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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위 사막

신의 뜻



 

신의 뜻

 

 

삶이라는 것은

나와 너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하나인데

너는 무수히 많다

어떤 너는

나를 사랑한다.

어떤 너는

나를 미워한다.

어떤 너는

나에게 진실 하지만

어떤 너는

나에게 거짓을 꾀한다.

그냥 단지

미워하느냐

아니면

사랑하느냐의 차이다

사실

모든 너들은

저마다의 자아를 가진

또 하나의 나이기도 하다

운명은

그 모든 나들이

서로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우주 만물의 유전과 함께

자신의 의지와 행동의 결과물들로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행위이다.

그 속에서

나와 나는

서로 우열을 가린다.

 

신이 아무리 모든 자아를 똑같이 사랑 하여도

모든 자아는

먹지 않으면 생존 할 수 없고

 

비단 생존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 하더라도

어떤 우승 트로피가 하나 뿐 일 때

 

그것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줄 수도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합리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다.

 

합리적 경쟁

 

설혹 네가

생존을 위하여 인육을 먹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네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냥 먹어라

 

대신

너의 생존을 위하여

너에게 인육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과

사랑했던 그 모든 추억들만은

절대로 잊지 마라

 

자아와 자아가 서로 완전히 별개의 객체로써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

자아 그 자체를 유지 할 수 없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우주적인 본질이다.

 

그러나

 

이 작은 밀어냄은

 

사실 사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왜냐면

 

사랑은 절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나와 나가

진실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가 진심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 배척과

우열을 가르는 순간을

절대 피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였다.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절대 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자아와 자아를 나누어 놓고 보니

경쟁 역시 필수 불가결이었기 때문에

먹어야만 생존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니

 

세상 그 어떤 운명의 시련 속에서도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사랑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슬픔은 오로지 하나 뿐

 

그것은

관계의 단절이다.

사랑을 상실하거나

죽음이 천륜을 갈라놓거나

이별이 관계를 단절 시키거나

전달하여야 할 감정이 전달되지 않거나(감정대신 어떠한 정보나 사실이라도)

어떤 의도나 행동이 역경에 부딪히거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가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혹은 어떠한 과정상에서

단절이 발생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

우리에게는 슬픈 감정과 눈물이 발생한다.

지나치게 큰 고난을 견디고 역경 끝에 얻은 눈물이 주체할 수 없는 크기로 터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의 모든 단절을 한꺼번에 보상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물을 나약한 것으로 치부하고

배척한다.

 

모든 눈물은 각각의 의미가 있다.

어딘가에서 단절이 발생하기 때문에 눈물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여 이 눈물은

바로 모든 슬픔과 사건을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이고 진리와 문 그리고 열쇠로 통하는 문이다.

 

? 슬프고

? 눈물을 흘리는가에

나 자신과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파악해야만 한다.

 

원인을 모르는데 해법이 나올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작품의 제목이 슬픔의 바위 사막이다.

 

왜 슬픈가?

 

그 이유가 관계의 단절에 있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강인해지고 싶어서

눈물을 짓밟고 나면

눈물이 사라지는가?

 

더 큰 눈물이 세상에 생겨날 뿐이다.

 

우리가 모든 관계의 단절에서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신이 사랑을 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 모든 눈물들은 정작 우리 자기 자신이 아닌

우리를 창조한 신의 눈물들 이었다.


이기고 싶다면

무례함이나 감정적 도발을 포함한 자기 합리화보다는

이성적인 사고를 통한 합리적인 지혜를 창출하고

 

꾸준히 안전하게 본인의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결과에 승복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할 수 없는 이상

승패가 결정 된 그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이길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다음으로 넘어간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나를

 

사랑할 줄 모르면

 

어떤 한 순간의 승리 이 외의 모든 생의 순간들이

 

더럽고 추악하고 위험한 것들로만 채워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짜 행복 할 수 있는것은

 

오로지 최종승자 단 한사람 뿐이되는 문제다.

 

그러나

 

깨끗하게 승부에 승복할 줄 안다면

 

승부는 그냥 어떤 경기 한 순간에 국한되고

 

인생의 나머지 모든 순간들에서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이 최종 승자가 아니어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단맛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

 

승부의 논리에 사람들이 집중하는것은

 

언제나 최고 권력자들의 소망이다.

 

민중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불행해지는 사이

 

자기들은 권력의 단맛을 있는대로 즐기겠다는 계산인거다.

 

승자만이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 자신을 포함한

 

이세상전체 99.99% 의 인간이 불행해지는 문제에

 

당신 스스로가

 

동의해야 한다.

 

 

드라마 도깨비 제작진과 김은숙 작가는

 

본인의 다음 블로그인

blog.daum.net/japhikel

본인이 2007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2010계속 되는 협박과 불안한 주변상황

끔찍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행되었던 자살기도 속에서

이미 블로그가 한번 삭제되었다가

지난 2011부터 다시 집필을 재개하여 현재까지 공개 집필해왔던 작품

슬픔의 바위사막을 표절하였습니다.

 

협박의 원인은 본인이 지난 2005年 末 작성한 네이버 오픈백과사전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 봅시다.’ 로 추정되며

조회수 816,000 의 이 게시물은 지금 현재 검색제한조치가 걸려있는 상황입니다.

 

https://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보시다시피 100 번째의 가장 첫 번째의 오픈 백과 게시물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의 네이버 아이디로 접속하여 정상 카테고리를 따라가도 99번째 까지만 검색이 됩니다.

 

(연관검색어의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목을 정확하게 끝까지 다 입력 하여도

최종적으로 검색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검색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제한 된 것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바랍니다.

 

http://blog.daum.net/japhikel/1009

 

이제 와서야 드라마 도깨비 제작진의 표절범죄사실을 밝히는 사유는

부끄럽게도 제가 지난 2017713부터 올해 2018811까지 부당한 실형을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굉장히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계속적으로 저를 협박하고 있었으며

이 협박은 온라인상에서의 집단 시시비비나

오프라인 상에서의 폭행시비를 포함하여

귀중품 절도, 재물손괴, 지인들의 신변안전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던 끔찍한 상황이었습니다.

경찰에는 숫한 도움요청을 진행하였으나

매번 증거불충분이나 용의자 특정 곤란, 그리고 개인정보보호법을 구실로 삼아 지인에 대한 신변안전 위협은 번번이 수사대상에서 제외되기만 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조치였습니다.)

 

결국 분을 못 참고 몇 차례 폭행과 재물손괴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그로인하여 실형을 살게 되었던 겁니다.

 

하지는 이는 엄연히 대한민국 형법 제 21조 정당방위에 관한 법령 각 1, 2, 3항의 전항을 위배하지 않는 충분히 처벌을 면할 수 있는 범죄였고,

설혹 범죄사실과 협박 사실 간의 인과관계 성립에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누구나가 보아도 제가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매우 많았기에

대한민국 형법 제 16조 오상방위 내지는 오상정당행위에 의한 법령에 의해서도

역시 처벌을 면할 수가 있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천 오정경찰서 또는 원미경찰서 유치장에서

증거제출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자필로 작성한 자필진술서 17P. 는 대부분 삭제 폐기 되었고

혐의를 인정하는 내용만이 담긴 맨 뒤 두 장 추가보충내용만이 남겨졌으며

이 내용을 그대로 법정에 제출하기가 이상하자

 

누군가 심지어 괴한의 자필필적으로 진정서세 글자를 A4 용지에 써서

이를 마치 표지인 것처럼 위장하여 법정에 제출하는 수법으로 구속적부심사를 방해하였고,

이 위조된 자필진술서가 제1차 검찰 진술조서에 공식 반영 되면서

 

마치 제가 증거제출 필요 없이 범행 일체를 자백한 것으로 법정에 사실이 잘못 전달되어져

그대로 1심에서 징역 16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 6감형이 이루어졌으나

 

합의를 진행하였던 피해자 측이 이면 계약서를 작성하여 소송사기에 휘말려 위약금 오천만원의 손배소송까지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6월 감형을 받겠다고 합의금 50,000,000원을 배상할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피해자가 저와의 대화를 완강하게 거부 하여 대화를 포기하였고 (2017926)

제가 대화를 포기하자 피해자가 저 모르게 저의 모친(當年 77)을 꼬드겨서 2017928문제의 이면계약서를 저도 모르게 작성해 두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제시하였던 합의금은 500만원이고,

법정 판결문에 조차 피해자와 가해자가 원만히 합의하였다. 라는 내용이 아닌

피해자가 항소심에 이르러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아니한다고 하였다는 단순 처벌 불원의 조항만이 있었습니다.

