램에 이르기 까지 정말이지 통하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서로의 취향에 대해서 서로가 혀를 내두르면서도 우습게도 류하도 혜영도 대화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 하나만이 유일한 공통점 이었다.
“이렇게 까지 누군가랑 취향이 극과 극으로 차이 나는 대화를 해본 것도 처음이네요. 근데 왜 이렇게 재미있죠?”
혜영이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류하는 지나치게 음란하다거나 선정적이지 않은 혜영에게 도리어 매력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네요.”
혜영이 류하에게 질문했다.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류하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단역배우죠.”
혜영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아 영화배우시구나! 출연작이 뭐뭐에요?”
류하는 무척이나 곤란해 하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역배우라는 것이 꼭 영화배우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에는 그렇게 많이 출연하지 못했어요. 몇 작품 않됩니다. 대부분 광고나 드라마 기타 촬영물들에 출연을 하죠.
생각보다 촬영이 필요한 분야는 대단히 많고 그게 모두 대중매체로써 매스컴을 타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제가 출연한 영화들은 말씀드려도 무슨 영화인지 잘 모르실거고 또 그 영화에서 저를 찾아보시기도 힘드실 거에요.”
혜영은 자신이 질문을 잘못 던졌다는 것을 알고 급히 얼버무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난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류하는 다시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술을 마시고 싶으셨던 거에요?”
혜영은 잔뜩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언짢은 표정을 짓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류하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서도 자신이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 친구가 딴 여자한테 한눈을 팔지 않겠어요?
뭐 아직까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 여자하고 바람을 피울만한 능력도 없어 보이지만, 어쨌거나 기분 나쁘다는 말이죠.”
류하는 ‘심쿵사’ 라는 최신 유행어의 의미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애인분이 있으셨군요...”
말을 하면서, 그것이 끝나기도 전에, 류하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러 이 술집에 들어왔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 아가씨와 지금껏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이 아가씨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급격히 회의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혜영은 그만 까르륵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 세상에 맙소사! 굉장히 순진한 오빠시다.”
혜영은 터져 나온 웃음보를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고.
류하는 자신이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웃기게 되었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맹한 표정은 혜영을 완전히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한참동안을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던 그녀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미안한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프네, 미안해요, 비웃은게 아니라 너무 순진해 보이셔서,
이정도로 순진한 사람 만난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웃은 거에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혜영은 다시 말했다.
“이런데 처음 와보시죠?”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류하는 대답했다.
“네.”
혜영은 이제 완전히 웃음을 멈추고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어쨌거나 웃음을 파는 곳이에요.
손님들과 2차를 나간다거나 하는 음란함을 파는곳 까지의 수준은 아니지만
결국 남자들을 상대로 여자들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곳이죠. 아 오해는 마세요.
제가 남자친구를 두고서 다른 남자랑 함부로 바람을 피운다거나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몸이나 인간관계를 마구 허락하는 여자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한테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저랑 이야기를 나눈 것을 부도덕한 일로 생각하시지는 마시라는 거에요.
왜 연기자들도 그러잖아요? 연기를 위해서는 스킨쉽 까지도 허락하는게 연기자라는 직업의 특성 아니던가요?
그러니까 지금 저는 직업정신을 발휘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부담 갖지 마시고 지금까지 그러신 것처럼 여자 친구랑 농담 따먹기 한다고 생각하시고 이 시간을 즐기시면 돼요.”
류하는 약간 멍청해진 표정으로 생각했다.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류하의 대답은 그의 마음속 고민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신속했다.
“그래요. 까짓것 놀아 보죠 뭐.”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혜영이 물었다.
“오빠는 이름이 뭐에요?”
류하는 흔쾌히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최류하(崔流夏) 라고 해요. 흘러가는 여름 이라는 거창한 이름이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두 사람만의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직업정신이라는 미명하에 두 사람은 다른 사생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
그러니까 바에서만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는
모든 조건들로부터 해방된 어떠한 변명이 허락된 마법의 장소처럼
나카가와 나츠미의 배우로써의 생활은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고정 팬의 확보덕분에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았다.
문란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성문화와 다르게 그녀는 유달리도 청교도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연기생활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녀도, 또 소속사도 음란한 영상물이나 사진,
또는 화보의 촬영에는 그녀를 내보내지 않았고 또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사생활까지 이어졌고 그런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은
일본 국내에 마치 그녀의 성격을 닮은 것만 같은 고정 팬들을 만들게 했고,
그들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애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연 어느 날 한국으로의 진출을 원했고,
소속사측에 그것을 요구했다. OO 글로벌은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세계적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기업이라
한번쯤 한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한국어를 공부했고, 발음이 약간 부자연스러운 것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소속사도 또 그녀 자신도 그녀의 순수한 매력이 한국 팬들에게 충분히 신선한 충격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했고,
또 잘난 척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고려해서
될 수 있으면 그녀의 한국어 구사에 자연스러워 보이는 실수나 약간은 겸손해 보이는 장면들을 집어넣은 방송 또는 광고 또는 영화를 찍었다.
그녀는 한국에 진출하면서 구태여 다른 이름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 연예계 생활을 하기 위해 예명을 짓지도 않았다. 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라는 이름은
그대로 한국인들의 뇌리에 굉장히 순수해 보이는 일본 여배우의 이름으로 새겨졌다.
그녀의 한국진출은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또 실패라고 평가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수준에 머물렀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연예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고정 팬들에게 그녀는 거의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한국 팬들은 거의 대부분 점차로 선정적으로 변해가는 한국 연예계와
걸 그룹 출신들이 지배해 가는 시장구조에 환멸과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신선하고 순수한 자극이 필요했고 나츠미는 그렇게 준비된 여배우였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 시장에 진출 하고나서 얼마 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본의 고정 팬들의 불만이 조용히 하나씩 둘씩 불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영화 “반딧불이의 빛”은 바로 그 시점에서 개봉된 영화였다. 그리고 정식이 본 포스터는 바로 그 영화의 포스터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출구에서 혜영은 정식에게 물었다.
“재미있었어?”
정식은 잠깐 멍하니 걸으며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혜영은 다시 질문 했다.
“재미있었느냐고?”
정식은 마치 작살에 맞은 물고기 같았다.
펄떡 펄떡 뛰어오르며 몸부림치는 활어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어? 어, 뭐라고?”
혜영은 화내지 않기로 했다.
“재미있으셨어요? 오빠?”
정식은 잠시 동안 멍하니 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혜영이라는 여성을 처음만난 남성의 표정과 같았다.
그는 마치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대략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정식은 간신히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래 감명 깊은 영화였어.”
정식이 두문불출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심지어 혜영에게조차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혜영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에게 연락을 시도 했지만, 그는 응답해오지 않았다.
간신히, 혜영은 정말로 간신히, 그의 집에 찾아가려는 자신을 멈출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그것은 아니었다. 그와 자신은 정식으로 교제 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웠고,
무얼 어떻게 생각 해 보아도 지금 자신의 감정은 단지 일방적인 것에 불과 했다.
또 그의 집에 찾아가 그의 지인들(특히나 그의 부모님)과 마주쳐야만 한다는 가정 앞에서
그녀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만큼 정식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애정에는 깊이와 정도라는 것이 있었고, 그녀가 가진 그에 대한 애정의 깊이는 결국 그 정도였다.
그것은 단지 자존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끓는 감정 까지도 식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났고, 그래서 그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정식이나 다른 사람이 미처 예견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연결되는 결심 이었다.
밤의 계류장
비행기는 정해진 계류장 스팟에 멈춰서고
비를 막아주는 아크릴판이 덮인 계단을 따라
활주로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을 향해 내려온다.
하늘은 반투명한 잿빛 이었고
검은 구름은 대지에 눕듯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보다 더 어두운 빛깔의 콘크리트 바닥
바닥에는 비행물체를 유도하는 작은 등이
지상의 별처럼 선명하게 점점이 박혀있었다.
토잉하는 동안 비행기는 금방이라도 이륙할 것처럼
극심하게 흔들리고 탑승자에게 멀미를 유발했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승객들이 아니었고
비행기는 밤하늘을 날아 먼 땅으로 떠나갈 수 없었다.
직원들을 태우러 온 버스에 오르며 간밤의 작업이 모두 종료되고
비로소 아침을 향해 퇴근한다는 사실을 실감 할 때
특별히 누군가의 얼굴을 밤하늘에 그려내지 않더라도
문득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가을의 문턱
박명이 찾아들어 지평선이 어물어물한 새벽녘
하늘의 한쪽에는 먼 땅에서 이륙하여 이곳으로 날아드는 비행기들이
주 날개의 전조등을 일출 직전의 샛별 보다 더 밝게 불타오르게 한 채로
가슴을 꿰뚫는 눈빛으로 꼬리를 물어 어둠의 대지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는 어두운 나의 마음에 접근하는 불빛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부터 왔으며 나에 대한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
이 상념의 끈을 잠시라도 놓친다면
내가 또다시 진실에 접근 할 수 있는 다음번 기회는 또 언제쯤 찾아올 것인가?
우리는 전설의 땅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가슴 설레는 승객들처럼
저간의 오고가는 수많은 마음들을 공간상에 풀어놓았다.
버스에 탑승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 앞에서
계단으로부터 계류장을 가로질러 차량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의 화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떠나는 비행기처럼 훌쩍 날아가 버리고
우리는 집을 향한 움직임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 버렸다.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가을의 활주로를 달리며
버스 구석에 모여 앉은 우리는 비행기의 이동 중에 생긴 멀미를 치유했다
서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무게가 390톤을 넘어가는 거대한 물체의 일부도 될 수 없는 작은 무리를 조직하여.
상황을 우리의 의도대로 끌고 와 우리의 멀미를 해소 했다.
우리는 잠시 하나가 되었다.
높은 고도의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보인다는
동그란 무지개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어느 날이었다.
드넓은 활주로 좌우로 펼쳐진 초목지에
흔한 코스모스라도 끝없이 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들국화 피어나는 계절에 키 낮은 야생화들 이름을 주워섬기다
그래 그 녀석들은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계절 서로 다른 땅에 떨어져 사는 야생화들처럼
이내 각자 딴마음을 품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동그란 무지개 이야기는 과거 TV 드라마 “파일럿” 에 잠시 등장하는 이야기 입니다.
조종사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가운데 간혹 그것을 보시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또 스카이다이빙 중에도 촬영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해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잉이란 비행기가 자력이 아닌 외부의 차량의 힘을 빌려 견인되는 것을 지칭합니다.
과거 이런 저런 직장을 전전 할 때, 인천공항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한편 쓰면서
마음을 정리한 정식은 결국 결심하고 말았다. 그녀만을 위한 시나리오를 쓰기로
그는 자신이 완전히 그녀에게 매료되어버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혜영에 대한 작은 책임감조차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니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싶어질 만큼
저 먼 땅에서 하늘을 날아 이곳으로 모험을 떠나온 그녀에 대한 자신의 끓어오르는 격한 마음을
더 이상 감추려 하지 않기로. 계절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바람을 쐬러 잠깐 밖으로 나온 정식은 집 앞의 우편함을 열어보려다가 발신자 불명의 작은 소포를 발견 했다.
집 안으로 들어와 열어보니 작은 인형얼굴의 손난로 하나와 한글 문서파일을 프린터로 출력한 A4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용 설명서
이것은 천연 곡물이 들어있는 손난로입니다.
소지하고 다니시다가 길가에 편의점이 보이시면 쳐들어가신 후
음료수 한잔 사 드시면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40초에서 1분간 조리하셔서 사용하십시오.
대략 반시간에서 한 시간 정도 따뜻해집니다.
온도는 전자레인지에 얼마나 조리하였나 하는 조리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1분 10초 이상 가열하지 마십시오.
처음 2~3회 사용 시에는 습기가 배어나올 수 있으나
그것은 내부에 함유된 천연 곡물에서 배어나온
순수한 물에 의한 습기이오니 안심하시고 사용하십시오.
자주 사용하시다 보면 더 이상 습기가 배어나오지 않습니다.
본 제품은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만 파손 시에 AS는 불가능 합니다.
그냥 새것을 사서 쓰세요.
본 제품의 판매처는 교보문고 광화문 점과
전국 CU 편의점에서 단돈 7000원에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전화 하지 마.
ps.
싸구려인데 ...
워낙 싸구려라서
도저히 AS 는 불가능해
그러니까 잘 쓰라고 ...
정식은 글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또 무슨 짓을 저질러 가고 있는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타인에게 매료당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심리상태를 자기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나츠미가 일본 여인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한국과 일본인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당한 소재를 찾기가 어려웠다.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워낙에 깊기 때문이고
사실상 임진왜란 이후로는 역사적으로도 교류 자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시도하는 수많은 역사 왜곡들로 인하여 사료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었다.
어느 한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한쪽이 양보를 할 수 밖에 없는 형국 이었던 것이다.
정식은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과거의 사료가 아닌 현대의 한일 문화교류 사례 중에서 적당한 것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작업에 골몰한 나머지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 시피 했고,
일본 여자의 사진으로 뒤덮인 그의 방에 그의 어머니가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하고많은 여자 중에 하필이면 일본 여자 사진을 방안에 붙여놓고 그러니?”
그 별 볼일 없는 말 한마디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판다는 것을 그의 어머니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정식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보려고 해도
일본과 한국 양국을 동시에 만족 시킬 수 있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 사료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달을 헤매던 그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는 참 신선했다.
그는 우리가 일본의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일본대 한국의 구도가 아니라, 남자대 여자의 구도에서 한 일 양국의 문화적 접점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국 정식은 우리가 일본 여성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제 3국의 인물의 시점에서 일본 여성의 변천사를 파고들어가는 학구풍의 시놉시스를 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검색창에 책의 제목이 나타났다.
OOO 라는 중국 저자가 “일본 여성” 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발견한 정식은
어떤 학자가 일본의 여성의 삶의 변화를 추적해 나가고
그 와중에 실제의 일본 여성을 만나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어 책을 완성하고
두 사람이 일본의 여성의 삶속에 숨겨진 눈물들에 공감하며 사랑을 싹틔워 나가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구성하기로 했다.
일단 기본 플롯 자체가 단순하지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해 지도록 신경을 썼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인권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중심으로 하는 메시지였다.
히라쓰카 라이초 (ひらつからいてう, 平塚雷鳥, Hiratsuka Raichou)의 강렬한 메시지,
‘고대의 일본 여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이었으나
지금의 일본 여성은 타인의 빛을 받았을 때에만 그 창백한 민낯을 드러내는 달과 같다.‘
라는 절규에 매료당한 중국의 학자가 고대의 일본 역사를 더듬어 나가는 것이 중심적인 이야기였다.
더불어서 일본 사회에 만연한 개방적인 성문화와 여성들 간의 가식 그리고 텃세,
직장 내에서조차 만연한 성희롱, 집단적인 개인에 대한 폭력, 그에 불만을 품은 가냘픈 일본 여성을 히로인으로 삼기로 결정 했다.
물론 당연히 그 히로인으로 내점한 여성은 나츠미다.
글은 마치 순풍에 돛을 단 거대한 범선처럼 상상력의 세계라고 하는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 해 나갔다.
