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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삶에서 사람을 시험에 빠트리는 가장 힘든 고비와 그 속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을 찾아내는 일에 대하여

사람을 가장 힘든 고비에 빠트리는 것은 언제나 자기 내면에서 속삭여오는 어떤 유혹 혹은 선택의 갈림길이다.

 

원인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 혹은 현실상의 다른 것에 의한 요인이던

아니면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심리적인 것이던

 

자아가 현실상에서 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서

가장 힘든 고비가 바로 그 선택 그 자체이므로

 

삶에서 가장 힘든 고비란 바로 내면의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가장 힘든 고비일 수밖에 없다.

 

삶과 세상을 하나님께서 이미 그러하도록 지음을 하셨기 때문이며

물리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그 어떠한 검증을 거쳐 보더라도

 

바로 위의 선택 그 자체가 가장 힘든 고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를 찾아서 선택하고 행하는 것

 

그것이 가장 힘든 고비이다.

언제나 무조건

 

 

 

 

사람들이 참으로 어려워하는 선택지는 그 중에서도

과연 나는 도의와 현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나의 대원칙은 이렇다

 

첫 번째

그 일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가?

 

두 번째

그 일은 악한 일인가? 선한 일인가?

 

 

 

왜 인가에 대하여

 

한가지만 생각하자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결코 꿈속이 아니며

당신의 육신은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물리적인 것이며

구체적인 것이다.

 

단지 그 안에 무형의 자아가 담겨있을 뿐이다.

 

 

 

 

만약 삶에서 도의와 현실 둘 중의 오로지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정말로 있을 때

 

하나만 생각하라

도의적인 선택을 하려 하였을 때에 실현 가능성이 존재 하는지를

 

시간적 여유가 충분 하다면 많은 고민을 해 보며 이런 저런 가능성을 찾아보고

최대한 도의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삶 그 자체를 포기할 것인가?

 

죽음으로써 그 생이 종착을 맞이할 수 있는 희생이 아니라면

구태여 도의적인 문제로 인하여 현실을 희생하려하지는 마라

 

그저 악을 멀리하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악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현실을 포기해야 할 의무를 지닌 생은 이 세상에 없다.

 

목숨쯤은 대의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기나긴 삶 전체를 도탄에 빠트리는 선택은 그냥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삶이던지)

 

자기 자신도 할 필요가 없고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범죄이며 악이다

 

 

 

 

 

 

 

 

 

사실 대원칙은 총 세 가지이다

 

무슨 선택이 진실한 답인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겠다.

 

 

 

첫 번째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그 일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가?

 

두 번째

 

그 일은 악한 일인가? 선한 일인가?

 

세 번째

 

그 일의 실행으로써 창출되는 결과는 나와 세상전부에게 이득인가?

 

나에게만 이득인가?

 

타인에게만 이득인가?

 

그 타인은 그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구할 가치가 있는 타인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거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거나)

(세상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거나 구해줌이 모두에게 이득 혹은 나와 타인의 삶이 선량함에 이르는 경우라거나)

 

 

옳고 그름 앞에서

사람은 11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꿀 능력이 없다.

 

무언가 내가 하고싶은 일을 위하여 1을 이용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1을 새로 창출하거나 11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다.

 

 

될 수 있으면 악을 멀리하기 위하여 세운 원칙이며

굳이 저질러야 할 필요가 없는 악을 굳이 저질러 가면서 현실을 섬기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선량함 이라는 가치가 현실세계에 실질적 영향력을 끼치는 쪽에 어떻게든 이득을 주기 위해 살아왔다.

그 반대의 선택은 아무리 생각 해 보더라도 그냥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이 궁극적으로 악에 실제적 이득을 제공하는 선택일 때 다시 한 번 더 생각 해 보라

악이라는 존재에게 이득을 제공하여서라도 자신을 희생할 가치나 필요성이 존재하는지를)

 

(악은 자신이 100 이라는 이득을 얻기 위하여 무수한 자아들에게 1의 이득을 주며 현혹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자아가 고달프고 괴로울 때 받은 커피 한잔일지라도 커피 한잔의 가치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원이다.)

 

(그것이 당신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이득은 아니라는 뜻이다.)

 

100원은 100원이고

만원은 만원이며 

집은 집으로만 그 가치를 대체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닌 다른것의 100원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악에게 이득을 주는 선택이 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고달프고 목이 말라서 물 한잔을 얻어마신 것에 매우 큰 고마움을 느낄 수는 있고 

그 물 한잔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얻어마신 것은 역시나 단지 한잔의 물이었을 뿐이고

 

그 한잔의 물이 당신의 모든 생애의 전 시간동안을 당신의 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감로수가 되는것은 아니다.

 

기분은 달라질 수 있고

현실적 기회제공의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물한잔 얻어마시기 위해서 악을 가까이 함은 옳은 일이 아닌 것이다.

 

요약하자면

어떤 한 자아의 선택에 영향을 받았던

무슨 이유에서건

 

나 자신의 선택의 목적들이 궁극적으로 악에게 이득을 주는 선택일 때

(혹은 어떤 다른 자아의)

 

그 자아의 자기 자신의 일신의 안위는 해결이 될지 안될지 알 수 없으나

그 자아는 사회 전체의 부동산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쪽에 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세상은 다수결의 원칙이 현재까지는 유효하다.

 

즉 어느 한 사람만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바꾸는것은 절대로 아니며

그 어떤 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악에게 이득을 제공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의 일신의 안위이건

누군가의 일신의 영달만을 목적으로 최종적으로 악에게 가장 큰 이득을 제공하였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은 절대로 아니다.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어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만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자아들이 자신들의 책무를 방기하는것에 불과하다.

 

1은 그냥 1이다.

 

1이 어디까지를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1이 무엇을 해도

 

1은 그냥 1이다.

 

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1 때문에 악을 키울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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