 

이 소송 사기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합의금 최종 지급 영수증이 법정에 제출 된 사실이 없고

저의 항소심 국선변호인과(합의서 법정 제출자)

저에게 합의가 되었으니 어서 사인하라고 윽박을 지른 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까지만 밝히겠습니다.

 

심지어 피해자는 지난 2017118항소심 선고 8日 前에도

그리고 2018110상고심 대법 판결 9日 前 에도

합의 내용과 법정 진행상황이 상이함을 법정에 알릴 기회가 2번이나 있었는데도

이를 법정에 알리지 않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니 법정에 제출된 정신과 진단서마저도 위조 되어져 있었더군요.

 

이 모든 내용들은 전부 증거를 가지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진술서 위조범의 필적,

위조된 진단서,

그 외의 숫한 협박의 증거들은 모두 자료로써 보관중입니다.

글의 말미에 밝히겠습니다.

 

이제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작품 표절 이야기로 넘어가죠.

그렇게 지난 2017713부터 부당한 실형을 살게 되어 구속 수감 중이었던 제가

올해 20186

문제의 드라마 도깨비를 교정시설 보라미 방송에서 시청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집이 가난하여 대학 등록금을 마련 할 수 없어

미술 전공의 꿈을 접고 고졸학력으로 학업을 종료한 뒤 계속 되는 직장생활로 돈을 벌며 작가로써의 꿈을 키워오고 또 공부해왔던 사람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아버지와 제가 함께 돈을 모아 융자끼고 마련한 집이고

집에는 TV 가 한 대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요

 

어머니 차지죠.

 

저는 평소에 드라마 같은 거 아니 TV 자체를 거의 안 보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20186

화성직업훈련교도소 독방에서(협박피해사실과 블로그의 사회적 인지도, 네이버 게시물 검색 제한 조치 등의 특수한 상황이 개인 신변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이 인정되어 독거실에서 홀로 실형을 살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드라마 도깨비를 볼 때 까지

 

저는 작품의 표절 피해 사실을 전혀 몰랐었고

 

보자마자 표절 피해 사실을 알게 되어

 

지난 20186月 末 대검찰청에 제출한 자필 陳情書 내용을 그대로 적어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대검이 이 사건을 다시 부천지청으로 넘겼고 부천지청은 수사의 중지를 요청하는 저의 서신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관련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였는데요. 이는 진정서 제출 등의 사실과 자료를 은폐할 목적입니다. 당시 자필 진정서 사본(필사본 및 원본 포함) 등은 모두 제가 보관중이고 이는 한국 저작권 협회와의 상담 시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표절의 범위부터 거론 하자면

 

설정의 도용과 대사의 카피

표현하려는 장면의 구도와 이미지의 도용

스토리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 역시 그대로 도용

인문학적 예술의 요소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도용한 사실 등이 있으며

 

구체적인 공통점들을 나열 하자면

신적 존재와 반신적인 존재가 운명적인 조우를 하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구성된 점

(제 작품에서는 여주인공인 작은 마녀가 운명을 만나 해답을 얻고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도깨비가 육성재 에게 강림한 신을 만나 해답을 듣게 되죠)

遭遇(조우) 는 반신적 존재의 도전과 해답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공통점

주인공이 신적인 존재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반신적 존재라는 공통점과

(제 작품인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는 비열한 세계의 과 얼어붙은 채 불타오르는 모든 눈물을 쓸모없는 바윗덩어리로 바꾸는 냉혹한 태양에 의해서 고통 받고, 드라마 도깨비에서의 공유씨는 에 의해서 고통을 받죠.)

정말 짜증나는 건 그러한 고통 받는 남자 주인공을 여자 주인공이 구원해주는 스토리라인까지 똑같다는 것이고

 

진짜 이럴 수도 있나 싶을 만큼 철저하게 베끼셨더군요.

 

한마디로 주제의식을 통째로 베끼시려는 시도를 하셨습니다.

신은 피조물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며

그 답은 피조물이 내는 것이다 까지 베끼셨더라구요.

문제의 도깨비 12의 경우

그리고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체적인 장면의 흐름과 전개도 너무나 유사하구요

사건의 흐름이 특히나 유사한데

고통 받는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저의 작품의 경우 여주인공이 그 해답을 찾아가지만

드라마 도깨비는 주인공이 그 해답의 단편과 조우하는 점이 약간 다를 뿐

실제 구원은 여주인공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전개구도는 너무나 화가 날 만큼 유사합니다.

특히 세계관의 구성에서

환생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自我(자아)의 인식의 구조와 이를 바탕으로 세계관이 구성되는 유사점에 환생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에 여러 반신적인 신화의 존재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점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에 기독교적 관점의 유일신 관점의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하고

그러한 신을 추론해 나가는 논리전개의 구조까지도 유사합니다.

불꽃과 검의 모티브에서도

저의 작품상에서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모두 불꽃을 다루는데요.

백일몽의 불꽃으로 마법을 쓰는 작은 마녀와 소망의 불꽃으로 마법의 도구를 만들어내는 슬픔의 대장장이로 표현되는데요.

드라마 도깨비의 경우 도깨비 본인이 불꽃을 다루고

불꽃 속에 검을 숨기는데

이는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사막 마지막에 슬픔의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소망의 검을 백일몽의 불꽃 속에 납검(納劍) 하는 작은 마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또한 빗자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마녀라는 이미지로 기존 클리셰에 차별화를 둔 저의 작은 마녀라는 캐릭터를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빗자루로 변하지 않는 도깨비라는 컨셉으로 표절 하였구요.

(캐릭터 표절이 아닌 기존 클리셰를 탈피하는 기법을 선점함으로써 마치 자기 캐릭터가 원조인 것처럼 보이려는 이미지의 카피)

 

심지어 긍정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꽃이고

슬픔은 세상에 내리는 비로 표현된다는 부분 까지도 똑같습니다.

(주인공이 슬프면 세상에 비가 온다는 공통점)

 

이 부분에도 어느 정도 가공은 있습니다.

 

제 작품상에서 주인공이 스스로의 실수로 자신이 가장 아끼던 그리움의 보석이 파괴 된 뒤

슬픔에 젖어 자기 자신 스스로가 눈물이 되어

얼어붙은 냉혹한 태양의 마법으로 거대한 보석이 된 채 눈물이 없는 울음으로

오롯이 소리로만 울음을 울 때

슬픔의 바위 사막과 이를 아우른 모든 세상에 주인공이 구원되는 그 날 까지 절대 그치지 않는 비가 온다는 설정이 본래 설정이었는데요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도깨비가 그냥 즉흥 적으로 기분이 좋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한겨울에 꽃이 피고

슬프면 어느 특정 지역에 비가내리고 하는 식입니다.

 

저의 작품상에 긍정적 요소로 꽃이 등장하는 것은 모두 3번으로

쇠나무에 꽃이 피다.’

쇠나무에 꽃이 피다. fin.’

쇠나무에 꽃이 피다. No.2.’

 

가 그것입니다.