그는 몇 달에 걸친 기간 동안 실제적인 역사적 사료들을 참고해 나가며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국의 학자가
일본의 여성이라고 하는 가장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억압받아온 소외된 존재들을 탐구해나가는 과정을 실체로써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그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건은 ‘일본 여성’ 이라는 책을 구하려 서점에 찾아갔을 때,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그 모 서점에서 조차도 그 책은 정식으로 절판되어버린 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책을 인터넷 온라인 판매로 구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판매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다행히도 국립중앙 도서관 정회원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여성’ 이라는 책의 사료를 중심으로
그 사료에 나오는 역사적 사료들의 원본과 대조를 해 가며 스토리작업을 지속했다.
또 학자가 어떠한 책을 완성하여 편집하고 출판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다 현실성 있게 구성하기 위하여
출판사와 대학 교수들을 상대로 전화로 때로는 만남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떻게 책을 만드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한국의 가정문화와 일본의 가정 문화가 거의 차이 나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이었다.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남존여비사상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정식은 ‘주부’ 라는 문자 자체가 가정주부와 전업주부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 사회에서 시작된 용어이고
그것이 여과 없이 대한민국에 통용되어 왔다는 것에 놀랐다.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월급봉투를 받아 가정을 꾸려나가고,
전업주부들 사이에 꽃꽂이 열풍이 불어오던 시점에서는 한국의 가정사를 연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가정사를 연구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좋은 말로 개방적인 성 문화이지 그것이 여성들에게 유리한 것이라거나 여성의 인권 혹은 ‘자주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남성들은 철저하게 하게 여성들을 욕망으로써 대해 왔고
게이샤의 문화처럼 일부의 상류층 사회에서 즐기던 ‘정신적 사랑의 유희’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일본의 남성들의 성욕은 거의 ‘변태적’ 이었다.
사실상 여성의 인권이 가장 탄압받고 있는 문화권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전 세계 그 어느 누구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대답은 동일할 것이다.
바로 무슬림의 문화가 지배하는 아랍권의 여성들의 인권이 가장 심각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하지만 정식은 연구를 계속하면 할수록 절실하게 느꼈다. ‘가장 성적으로 심각하게 희롱당하는 여성’ 들은 바로 일본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아랍권의 일부다처제는 어쨌거나 한명의 남성이 그녀들을 ‘부양’ 하는 문화에 가깝다.
최소한의 ‘책임감’ 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남성들에게는 그런 ‘책임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본의 개방적인 성문화의 이면에는 남성들의 ‘책임감’이 철저하게 배제되어있었다.
성애를 나누고 발생하는 모든 책임과 감정적, 윤리적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에게로 온전히 전가되었다.
물론 현대의 일본 사회가 여성의 ‘처녀성’을 중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남성들이 성애라는 행위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감정적 책임감과 윤리 의식에 대해서
모든 마음의 짐을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성애에 개방적인 성격을 가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정조를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의 일본 사회는 ‘자신의 정조를 소중히 여기는’ 청교도적인 여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상에 펼쳐진 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소다.
그는 ‘크리스마크 케이크‘ 라는 용어들이나 ’섣달그뭄 소바(토시코시소바 年越しそば)‘ 같은 용어들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천연기념물‘ 이라는 은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용어가 직접적인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냥 그 나이에 연애도 못해봤냐는 가벼운 농담에 가깝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처녀성을 지키는 여성을 말 그대로 ’경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처럼 남성까지 한데 묶어서 놀리는 정도가 아니라 여성을 콕 짚어서 ‘경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본 남성들의 무책임함과 변태적인 성욕은 ‘위안부’ 시스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고
피해자가 수십만명에 이를 지경이라는 대목에서 치를 떨었다.
또한 ‘치한’ 이라는 용어 역시 일본에서 유래된 용어라는 점에서도 꽤나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정식은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고 자신의 작업이 반드시 그 결실을 보기를 바랐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여성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억압받고 있는지를 한 가지씩 알아나갈 때 마다
나츠미라는 여성이 그 사회에서 받았을 억압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 나라의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혼 생활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제도일 뿐이고 아내에 대한 가장의 책임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변해버린 시대에서 남존여비사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남자들이 가장 최대한의 양보를 한
일종의 타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재차 발견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여성들의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을 향한 일본남성들의 ‘성적으로 무책임한 태도’는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그 나라의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처참한 여성들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식은 글을 구성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이것은 국제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관념 그 자체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식은 일본 관객과 한국 관객 양자 모두를 만족 시키려던 처음의 취지를 바꾸어서
한국의 관객들이 보다 더 쉽게 만족 할 수 있도록 글을 구성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나리오의 주된 내용이 일본의 그리고 그 나라의 치부를 들추어가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욕을 먹을 것이라면 기왕에 주인공을 한국인으로 내정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원고에서 주인공인 학자는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었고.
작품의 주 무대도 일본과 한국을 그리고 중국까지 삼국을 오가는 내용이 되었다.
그리고 스토리상에서 그녀의 역할과 인생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어
청교도적인 이미지의 현모양처타입의 전형적인 일본의 어머니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 나츠미가 몸담은 기획사인 OO 글로벌 측에 자신의 시나리오를 넘겼다. ‘Zhaphikel’ 이라는 필명과 함께,
그 필명 자체가 한때 유행했던 일본 해적판 만화책에서 따온 것이지만, 어지간히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그 필명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일본 본토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만화였지만,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류하와 혜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날따라 둘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 다 맥주 취향은 비슷했다. 그들이 마시던 맥주는 다름 아닌 밀러,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한때 일본에서 가장 비싼 콘서트 티켓 값을 자랑했던 록그룹
‘BUMP OF CHICKEN’ 의 ‘EVER LASTING LIE’ 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 시점은 노래가사 속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각자의 시간과 장소 속에서 인생이라는 세월을 소모하는 장면을 음악으로 형상화 해낸 것만 같은
바로 그 독특한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캐스터네츠의 합주가 고대의 신화가 펼쳐지듯이
스피커의 진동판을 떨어 울리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혜영씨 이 노래가사 의미 알아요?”
서로간의 취향이 극과 극을 달렸기 때문일까?
“아뇨 전 오늘 처음 듣는 노래에요. 노래가 굉장히 서사시 같은 웅장한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가 처량하고 서글프네요.”
류하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노래는 두 가지 버전이 있어요. 한 가지는 ‘THE LIVING DEAD’ 라는 그들의 정규 앨범에 수록된 록음악 버전이고,
다른 한 가지는 디지털싱글앨범으로 발표 된 지금 듣고 있는 어쿠스틱 기타 버전이에요.
사실 앨범에 수록된 록음악 버전은 듣고 있기에 괴로울 만큼 우울하고 괴상한 멜로디 이지만
지금 듣는 이 어쿠스틱 버전은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곡이죠.
저는 특히 이 간주부분을 참 좋아해요. 가수가 음정을 틀리는 부분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류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노래는 어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다룬 노래에요
뭐랄까 현대의 일본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요?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의 목숨에 값이 붙었어요.
목숨에 값이 붙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 여자가 카드빚이라도 왕창 지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의 어두운 폭력에 희생된 흑역사를 가진 매춘부라도 되는 것일까요?
아무튼 남자는 여자를 구해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녀를 구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해지게 되었어요.
그녀를 구명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머리를 숙이고 다니고 자존심을 버리고 구명을 해보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죠.
그 때 누군가가 농담처럼 이야기를 던진 거에요.
‘석유라도 파내지 않고서야 구해낼 수 있겠어?’
라는 비아냥거림을,
남자는 진담으로 듣고 집을 뛰쳐나온 거에요.
모래바다에서 녹슨 삽을 들고 꿈을 파내는 사람,
붉게 타오르는 태양에 몸이 타들어가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려 하지,
Sir destiny, 운명 씨 당신, 당신 말야, 사람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겠지?
두고 보라지. 이 내가 아둥바둥 발버둥 치며 몸부림치는 것을
그리고는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 돼요.
죽은 거리에서 밤의 드레스를 걸치고 꾸며낸 이야기 같은 사랑을 파는 사람,
누군가의 품에, 팔에, 몸을 맡기면서도, 마음은 늘 한 사람만을 기다려, 사랑하는 그 사람은 상냥하게 거짓말을 말했지.
‘우린 괜찮을 거야, 내일을 믿고 기다려 줘’
믿을 수 있는 요소 따위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기다려온 긴 세월,
Sir destiny, 운명 씨 당신이라도 말이야, 아마 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
몇 번째의 아침인가에도 변함없이 그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어.
라고 말하며 지금 듣고 있는 이 드라마틱한 기타반주가 시작 돼요.
반주는 힘이 넘치지만 전설적이고 또 서글프죠. 저는 이 반주를 개인적으로 최고의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잠시 류하는 말을 끊었다.
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의 뒤편으로 돌아가서 오디오를 조정하고 돌아왔다.
그날따라 바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고,
다른 바텐더들도 손님들도 이 두 사람만을 위한 무대 위에 함부로 난입해 들어오지 않았다.
혜영도 류하도 너무 일찍 바에 들어왔던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혜영의 물음에 류하는 대답했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늙어 죽어버리고,
남자는 완전한 노인이 되어서 부러진 삽을 들고 모래를 파내다가 운명에게 질문을 던지죠.
Sir destiny 운명씨 당신, 보고 있겠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가 멋지게 꿈을 파내어서 당신에게 단단히 복수 해 줄 테니까,
Sir destiny 운명 씨 당신 말야, 내 꿈이란 게 뭐였더라? 무엇이 나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고 있었던 걸까?
소중한 무언가를 기다리게 했던 것 같은데... 라고요.”
혜영은 피식 웃었다.
“무슨 결말이 그래요?”
류하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무슨 결말이 그 모양 인지,
왜 하필이면 그렇게도 지독하리만치 슬픈 노래가 지금 현대의 일본 사회의 민낯이 되어버렸는지,
또 이 나라 한국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이 노래에 공감을 하게 되었는지, 만약 모두가 행복했다면,
그랬다면 이런 노래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또 공감을 얻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죠.”
혜영은 질문했다.
“실연당한 적 있어요?”
류하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뇨, 애인이 내 눈앞에서 성폭행당하고 난 뒤 자살했어요.”
혜영은 일순간 말문을 잊었다.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풍문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당사자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말이 없던 혜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음악 다른 걸로 바꿀까요?”
류하는 급히 대답했다.
“아뇨 바꾸지 마세요. 계속 듣고 싶어요. 이 노래를 우연치 않게 내 집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제법 유명한 노래이지만 공공장소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에요.
지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군요. 그런데 이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되었죠?”
혜영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 헤헤 음악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 저는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이 노래가 여기 들어있는지.”
혜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류하는 한번 피식 웃은 뒤 입을 열었다.
“배우생활 처음으로 주연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어요.
제 얼굴 분위기가 어딘가 어두컴컴하니 학자풍이라고 이번 역할에 제격이라나, 뭐라나,
어쨌거나 발랄하고 신선한 이미지가 풍기지 않기 때문에 저를 골랐다고 하시더군요.
차분해 보이는 젊은 사람을 골라야 했는데 그게 요즘 세상에서는 오히려 구하기 어려운 얼굴이라고 하더군요.
죄다 발랑 까져서 속내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니 학자풍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젊은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꼭 맡아달라고 하시더군요. 한국인 학자의 역할인데,
일본의 여성들에 대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변천사에 대해서 연구 하다가
일본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함께 연구 활동을 하다가 책을 내고,
일본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사회에 호소하는 젊은 인권 운동가들의 이야기에요.
대중적인 공감을 얻지 못한 채 서서히 실망을 하다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일본이라는 나라에도 어느 한 쪽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고향을 떠나가서 제 3국인 중국에 두 사람이 정착해 나가는 스토리에요.
광활한 대륙의 어느 시골마을에 젊은 내외 두 사람이 정착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죠.
인간의 감정에 대한 호소를 외치다가, 인권에 대하여 사회에 공감을 호소 하다가,
결국 사회를 버리고 두 사람만의 낙원을 찾아가게 되는 그런 이야기에요.
이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인데,
솔직히 소속사측에서도 큰 흥행을 바라고 제작하는 영화는 아닌가 봐요.
단지 작품성이 아깝다고 영화를 만들기로 한 모양이에요.
왜 요즘 유명한 한국에 진출한 일본 여배우 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씨라고 있잖아요?
그녀를 통해서 일본 여성의 인권을 사회에 알리는 것이 목적인 일종의 계몽적인 성격을 가진 영화인 것 같아요.
한, 중, 일 삼국에서 순차적으로 개봉하는 모양이에요. 영화 제목도 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에요.”
혜영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거, 이거 질투나려고 하는데요? 결국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연애질하면서 놀아나겠다는 말인데?
잠깐, 누구라고요? 나카가와 나츠미? 하필 그 여자?”
류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아가씨한테 무슨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있으신 모양이네요?”
혜영이 치를 떨며 이야기 했다.
“왜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전 남자친구가 딴 여자한테 한눈팔기 시작했었다고,
그게 그 여자거든요, 그 작자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완전히 여우한테 홀린 조선시대 머슴마냥
그냥 그 여자한테 푹 빠져서는 말도 없이 나랑 연락까지 끊어버리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제까짓 게 뭐라고 그런 여자랑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지,
돌아버린 놈이라니까요? 아무튼 그 일 이후에 TV에서 그 여자만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려요. 너무 기분 나쁘고 재수가 없어서.”
대화의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혜영도, 류하도 정식의 필명을 몰랐다는 것이다.
류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아, 헤어진 거에요? 이런,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혜영은 잠시 혼자서 씩씩 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 인간이랑 헤어진지도 오래 돼서 별 감정도 없고,
결국 그래봐야 진짜도 아니고 ‘연기’ 에 불과한 거 아니겠어요?
누군가가 짜 놓은 각본 위에서 춤추는 연극 말이에요.
살아서 숨을 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연극. 아무리 진짜같이 보여도 결국 가짜에 불과한 연극 말이에요.”
류하는 그녀가 말과는 달리 굉장히 심하게 토라져버렸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결국 두 사람은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애꿎은 맥주만 마셔댔다.
똑같은 노래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한밤중의 적막한 바에서
어느 날 오랜만에 류하와 정식이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OO비어라는 유명한 체인점 형식의 제조맥주 전문점에 방문을 했다.
“여, 오랜만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류하의 넉살좋은 태도를 보고 정식이 웃으며 대꾸 했다.
“죽네 사네 울부짖더니 요즘 살만 한가 보지?”
류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그렇게 농담하듯이 말 하지 마라. 나 화낸다.”
정식은 정색을 하고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 잘못했어, 사과 할게. 그냥 꽤 밝아진 것 같아서 해 본 말이야.”
류하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래 나도 그만 하마, 그냥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불러냈어.”
두 사람은 한참을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학급의 누구는 어떤 녀석이었고,
누구는 고등학교 때 까지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었다는 둥 시시한 신변 잡담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인가 류하가 정식에게 물었다.
“야, 사실은 나 연애상담 하려고 널 불러낸 거거든?”
그 말에 정식은 대단히 놀라워하며 답했다.
“진짜? 너 수련양은 이제 완전히 잊은 거냐?”
류하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을 했다.
“사실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야, 요즘도 불면증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니까.