 

모두 순수 시문학 작품으로

특히 쇠나무에 꽃이 피다. No.2.’ 는 한겨울에 피는 꽃입니다.

말라죽은 나무에 겨우살이가 뿌리를 내려 한겨울 소담스레 내리는 함박눈과 꽃송이들이

서로 마주보며 눈꽃 과 겨우살이 꽃이 만개하는 내용을 담았는데요.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쇠나무에 꽃이 피다. No.2 (Bloom in steel wood No.2)

 

대략적으로 보아 뛰어노는 개구쟁이들의 키만큼

그보다 조금 더 뜨거웠던 여름이라는 순수의 계절이 지나고

계절이 품고 있던 연모의 정이 소나기가 되어 떨어져 내렸던 몇 개월,

나무는 푸르게 피어나고 자라나 늠름하게 그늘을 드리웠다.

 

사실 그 나무가

계절의 사모하는 마음을 먹고 자라나

그 위엄어린 자태를 뽐내게 된 것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어느 날 문득 제멋대로 해안가를 스쳐 지나가는

성품이 어질지 못한 태풍의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위 틈바구니에 몸을 의탁하여

거친 바다바람을 먹고 자라난 해송의 이야기처럼

아스라이 작은 섬 끼고 도는 고깃배 그림자를,

하염없이 추억하는 서글픈 이야기도 아니었다.

 

태평양의 어느 섬에는

출생의 비화가 있는 반인반어(伴人半漁)의 왕자가

낮에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밤에는 등에 달려있는 상어의 아가리로

헤엄치는 사람들을 머리부터 베어 먹었다는

무섭고도 기괴한 전설이 전해져온다.

 

마치 그 왕자의 등을 가린 망토와도 같은 시간의 베일이

정확하게 나무와 함께 있었던 어떠한 사건들을,

은밀하게 감추고 가리어두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나무는 어느 날부터 물기가 마르기 시작하여

왕자의 전설이 전해지던 태평양보다도 더 푸르른 하늘

푸른 계절이 내려주던 사모하는 마음들을 마시고도

오가는 산들바람이 들려주는 아델라와 무늬삐꾹나리간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스캔들 이야기라던가

뱀딸기 꽃이 초록의 바다에서 노란 마음을 품게 된

아름다운 사연들을 전해 듣고서도

온통 보라색으로 숲의 바닥을 점령하여

나무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려 애써준,

맥문동 군락의 진심어린 애정에도

마음이 마르고 믿음이 휘발되고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어 죽어가기 시작했다.

 

계절이 나무를 사모하는 마음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와

그 마음들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게 되어

낮은 곳을 찾아내는 그 고운 품성으로 인하여 서로 모여들어

숲의 모든 지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흐르는

폭도 깊이도 변화무쌍한 개울물에 서로 모여 조잘대며 흐르고

계집아이들이 서로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흐르는 수면 위로

마른 나무의 가지 위에는 총명한 물총새 한 마리가 수면을 내려다보며

작은 심장을 뛰게 해줄 양식이 될 물고기를 목표로 한다.

 

흐르는 개울 옆에서 숲의 마음을 전달받고도

나무는 결국 죽어 굳은 마음이 쇠와 같이 단단해지고 말았다.

 

그 무슨 사연이 있어 나무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것일까

수많은 시간이 흘러 계절이 다시 나무를 찾은 횟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무렵,

쇠와 같은 나무의 가지들 틈바구니로 겨우살이 한 그루 철목(鐵木)을 꿰뚫고 뿌리를 박아

죽어 쇠가 되어 아무런 영양가조차도 없는 쇠나무로부터 무엇을 받아먹는지

계절이 나무를 떠나있던 겨울에, 새하얀 눈송이만큼이나 깨끗한 꽃송이들을 만개하였다.

 

꽃잎 한 장 한 장, 찬바람에 흩날리다,

쇠나무 가지를 간질이며 사랑을 속삭인다.

 

*휴거헐거 철목개화(休去歇去 鐵木開花) 라는 벽암록의 고사를 인용한 시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029

 

자세한 내용은 원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쇠나무에 꽃이 피다 No. 2.’) 2015에 유소다라는 모델분에게 써준 시를 조금 수정하여 상기 블로그에 올려둔 시이구요.

무엇을 어떻게 해도 김은숙 작가님은 원작자임을 주장 하실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위처럼 무단으로 설정들을 도용하시기에 이르신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작품 전체를 일단 읽어보셔야 비교하여 이해하시는 게 가능하시므로 일단 작품을 읽어보시기를 바라며

 

이 외에도 수많은 도용의 흔적들을 계속해서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포스팅을 한 번 하고

나머지를 이어가도록 하죠.

 

저의 작품상에서

작은 마녀는 백일몽의 불꽃 속에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소망의 검을 납검하고

주인공은 소망의 불꽃으로, 얼어붙은 태양에 의해 바위가 되거나 보석이 되어버린 눈물들을 제련하며

인내의 눈물로 만들어진 모루 위에

분노가 기어이 눈물이 된 타오르는 불꽃의 망치를 사용하여

여주인공인 작은 마녀로부터 건네받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가장 쓸모없는 쇠몽둥이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배타성의 결정체를 건네받아 이를 제련하여 소망의 검을 만들어내어 여주인공인 작은 마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검을 만들어주는 그런 스토리인데요,

반면에 드라마 도깨비는 도깨비가 자신의 도깨비불에 자신의 심장에 박혀 있던 물의 검을 납검 하고

마침내 김고은씨의 손을 이용하여 자신의 심장에서 뽑아 낸 그 물의 검이 불의 검으로 바뀐 뒤에

도깨비는 흩날리는 불티가 되어 스러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데요.

이 장면이

저의 작품상에서

주인공이 마침내 소망의 검을 완성 할 때

자신이 그동안 슬픔의 바위 사막 안에서 고독하게 눈물들을 제련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사연들에 의한 희로애락(喜怒愛樂, 또는 喜怒哀樂)들이

다시는 발휘될 수 없는 인내와(인내의 모루)

결코 두 번 다시는 타오를 수 없는 단 한 번의 분노(분노의 망치)

모두 사라져 버리는 장면과 너무 유사합니다.

 

본문 일부를 인용하자면

 

검이 완성되자

자신의 모든 것을 검에게 빼앗긴

인내의 모루와 분노의 망치는

새하얀 먼지들처럼

바람결에 흩어져갔어

다시는 품지 못할 분노와

더 이상 발휘할 수 없는 인내심이

먼지처럼 바람결에 흩어져갔어

다시는 켜지지 않을 소망의 불꽃도

그 힘을 잃고 천천히 수그러들었어.

온 힘을 다해 움직인 열정의 풀무도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어.

대장장이는

더 이상 대장장이일 수 없었어.’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6

 

, 너무나 그 장면이 유사합니다.

그 이미지 자체가 너무나 유사한 거죠.

 

이 외에도 저의 작품상에서 작은 마녀는

본래는 마법의 가마솥을 사용할 때 쓰이던 백일몽의 불꽃으로 마법과 이적을 발휘하여

세상을 초월한 이동을 통한 여행을 거듭합니다.

반면에 주인공인 대장장이는 이러한 이동을 할 수가 없는 존재로 묘사 되는데

이는

6‘You could be to me’

의 기본 설정으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06 You could be to me

 

슬픔의 바위 사막 제 2(Rock desert of sorrow Part 2)

 

I‘m nowere to going now

I can‘t

It just big sorrow

I want going everywhere

But I can‘t

I couldn‘t gone through anything, anytime

Please

You should gone through everything, everytime

You can do that

Because

You are different to me

Go,

Gone though now

 

To the time.

To the life.

To the fate.

 

You could be to me.

 

Be there

In your mind

 

이 작품은 2016311

인천공항에서 퇴근길에 모바일로 작성한 작품이 원문인데요.