단지, 단지 어떤 아가씨가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이 아가씨가 남친이 있는 아가씨였거든, 솔직히 김이 팍 새더라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묘하게 자꾸 끌리는 거야,
그래서 그동안 인연을 끊지 않고 그냥 간간이 만나서 이야기나 나누는 정도였는데,
최근에 이 아가씨가 전 남친이랑 헤어졌다는 거야. 그런데 이 아가씨는 연기자라는 직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
아무 여자하고나 놀아나는 직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제야 요즘 업계에서 좀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연기를 그만 두는 것도 솔직히 아깝고,
그렇다고 매력적인 아가씨를 놓치는 것도 아깝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식은 단조롭게 말했다.
“상담 대상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니냐? 나는 연애에는 완전 숙맥이라는 거 잘 알잖냐?”
사실이 그랬기에 류하도 할 말은 없었다. 단지 조금 투덜거렸을 뿐이다.
“그냥, 오죽 답답했으면 너한테 이러겠냐.”
두 사람은 피식 웃으며 다시 어린 시절이야기를 나누며 기세 좋게 맥주를 마셔대었다.
정식이 말했다.
“너도 그리고 나도 잘돼서 큰 사람 돼서 다음에는 이런 쪼끄만 술집 말고
더 좋은데로 가서 진짜 비싼 고급술에 안주 시켜놓고 필름이 끊어질 때 까지 한 번 마셔보자.”
류하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아가씨는 부르지 말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드디어 문제의 촬영은 시작 되었고, 류하와 나츠미는 그날 처음 만났다.
각자 대본과 감독들과 스태프를 사이에 두고서, 그가 그녀에게 받은 인상은
대단히 반듯하고 깍듯한 예절을 가진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일본여성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외모 상으로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일본의 5000엔권 지폐에 등장하는 유명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ひぐち いちよう)의 그 단아해 보이는 이미지와 많이 닮은 모습이다.
류하는 비록 그다지 학식이 높지는 않았지만 이미 대본을 읽어본 이후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근대 일본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해온 가장 반듯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았다.
이를테면 서구문화권에서 한때 문제가 되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에서도 언급 되었던
‘정치적으로 반듯한(Politically correct)' 태도처럼,
사회는 때때로 개인에게 어떠한 태도를 강압적으로 요구하기도 하고
나츠미의 그 단아한 품성과 이미지는 그러한 요구의 산물인 것처럼 보였다.
촬영장소는 꽤나 국제적이었다. 때로는 중국에서 때로는 일본에서,
때로는 한국에서, 계절에 맞는 신을 촬영하기 위해 스토리의 순서를 무시한 채
편집의 용이성을 따져서 진행되는 영화의 촬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배우에게 꽤 큰 혼란을 주는 요인이다.
다음번 연기와 지금 연기의 이입되는 감정이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타임라인에 맞추어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이 아닌
시간과 공간상의 제약에 맞추어 진행되는 조각퍼즐 맞추기 작업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류하는 처음으로 주연급 배우로써 연기를 해 본 것이기에 그만큼 NG 도 많았다.
도리어 순진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류하가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아무래도 류하는 전문적인 연기자로써의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러니까 진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감정의 표현에 미숙함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배우가 또 감독이 또 스태프들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떠한 장면을 상상하고 또 실행에 옮기고 촬영을 해도,
혜영의 말이 맞았다. 그것은 ‘진짜’ 가 아니었다.
스태프들도 감독들도 또 배우들도 모두 그것을 알았고 그런 것에 익숙했지만,
류하에게는 그 작업이 어쩐지 고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꾸만 진짜와 연기를 혼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도 류하는 바에서 혜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위에는 두 명의 남성들이 다른 바텐더 아가씨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고,
음악은 혜영도 또 류하도 두 사람 모두 모르는 음악이었다. 사실 음악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혜영 씨 난 아무래도 연기에는 소질이 없나 봐요. 요즘 들어 감독님들이랑 스태프 분들 눈치 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네요.
진짜와 연기를 도저히 구분 할 자신이 없어요.”
사실 혜영은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 와 주는 이 순진한 남자에게 어느 정도 흑심을 품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도통 그린 라이트가 켜진걸 아는지 모르는지 숙맥도 도통 이런 숙맥이 없어 답답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우하고는 같이 살아도 곰하고는 같이 못산다더니 자신이 딱 그런 꼴이라고 생각하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 여기서 파는 안주 말고 다른데서 치킨 좀 시켜먹을 까요? 요즘 신호등 치킨이 유행이라던데.”
류하의 표정은 또다시 멍청해졌다. 그리고 혜영은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고,
“신호등 치킨이요?”
결국 혜영은 또다시 그 순진한 표정에 홀랑 넘어가서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아는 게 뭐에요? 신호등 치킨도 몰라요? 마약김밥은 아시나?”
이쯤 되면 류하라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 그런 거 모르면 뭐 사람 죽어요? 모를 수도 있지 무안을 주시고 그래요.”
혜영은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여자 자존심에 먼저 대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치킨을 사겠다고 그를 달래기로 했다.
“아, 웃겨라, 미치겠다. 숨넘어가시겠네, 그래요 내가 잘못 했어요. 내가 잘못 했으니까 내가 치킨 살게요 우리 같이 먹어요.”
류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잠자코 있었고, 혜영은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거기 OOO치킨집이죠? 여기 신호등 치킨 3색으로 모두 다,
빨간색은 한 마리로 노랑이랑 초록은 반 마리씩 총 두 마리 주세요, 여기 OO 칵테일 바에요. 어딘지 아시죠?”
듣고 있던 류하는 도저히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혜영에게 물었다.
“빨강? 노랑? 초록이요? 무슨 치킨이 그래요?”
혜영은 마치 류하의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약간 으스대는 표정으로 엄하게 말했다.
“잠자코 기다려 보세요. 도착하면 알아요.”
잠시후 정말로 치킨이 배달되어 왔고 혜영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배달원에게 건넸다.
그리고 류하는 그 액수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니 무슨 치킨이 두 마리에 45000원이나 해요?”
혜영은 점잖게 그를 나무랐다.
“촌스러운 티 그만내고 가만히 있어 봐요. 일단 치킨이나 먹자구요.”
혜영은 일단 첫 번 째로 빨간 색깔의 치킨을 한 조각 들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금세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뱉을만한 작은 통을 찾아 허둥대다가
그냥 못이기는 척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이야기 했다.
“아 이거, 달아요, 무지무지 달아요, 단 음식인데, 도저히 치킨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이건 아니야 이건 진짜 아니에요. 무슨 치킨이 아니라 과자 먹는 느낌이야.
그것도 너무 달아서 느끼한 과자. 딸기 맛 과자를 아주 곱게 가루를 내서
그 가루를 아주 두껍게 치킨에 입혀놓은 그런 맛이에요,
완전 과자 반, 치킨 반인데, 아 무, 치킨 무 먹어야지.”
급하게 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는 말했다.
“아, 진짜 빨간 색은 아니야, 이건 진짜 아니야, 이거는 누군가랑 인연을 끊고 싶을 때,
그 맘에 않드는 사람 입속에 넣어주면 자연스럽게 서로 결별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맛이에요.
그러니까 45000원 짜리 치킨 무를 샀는데, 거기에 덤으로 치킨이 딸려온 그런 느낌이야. 아, 돈 아까워 미치겠네, 진짜.”
투덜투덜 거리며 혜영은 이번에는 노란색 치킨을 집어 들고 조금 뜯어서 시식을 해 봤다.
잠시 동안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아까보다는 밝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건 진짜 그 옛날 과자 바나나킥? 그거 맛인데요. 아까보다는 먹을 만한데, 어쨌거나 이것도 그렇게 맘에 드는 맛은 아닌 것 같아요.”
대화의 이 시점에서 그, 바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혜영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그다지 큰 무리가 없는 사건의 전개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먹방에 모두들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던 것, 류하도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혜영은 곧 초록색깔의 치킨을 집어 들고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 이거 맛있어, 맛있어요. 이거. 메론 맛인데,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먹을 만 해. 이거 먹어요, 이거. 초록색이 답이야 초록색이 맛있어.”
말이 끝나자마자, 단골손님이던 류하와 혜영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다른 바텐더 아가씨들이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류하나 다른 손님들은 그녀들이 왜 웃는지 도무지 짐작을 못하고 있었고, 혜영은 류하에게 치킨을 먹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자요, 먹어 보라니까요. 초록색이 맛있어요.”
우물쭈물, 류하는 이걸 먹어도 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는 표정으로 초록빛깔의 치킨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한 조각을 집어서 기세 좋게 씹어 보았다.
그 좋은 기세는 윗니와 아랫니가 정체불명의 초록빛깔 과자 같은 치킨을 분쇄하기 직전 까지만 유지 되었을 뿐이고,
단 한 번 씹고 나서 그 직후 류하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거 도대체 뭐에요? 이거 사람이 먹는 거 맞아요?”
혜영은 그 순간 한숨을 포옥~ 내쉬었고, 동료 바텐더 아가씨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아직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혜영은 류하에게 다른 것도 먹어보라고 권했다.
“일단 무 한 조각 드시고 입가심 좀 하신 담에 다른 색깔도 먹어보고 뭐가 제일 맛있는지 한번 이야기 해줘 봐요.”
류하는, 마치 전쟁에 임하는 장수와 같은 비장한 표정으로 나머지 두 가지 색깔의 치킨을 노려보다가
일단 노란색을 한번 먹어 보았고, 또다시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류하는 황급히 대충 씹어 삼킨 후에 또 무 한 조각을 집어먹고 잠시 표정관리를 하더니,
이윽고 마지막 빨간색 치킨을 집어서 먹어 보았다. 일단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아, 역시 나랑 혜영씨는 취향이 많이 다른가보네요. 난 이게 제일 맛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바는 온통 폭소로 가득차고 말았고, 혜영의 미간에는 자연스레 내천(川)자가 그려지고 말았다.
“아니 그 딸기 맛은 진짜 인연 끊고 싶은 사람들한테나 먹이는 거라니까 이 오빠가 정말...”
혜영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류하는 아까워서 먹는다는 태도로 빨간색 치킨을 열심히 주워 먹으며 말했다.
“아니 이 비싼 치킨 버리면 아까우니까 일단 이거라도 좀, 먹자구요.”
혜영은 그런 류하를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쉬면서 생각했다,
‘그나마 먹으라고 시키면 먹기는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다른 동료 바텐더 아가씨들과 손님들은 한참을 웃어대었다.
정식은 시나리오를 넘긴 후 그것을 정식으로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
이메일을 통해서 스태프들과 또 감독들과 대화를 진행 했고, 또 시나리오를 수정, 보완해 나갔다.
그리고 영화의 촬영 진행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고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인가, 한국에서의 촬영분량 작업을 진행하기 전에
감독이 그에게 한번 와서 참관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나츠미의 얼굴을 근처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은 정식은 그러겠노라고 답장을 보냈다.
거대한 정사각형의 로고는 모래시계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그 모래시계는 거의 대부분의 모래를 아래쪽으로 흘려보내고 뒤집히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정식은 OO 글로벌 한국지사의 건물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회사는 모래시계가 로고에요
모래시계라는 것은 언젠가는 윗부분의 모래가 다 떨어져 내리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을 반대로 뒤집어야 하는 물건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모래시계가 뒤집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은 만물을 유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간의 고뇌와 노력을 상징하죠. 근사한 로고죠?”
자리에는 부사장님께서 친히 참석을 하셔서 회사의 기원과 모토 그리고 이상에 대해서 정식에게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설명을 하고 계셨다.
“정식씨의 시나리오 초고를 보니 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여성의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서 단지 성문화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해소하기 이전에 여성들이 치뤄야 할 감정적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한
남성들의 기본적인 책임감이 결여된다면 어떠한 결혼제도나 사회제도 또 문화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남성들의 무책임한 성욕의 발산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강렬한 메시지에 감동 받았습니다.
결국 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사회라는 거대한 괴물과 같은 거대한 집단이
개인이라는 작은 자아에게 어떠한 태도와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고
결국 우리가 또 성문화 개방론자들이 부르짖는 또 신세대들이 부르짖는 ‘위선’과 ‘가식’의 영역에 속하는
‘책임감’ 이라는 요소가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의 소산이라는 것을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통감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통쾌한 감정마저도 들더군요.
실례지만 혹시 정식씨 과거에 작가로써 한국 문인 협회에 등록되신 분이신가요?
아무리 보아도 이 분야에 초심자로는 보이지가 않으신데.“
정식은 가볍게 겸양의 말씀을 건넸다.
“아직 제가 많이 미숙해서 그런 영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등단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다 쉬운 길은 아니더군요.”
부사장님은 가볍게 웃으셨다.
“이거 안타까운 일이군요. 정식 씨 같은 우수한 인재를 몰라보다니.”
정식은 살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제가 부족하고 부덕했던 것이지 한국의 문학계가 부족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사장님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정식은 자신이 무사히 이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 사람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 스태프 분들과 촬영과 관계된 자세한 사항들을 논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급히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이만.”
부사장이 자리를 뜨고 나서 감독은 정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부사장님께서 정식 씨를 아주 좋게 보신 모양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쭈욱 함께 일하실 수 있게 되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나리오가 나오시면 저희 쪽에 꼭 연락을 주십시오.”
정식은 약간의 겸양의 말을 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은 환히 웃으며 정식에게 오늘 불러낼 이유에 대해서 용건을 꺼냈다.
“다른게 문제가 아니고요 스토리상에서 나츠미양과 주인공인 정일 씨가 처음 인권운동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시나리오 작가분과 조금 상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일단 촬영장으로 가시죠. 배우 분들도 보시고 배역에 대해서 혹시 이견이 있으시다 거나
아니면 가지고 계신 생각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일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촬영현장은 국립중앙 도서관 이었다.
류하와 나츠미가 함께 책을 제작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대목이었다.
정식은 촬영장에 와서 류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대단히 놀라워했다.
“야 최류하! 너 여기 웬일이냐? 단역으로 출연한 거야?”
감독은 류하와 정식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어라? 두 분이 아는 사이셨어요?”
놀라기는 류하도 마찬가지였다.
“정식이 너는 여기 웬일이냐? 나야 여기 주연배우로 촬영 온 거지만 너는 대체?”
정일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니가 주연이라고? 니가 정일이 역할이란 말야?”
류하는 정식이 정확한 캐릭터 이름을 말하자 더욱 놀랐다.
“니가 내 캐릭터 이름은 어떻게 아냐?”
정식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 영화 시나리오 내가 쓴 거야.”
류하는 굉장히 놀랐다.
“진짜? 니가 이 영화 시나리오 썼다고? 정말로?”
한쪽에서 나츠미가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정식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 이분께서 시나리오 작가분이세요? 반갑습니다. 나츠미라고 해요.”
감독은 이제야 정신이 든다는 듯 은근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거, 이거 정식씨랑 류하군이 서로 지인이라니 잘 되었네 우리 서로 인사하고 슬슬 촬영 이야기 합시다.”
대화의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류하가 정식이 나츠미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또 혜영과는 어떠한 관계인지를 여전히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편 정식 역시도 자신의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기 보다는 일단 조용히 분위기에 묻어가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은 촬영의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츠미와 정일이 열심히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하는 장면들을 촬영해 나갔다.
감독은 간간히 정식에게 자신의 의문점들을 물어보았고 정식은 거의 형식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방처혼(訪妻婚)이라는 제도가 잘 이해가 않되네요.
아내의 집을 찾아와서 관계를 치르고 간다? 정식으로 당당하게 오는 건가요?
아니면 월담하듯이 슬그머니 오는 건가요?”
류하는 마치 천생 학자였다는 듯이 능숙하게 사료를 뒤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츠미는 무언가 다른 사료를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처음 발견한 사람 특유의 밝은 톤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 여기 나와 있네요. 방처혼 제도에서는 남자가 아내의 집을 찾아왔다가 가는 것이
일종의 비밀스러운 행사였다고 적혀있네요. 어두운 밤에 몰래 찾아와서 닭이 울기 전에 슬그머니 떠난다고 적혀있어요.”
두 사람은 도서관 내에서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능숙하게 호흡이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감독은 넌지시 정식에게 의향을 물어보았다. 카메라는 계속 촬영 중이었다.
“어떻습니까? 저 두 사람 은근히 분위기가 좀 묘하지 않나요?
류하군이 주연급 연기가 처음이라서 그런 것인지 감정이입이 굉장히 깊어요.
그리고 나츠미양도 그런 류하군의 감정에 보조를 맞추다보니 지금은 두 사람이 굉장히 친밀해져서 마치 연인 같은 분위기가 나죠,
보시기에 어떠신가요?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의도하신 것과 다른 점이라던가 아니면 특별히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정식은 거의 감정의 기복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간신히 적절한 대담을 할 수 있었다.
“아니요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다른 첨언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의도한 시나리오와 약간 다른 점도 있기는 하지만 그 느낌이나 맛이 나쁘지는 않네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내심에서는 질투심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감독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정말 잘 되었군요, 처음에는 류하군이 감정 연기가 워낙 서툴러서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두분이 지인이신 데다가 연기도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잘 되었군요.”
정식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정신상태로 감독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촬영은 스토리의 여러 부분들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구하는 모든 신들을 촬영하는 것이었고 꽤 긴 시간 촬영이 이어졌었다.
집에 돌아온 정식은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억제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나리오작가가 처음부터 여배우에게 흑심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이야기한다면 대단한 추문이 될 터였기 때문이다.
한편 류하는 자신이 출연하게 된 영화가 정식의 시나리오에서 시작된 영화라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지만
사실 그는 순수한 놀라움 이외의 다른 감정이라고는 ‘반갑다’ 는 감정뿐이었다.
그날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 몇 사람과 함께 또 나츠미와 류하가 호프집에서 맥주를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들도
대부분 정식과 류하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 녀석 하고는 진짜 불알친구라니까요,
초등학교시절 원래 서울에 살다가 지금 살고 있는 부천으로 이사 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같은 학교였어요. 나중에 대학교 들어갈 때는 전공이 달라서 헤어졌지만,
아 그 녀석은 국문학과 출신이고 저는 사회복지학과였는데 아무튼 대학교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계속 친구였어요.”
그날 류하는 오랜만에 친구 덕에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나츠미가 말을 이었다.
“아 정말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들고 솔직히 고민이 많이 들었어요.
과연 제 조국에서 이런 시나리오를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또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워낙 마음에 드는 스토리여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은 원래부터 시나리오작가셨나요?”
나츠미의 질문에 거의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류하는 될 수 있으면 우쭐해 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이며 나츠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뇨 그 녀석 원래 시문학이 전공이에요, 고등학교 때 그 녀석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인지 아니면 글을 쓸 것인지 엄청 고민했었어요.
미술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만류했지만 결국 문학도의 길을 선택했죠.
솔직히 저는 그 때만해도 녀석이 문학계에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조금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죠,
아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다 쓰고 다시 봤어요, 그 녀석.”
스태프들은 정식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차례로 질문을 던졌고 류하는 답해주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술자리가 파한 뒤 류하는 스태프들과 헤어졌고, 나츠미는 스태프들과 함께 전용차로 귀가했다.
그리고 류하는 약간 취한 상태로 OO 칵테일바의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혜영씨.”
얼굴이 벌개진 채로 배시시 웃는 그를 보며 혜영은 마치 바가지 긁는 마누라처럼 투정을 부려댔다.
“뭐에요 완전 술취해가지고 무슨 집에 돌아와서 마누라 찾는 주정뱅이 남편마냥, 나 류하씨 애인 아니거든요?”
토라진 혜영의 얼굴을 보며 류하는 여전히 배시시 웃고 있었고
다른 바텐더 아가씨들은 혜영의 뻔뻔한 내숭에 속이 뒤집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류하는 웃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서 피치크러쉬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는 잠자코 앉아서 홀짝 홀짝 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답답한 혜영이 물었다.
“뭐에요? 오늘따라 미리부터 술 취해서 들어와서는 잔뜩 분위기만 잡고 앉아있고. 무슨 일 있어요?”
류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이야기 했다.
“나... 있잖아요?”
류하는 또 뜸을 들였다. 그리고 혜영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화를 냈다
“뭔데요?”
류하는 한 번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나 2주 후에 해외 로케이션 가요, 중국으로 가서 대략 한 달간 촬영하고 돌아온대요.”
혜영은 결국 류하가 나츠미와 해외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에 불과한 이야기를 듣고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이야기 했다.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왜 하시는데요?”
류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혜영은 조금 뜨끔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설마 우는 거에요?”
마치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류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복잡한 내심이 그대로 얼굴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요, 않 울어요. 우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혜영씨한테 말없이 그냥 떠나면 않 될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서 그냥 이야기 해 본 거에요.“
고개를 들어 올린 바로 그 동작처럼 말이 끝나자마자 류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칵테일 값을 계산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혜영은 끝내 그를 붙잡지 않았다.
류하는 밤거리를 서성거렸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고,
발길 닿는 대로 아무데나 돌아다녔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투정 섞인 감정만이 무럭무럭 가슴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정식이 썼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언가 사회적인 지위에서 정식과 자신 사이에 어떤 큰 선 하나가 길게 획을 그려 서로를 갈라놓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류하는 스마트폰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류하는 공원에서 정식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정식에게 말을 걸었다.
“여~ 유능한 시나리오작가님 반갑습니다.”
정식은 류하의 얼굴을 보며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대꾸했다.
“시답잖은 말 하자고 불러낸 거냐?”
류하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정식은 맥주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시고는 류하에게 다시 질문 했다.
“그래서, 왜 불러냈는데?”
류하는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나, 있잖아, 나츠미씨한테 자꾸만 호감이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더라.”
정식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류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확실히 연기가 미숙하긴 미숙한가봐, 연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감정이 이입이 돼,
가볍게 손을 스치는 정도에 불과한 별것도 아닌 스킨쉽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츠미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거든,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나는 그러면 않된다는 거야.“
정식은 피식 웃으며 이야기 했다.
“왜 않되는데?”
류하는 굉장히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게, 사실은 양다리거든.”
정식은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며 질문 했다.
“호오 그래? 양다리? 우리 순진 남 류하군이 웬일이실까? 그래 나머지 한쪽 다른 여자는 누구냐?”
류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그 왜 OO 사거리에 OO 칵테일 바라고 있잖아 거기 일하는 바텐더 아가씨야.”
순간 정식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냐?”
류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대꾸했다.
“김혜영씨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식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맥주병으로 류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버리고 말았다.
“이 개자식아 혜영이는 내 여자야!”
사실 그 순간 정식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말을 뱉어버렸고,
흐릿해진 이성으로 가물가물 더듬어 혜영과 정식간의 관계를 눈치 챈 류하는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던 정식은 우물쭈물,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정식이 혜영을 자신의 여자라고 이야기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그가 차버린 여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 좋아하는 여성은 더 이상 혜영이 아닌 나츠미였다.
하지만 류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의 폭발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폭력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정식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이라는 관용적 어구의 의미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었다. 말없이 류하를 노려보던 정식은 황급히 뒤돌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류하는 멍청한 정신상태로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곱씹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혜영의 말이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처럼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 작자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완전히 여우한테 홀린 조선시대 머슴마냥
그냥 그 여자한테 푹 빠져서는 말도 없이 나랑 연락까지 끊어버리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그리고 다음 순간 류하는 정식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에서는 정식과 혜영이 서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갑작스레 다시 찾아온 그를 혜영은 일단 내치기보다는 조용히 맞아들였고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다.
“어떻게 왔어요?”
혜영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질문 했다. 그리고 정식도 그다지 편치는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류하, 알아?”
혜영은 내심 무척이나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날카로운 어조로 대꾸한다.
“그 사람을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정식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 자식 내 친구야.”
혜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뭐 어쨌는데요?”
정식은 아무 말 없이 맥주만 마셨다.
그리고 혜영은 잠시 침묵 하다가 곧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선을 그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했죠? 전화 하지 말라고, 난 오빠란 사람 잊은 지 오래에요
류하 오빠가 오빠 친구건 아니건 그건 오빠가 더 이상 상관 할 문제가 아니라구요.
알아요? 오빠는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에요.”
말없이 맥주만 마시던 정식이 입을 열었다.
“그자식이 다른 여자랑 너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알아?”
마침내 혜영은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잖아! 말도 없이 연락 끊어버린 게 누군데! 내가 아직도 오빠 여자로 보여? 당장 않나가?”
그 순간 바의 출입문이 열리며 류하가 쳐들어왔고 류하는 다짜고짜 정식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혜영은 곧 뒤따라 나갔고 혜영과 절친했던 바텐더 두어명도 곧 뒤따라 나갔다.
온같 네온사인들이 화려하게 빛나는 빛으로 가득한 어두운 밤거리에서
류하는 오랜 친구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며 미친놈처럼 큰소리로 외쳤다.
“개자식아 나츠미씨가 좋다고 혜영씨 떠나갔으면 니 감정에 스스로 책임을 져!
니가 뭔데 이 시간에 혜영 씨 찾아와서 이러쿵 저러쿵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정식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류하를 올려다보고 류하는 계속 외쳤다.
“너 그렇게 쉽게 여자 버리고 딴 여자한테 한눈이나 팔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지마 개자식아!”
정식도 일어나며 마주 외쳤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이 씨발새꺄? 니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
류하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마주 외쳤다.
“나 한테는 그래도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는 게 있고 양심이라는 게 있어!
너처럼 사귀다 말고 한눈 판건 아냐! 단지 누구를 선택할지 선택의 기로 속에서 방황하는 정도지 너처럼 무책임하게 굴지는 않아!”
정식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육탄돌격을 해 왔고 두 사람은 엉겨 붙어 싸우는가 싶더니
이내 류하가 정식을 길 한쪽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류하가 다시 외쳤다.
“난 너한테 나츠미씨를 양보하지도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혜영씨에게 네가 접근하는 것도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겠다.
네가 뭔데 혜영씨에게 집적거려? 결국 네가 버린 여자 아냐?”
황급히 두 사람을 따라 나려온 혜영은 마침 그 장면을 보게 되었고 류하의 말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나온 다른 바텐더들도 그 장면을 함께 보았다.
“류하오빠, 오빠도 결국 나츠미인가 뭔가 하는 그 여우한테 가려고? 저기 저 개자식처럼 나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 가려고?”
류하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고 그 망설이는 류하의 표정에 혜영은 큰 상처를 받았다.
정식은 말없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떠나갔다.
혜영은 외쳤다.
“말해봐! 어느 쪽이야? 나야? 아니면 나츠미야?“
혜영은 거의 울고 있었고
류하는 완전히 당황해서 자신의 팔다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허둥거렸다,
혜영은 매몰차게 외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됐어!”
정식은 방 안으로 돌아와 “반딧불이의 빛” 이라는 영화 포스터 속의 나츠미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문득 그녀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무척이나 간절한 것이었다.
마치 혜영을 처음 만나던 그 날 그를 사로잡았던 강렬한 열망처럼 한순간의 어떤 욕구는
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사로잡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정식은 자신의 눈 코 입을 매만지다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한 몸짓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시간은 너무 늦어버렸고 지금 시간에 문을 연 화방이나 문구점 같은 곳은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하고는 하는 2절 켄트지는 사실 특별한 처리를 해두지 않는 한
변색의 문제 때문에 공기 중에서 장시간 보관이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는 도저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방안을 서성거렸다.
밤은 깊어갔고 이윽고 새벽이 왔을 때,
정식은 책상위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어느덧 아침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온 정식은 서둘러 OO 문구점에 갔고 종이와 연필을 사왔다.
이젤은 처음부터 그의 방 안에 준비 되어 있었고, 이제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의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한참을 사진을 고르던 정식은 이내 마음을 정했다.
자신이 소장한 그녀의 사진들 중에서 가장 정숙해 보이고 또 미스터리해 보이는
또 신선해 보이는 사진 한 장을 선택해서 그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첩재산(叠彩山 디에차이샨) 산자락 아래 인구 500만의 소도시 계림(桂林)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한때 영국령이었던 홍콩이 근처에 있는 유명 관광지에
관광객이 아닌 남 녀 한 쌍이 밤거리를 거닐며 먹자골목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먹고 있다.
다름 아닌 류하와 나츠미다. 두 사람은 화자펀(花甲粉) 이라는 국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거리에는 많은 길거리 음식들이 있었고 불판 위에 바로 생굴을 올려 양념과 함께 구워 파는 곳도 있었다.
한참을 맛있게 국수를 먹던 나츠미가 류하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한다.
“우리 여기 정착 할래요?”
장면인즉슨 영화의 스토리상에서 마지막 단계로 일본 국내에서 책을 내고
여론의 뭇매를 맞아가며 일본 여성의 인권신장을 토로하다가 지쳐버린 두 사람이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 3국인 중국에 정착하는 대목이었다.
영화상에서는 류하의 조국인 한국도 두 사람의 책과 인권운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 냉담한 대중들의 반응은 일본에서는 더 했다. 심지어 서명운동을 하던 부스가
분노한 대중들의 손길과 발길질 아래 부서지는 수모까지 겪은 두 사람이 마침내 한국과 일본을 떠나버릴 결심을 한 것이다.
문제는 류하의 감정상태에 있었다.
웃으며 질문하는 나츠미의 얼굴 위로
“됐어!”
라고 고함을 지르며 뒤돌아서는 혜영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이는 것이다.
결국 류하는 또다시 대사를 잊어버리고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웅얼거리고 말았다.
“어, 저기, 그게...”
그 순간 들려오는 감독의 목소리
“컷!”
류하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감독은 굉장히 화가 났지만 류하와 정식의 관계를 고려해서 자신의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고 부드럽게 이야기 했다.
“우리 류하군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찍죠.”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나츠미는 짐짓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류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류하 씨, 무슨 일 있어요?”
류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나츠미를 바라보다가, 목울대를 한 번 묵직하게 움직이고는 이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또 다시 나츠미의 얼굴 위로 혜영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리고 류하는 또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츠미는 여성 특유의 직감으로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그 동정에 관심을 표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나츠미 역시 우물쭈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채로 가만히 고개 숙인 류하의 뒤통수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밤의 숙소에서 좁은 방 안에서 술을 마시던 류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꾸만 그날의 혜영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류하는 생각했다.
‘책임감 이라는 것이 애정 어린 호감보다 우선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류하는 마지막 대사 한마디에서 자꾸만 주춤 주춤 더듬거리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요, 우리 같이 여기서 살아요.”