 

출처는 여기입니다. http://blog.daum.net/japhikel/816

 

제 작품상에서 그리움의 주인공과 작은 마녀는 동일인물로 설정되어져 있으며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는 공간은 현실공간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속에 창조된 공간으로 설정 되어져 있고

스토리는 현실과 심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구조입니다.

하여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는 현실상의 가장 사랑하는 여성을 심상의 세계에서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최고의 작품을 건네어 줌으로써 모든 마음의 희로애락을 떨쳐버리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사랑이라는 것이 결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인공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되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심상의 세계 속에서

자유와 진정한 권리인 으로써의 사고와 진심어린 마음으로써

주인공에게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와 주어야만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시 문학 자체도 움직여야 할 대상이 주인공이 아닌 여주인공으로 구성 된 것이며

전체 스토리의 구조 자체도 여주인공인 작은 마녀가 마법의 불꽃으로 세상을 초월한 무수한 여행을 통하여 주인공을 찾아온다는 설정이 된 것입니다.

 

you could be to me 자체가 저의 작품 스토리 전개의 짧은 축약입니다.

 

이를 드라마 도깨비는 다음과 같이 설정을 도용했는데요.

 

본래는 빗자루를 타고 이동하는 마녀라고 하는 기존의 클리셰의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하여

백일몽의 불꽃으로 몸을 던져 뛰어들어 세상을 초월하며 이동하는 작은 마녀를

김은숙 작가님께서는

드라마 도깨비에서

애초에 이러한 이동능력 자체가 없는 도깨비라는 기존의 클리셰를 이용한 캐릭터에게

문을 열면 다른 세상으로 이동이 가능한 캐릭터 로 설정을 바꾸어서 그 이미지를 도용하셨더군요.

때로는 불꽃으로도 이동을 하던데

 

저의 작품상에서 주인공의 집안에 침입한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자들 즉 주인공의 적들이 주인공이 아끼는 그리움의 보석을 살피다가 분노하여 달려드는 주인공에게 그리움의 보석을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슬픔의 대장장이는 그만 자신의 분노의 망치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그리움의 주인공이라는 보석을 깨트리게 되는 장면과 너무나 유사한 장면인데요.

 

처음으로 김고은씨가 공유씨의 심장에 박힌 검에 손을 대었을 때

놀란 공유씨가 김고은씨를 그만 밀쳐내어 버리고

뒤로 튕겨지듯 날아가던 김고은씨를 도깨비가 쏜살같이 이동하여 받아 낼 때

도깨비가 불꽃으로 이동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화가 나는 일인 겁니다.

 

또한 제 작품과 도깨비 모두

두 작품이 모두 마녀와 대장장이 그리고 도깨비와 저승사자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친숙한 클리셰에 가까운 캐릭터들이

모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설정들과는 다른 매우 독창적인 캐릭터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각 캐릭터의 설정과 인물간의 구도 스토리라인의 전개 과정까지 유사하다는 것은

심지어 역할 배정까지 유사하다는 것은

 

확률 적으로 고의 표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설혹 정말로 우연의 일치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작품이 이전에 있었는지를 김은숙 작가님께서 충분히 살피지 않으신 것이므로

이는 부주의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해당합니다.

 

제 블로그가 어디 꽁꽁 감추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통산 방문자가 70만명을 넘어선 엄연한 파워블로거인데

게다가 제 2회 항공문학상 시 부문 장려상 수상 경력에 2번의 출판경력까지 있는 어엿한 작가의 블로그에 공개집필로 수록 된 작품인데

이를 살피지 못한 것은 김은숙 작가님과 드라마 도깨비 제작진 전체의 책임이 맞습니다.

 

특히 작은 마녀가 슬픔의 바위 사막 이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초월적인 여행, , 심상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드는 여행 끝에 마침내 주인공을 만나, 헬리오스의 후광을 받으며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장면과(자세한 내용 후술)

 

기억을 지우는 차를 마시지 않은 채 환생하여 하나의 세상과 생을 마치 다시 살 듯, 또한 실제로도 하나의 세상을 다시 살아서 모든 역경을 초월한 김고은 씨가 심지어 드라마 장면 상에서 햇빛을 후광처럼 두른 채 도깨비에게 고백하는 장면까지 이르고 보면 ...........................

 

아 화나,

 

또한 마녀라고 하는 어떤 반신적인 존재가(일반적으로는 반신적인 존재가 아니지만 저의 작품상에서는 반신적인 존재입니다.)

역시 슬픔의 대장장이라고 하는 신화적인 반신적인 존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유일신의 화신(化身)으로 표현 된 운명(運命)이라는 절대적인 초월자와 맞닥뜨려 정면으로 승부를 벌이고 해답을 얻는 과정과

 

도깨비가 자신과 김고은 사이에 얽힌 운명의 굴레를 해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육성재에게 잠시 강림한 신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신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장면이 또한 너무나 유사하고,

 

심지어 이 속에서 진짜 고통 받는 주인공을 구원하는 것이 여주인공이라는 설정까지 유사하고

 

저는 작품상에서 오글거리는 설정을 피하고자 작은 마녀와 슬픔의 대장장이에게 불꽃이라는 소재의 유사함을 부여한 반면

드라마 도깨비는 뜬금없이 도깨비 신부가 나타나고 여기에 설정에 대한 설명조차 없고

(어디서 튀어나온 오글거리는 설정이냐고 ......)

 

거기에

작은 마녀와 운명이 서로 한판 대결을 벌이는 체스경기를 너무나 빼어 닮은 장면이

삼신할머니와 육성재의 술자리 대화 장면이며

 

또한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중에서

본편 제 19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편

(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second volume)

에 대하여

 

도깨비 1112

육성재에게 강림한 신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해당 회차 전체가 저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사까지 그대로 카피하여 주제의식에 대한 표절 의도를 비친 경우입니다.

 

저의 작품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운명이 항상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편 中篇(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second volume)

슬픔의 바위 사막 제 19(Rock desert of sorrow part. 19)

 

서로의 체스 시계 버튼을 누르는 소리

각자 서로의 모래시계를 떨어뜨리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해오지

각자 서로에게 주어진 한계 시간 안에

상대를 이겨야 하기 때문이야

주어진 시간을 먼저 소모해버리게 되면

그것은 바로 패배

 

터치&무브, 손댄 기물은 반드시 움직여야해

신중하게 기물을 고르고

신속하게 기물을 옮기고

재빠르게 체스시계의 버튼을 넘겨서

상대의 모래시계를 갉아 먹는다

 

흑의 기물 위치

c7

나이트 c6

나이트 g6

e6, f6, d5

중략...

 

백의 기물 위치

e5, d4, c3

나이트 f3

중략...

 

f takes e5

d takes e5

Knight c takes e5

Kinght takes e5

Kinght takes e5

중략 ...

 

낭랑한 목소리

시간이 두 선수의 기보를 기록하며

엄숙하게 매 수를 선언하고 있어

우주가 열린 이래 단 한 번도 뒤집힌 적 없는

이상한 모래시계의 선언이 매순간 반복되고 있어.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난타전

서로 가진 기물 전부를 아끼지 않고 쏟아 부어 총력전을 벌이고 있어

계략을 꾸미고 함정을 파고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우회 공격으로

그러나 공격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스테일메이트

 

다이긴 싸움 무위로 돌려버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가장 치열한 투쟁의 본질

그것은 승리를 위한 것

 

명예도 도덕도 규칙도 기물도

운명도 마녀도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승리를 위하여 존재 한다.