라고 나츠미를 향해 웃으며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도저히 입에서 내뱉어지지가 않았다.
류하는 홀로 방안에서 누구를 향한 말인지 대상이 불분명한 감정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대사를 되뇌어 보았다.
“그래요, 우리 같이 여기서 살아요.”
말을 하는 류하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건가?
이게 소위 말하는 ’연기‘ 라는 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혹은 다른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진심이 아닌 대상과 혹은 애증의 대상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게 그런 게 연기라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왜 갈등을 하고 있나?’
자신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이 한심스러운 일이었지만
류하는 정말로 스스로의 진심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어떠한 모습인 것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고뇌와 갈등은 점차로 깊어져갔다.
나츠미는 오늘 저녁 촬영에서의 류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남자 배우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성(자신)을 향한 호감을 혹은 스킨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주저하는 모습의 남자배우를 만나게 된 것은 처음 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어떠한 책임감이 있다, 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모습이 책임감으로 비롯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도 짐작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사실 나츠미는 갈등하고 있었다. 류하라는 남성에게 그의 속내가 어떠한 것인지를 물어본다는 것이,
타인의 속마음을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 경직된 사회구조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츠미에게는 도저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츠미는 밤을 새우며 갈등하고 있었다.
결국 다음 날 저녁,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어제와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류하는 또다시 대사를 내뱉지 못했다.
감독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삭히고 있었고 스태프들은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나츠미는 용기를 내어 어제 밤이 새도록 고민하던 질문을 그에게 던지기로 결심했다.
“류하 씨 혹시 애인 있어요?”
나츠미는 밤새 고민했고 혹여 그에게 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가볍게 질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류하는 나츠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혜영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걱정이 가득한 나츠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조차도 도대체 왜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불가사의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류하는 어떤 막중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없어요.”
말을 꺼내고 나서도 류하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사실 그에게 지금 현재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없는 것은 반쯤은 사실이었다.
나츠미의 표정이 조금 밝은 미소로 변하면서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옛날 에는요? 과거에 사귀던 여자도 없었어요?”
류하는 자신의 생각 보다는 덤덤하게, 하지만 아직도 어두움이 간직된 얼굴로 말했다.
“있었어요. 몇 년 전에.”
나츠미는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며 다시 질문 했다.
“왜 헤어졌어요?”
류하는 한참을 심호흡을 하며 잠시 고민을 했다.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츠미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고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아픔을 염려하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류하는 한참 동안을 그 모성애로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자신도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기면서,
그리고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의 동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다.
사실 지금 이 촬영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그 두 사람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수련이하고 같이 밤에 으슥한 골목길을 지날 때였어요.”
자신 스스로도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타인에게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태연하게 털어놓는 자신 스스로를
“오른쪽 골목길 이었을 거에요. 남자애들 목소리하고 여자애 목소리가 들렸는데,
꼭 싸우는 소리 같았어요. 수련이가 그냥 가자고 제 팔을 잡아끌었는데,
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은 기이한 예감을 느꼈죠.
누군가가 나에게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 하는 것 같았어요.
결국 수련이의 팔을 뿌리치고 그 문제의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잠시 심호흡을 하는 류하, 그리고 나츠미는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왠지 그 뒷이야기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생각하는 일이지만, 저는 간혹 후회를 해요. 내가 조금만 더 비겁한 인간 이었다면,
나를 잡아끄는 수련이의 팔을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도 수련이의 그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있었을 텐데.”
류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마치 그 때 그 장소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이한 느낌
흔히들 말하는 데자뷰 현상을 겪는 것 같은 기분을 받으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촬영장의 많은 사람들이 그 날 그 별이 빛나는 계림의 골목길에서 그 상처 입은 영혼과 마주하고 있었다.
“워낙 어두워서 얼굴도 볼 수 없었어요. 여러 명의 남자아이들이 한 교복 입은 여학생 하나를 희롱 하고 있었어요...”
“아이 씨팔 꼰대새끼가! 야! 너 가던 길이나 가라?”
새파랗게 어린 한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지거리 였다.
류하는 황당한 감정마저도 느꼈다.
“니들 뭐야? 이봐요 아가씨 괜찮아요?”
이 때 까지만 해도 류하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어서 빨리 도망가요!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니들 뭐야 이 자식들아?”
하지만 그 어린 악마들은 도망을 간다거나 겁을 집어먹은 태도가 아니었다.
그 아이들에게 류하는 단지 귀찮은 방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미친 새끼가 뒈지고 싶은가?”
순식간에 벌어진 주먹다짐, 류하는 형편없이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수련은 비명을 질렀다.
“류하야~!”
당황한 수련은 스마트폰을 꺼내어 경찰에 연락을 시도했고 그 어린 악마들은 그 행동에서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반쯤 정신을 잃은 류하를 내버려 두고 수련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CCTV도 없이 그 흔한 노란 나트륨등조차도 저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골목길,
수련은 당황했고 한 녀석이 그녀의 팔을 쳤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액정이 깨져버렸다.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 응급실에서 였어요. 이미 사건이 벌어진지 하루가 넘게 흘렀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 자식들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워낙 어두웠던 데다가 처음부터 눈을 다쳐서 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어요.
수련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죠. 그리고 아버지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어요.”
류하는 턱을 덜덜 떨며 말을 이어갔다.
“왜 어린 시절 학교에서 종종 선생님들이 말하지 않나요?
이 세상에 완전범죄 같은 것은 없는 거라고 죄지은 아이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 있다고,
언제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고 잘못 했으면 얼른 어른들께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면 용서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어깨를 들썩거리는 류하
“근데 그게 말짱 다 개소리더라구요. 난 그 개자식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수련이는 완전히 미쳐버려서 자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나쁜 놈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희희덕 거리며 잘 살 고 있을 테고 아픔도 고통도 온전히 내 것이고,
도리어 잘못한 놈들이 더 큰소리치며 잘 살고,
수련이의 죽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뉴스거리도 될 수 없는 시시한 사건이고,
모든 것은 다 나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고 친구 녀석들이 또 친척들이 이야기 할 때는
그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까지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탓만 늘어놓고,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린 악마자식들의 동정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완전범죄라는 게 그렇게 쉽게도 만들어질 수도 있구나,
꼭 로드킬 당하는 쥐새끼나 고양이 새끼처럼 사람이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짓밟히는 게
현실에서 엄연히 생길 수도 있는 일이구나,“
조금씩, 조금씩 류하는 감정을 추슬러 나갔다.
“그날 그 골목길의 얇은 콘크리트 벽이 바로 이 세상의 차가운 현실이라는 벽 그 자체더군요.
아무도 그 벽 너머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던 그 때 그 순간처럼,
세상은 우리를 그리고 저를 용납하거나 이해하거나 구원하려 하지 않았어요.”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는 나츠미
“처음에는 별 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자해도 여러 번 해 보고, 왜 여기 목에 상처 보여요?
그 때 칼로 경동맥을 찌른 상처에요, 몇 번이나 죽으려고 해 봤지만 사람 목숨이라는 게 생각보다 굉장히 질기더라구요.
수련이를 따라 죽지도 못하는 비겁한 저를 반추 해 볼 때마다,
정말이지 수련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살이라는 수단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을지 생각되고,
그러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와요.”
아무런 말없이 스태프들이 그들의 주위에서 류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매년 미국에서 총기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거?
만 몇 천명에서 몇 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총을 이용한 살인과 자살을 모두 포함해서 그 정도 숫자가 매년 죽는대요.
그리고 총이 전혀 없는 우리나라에서 지난 2015년 자살로 죽은 사람이 무려 13000명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있잖아요, 웃기는 건요. 총을 이용한 자살시도의 성공률은 무려 85%에 달해요
그리고 총을 이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이용한 자살시도의 성공률은 얼마인지 알아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2%에요. 고작 2% 라구요.”
나츠미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내가 가슴이 아픈 것은 있잖아요,
다른 곳도 아니고 정신병동에서 그 폐쇄된 환경 안에서
그 어떠한 자해수단도 없었던 수련이가 자살이라는 수단을 성공하기 까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지가 너무나도 절절히 공감이 가는 거에요.”
잠시 숨을 고른 류하는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하리만치 수치스러웠던 시간을 살아왔어요.
내가 여전히 살아서 숨을 쉬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 대한 가장 커다란 모욕의 순간들이었어요.
건강은 지독하리만큼 악화 되었고, 마약에 가까운 신경안정제와 수면제가 없으면 잠도 잘 수 없었어요.
결국 다니던 직장마저도 그만 두어야 했을 정도로,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다가,
왜 얼마 전에 만나본 적 있죠? 정식이라고, 그놈 필명도 참 웃기게 지어놔서 나도 몰랐는데.”
나츠미가 놀라서 물었다.
“아 그 이번 영화 시나리오 작가분이요?”
정식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고 그 가벼운 미소 한줄기에 모두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네 바로 그녀석이 저한테 단역 배우 일이라도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최소한 몸이 고된 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은근히 부추겨서 이 업계에 뛰어든 거에요.
그리고는 정신없이 촬영현장 쫒아다니다 보니까 어떻게 아픔이라는 것도 천천히 작아지더라구요.”
류하는 마시던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OO사 라는 사찰에 청수(淸水) 라는 스님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께서 저를 많이 위로 해 주셨어요. 살다보니 그분 말씀이 맞더라구요.
그때로 돌아가 본들 무엇 할 것이며 기억은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지, 왜 한번 생각 해 봐요,
나나 수련이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혹은 두 사람 모두가 그 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고, 한번 생각 해 보세요, 얼마나 웃기는 일이에요 그게?
그게 삶이겠어요? 그냥 연극이지? 아니면 그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다면,
수련이는 기껏 죽었는데 자신을 왜 다시 살려낸 것인지 길길이 미쳐 날뛸 테고
서로가 그 불편한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게, 과거로 돌아간다는 게 사실상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 아니겠어요?
살다보니 그분 말씀이 맞더라구요. 처음에는 그런 걸, 그런 이론에 불과한 말을 납득한다고 해서,
그런다고 수련이가 살아 돌아오느냐고 혼자서 날뛰었지만, 살다보니 그 말이 맞아요. 과거로 돌아가 본들 무엇을 하겠어요?”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나츠미의 눈빛이 빛났다.
그것은 대단히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가진 눈빛 이었고 그 순간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류하에게 질문했다.
“지금 이 순간, 류하 씨는 저에게 그동안 숨겨진 본심을 말 해 주었어요.
아마 지금 류하씨의 마음이 또 심정이 그때와 가장 비슷하겠죠,
그런데 류하 씨, 만약 지금이 그때 그 순간의 골목길이고,
그때 그 골목길 안에 있던 여학생이 저라면 류하 씨 어떻게 하실래요?”
사실상 류하의 인생을 통털어서 가장 불가사의한 순간이었을 것이고,
또 그 비정상적인 사건들이 류하의 인생을 시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부터였다.
류하는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강한 데자뷰 현상을 겪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류하의 내면 상태를 전혀 짐작 할 수 없었지만 류하는 지금 이 순간 그 때,
그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촬영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두 남녀의 대화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류하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9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B급 고어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린 한 시각적 이미지들이었지만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한 여성의 목소리,
일면식조차도 없고 그 어떠한 사회적 법적 책임도 없는 단지 도의적인 명분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 날의 갈림길 너머로 한 여성의 다급한 구원을 향한 갈망이 해일처럼 그를 다시 덮쳐왔다.
그것은 지독한 갈망이었다. 류하는 자신의 감정이 송두리째 불타고 있는 것만 같은 어떤 간절한 갈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단 한 번의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었고 그 도움의 손길은
곧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구원의 손길이었고 순간이었다.
류하는 그 간절한 바람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이나 모습으로써가 아닌 감정 그 자체로써 격렬하게 느낄 수 있었고 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류하는 자신이 말을 하고 있다.
라고 하는 행동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그날의 그 순간에서 다시 그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당신을 구할 거에요.”
말이 떨어진 것은 한참 만이었고, 모두의 표정이 밝게 살아났으며 가볍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츠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혜영은 유달리 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어갔다.
될 수 있으면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려고 했고, 바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
본래 그녀가 일하는 바에서는 바텐더들이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최근 그녀의 심리상태를 잘 아는 동료들은 오너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본래 담배를 피울 줄 몰랐지만 어느 날 우연히 접대하게 된 손님으로부터 담배를 배우게 되었고 이제는 거의 골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가다 일찍 바에 나와 홀로 있는 시간에는 예외 없이 ‘BUMP OF CHICKEN’ 의 ‘EVER LASTING LIE‘를 듣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독특한 기타반주 소리에 매료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실력 있는 가수들과는 달리 고음부에서 찢어지는 듯 한 후지와라 모토오(藤原基央)의
어딘가 불안한 고음처리가 특히나 처연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동료들이 출근하고 나면 음악은 바뀌었지만 딱히 유감을 표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류하는 다시는 바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정식도 마찬가지였다.
정식은 어느새 그림을 완성하고 사진을 찍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던 화랑에 들러
사장님과 그림에 대해서 가벼운 환담을 나누고 액자를 맡겼다.
돌아오는 길에 OO 글로벌에 전화를 걸어 나츠미양의 연락처를 물었다.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
본래 OO글로벌은 배우들의 신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주의이지만
정식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으로 허락해 주었다. 같은 식구로 여겼던 것이다.
또 그의 작품이 대단히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는 작품이었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내용이었기에
담당자의 경계심이 누그러진 것이 원인 이었다.
집에 돌아온 정식은 OO 글로벌 측에 자신이 그린 그녀의 그림 사진을 메일로 보내면서
그것을 영화의 포스터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함께 적어 보냈다.
사실 시나리오 작가가 직접그린 연필소묘의 그림 위로 주연 여배우의 이름이 적힌 포스터라는 것은
시각적으로도 느낌이 꽤 좋은 디자인 이었고 대단히 신비스럽고 어딘가 미스터리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포스터 자체의 희소성도 높아지는 이중의 효과를 발휘하는 구석이 있었다.
OO 글로벌 담당자는 굉장히 기뻐하며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극찬을 보내왔다.
그들은 정식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놀라워했다.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마침내 류하는 나츠미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여기서 함께 살아요.”
환한 미소로 가득 찬, 흰 수국이 만개한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 하면서 촬영은 마무리 되었고, 모든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류하는 다시 청수 스님과 자리를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신기한 일이었어요.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그 때 일을 말했던 것이.
그리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않게 되었어요.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그 순간이 다시 와도 나라는 놈은 도움을 요청하는 그 외침을 절대 뿌리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요,
단 한명의 이름 모를 여학생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그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일이라는 것을요.
비록 그 때문에 수련이 에게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지만,
그런 끔찍한 사고라는 것도 결국엔 언제나 현실상에 일어나 왔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라는 것도요.
확실히 알겠습니다. 스님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 인지를요.“
청수 스님은 말없이 불상만 바라보며 염주알만 만지고 있었다.
“스님, 혜영 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님은 여전히 말이 없으셨고 류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본존불상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는
다시 반배를 한 후 암자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는 촬영이 한창이었다.
나츠미는 대사를 읊으면서도 그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자신의 심경과 이렇게도 맞아떨어질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중적인 태도로 여성들을 대하죠.