 

그러나

설혹 스스로가 패배 했을지라도

결코 승부에 불복해서는 안 되는

가장 무서운 단 한판의 승부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단 한 번의 승부

 

치열하고 처절한 승부의 끝에

백은 킹과 폰 비숍이 남았고

흑은 킹과 폰만이 남았지

승리의 열쇠는 프로모션

기나긴 투쟁의 끝에 기어코 반대편 운명의 벽과 마주한

가장 하찮은 기물 폰의 눈부신 변화

운명의 벽과 마주한 폰은

그 순간 무엇으로든 변화 할 수 있어

퀸이 될 수도 있고

비숍이 될 수도 있고

룩이 될 수도 있고

나이트가 될 수도 있지

체스라고 하는 작은 규칙

우주에 빗댈 수 있는 그 규칙 안에서

그 규칙이 허락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어.

 

킹은 오로지 처음 주어지는 단 하나뿐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생명과도 같은 것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야

그러니 폰은 결코 킹이 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우주가 허락하고 우주가 품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중

무엇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백측

운명의 기물

비숍이 d5

폰이 f5

킹이 e2 에 있어

 

흑측

마녀의 기물

폰이 g7 h2 에 각 하나씩

킹이 g1에 도달 했어.

 

우측 하단 부 첫 번째 랭크의 일곱 번째 파일에 흑의 킹이 있고

두 번째 랭크에 가장 오른쪽 파일에 흑의 폰이 프로모션진행 직전에 있어

흑의 폰 하나가 우측 상단부에 아직 출발하지 못한 상태야

백의 킹이 두 번째 랭크 다섯 번째 파일에 있지

백의 폰과 비숍이 중앙부에 각각 좌우에 있어.

 

이미 운명의 벽과 마주한 킹

그리고 운명의 벽을 마주하기 직전의 폰

그것은 마치 경각에 달한 누군가의 목숨과 같은 모습

초월적인 의지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에 이미 한발 걸쳐놓은

구체성과 배타성의 현실과

그 섬과 같은 디지털들이 떠있는

그 디지털들이 태어난 고향

그 불연속적인 객체들을 포용하는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

어머니의 바다에게로 회귀하려는 격렬한 몸부림, 움직임!

 

백의 비숍이 d5 에서 h1으로

중앙에서 대각선으로 이동하여

가장 우측 파일 첫 번째 랭크로 움직였어

흑의 폰과 킹 사이를 가로막으며

흑폰의 진행방향을 가로 막았어.

운명의 한 수

흑의 프로모션을 방해하는

그리고 킹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비장의 희생 수

흑의 킹이 h1 으로 이동하며 비숍을 잡았어.

이제 흑폰은 흑의 킹에게 진로를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어

 

백의 킹의 신중한 한 수

e2 에서 f2

5번째 파일에서 여섯 번째 파일로 자리를 옮겼어

킹의 자살수 금지를 이용하여

흑의 킹이 움직일 진로를 차단하려는 의도야

이제 흑의 킹은 어디로 움직여도 백의 킹의 체크를 피할 수 없어

하지만 체크를 당한 것은 아니야

스테일메이트도 아니지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다른 기물들이 있으니까

또 한 가지

마주 오는 흑폰을 백폰으로 양파상으로 잡기 보다는

킹의 움직임으로 잡으려는 의도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상대를 공격할 준비를 해

 

지금까지 우측 일곱 번째 랭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일곱 번째 파일의 흑폰 하나가 최초의 출발을 했어

마녀의 흑폰이 g7에서 g5

두 칸을 전진 할 수 있는 폰의 첫 번째 전진

이 첫 번째 전진에 주의할 점은 마주 오는 상대편 폰이

두 칸을 전진하려는 폰을 양파상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여섯 번째 파일에 있던 백폰의 움직임에 걸리는거야.

원래 한 칸밖에 움직일 수 없는 폰

마주 오는 폰이 있는 경우 그 폰을 피할 수 없고

한 칸을 움직인 것으로 간주되어 상대 폰 에게 잡히게되는 규칙이야

폰과 폰은

결코 서로의 투쟁을

서로의 운명을 회피할 수 없어

 

그러나

마주 오는 백폰

양파상을 쓰지 않았어.

마녀가 걸어온 흑폰의 투쟁 신청

받아들이지 않았어.

지나치는 흑폰을 무시하고 한 칸을 전진하는 운명의 백폰

f5 에서 f6

흑폰은 g5 에서 g4

다시 백폰은 f6에서 f7으로

서로 각각 따로 움직이는 폰들

운명의 벽과 마주하기 직전

흑폰은 g4에서 g3

우측 하단부 구석에서

f2에서 기다리던 킹이 흑폰을 처리했지

백의 킹은 이제 g3

우측 세 번째 랭크야

 

비로소 자살 수 금지에서 풀려난 흑의 킹이 h1 에서 g1 으로 움직였어

좌측으로 한 칸을 움직인 거야

이제 서야 비로소 h2 의 흑폰을 프로모션 할 수 있게 되었지

f파일의 흑폰은 이것을 위한 희생양

이제 단 하나 남은 마녀의 폰

 

그러나

백폰이 먼저 f8 에 도달 하며

가장 아름다운 퀸으로 프로모션을 진행 했어

마녀에게 대적하는 운명의 퀸

마녀는 h2의 흑폰을

마침내 전진시켜서

h1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벽

그가 존재하는 우주라는 어항의 벽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금붕어가 마주한

투명한 어항의 벽으로 옮겨 놓았어.

 

마녀는 그를

그로 하여금

스스로 어항의 벽을 깨고

스스로를 물 밖으로 추방하여

물속에서밖에 살 수 없는 그를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려고 했어

늠름한 나이트로 프로모션 하려 했지

b3에 위치한 운명의 킹을 노릴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나이트로

 

그 순간

운명이 마녀에게 속삭였어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의 철길 위에서

양쪽으로 한 줄씩 선로가 깔려있을 뿐인

그 단순한 미로 속에서 8년을 맴돌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속삭임

 

이 멍청아

내 강력한 퀸을 생각 해봐

고작 그따위 나이트로 나를 한번 위협하고 나서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어쩔 생각이지?

내 퀸은 강력해 아름답지

 

슬픔의 바위 사막

백택(白澤 báizé) 이 살던 도시

네가 백택을 찾아낼 때까지

셀레네와 헬리오스를 따라 여행하며 지나쳐온 수많은 도시

그리움의 주인공이 그 연인과 함께 살던 도시

모두다 너희들의 심상의 세계

너희들 각자의 감정과 사고와 고정관념이 머물러 있는

그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만들어낸 객체들이 군집된 공간들

마치 온전한 연속성, 어머니의 바다의 그 고요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너희들 자신처럼

 

너와 나, 여기부터 저기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경계를 나누고 서로를 배척하여 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배타적인 객체를 구축한 너희들 자신과 같이

그 모습 그대로

그 배타성과 고집이 만들어낸 너희들의 심상의 세계에

너희들의 현실이 갇혀 있지

 

마치 네가 그 심상의 세계들을 자유롭게 초월했듯이

마치 네가 그 사고의 벽을 거침없이 허물어 냈듯이

마치 네가 너와 나라고 하는 이 우주보다도 더욱 멀고 먼 그 공간을

눈부시게 도약하여 마침내 그와 그녀를 만나게 한 것처럼

 

내 퀸은 너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너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너를 위협할 수 있는데

 

고작 그따위 나이트로 무엇을 할 거지?

퀸을 만들어!

너 자신을 퀸으로 변화 시켜!

그의 곁으로 가!

그의 곁에 함께 서서 나와 마주해봐!

나를 뛰어넘어보라는 말이다!

그러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 나와 대적하고 있는 거잖아?”

 

그것은 마녀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질문

결코 거짓으로 대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질문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한낱 허깨비로 변해 사라져 버리는 사랑의 본질

마약보다도 더 강렬한 삶의 어떤 지점 어떤 순간의 유혹

 

마녀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폰을 퀸으로 프로모션 했어

 

기다렸다는 듯이

운명의 퀸이 f8로부터 f2까지

단숨에 날아와 내려 꽂혔지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꽂히는 것처럼

 

체크메이트

 

흑의 킹은 f1으로도 g2로도 움직일 수 없어

첫 번째 랭크 일곱 번째 파일에서

여덟 번째 파일에 있는 자신의 퀸에게 진로를 가로막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

어디로 움직여도 모두 백의 퀸의 공격권

운명의 퀸을 잡을 수도 없어

킹이 f2로 움직이면

g3에 위치한 백의 킹의 체크를 결코 피할 수 없어

그것은 자살 수

금지되어있는 규칙

 

마녀의 퀸은

그 쓸모없는 킹에게 가로막혀

운명의 퀸을 공격할 모든 진로가

완벽하게 차단되어있는 한심한 상태

허탈한 마녀가

자신의 킹을 채 쓰러트리기 전에

야만스럽고 잔인한 운명

비열한 세계의 신이 그녀의 킹을 쓰러뜨리며 선언했다.

 

내 승리다 어리석은 여인이여

 

마녀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어.

마녀는 경기를 치루는 동안 보았어.

 

운명이

비열한 세계의 신이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가치를 미끼로

그에게 어떤 행위들을 해왔는지 모두 보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같은 질문이 건네어진 그 순간에

마치 그와 같이 바보처럼 움직여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분노

오직 자신만이 쓰러뜨릴 수 있는 킹을

야만스럽게 쓰러뜨리며 이죽거리는 유치한 도발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지

 

나는 아직 포기 하지 않았어요!”

 

승부에 대한 불복

자신의 가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오기

그러나 여인이여

당신의 오기와 치기는 어떻게 그토록 이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운명이 잔인하게 말 했어.

 

포기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쩔 거지?

네 능력으로 보석이 되어버린 대장장이의 굳은 결심을 되돌릴 수 있나?

그가 갇혀있는 스스로의 심상의 세계 속에서 그는 과연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눈에는 그의 남은 수명이 보인다.

너는 그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나?”

 

그래요!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대답

운명이 잔인하게 웃으며 대답 했어

 

너에게 슬픔의 바위 사막을 알려준 그 다섯 번 째 마녀의 생명을

네 손으로 끊어봐라 그러면 그를 되돌려주지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

 

나는... 나는...”

 

여전히 잔인하게 웃는 운명

 

그건 조금 어렵나?

그럼 이건 어떨까

네 손으로 무언가를 죽일 필요는 없어

그건 내가 하지

너는 선택만 하라고

네가 살고 있던 마녀의 숲을 없애버릴 거야

그 대가로 그를 되돌려주지 어때?

너는 마녀의 숲과 그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거지?

너는 둘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어

이건 좀 쉽나?”

 

놀림 받은 사실을 깨달은 마녀는 발악하듯이 외쳤어

 

그래요! 나는 그를 선택하겠어요!

당신이 무어라고 이야기하건 어떤 조건을 내걸건

나는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나직하게 웃는 운명

 

그가 네 외모가 별로라며 네 사랑을 거부하면 그땐 어쩔 거지?”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를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운명은 마치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어

 

어쩌면 그는 너의 사랑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수도 있어

그가 너의 사랑보다는 너의 육체나 재물 혹은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너를 버릴 수도 있지

아니면

그가 끝끝내 그리움의 주인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너의 사랑을 영원히 외면할 수도 있어

네가 그와 다른 사람의 생명 가운데에서

그를 선택하고 그를 구해준 그 순간에

정작 그가 너를 선택하지 않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너의 사랑이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정도면 다행이게

그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너 자신과 너를 사랑한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네가 나의 첫 번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서

다섯 번째 마녀를 네 손으로 죽였다고 해서

내가 너와의 약속을 현실로 이행해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지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어리석은 거야

손해 보는 행위고 바보짓이지

 

너희들과 나는 어머니의 바다에서부터 태어났다

어머니의 바다는 여전히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

너와 나, 여기부터 저기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라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 불연속적이고 배타적인 객체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 더불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연결점

그 어떤 구분도, 그 어떤 경계도, 심지어 안과 밖의 구분조차도 없는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

세상이라는 불연속은

그 객체들은

어머니의 바다에 기대어

그 바다위에 서로 무한대의 거리를 마주하며 떠있는 작은 섬들

 

너의 마법은 그 연속성에 가 닿은 너의 위대한 정신이

너희 객체들의 한계인 심상의 세계를 초월하는 그 힘을 원동력으로

어머니의 바다를 이용해 불연속과 불연속을 초월하여

연속성으로 연결된 불연속의 반대편의 현상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기술

인과의 천칭의 눈금을 속이는 기술

인과를 재정립하는 기술

 

그러나 아이야

너의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자유로이 심상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네 정신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그는 그이고 너는 너라고 하는 객체가 가지는 한계

그가 너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네가 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우주적인 한계

너와 내가 그리고 그와 그녀가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객체라는 본질의 한계

 

내가 장난처럼 너에게 내건 조건들은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잔인한 악당들이 지금의 나처럼 야만스럽게 네 킹을 쓰러트릴 때

 

아이야

발악해봐야 소용없단다.

그래도 그를 사랑할 것이냐?"

 

마녀는 그제 서야 깨달은 잔혹한 현실에 눈물 흘리며 대답 했어.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할겁니다

 

그가 너의 호의를 너의 희생을 견딜 수 없어

그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려고?”

 

단호한 마녀의 대답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 할 겁니다.”

 

그 순간

온 우주가 통쾌하게 웃었다

전 우주가 우리의 선택의 순간을 위해

1초의 순간을 위해 움직여온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처음으로

전 우주가 웃었다

 

모든 본질들이

태초 이래 최초로 기쁨과 환희의 1초의 순간을 맞이했다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부다!

바로 그것만이 내가 너희들에게 영겁의 세월동안 던지는 질문!

 

좋으냐?

싫으냐?

얼마나 좋으냐?

무엇보다도 좋으냐?

언제까지 좋으냐?

어떻게 해도 좋으냐?

끝끝내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너희들이 살면서 쟁취하고 상실하는 그 모든 것들에게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 1초의 순간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

 

마녀야

네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쟁취하던

혹은 실패하던

비겁한 선택이던 어리석은 선택이던

모두 다 긍정된 사건들

긍정된 우연가운데 하나일 뿐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가 1부터 6까지 어떤 숫자를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하늘로 던져진 그 순간에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일 뿐

너 자신에게 패배자라는 꼬리표를 내걸고 실망할 이유 따윈 없다

괜찮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절대 현재의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라!

내일의 일은 내일 걱정해라!

 

마녀야

내 질문은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네 삶이 끝나고 난 후

또 다른 객체가 자신을 라고 인식할 때

영겁의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라는 존재의 인식

이 우주에 라는 객체가 존재하는 한

내 질문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마녀야

네가 다른 에게

무슨 행동을 하던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이다.

부디 지금의 네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다오 아이야

 

마녀와 운명이

소망의 화덕 안에서 불타오르는 보석을 바라보았어.

 

운명이 다시 말했지

 

온 세상 가득히 만연해 있는

나에 대한 그 수많은 편견의 벽에 기대어서

오직 나만의 공간에서

오직 나만이 느껴온 그 고독한 시간들

 

너는 마침내 모든 심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에게 도달하여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마주하여 나에게 이 우주에게

진실로 기쁜 단 1초의 순간을 선물해 주었다

 

태초 이래 처음으로

우주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너를 위해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그녀와 그녀의 연인과 대장장이를 서로 만나게 해주어라

너의 운명의 결말과 마주해 보거라 용감한 소녀여

 

그 순간

 

전 우주의 모든 것이 융합 되었어

그리고

발가락 사이사이 백사장 모래알 촉촉하게 닿는 그 느낌처럼

낱알, 낱알 보드랍게 흩어져갔지

 

가까이 혹은 멀리

망망한 대해의 수평선과

발등에 속삭이는 파도의 흰 포말

가까이 혹은 멀리

 

*이 시의 체스 경기는 널리 알려진 체스경기

Authors comment : The chess game of this poem is well-known chess game

Advanced Chess Strategy 영상과

Chess puzzle pawn promotion 이라는 두 영상의 부분을 인용해

조합하여 스토리를 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출처는 유튜브입니다.