결혼해서는 아내가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라지만 사실상 그네들은 지하철에서 무책임하게 아무여자나 희롱하고 집적거리고
거리에는 조금만 길을 걸어도 ‘자유로운 성애’ 라는 허울 좋은 변명 하에 여성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음란한 포스터와 광고물 또 조형물이 넘쳐나죠,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들은 여성을 상대로 저질스러운 장난을 멈추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죠. 일본의 성범죄 발생률이 왜 낮은지 알아요?
그것은 남성들이 윤락녀들을 상대로 자유롭게 성욕을 해소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학적인 폭력성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성질이 있어서 한 번 어디선가 욕구를 해소했다고 해서 수그러들지 않아요.
오히려 내면 심리 세계에서 보다 더 비뚤어지고 커져가기만 할 뿐이죠.
일본의 성범죄 발생률이 낮은 이유는 국가가 성범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일본에서는 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법적으로 처벌하려면 그 범죄 사실을 피해자인 내가 입증해야만 해요.
경찰관들은 피해자인 여성을 마치 범죄자처럼 심문하려 하고 현장검증, 그러니까 범죄 장면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연기하도록 강요하죠. 그리고 그 상대역은 자신을 취조하는 경찰관이 되는 거에요.
나는 한 여성이 10여 시간에 달하는 취조를 받는 동안 자신의 체내에 남은 상대 남자의 정액을 채취하여 유전자 검사를 받도록 해달라고
경찰관에게 사정하다가 경찰관의 끈질긴 거부와 계속 발생되는 요의를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홀로 눈물과 함께 그것을 쏟아내고 말았다는 끔찍한 기사를 접하고 난 뒤에 아무런 미련 없이 고국을 떠났어요.
그것은 사회 전체가 여성이라고 하는 개별적인 자아에게 가하는 집단적이고 끔찍한 폭력이었어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제 1대 쇼군으로 즉위하고 막부정치시대를 열면서 자신의 정적들을 타락시키기 위하여
여성들을 환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일본 열도에는 여성들의 눈물이 지저에 흐르는 마그마처럼 그림자의 이면에 깔린 채로 흐르고 있었죠.
나는 그런 일본이 싫었어요. 하지만 어느 나라에 가도 여자는 결코 남성보다 상위의 존재도 될 수 없었고 심지어 대등한 존재도 될 수 없었죠.
일부 일본 여성들은 드라마 ‘겨울연가’의 방송 이후로 온화한 한국 남성들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어요.
한국이야 말로 유교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고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였던 데다가
가부장적인 문화역시 일본과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정일 씨는 어딘가 다르네요.
이렇게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치부를 들추려고 하는 남자는 못 봤어요.
일본을 싫어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어떻게든 일본의 치부를 들추려고 하면서도
구태여 남존여비 사상을 들추지 않는 이유는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서 라죠?”
정일이라는 이름은 극중에서 류하가 배정받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정식은 그러한 이름을 지음으로써 나츠미와 자신간의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정작 연결고리가 생긴 것은 류하 였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삼강행실도’ 라는 한국의 고서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서적은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위하여 권장되고 있는 ‘권장도서’ 목록에 포함되는 서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 내용을 알고 또 저자의 행실을 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류하 역시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처음에는 그 책이 ‘권장도서’ 목록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문화재가 아니라 거의 잔혹엽기소설 수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나라 대한민국의 남성들의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진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공통점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성’에서 기초한다는 것에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음 대사에 너무나도 깊은 감정이 이입되고 말았다. 류하의 정서에 이런 것들은 거의 쓰레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도서 옆에는 지금은 절판되어버린 ‘여인 열전’ 이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정식이 극명한 대조의 메타포로써 앞으로의 스토리전개를 위해 복선으로 깔아둔 안배였다.
두 사람은 그 책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 책은 관객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다.
“지극히 공감합니다. 저는 전업주부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시작된 용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일본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기를 바라고 있고 그녀들이 성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제거 되어야 할 가장 큰 요인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인 욕구로만 대하려는 무책임한 태도를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봐요.”
대사의 이 지점에서 류하는 그날의 악몽 같았던 순간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목젖을 떨어 울리며 계속 대사를 읊었다.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것이 아니에요
1부1처제라는 혼인 제도가 철학적으로 완벽한 혼인제도가 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최소한의 책임감이야 말로 남성이 여성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라고 저는 생각해요.”
대사의 마지막 지점에서 류하는 거의 울고 있었다.
“컷! NG!"
눈물을 흘리던 류하는 멍청한 표정으로 감독을 돌아보았고, 감독은 그런 그를 가볍게 나무랐다.
“류하 씨 감정 이입이 너무 깊었어요. 최대한 릴랙스하게 학구적인 느낌이 들도록, 다시갈 수 있죠?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요.”
감독은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그의 과거를 알기 때문이다.
류하는 감독에게 잠시 난처한 미소를 한번 지은 후 심호흡을 하고 다시 촬영을 하려고 했다.
모두들 가볍게 커피한잔을 마시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직후 이어진 촬영에서는 정말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똑같은 대사를 조용히 읊은 나츠미를 바라보던 류하가 갑자기 큰소리로 방언을 외치기 시작 한 것이다.
“나츠미? 넌 그 때 분명히 악어한테 잡혀 먹히지 않았어?
“Nathumi? You are then preyed by the crocodile had been eaten?
그때 USB 빼돌린 게 나라고, 니가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미시시피 강속으로 끌려들어가고
강물에 온통 붉은 핏자국이 번져갈 때 그 자리엔 나도 있었어!
I’m the about keeping about a usb, Do you being dragged into the Mississippi River and drops your legs!
The river was all bloody! I see clearly that!
넌 죽은 사람이잖아!“
You are a dead woman!“
심지어 그 언어는 영어였다. 캘리포니아 주 억양이 강하게 묻어나는 미국식 영어발음
나츠미는 경악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왜 사라가 아닌 자신을 죽은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지 알 수 가 없었다.
“어떻게 류하씨가 그 일을 알죠?”
잠시 동안 류하는 말이 없었다.
“어? 제가 또 NG를 낸 모양이네요?”
류하의 얼빠진 대답이 끝나고 잠시 촬영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단히 불가사의한 일이었고 사람들은 서둘러서 카메라의 영상을 되돌려 보았다.
카메라에는 장시간의 암흑만이 찍혀 있었다. 심지어 그 어떠한 소리 신호도 없이
마치 누군가가 편집과정에서 소리를 잘라내 버린 것처럼 완벽한 무음의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약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감독이 호기롭게 외쳤다.
“자자 잠깐 무언가 혼란스러운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다시 촬영 갑시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 그 사건을 잊었다.
그리고 그것은 류하의 인생을 또다시 송두리째 망가트리는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치고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나츠미의 제안에 류하는 조금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나츠미씨와 저녁식사를 하기에 앞서서 어딘가 가야 할 곳이 한군데 있네요.
누군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거든요. 더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다가는
왕신(王神) 하나가 제 어깨에 달라붙어서 평생 않떨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네요.”
나츠미는 순진하게 되물었다.
“왕신이 뭐에요?”
류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런게 있어요.”
바는 오늘 일찍 문을 열었고, 첫손님을 맞아들였다.
혜영은 류하에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영영 않오는 줄 알았더니.”
류하는 담배를 피우는 혜영을 나무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슨 담배 펴요? 나도 한 대 줄래요?”
두 사람은 원래부터 그래 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맞담배를 피워댔다.
류하는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나 혜영씨 싫었던 것은 아니에요, 단지 있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또다시 흐르고 류하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혜영도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대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동안 함께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류하가 말을 이었다.
“그냥 난 나츠미씨가 더 좋은 것 같아요. 혜영씨 말이 맞아요, 연기? 그거 다 사기죠.
각본 따라 춤추는 광대놀음, 근데 그 광대놀음을 하다보니까. 사람이 없던 감정이 생기네요.
연기라는게 마냥 연기이기만 한 거는 또 아니더라구요, 연기자로써 이런 감정조절 미숙은 역량 부족인데,
근데 나 역량이 너무 부족 한가 봐요. 도저히 더 이상 가식으로 연기를 못하겠어요. 아, 복잡한 거 다 때려치우고,
그냥 혜영씨보다 나츠미양에게 더 끌려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미안해요.“
류하는 이제 꽁초가 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려는 그의 등 뒤에서 혜영이 울먹이며 말했다.
“다른 거 더 할 말 없어요?”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시감 속에서 류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뒤통수만 보이며 말을 했다.
“OO사라는 절에 가시면 청수라는 스님이 계세요. 인생 상담 잘 해주시는 분입니다. 답답하시거든 한번쯤 찾아가 보세요.”
그리고 류하는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에는 ‘EVER LASTING LIE’의 슬픈 멜로디만이 죽음처럼 흐르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영화 포스터가 붙었다. 사람들은 연필 소묘로 그려진 영화 포스터를 처음 보았고,
그것이 시나리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짧은 숏컷의 이국적인 일본 여인의 그림 맨 윗줄에
‘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Nakagawa Nathumi)’ 라는 이름이 영어 발음으로 적혀 있었다.
영화는 중국에서 처음 개봉 되었고. 자국의 학자에 의해서 출판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 대하여 중국인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동양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나라다.
그 나라의 여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유로운 연애를 해 왔고,
사랑이라는 남녀 간의 감정의 교류에서 여성이 자주적인 위치를 확립하고 있는 유일한 거의 유일한 동양권 국가였다.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한 지위를 가진다.
당신이 어떤 중국의 문학작품 혹은 무협영화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 나라의 여성들이 다소곳하게 남성의 말에 순종하기만 하는 모습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과거에 일부다처제가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일본이나 한국의 여성들처럼 자신의 인생을 ‘남자에게 헌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여인은 없었다.
또 그런 문화를 추구하지도 않은 거의 유일한 동양권 국가였다.
그 나라의 여인들은 ‘가정에 헌신‘ 하는 생활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남자를 자신이 떠받들어야만 하는 주인으로 여겼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여성들도 얼마든지 남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녀들은 ’자신이 원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지
’남자가 원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 나라의 여인들에게 ‘자유연애’ 는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그들의 권리였다.
때문에 중국에서 영화는 한류열풍의 바람을 타고 굉장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두 남녀가 중국의 계림을 찾아와 정착하는 장면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
중국의 박스오피스 라고 할 수 있는 CBO (http://www.cbooo.cn/) 에서는 연일 호평이 쏟아졌고 예매율은 1위로 치솟았으며,
바이두 (www.baidu.com) 와 소후닷컴 (www.sohu.com) 그리고 QQ닷컴 (www.qq.com) , 시나닷컴 (www.sina.com.cn) 등에서도 연일 찬사와 호평이 쏟아졌다.
결국 영화촬영을 함께한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 그리고 OO 글로벌 측에서는 파티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시사회는 한국 그리고 일본의 순서로 차례대로 열렸다.
그리고 일본의 보수적인 남성들은 거의 제정신을 잃은 사람들처럼 보일정도로 격분해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영화의 제작을 두고 ‘겨울연가’ 이후 제 2의 국치(國恥)라고 부르짖으며 영화의 개봉을 반대했다.
일본의 주요 포털사이트 들인 니프티 (www.nifty.com) 와 goo (www.goo.ne.jp,) 그리고 Excite (www.excite.co.jp) 등을 비롯한 수많은 포털 사이트들과,
개인 블로그들과 도메인 주소에는 연일 비판성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그들이 주목한 것은 영화의 내용상에도 등장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특히 그중에서도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내용들이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여인이 정절을 지키려고 자신의 두 귀와 코를 벤 이야기며(영녀절이-令女截耳 위나라 11번째 이야기),
임금이 미색이 출중한 과부를 탐하자 여인이 스스로 코를 벤 이야기(고행할비-高行割鼻 한나라 6번째 이야기),
남편을 적군의 군대들로부터 구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인육을 탐하는 자들에게 증여하여
결국은 가마솥에 삶아지게 된 여인의 이야기(취가취팽-翠哥就烹 원나라 28번째 이야기) 등이 주로 입방아에 올랐는데,
이딴 쓰레기 같은 책을 ‘권장도서’ 목록에 올려놓은 한국의 남성들의 사상을 맹공하면서
한국의 속담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를 인용하여 연일 거세게 비판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특히 삼강행실도의 저자가 평소에 계집종들에게 벌레를 먹이거나 똥을 먹이는 등 잔혹한 고문을 일삼던 변태 성욕자 였다는 점을 들어서
영화의 일본에서의 개봉 자체를 반대했고 나카가와 나츠미 라는 여성을 거의 역적처럼 취급했다.
또한 저작된 그 고서의 내용이 진실인지 여부와 출처도 불분명하다는 점이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었다.
많은 일본의 남성들이 삼강행실열녀도의 고사들을 구글에서 한자로 검색 해 보았지만
한국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그런 고사가 전해지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의 그녀의 고정 팬 사이트에서 조차도 반대여론이 들끓었고.
OO 글로벌 측은 이것을 무마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반향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의 네이버나 다음 등에서는 반대로 지지여론이 들끓었다.
주로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과거 일본의 5등친 에서의 남녀 차별적인 제도들에 대한 공격과 의제령과 상장령에서 나타나는
남녀 차별주의(남편의 가족이 상을 당했을 때와 아내의 가족이 상을 당했을 때 각자 남편과 아내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달랐다.)
여실어교(女實語敎)의 남존 여비 사상, 그밖의 여논어, 여대학, 여중용, 여오상훈, 등의 구체적 문헌들과
2차 대전 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였던 종군 위안부의 존재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말았다.
나츠미의 한국 팬 카페인 ‘플라워 나츠미’ 에서는 연일 그녀에 대한 용기와 찬사가 올라왔고
그녀의 페이스북 팬 페이지에서는 하루도 그칠 날 없이 한국팬들과 일본 팬들간의 번역기를 돌려가며 치루는 엽기적인 수준의 ‘언쟁’ 들이 벌어졌다.
특히 일본 팬들이 종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내놓은 다른 무기로는
월남전 당시의 한국군의 현지 여인들에 대한 성폭력들이 도마위에 올라왔고 한국 팬들은 ‘논점 일탈’을 하지 말라고 응수 했다.
하루, 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들 이었다.
결국 OO 글로벌은 영화의 일본 개봉을 포기했고 이 시기는 나츠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류하는 그녀와 함께 하면서 자꾸만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류하와 나츠미는 자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상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발생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 번 째는 류하가 나츠미에게 이상한 발언을 하는 것이다.
류하는 자꾸만 나츠미에게 영어로 그녀가 죽은 여인이라고 말하며
당시의 상황을 기억 해 내 보라며 어깨를 잡아 흔든다거나 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두 사람 모두 기억을 잊어버린다.
나츠미의 경우는 한층 더했는데, 완벽한 수련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한번은 유명 레스토랑에서 함께 만찬을 즐기던 도중 그녀가 갑자기 완벽한 수련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했다.
“네가, 네가 감히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자식 같으니!”