 

*이영도씨의 작품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군요.

독창적인 표현을 개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편견의 벽에 기대어서 오직 나만이 느껴온 고독한 시간들 이라는 표현은

JK 김동욱씨의 제 1집 앨범에 수록된 EGO 라는 곡의 가사에서 빌려온 표현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8

 

이게 원문입니다.

 

드라마 도깨비가 1112에서 무엇을 베꼈다는 것인지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다들 아실 테지만

신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고 피조물은 거기에 답을 내어놓는 다는 대사

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가 너무나 많았음을 독백하는 장면

 

화가 날 정도로 유사해서

감옥 안에서 혼자 TV 보다가 기물파손 할 뻔 했었습니다.

 

특히

너에게 슬픔의 바위 사막을 알려준 그 다섯 번 째 마녀의 생명을

네 손으로 끊어봐라 그러면 그를 되돌려주지

 

이 대사는 삼신할머니의 대사

검을 뽑고 무()로 돌아가 안 그러면 저 아이가 죽어

와 너무나 유사한데요.

이건 김은숙 작가님께서 제 작품의 주제의식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상태에서 대충 카피하신 거고

이 미묘한 차이가 어떤 결론으로 바뀌는지는 후술하겠습니다.

 

그리고 삼신할머니와 육성재의 술자리 대화 장면의 경우

주인공인 도깨비가 인지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신과 반신적 존재의 어떤 위험한 도박과 같은 사건이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인데요.

다음을 보시죠

 

이곳은 검암(黔岩)No. 2(This is Geomam station No. 2)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20(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20)

 

서로 체스를 두고 있어

선수는 운명과 마녀

폰과 룩 비숍과 나이트

그리고 킹과 퀸

운명이 백을 잡았어.

마녀는 흑을 잡았지

가볍게 폰을 전진 시키고

나이트를 움직이고

퀸으로 상대편 말을 노리며

서로 체크와 스테일메이트를 조심하지

64칸의 우주 속에서

나와

그리움의 주인공의 운명이

난마(亂麻) 와 같이 얽혀있어

 

말들이 움직이면

우리를 둘러싼 우주가 움직여

사소한 먼지 한 톨조차 그냥 움직이지 않아

온 우주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 상황들이

명백히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이끌어

 

나의 기다림은 하루 이틀 계속되고 있어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불안감은 가중되지

운명은 포기를 마녀는 불굴을 강요해

 

그걸 바랐던 적이 있어

내가 절대로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그녀가 멀리 떠나주기를

누군가 멋진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 주기를

바보같이

단 한번도

우리가 함께 미래를 설계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어.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도 과분해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소심한 나는 부담감을 느끼며 선뜻 다가서지 못했어.

어쩌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아도

그녀는

내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명확한 의사의 표현을 망설여왔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감을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나 혼자서 부담감을 느끼며

바보처럼 벙어리냉가슴을 앓아온 것인지는 불분명해

무엇보다도,

 

나는 너무나 불안정했고

운명은 가혹 했으며

잔인한 환상에 시달렸고

그것은 어쩌면 현실일지도 모르기에

기약 없는 구원 이라는 것은

절대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없으니까

우리가 고통 받고 있었으니까

멀쩡한 정신으로

다음순간에 내가 무슨 행동을 하게 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기에

나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가 너무나도 크게

내 인생전반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녀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워진 나머지

결정적인 순간들마다

그녀를 욕심내는 일을 망설여왔지

어느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괜찮은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나는 너무나 고지식한 남자 인가봐

 

하루, 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는 그녀가 멀리 떠났을 거라고 생각 하게 되었어.

기다림을 그만두려 할 때 마다

마녀의 음성이 나를 설득 했어.

포기하지 말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운명은 그런 나를 열렬히 비웃었지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기회를 주었는데

고작 여자 마음하나 돌리지 못한 것이 말이 되냐고

 

상냥한 설득과

잔인한 비웃음의

상반된 선율 사이로

내 마음은 더욱 순수해졌어.

 

제발 한번만 이곳에 나타나 달라고

진심으로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당신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고

내가 당신의 반려가 되고 싶다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 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된 내 마음 앞에

진정으로 솔직하게 당신을 마주하고 있다고

오로지 당신만을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69

 

바로 여주인공과 운명이 신의 관점과 시각에서 서로 내기를 하며 움직이는 사소한 장기 말 들이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는 여성의 운명 사이에 우주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삼신할머니가 육성재와 술을 마시며 담소하는 장면과 너무나 똑같지 않나요?(단지 사람만 다르지 품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그냥 동일한 겁니다.)

 

그 외의 작품 구성요소 내에서

저의 작품 내에서 보자면 소망의 불꽃과 화덕, 열정의 풀무와 인내의 모루, 분노의 망치로 얼어붙은 차가운 태양 아래에서 얼어붙어 쓸모없는 돌멩이가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 보석이 되기도 하는 눈물을 제련하는 슬픔의 대장장이와 (대장장이와 차가운 태양의 구도는 저승사자와 도깨비의 인물구도와 지나칠 정도로 유사합니다.)

이러한 불꽃을 다루는 대장장이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되는 여주인공을 뜬금없이 집어넣기가 싫어서 마법의 가마솥을 사용하는 마녀에게 가마솥과 빗자루 같은 안 예쁜 이미지들 싹 빼버리고 마법의 가마솥에 사용하던 백일몽의 불꽃으로 마법을 쓰는 즉 주인공과 같은 불꽃을 사용하는 존재로써 주인공과 여주인공간의 운명적 사랑을 암시했던 것입니다.

 

이걸 뜬금없는 도깨비 신부라는 설정으로 ..... 이미지를 한 번 떨어트리더니 불꽃과 얼음 불꽃과 검 같은 대결구도와 인물 구도 다양한 이미지와 모티브 주제 의식 등을 모두 카피하더니

심지어 차가운 태양이라고 하는 세상 모든 미움의 결정체 즉 태양이 스스로 자기 태양아래 존재하는 피조물들에게 냉혹하고 차가운 저주를 퍼 붇는 구도를(본래 저작 의도는 미움이라고 하는 어떠한 현상이 눈물이라는 고결한 보석을 쓸모없는 돌멩이로 바꾸지만 어떤 고결한 눈물은 그 속에서조차도 보석으로 승화된다는 의도인데 ...........)

이러한 구도를 도깨비에서는 고려의 어느 미친 왕이 자기 신하 백성 부인까지 다 죽여서 차가운 얼음의 마법을 쓰는 저승사자가 되었더라.

 

마치 차가운 태양과 주인공 대장장이가 서로 원한 관계인 것처럼

저승사자와 도깨비도 주종관계 속에서 (...) 원한 관계더라...

라는 식으로 거의 비하에 가까운(표절 의도가?) 카피를 하고

 

이처럼

도저히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만큼의 설정상의 유사점이 있고(표절범위)

이정도 까지 카피를 하는 것은 거의 염치가 없는 수준입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그리고 출판이 이루어진 작품의 모방문학의 경우

이 모방문학이나 오마쥬가 원작의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는 경우에는

 

묻힌 작품이 재조명되는 일은 있어도

원작자에게 실질적인 저작권상의 피해는 없습니다.

 

작품의 이미지나 주제 등에 손상도 피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인데요.

모방문학이나 재창조(오마쥬)

같은 소재, 같은 글귀, 같은 이미지 등의 인문학적 요소 혹은 예술적인 요소들을

다른 이미지, 다른 주제의식, 다른 느낌, 다른 이야기로(즉 다른 작품으로)

즉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재창조하기 때문입니다.