라고 외치며 갑자기 그녀는 나이프를 들고 그를 향해 달려들다가 식탁보에 걸려 넘어지고는 하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 지나가고 나면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무릎에 난 상처를 기이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더욱 기이한 사건은 그러한 두 사람의 기행을 우연히 촬영한 사람이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파일을 찾아 재생하면
깜깜한 암흑만이 그 안에서 발견 될 뿐이었다는 점이다. 촬영한 당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이 일이 터졌다. 그녀가 미시시피 강변에서 사라가 악어에게 잡혀 먹히던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이
한, 중, 일 3국의 포털사이트를 떠돌면서 그것이 그녀가 촬영한 영상이라는 당시 지인들의 증언까지 세상에 나돌아 다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도덕성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해명을 위하여 기자 회견을 하려고 했다.
“저는 분명히 그 장면을 촬영한 당사자가 맞지만 어떠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영상을 촬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은 단순히 사고였고 문제의 USB 메모리가 누구에 의해서 세상으로 유출 된 것인지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그 영상의 최초 유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기자들이 그 장면을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거나 플래쉬를 터뜨렸다.
그녀가 다음 준비된 대사를 말하려고 할 때 갑자기 그녀의 앞에서 누군가가 돌출된다 싶은 순간
챙이 긴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한 젊은 여성이 번쩍이는 칼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얼굴을 무참하게 훼손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칼은 길이가 거의 30cm 는 되어 보이는 아주 예리한 회칼이었고 나츠미의 얼굴에서는 피가 솟구쳤으며,
사방은 그 자리에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류하는 너무나 놀라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고 범행을 저지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나츠미를 향해 외쳤다.
“넌 죽은 여자야! 산 사람이 아니라고! 그날 미시시피 강변에서 악어에게 물어뜯긴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너란 말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이 한심한 연극을 계속 할 생각인 거냐구!”
처참하다시피 울부짖던 그녀의 외침, 그녀는 곧 경호대원들에게 붙들리고 말았고,
경찰서로 연행 되었다. 그녀는 바로 다름 아닌 ‘혜영’ 이었다.
류하는 마스크가 벗겨진 그녀의 맨 얼굴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거친 사내들에게 끌려가는 혜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류하는 아무런 말 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대중매체에서도 그날 혜영의 외침을 보도하지 못했는데,
왜냐면 사진이고 동영상이고 모두 검게 변해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로 사건의 그 지점에서 그렇게 한결 같이 모든 촬영장치가 이상현상을 보인 것을 놀라워했다.
피해당사자인 나츠미의 안전보다도 더 흥미로운 주제에 이끌려버린 것이다.
“칼에 의한 자상(刺傷)의 흉터는 현대 의학으로도 완전히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레이져로 흉터부위를 깎아서 주변의 다른 피부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시술법등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흉터를 보다 덜 눈에 띄게 만드는 수준이지 흉터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사용된 흉기가 대단히 예리한 칼이라서 진피층 깊이까지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흉터를 제거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아무래도 연기자 생활은 이제 그만 하셔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의 선언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츠미도 류하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리창 너머의 혜영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나도 내가 그날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어! 계획된 범행?
그 회칼 사는데 도검소지 허가증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고!
내가 그날 뭐에 홀렸는지 그걸 사가지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미친 짓을 저질렀는데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를 모르겠어.”
혜영이 울고불고 난리 치는 모습을 더 볼 수가 없었던 류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떻게든 네 구명운동을 한번 해 볼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특수상해죄가 적용되어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류하가 어떻게 해서든 벌금이나 보석으로 풀어주려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원의 판결은 완고했다. 판사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일벌백계의 전형으로 삼아 다른 모방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결국 창창한 나이의 혜영은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정식은 병상에 누워있는 나츠미에게 다가왔다.
“저에요, 정식이.”
나츠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얼굴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두 눈이 위치한 부분은 뚫려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로 말없이 정식을 응시했다.
“미안해요, 결국 내가 쓴 시나리오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그도 인터넷상에서 한, 일간의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연일 혐한시위가 벌어졌고 많은 죄 없는 교포들이 피해를 당해야 했다.
한국 측에서는 이제 그만 종군 위안부 문제를 결착지어야 할 때가 왔다며
일본 천황과 총리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 뿐, 두 집단이 광기라고 밖에 할 수 있을 만큼 불타오르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정식은 심적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쓴 시나리오 한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인생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온 나라가 추문으로 들끓고 있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식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동안 그녀에 대해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내가 시나리오를 썼던 것은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 멋진 선물을 건네줄 수 있는 훌륭한 수컷이 되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열과 성을 다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죠.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당신을 파멸시키는 사건의 단초가 될 줄은,”
정식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흐느꼈다.
“난 정말로 단지 당신이 좋았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나츠미는 말없이 정식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정식은 드디어 그 말을 하기로 했다.
“당신에게 당신의 곁에 류하 그녀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있잖아요? 한번만 물어볼게요. 나 같은 남자는 어때요?”
나츠미는 아무런 말없이 그냥 응시하고만 있었다.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르고 정식은 튕겨지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쾌활하게 말했다.
“잊어요 그냥, 지금 내가 한 말도 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도, 내가 모두 잊을 수 있게 해 줄게요.”
정식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츠미를 바라보았고 나츠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문을 나서는 정식은 한탄하듯이 속삭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요미우리 신문도, 아하시 신문도, 마이니치, 닛칸, 산케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중앙일보, 노컷뉴스, 연합뉴스,
중국 신문사, 광명일보, 해방일보, 경제일보등 한, 중, 일 3국의 모든 언론은 일제히 젊은 시나리오작가의 자살을 다루었다.
문제의 ‘나카가와 나츠미’ 라는 영화는 금단의 언어가 되었고 3국의 모든 대중들은 한 생명의 안타까운 삶의 마감 소식 앞에서 투쟁을 멈추었다.
세상은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기나 했냐는 듯이 활기차게 돌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졌던 한 일 양국 간의 격렬한 투쟁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정식은 산속에서 등산용 로프로 목을 매어 자살 했다.
다만 많은 언론에서 그의 유서로 짐작되는 시 한편을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노래하는 고속도로(The 'Highway of singing')
슬픔의 바위 사막 외전 제 1편(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1)
그러니까 내가 OO 테크 라고 하는
하수처리시설 기계의 제작, 판매, 정비를 업으로 삼는 기업에 취직해서
전국팔도를 출장이랍시고 누비고 다니며 자동차 여행을 즐기던 시점이었다.
서울 외곽 순환고속도로를 따라서
판교 방면으로 시흥 톨게이트를 지나 고개를 하나 넘어
별 생각 없이 길 위를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노래하는 고속도로라는 팻말이 보이고
4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면 노래 소리가 들린다.
멜로디는 이렇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이것은 괴담이 아니다.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파서
타이어 스스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거친 콘크리트 노면에 파여 있는 홈에 의해서
말랑말랑한 고무타이어가 제 스스로 소리를 내고
도로가 설정한 멜로디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었지만
나는 유달리 그 멜로디가 서글펐다.
어린 시절 즐겨듣던 동요처럼
소년의 마음은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깊은 연심을 품은 소녀가
소년에게 순결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조금이라도 순수할 때
조금이라도 어릴 때
때 묻지 않은 젊음 이라는 것을
소녀에게 넌지시 건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이 엷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짧은 촛대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붉은 장미꽃잎처럼 여린 젊음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어린아이의 동요처럼 순수한 시절에
그대로 몸과 마음의 시간을 매어 둘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으련만
거친 콘크리트 노면에 파여진 무수한 홈과 같은 인생길에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처럼 시간은 무섭게 달려간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았던,
완벽하게 무의미 했을 것이라 여겼던 지난 날 모두가
제각각 내가 지나온 과거라고 하는 고속도로에
저마다의 간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홈으로 파여져 남겨져 있다가
거친 노면을 따라 무심코 그 길을 다시 거세게 달려가는, 그때 그 순간
검은 고무 타이어가 연주하는 멜로디로부터 불러일으켜진 마음의 풍랑과 함께
휘날리는 먼지가 되어 눈앞에서 격렬하게 휘몰아치며 물결치고
거센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 바위에 부서지듯이
미지의 운명들이 또한 시야 한 가득,
고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유리창 밖 풍경들과 함께
무모하게 달려와 덧없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끝없이 뒤로, 뒤로 밀려간다.
오수와 오물들과 동물의 사체 조각과 부위를 알 수 없는 지방 덩어리들,
내장 부스러기들이 검게 썩어 형언 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그 동물성 침출수에 잠겨있던 슬러지 압착 설비를 정비할 때는
갠지스 강에 몸과 마음을 정화 하는 힌두교 신자가 된 것 같았다.
더럽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어쩌면 지독한 질병에 걸릴 지도 모르는 그 끔찍한 죽음의 물에
겁도 없이 몸을 담그고 기계를 정비했었다.
그 기계는 지방 어딘가의 OO 닭 공장과 도축장에서 흘러나오는
몇 종류의 동물의 사체와 연관된 폐수에서,
최종적으로 걸러지는 슬러지를 처리하는 설비였다.
마치 나 스스로가 이 사회의 최극단, 모든 죽음과 더러운 것들의 끝에서
먹어대고 마셔대는 현상의 이면, 죽음으로부터 유리된 사회의 그림자
모든 끔찍한 오염들의 종말처리장치가 된 것 같은 기괴한 나날들이었다.
단지 나는, 거친 홈을 밟고 달리는 타이어가 노래를 부르듯
나의 마음이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 음침한 노래하는 고속도로를 셀 수 없이 내달리며
거리낌 없이 이 지방 저 지방에 동가식서가숙하며,
이 나라 전체에 산재해 있는 그 모든 종말처리설비들과
마치 동요를 부르는 어린아이가 서로 인사를 나누듯이
서슴없이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안부를 나누곤 하였다.
오염에 찌든 수많은 기계들을 가슴을 열어 정비할 때마다
이루 헤아릴 길 없는 다종다양한 오염원들과 거리낌 없이 부대낄 때마다
나의 허영으로 가득한 마음을 씻어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비행기라는 동요가 서글픈 멜로디처럼 느껴지게 된 지금
나의 젊음은 이제 정말 이삼년도 채 남지 않았고
그 뜨거운 젊음을 건네어줄 소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만약 그 오염된 침출수들을 나의 가슴으로 뜨겁게 덥힐 수 있다면
화산 암반사이의 온천수가 끓어오르는 증기의 압력과 함께
용암처럼 가열된 간헐천을 하늘높이 솟구쳐 오르게 하듯이
오염과 함께 침체 되어 가라앉아 있던 모든 아픔들이,
소년과 소녀의 간절했던 염원들이,
타오르는 젊음과 함께 맹렬히 분출되어, 동요속의 비행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될 그 순간을 말없이 인내하고 기다려 왔지만
버드나무가지가 바람결을 향해 손을 흔들듯이
끝없이 소녀를 향해 손짓 해 왔지만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 옛날 소녀의 꿈꾸는 눈동자 어디쯤인가부터 출발하여
마주 달려가던 소년의 혈관이 돋아난 종아리 까지 이를 만큼
아득히 멀고 먼 길, 노래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더 이상 갈 길을 잃어버린 소년의 젊음은
그 날 노래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앞 유리창 가득히 밀려들던
광기어린 속도로 차량의 앞을 향해 마주 달려오던 풍경들과 함께,
회한의 시간 너머로 바람과 함께 흩어져갔다.
도대체 운명이 나를 위하여, 나의 인생의 후반부를 위하여
어떠한 원대한 계획을 세워두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나의 시간은 불가해(不可解)의 고속도로를 지나
노년(老年)이라는 갈래 길, 고즈넉한 지방 국도 어디쯤인가로
서서히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슬픈 동요와 같은 시점이다.
이 시는 정식의 많은 지인들에게서 눈물을 자아냈다.
류하는 법원에서 걸어 나와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들고 편의점을 나선 그는 간의 의자에 앉아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길 저편 어딘가에서 동남아시아 계열의 어떤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류하의 흥미를 이끄는 구석이 있었다.
류하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그 외국인을 바라보았고 외국인 남성은 류하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신발 끈을 손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일어나 유창한 한국어로 방언을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 조차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 어조로
“무시기고 나발이고 눈깔에 뵈는 것도 없고! 니가 죽나 내가 죽나 한 번 해 보자고 달려들기나 해대고!
지 슨상님이 말씀을 하시거나 말거나 귓전에 들리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싸우자고 뎀벼 든다 카면 당연히 계백이제!
황! 산! 뻘! 이 들고 일어나고 자시고~!”
한참을 떠들던 외국인은 갑자기 다가왔던 것처럼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리고 류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질려버렸다.
지금까지 그와 나츠미 사이에서 일어났던 모든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 마치 죽기 직전에 거쳐 간다는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나츠미라는 여성이 무섭다고 느껴지게 되었다.
류하는 그렇게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에 대해서 청수 스님께 잔뜩 흥분한 어조로 떠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다음은 뭐냐면요, 어, 그 다음은... 아니, 아무튼 뭔가 심각한 일들이 제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조용히 염주를 굴리던 스님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류하군은 지금 도박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카드게임, 그중에서 포커를 치고 있다고 합시다. 중이 포커 게임을 이야기하니 우스우시겠지요.
아무튼, 긴 시간동안 포커를 쳐 왔고 이제 거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지을 한판의 게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룰은 아시죠?
카드 한 장 받을 때마다 배팅을 해야 하는 것, 마지막 히든카드를 받아야 하는데 이 때 류하군게서 칩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돈은 누구에게나 유한한 것이고 절대로 무한한 감정적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죠.
이것은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요소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 때 히든카드를 받기 전에 상대가 제의를 하나 합니다.
류하군의 건강?
혹은 류하군의 친척이나 친구 혹은 가족과 같은 인간관계?
류하군의 믿음
혹은 자존심
아니면 류하군의 양심,
그가 말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정당한 노력 이외의 그보다 더 큰 것을 걸어 봐라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 없다.
그러면 히든카드를 받게 해 주겠다. 라고 제의 합니다.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일 도 아니지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류하 군이 그 히든카드를 받아서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차를 한잔 따라 마신 스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류하군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시겠습니까?
수련양이 아직 큰일을 겪기 전인 바로 그 때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아직도 그 때로 되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나츠미양이 얼굴에 상처를 얻기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으십니까?
혜영양을 막아서 그 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싶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 류하는 완벽하게 공포에 질린 얼굴로 청수 스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스님은 다시 류하에게 물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더 이상 공포를 참을 수 없었던 류하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버렸고, 작은 암자의 문은 바람에 덜컹거렸다.
정확하게 정식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 이상의 초자연적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부터 류하는 나츠미를 대할 때 마치 결혼한 일본의 기성남성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그러듯이
어딘가 살짝 가식적인 듯한 태도로 마치 의무감과 책임감에 의해서 대한다는 듯이 그녀를 대하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하게 되었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책임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위선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인간이 만든 규율과 인간이 만든 도덕이라는 논리상에만 존재하는 허황된 관념일까?
동물들은 과연 전혀 책임감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새끼를 위해 자신을 한없이 희생하는 모성본능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단지 암컷 동물들만이 모성본능을 가지는 것일까?
왜 수컷 새들이 암컷 새들과 함께 새끼를 함께 부양하고
어째서 마치 인간의 혼인제도와 같은 암컷과 수컷의 관계를 가지는 동물들도 있는 것일까?
도대체 ‘희생’ 이라는 값어치는 언제 생겨난 것이고 또 왜 생겨난 것이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류하는 자신의 고민에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더 이상 불가사의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촬영한 모든 영상장비들에 나타난 컴컴하고 어두운 암흑처럼 진실은 어둠의 장막 어딘가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단지 류하의 기억 속에서만 마치 거짓말처럼,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옴니버스형식의 소설들처럼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조각퍼즐들처럼, 그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드문드문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의 국제 영화제 같은 곳에서 의미를 유추하기 힘든 순수 예술 영화들처럼
기억속의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현실상의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악몽 같은 것들이었다.
류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기분 속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곧잘 ‘연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상대 배역과도 아무런 감정 없이 진짜 같은 ‘감정’ 들을 ‘연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점점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고 더 이상 배우 일을 할 수 없는 나츠미를 자신이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아직 결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에 가까운 동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하가 나츠미를 안은 적은 없었다.
“자네가 그럴 줄은 몰랐네.”
류하는 수련의 부모님과 함께 모 한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류하는 그 자리가 불편했지만 배우로써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또 어른들의 말씀에 경청하는 예의바른 청년이 되기 위해서
그분들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 자리까지 끌려나와 ‘훈계’ 말씀을 듣고 있었다.
“수련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우리는 자네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괴롭힘 받고 있는 자네의 모습을 보면서 차마 모진 소리를 할 수는 없었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대신에 다른 생명 한 생명을 구한 일이라고,
우리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야 했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자네가 이 나라 한국 여인도 아니고 일본의 여인과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나?”
류하는 아무런 말없이 찻물만 한 모금을 머금고 간신히 그것을 삼켰다.
상 위에는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류하는 질식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는 그를 바라보며 수련이의 부모님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버려두고 실내를 빠져나갔다.
류하의 머릿속에는 청수 스님의 악마 같은 속삭임만이 되풀이되어 재생되고 있었다.
‘류하군의 건강?
혹은 류하군의 친척이나 친구 혹은 가족과 같은 인간관계?
류하군의 믿음
혹은 자존심
아니면 류하군의 양심,
그가 말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정당한 노력 이외의 그보다 더 큰 것을 걸어 봐라,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 없다.
그러면 히든카드를 받게 해 주겠다. 라고 제의 합니다.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일 도 아니지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류하 군이 그 히든카드를 받아서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류하는 정갈한 음식이 가득 놓인 상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젓가락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지?’
사실 류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나츠미에게 애정과 공포를 거의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나츠미와 결혼을 발표하게 된다면 과거의 끔찍했던 악몽들이 다시 되풀이되게 될 것이다.
나카가와 나츠미라는 영화가 한일 양국에 던진 충격은 그 정도로 큰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인 정식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그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식이 자신을 희생함으로 인하여 간신히 다시 얻어낸 침묵
그 활화산 같은, 혹은 지저에 묻힌 마그마같은 화두에, 류하는 감히 그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동시에 류하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나카가와 나츠미라는 여성의 정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과연 ‘무엇’ 이라는 말인가?
류하는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 것은 아닌 가 잠시 의심 해 보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화려한 유명 배우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류하는 그 모든 사건들의 중심을 타고 흐르는 ‘고통’을 인지 할 수 있었다.
류하는 악어에게 물린 채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자신을 생생하게 체험 할 수 있었고
온 몸이 처참하게 찢겨져나가는 그 모든 고통들을 생생하게 체감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혜영의 칼이 나츠미의 얼굴을 무참하게 유린하던 그 순간의 고통 역시도
마치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모든 고통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수련이 겪어야 했던 모든 수치심과 고통마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정식이 나무에 로프를 걸고 마침내 목을 매어 허공에서 다리를 버둥거리던 그 순간 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그것은 나츠미가 자신에게 수련의 일을 물어 보았을 때 겪었던 데자뷰 현상처럼
매 순간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나 류하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류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의 한 번의 선택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도저히 예측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무엇인가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하게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 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경기도 모 지역의 실탄 사격장이다.
클레이 사격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장소다,
도박의 끝은 마작이요 사격의 끝은 클레이 사격이라던가?
하지만 류하가 이곳에 온 것은 단지 클레이사격을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총을 소지하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거기 두 분은 부부신가요?”
강사가 물었다.
“제가 하는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잘 들으십시오. 부부싸움하고 난 다음에는 같이 사냥 나가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가볍게 웃었다.
“총이라는 무기는요. 사람을 정말 쉽게 죽일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많은 무기들 중에서 고통지수가 0에 가까운 유일한 무기에요.
워낙 신속하고 빠른 속도로 조직이 파괴되기 때문에 인간은 총에 맞았을 때 고통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죽습니다.
왜 부부싸움 하고나서 사냥가지 말라고 하느냐구요? 총이 그만큼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서 그렇습니다.
사냥개가 땅에 놓인 총을 밟았다는 변명도 있겠다? 신고하고 나면 보험금 1억원 통장에 꽂힌다? 방아쇠 한번만 당기면 일은 끝난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절대로 부부싸움 하고 나서 같이 사냥가지 마세요.”
그 날 류하가 집을 나서려던 순간 이었다.
나츠미는 그날따라 처연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류하씨,”
나츠미의 물음에 류하는 대답했다.
“응? 왜?”
나츠미는 굉장히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있잖아요,”
류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되물었다.
“왜 그러는데?”
나츠미는 꼭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뭐가 뭔지 몰라도 말이에요, 그냥, 그냥 날 사랑 해 줄 수는 없나요?”
류하는 순식간에 돌덩어리처럼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츠미는 다시 말했다.
“뭐가 뭔지 앞뒤가 어떻게 되는지 일의 선후가 무엇인지를 꼭 알아야만 하나요?
사랑에 그런게 필요하나요?“
그것은 한동안 잠잠했던 그 초자연적인 현상들과 비슷했다.
말을 하는 나츠미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동안 나츠미는 단 한 번도 류하에게 슬픈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류하는 곧 표정을 풀며 웃으며 말했다.
“왜, 왜그래? 무슨 일 있어?”
그는 마치 나츠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리고 나츠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잘 다녀오세요.”
마치 일본의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여성들처럼 집을 떠나는 가장을 배웅하는 그녀는 다소곳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그날따라 유달리 희고 긴 가느다란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옷깃의 옷을 입고 있었다.
류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수련을 잃고 나서 자신이 행했던 수많은 자살방법들을 떠올려 보았다.
총기를 제외한 다른 수단으로 자살을 성공할 확률이 2%에 불과 하다던가?
그는 무던히도 많은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실패의 경험들이 그를 겁먹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무려 12게이지 구경(대략 20mm구경) 톨탄(단발짜리 슬러그 산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그는 오늘 드디어 결행을 하려는 것이다.
다음날 신문의 1면에는 유명 영화배우 최모군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실렸다.
청수 스님은 돌아앉아 본존불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츠미는 그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츠미의 얼굴에서 더 이상 흉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인가요? 그에게 ‘진실’을 알려 준 사람이?”
청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염주만 굴리고 있었다.
나츠미는 광기에 찬 목소리로 토혈하듯 외쳤다.
“모래시계가 멈춰버렸다고요! 이제 더 이상 흘려보낼 모래 알갱이가 없어진 지가 수백년이나 지났어요!
이젠 누군가 그 시계를 뒤집어야 해요! 하지만! 눈물 없이는 절대로 뒤집어질 수 없어요!
왜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죠? 그는 모래시계를 뒤집을 수 있었어요!”
청수스님은 나직하게 말했다.
“길가에 어린 고양이가 배가고파 울부짖는 것을 보고도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커다란 고통 앞에서 어떻게 외면을 하겠습니까?”
나츠미는 미쳐버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그것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더 이상 가짜 모래알갱이를 흘리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단 말이에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진실을 추구하는 데에만 있지 않아요!
단지 연극에 불과하다고 해도 한편의 경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생은 매 순간 마다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에요!
왜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나요!”
청수 스님은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고(苦) 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츠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상관 할 일이 아니에요”
청수스님은 여전히 돌아앉은 채로 대답했다.
“그 수많은 고통은 당신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츠미는 다시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나는 어머니의 바다로 다시는 되돌아 가지 않아요.
그리고 그 모든 구원의 기쁨도 역시 나의 것이에요.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말이었다. 모든 고통과 기쁨이 자신의 것이라니,
청수 스님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츠미는 암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혜영은 흉터 한줄 없는 그녀의 맨얼굴과 마주쳤고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외쳤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들이에요?”
나츠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어느덧 그녀의 얼굴에는 흉터가 다시 생겨났다.
혜영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들이냐고!”
악다구니를 쓰는 혜영에게 나츠미는 나직하게 말했다.
“모르는게 약이에요.”
혜영은 잠시 멍 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암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츠미는 천천히 밤의 산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52
부제. 화신(花信)
나도밤나무(김선홍) 작
글 2015년 10월 22일 작
그림 2016년 3월 31일 작
*이 시는 후지이 미나(藤井美菜)양을 위한 팬아트 입니다.
전기 드리퍼에 적정량의 물을 붓고
여과지를 깔고, 계량스푼으로,
적당히 그라인딩 된 원두를 넣는다.
정확한 추출공식에 따라
머신이 증기의 압력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원액을 희석하면
물론 입 안 가득 풍미가 넘치는
훌륭한 아메리카노가 되지만
-카페인 함량도 적지만!
구태여 내가 전기 드리퍼를 고집하는 이유란 것은
청소의 귀찮음 이라거나 아니면
지나친 그라인딩과 탬핑이 싫어서는 아니다.
요즘은 캡슐도 많으니까,
단지
커피의 농도를 정확하게 자신의 취향에 맞추기에
가장 훌륭한 수단이 바로 드리퍼가 아닌가 싶다.
아 물론 커피를 내리는 과정 중에,
실내에 가득 퍼지는 아로마도 일품 이다.
얽히고, 섥힌 등나무 넝쿨 사이로
햇빛이 고아하고 정순한 광휘의 조각이 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연보랏빛 꽃잎 사이로
순결한 미소와 달콤한 입맞춤을
낮은 곳에서 인내하는 대지에게 선물할 때,
오후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정을 내려다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미 서부해안 서경 140도 근처의
태평양 연안의 에메랄드 같은 바다 속을 떠올려 보고는 하는 것이다.
고래가 처음 발견된 건 1989년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NOAA의 수중 청음 장치에서다.
이후 1992년 미 해군이
주파수에서 이름을 따서 52라고 이름 지었다.
다른 녀석들이 12~25 헤르츠 음역대에서 서로 대화를 나눌 때
52는 51.75헤르츠 음역대에서 목소리를 낸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52
어쩌면 “H.멜빌” 의 소설속의 Moby Dick처럼
거대한 순백의 모습일 수도 있고
아마존 유역의 홍차색 강물에 서식한다는 돌고래처럼
예쁘고 귀여운 분홍색의 작은 녀석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녀석이
크고 당당한 풍채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밑도 끝도 없이 사색에 잠기고는 하는 것이다.
방학을 맞아 텅 빈 교정으로 내려서서
아무도 없는 등나무 아래로 커피를 들고 자리를 옮겼다.
말없는 등나무에게
내 취향의 커피 향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후각도 청각도 심장도 없는 등나무가
나를 위해 정감이 넘치는 사유 활동을 할리가 없음에도
나는 그저 전해주고 싶었다.
등나무 사이로 햇빛을 맞으며
아무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외로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전달 할 수 없는 외로움
물론 나의 커피 향기는 지금 이 공간에 가득 퍼져있고
나의 모습은 찬란한 햇빛 아래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지만.
등나무가 그것을 인식 할 수는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나무는 분명히 ‘나’ 라고 하는 개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 이었다.
식물도 마음이 있고
아픔과 즐거움을 인식한다.
식물들은 초식동물을 인식하고 몸부림치며
가녀린 덩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지지대를 찾고
나무들은 벌목꾼의 발소리를 듣고 두려움을 느낀다.
지독한 페로몬을 내뿜어가며 서로 두려움을 공유한다.
하지만,
왜? 라는 이유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가 끓인 커피향기에 담긴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마치,
고래들이 52의 음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슴푸레한 바다 속 말없는 해류의 움직임을 향해
52가 긴 세월 동안 발해 온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나는 단지
일방적으로 등나무에게 나의 마음을 전해줄 뿐이다.
어쩌면 등나무는 내가 끓인 커피 향기를
악취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각자의 객체들 간에 취향은 다른 것이니까.
그저,
나는 전달하고 싶었다.
이곳은 상실과 낭만이 공존하는
잃어버린 아틀란티스의 바다.
52의 음성만큼이나 깊고 진한 향기가 유영하는,
등나무 아래의 미지의 공간을 부유하는 고결한 햇빛은
외로움이라는 수면을 투과하여
수심이 더욱 더 깊어질수록
그 밝기를 점차로 상실해 간다.
어디까지 침잠할 수 있을까?
너와 나의 세계라는 것은,
향기가 더 깊어진다.
*참고 기사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3/09/20150309005358.html?OutUrl=naver
가장 외로운 고래 52, 다른 고래와 '소통 불가'...이름 52인 이유는?
가장 외로운 고래가 52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어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가장 외로운 고래가 52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는 52Hz,
정확하게는 51.75Hz 주파수로 나 홀로 노래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고래는 12∼25Hz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이 고래는 52Hz 주파수를 가진다.
이에 다른 고래는 이해할 수 없는 주파수로 노래하기 때문에 가장 외로운 고래로 볼 수 있다.
고래가 처음 발견된 건 1989년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NOAA의 수중 청음 장치에서다.
이후 1992년 미 해군이 주파수에서 이름을 따서 52라고 이름 지었다.
우즈홀해양연구소는 “이후 20년에 걸쳐 수중 청음 장치를 이용해 52를 추적해왔다”고 밝혔다.
처음 소리를 발견한 이후 여러 번 52Hz 목소리가 관측됐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52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파수의 원인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영화 제작자인 조시 제만(Josh Zeman)과 배우인 아드리언 그레니어( Adrian Grenier)가
52를 찾고자 ‘52 탐사 프로젝트’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 펼치기 시작했다.
인터넷팀 이소은 기자 lse@segye.com
*고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주파수도 매우 다양합니다.
기사에서 다루는 주파수는 대형 고래의 주파수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아마 52의 목소리 형태가 분명히 대형고래의 종류와 유사성이 있을 것입니다.
*서경 140도 근처라는 자료는 다음에 링크를 걸어드릴 블로그에서 확인한 자료입니다.
http://sir_silver.blog.me/220295319350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미 동부해안에 위치한 대서양과 면한 매사추세츠주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기 블로그에서 확인되는 52의 이동경로는 서경 140도 근처의 미 서부 해안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藤(후지) 라는 한자는 등나무 등자입니다.
일본어로도 등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등나무의 꽃을 지칭할 때도 쓰입니다.
*화신(花信) 이란 일본어로 꽃이 필 때
혹은 꽃이 피어나는 시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꽃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등나무의 꽃말은 환영입니다.
*등나무 꽃은 사실 5월에 피지만
작품 구성을 위한 편의상 계절을 무시하였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악어 이야기는 모 회사에서 만든 악어가죽가방의 광고 이야기입니다.해당 광고는 CG를 이용하여 만들어졌고 대단히 실감나는 영상입니다.
*매년 악어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의 수는 평균적으로 2800명 정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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