당면과제의 관점으로 보자면 작품의 첫인상 같은 느낌이나 모티브 그리고 설정들과 주제 의식 등을 전혀 해치지 않습니다.

(사실 표절의 가장 큰 문제는 원작자가 대중들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과 금전적 이득 양자 모두를 작품을 도둑질함으로써 중간에서 편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에 표절의 특징은

먼저 고의성 여부가 완전 고의일 경우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도둑질한 범죄로써 민, 형사상의 모든 소송이 가능하고

출판의 여부나 시점에 따라서 작품의 첫인상에 가해지는 피해의 크기가 결정되며,

당 사건처럼 미 출간 작품의 경우 막대한 피해를 받습니다.

설혹 고의가 아니거나 고의성 입증이 어렵더라도

비슷한 작품이 이전에 있었는지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것이므로

부주의에 의한 미필적 고의가 성립 됩니다.

참고로 제 작품은 2007부터 2018까지 무려 11간 공개 집필해온 작품이며 블로그의 인지도가 매우 높고 -통산 방문자 70만명- 이러한 공개 집필은 다른 것이 아닌 저작권의 주장이 목적이었으며

가장 배타적인 저작권 표시의 작품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이 많은데

일단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포스팅을 하고

나머지를 이어가겠습니다.

 

표절의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저의 작품이 본래 표현하려고 하였던 저작 의도와 사건의 관련성에 대해서

이미 지난 20186에 감옥 안에서 제 작품을 볼 수조차 없었던 시기에 쓴 자필 진술서를 토대로 작성된 문서 내용입니다.

 

표절의 정의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드라마 도깨비의 경우에

타인의 작품(저의 작품)첫인상, 주요 모티브, 설정과 주제의식과 전반적인 느낌이나 대사, 장면 등의 구성요소들을 다른 것으로 재창조 하지 않고 그대로 도용하였기에, (예를 들면 주인공이 슬프면 세상에 비가 온다. 같은 설정의 경우, 단순히 비 하나만 놓고 보면 클리셰라는 주장이 가능 할 수 있으나 이 외에도 염치가 없을 만큼의 유사점이 너무나 많은데요. 이는 비가 슬픔이 아닌 기쁨이나, 추억 등, 어떤 특정한 암시 등을 지칭하는 다른 요소로 재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도 그냥 슬픔이 아니라, 정확히 꼬집어서 주인공의 슬픔으로 온 세상에 비가 온다.’ 와 같이 명확히 특정 지어진 하나의 이야기의 줄거리를 그대로 도용한 것이며,

이는 널리 알려진 유명 애니메이션 개구리왕눈이의 설정인데요.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이 노래가사는 다들 아실 테죠.

해당 애니메이션의 설정 상 무지개 연못은 개구리왕눈이라는 캐릭터가 생활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까지는 아니지만(나중에 전기뱀장어에게 된통 당한 메기가 바다로 나갔다가 어부들의 그물에 잡히는 스토리 구조상 무지개 연못은 분명히 해당 애니메이션의 세계 전체는 아닙니다.) 어떤 상징적인 메타포로써 주인공들과 조연들이 살아가는 세상 전부를 암시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의 슬픔에 모든 세상이 함께 울어준다는 동화적인 아름다운 상징이었죠.

이는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메타포로써

원작과 다른 점은 원작에서는 이 주인공의 슬픔으로 세상에 비가 오는 설정을 어떤 철학적 주제로써 이끌어내어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스토리에 살을 붙여 어떤 철학적 주제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 점이 다르며 바로 이러한 재창조의 작업을 우리는 클리셰 또는 모방문학이나 오마쥬 라고 합니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이었고 이미지 자체를 어떤 발랄하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과 느낌에서 대단히 비극적이고 슬프고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로 해당 인문학적 요소가 가지는 이미지까지 모두 바꾼 문제이기에 특별히 저작권상에 문제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작품에서 해당의 설정은 주인공의 슬픔에 세상 모든 조연들이 동감하고 공감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싫어하고 바라지 않는 어떤 거대한 비극으로써

실질적으로 눈물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는 배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는 상징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원작과는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죠.

즉 아까 말했던 비라는 소재에 대해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꾼 경우에 해당하죠.

 

원문을 인용하자면

 

진창(Slough)

 

슬픔의 바위 사막 제 9(Rock desert of sorrow part. 9)

 

거대한 바위들의 도시 한 가운데

오롯이 소리로 울음을 토해내는 사람형상의 보석이 하나 있어

그 발치에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은하계의 파편들이 흩어졌지

산산이 부셔져 버린 그리움의 파편들,

하늘에서는

끝도 없이 비가 내려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자들이 한데 뭉쳐서

본격적으로 도시를 약탈하려 하자,

사람들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대장장이가 사용하던 마법의 무구(武具)들을 사용하기로 했어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대장장이의 그것만큼 강인하지 못했어.

점차로 분노에 물들어가고

절망에 잠식되고

서로를 증오하며

공포에 질려 질식해버릴 것처럼 되고 말았지.

 

모든 싸움은 혀로 시작해서 혀로 끝나고

실체의 피를 흘리는 사건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눈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돌멩이가 되어서

그 돌멩이로 서로의 머리통을 두드리거나

이빨을 깨부수거나

눈을 찍어 눈동자를 파괴하는데 쓰이게 되었지

부드러운 침을 흘리는 세치 혀를 창처럼 사용하여

서로의 밑에서부터 심장까지 가리지 않고 찔러대기 시작하고

언어는 가장 쓸모없는 의미전달자가 되어

언외언(言外言)문답과 밑도 끝도 없는 선문답들

미친놈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는 재스츄어들로 모든 대화가 이루어져

빗방울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눈물로 이루어진 돌멩이들 틈바구니로 스며들고

 

눈물을 빻아 만들어야 했던 소중한 밭은

완전히 진창이 되어 아무런 작물도 자랄 수 없게 되었어.

거대한 바위들의 사막은

마치 기갈에 걸린 태고의 거대한 야수처럼

한 서린 빗물과 핏물을 끝없이 들이마셨어

 

꺼지지 않는 소망의 화덕 주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

바야흐로 거대한 진창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진흙탕만큼이나 지저분한 이유로 서로 싸워야 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은 열정의 풀무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소망을 불태워야만 했어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움의 파편들이 점차 진흙탕 속으로 사라져가는 가운데

대장장이의 보석이 토해놓는 울음소리에 모두들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어.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90

 

상기 원문과

 

타오르는 눈물(Blazing tear)

 

슬픔의 바위 사막 제 13(Rock desert of sorrow part. 13)

 

바위투성이의

잡초 한 포기 자라날 토양조차 거부하는

척박하고 거대한 바위 사막에, 슬픔이 가득한 대지에,

하루도 그칠 날이 없이 비가 내렸어

 

분노의 망치를 집어든 거센 바람’(ănĭmósus ventus)

끝내 미쳐버리고 말았어.

분노로 가득한 그의 마음은 더 이상 피아를 구분하지 않아

 

절망에 잠식당한 조용한 울음’(inexcítus fletus)

사막의 한 복판에서 스스로가 흘린 눈물에 깔려죽고 말았지.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어두운 밤손님’(tenebricósus nox hospes)

어디론가 도망쳐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어.

 

증오로 물들어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호랑이 발톱’(tígrĭferúngŭla)

도시로 돌아올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길을 잃고 사막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어.

 

사람들은 더 이상 대장장이의 유물을 얻거나 찾으려 하지 않았어.

다룰 수 없으니까

 

도리어 미쳐버린 거센 바람의 맹공(猛攻)

도시의 사람들과 눈물 흘리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풍처럼, 자연재해처럼, 매일을 휘몰아쳤어

 

조각난 그리움의 파편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오가는 사람들의 발치 아래에서

완전히 대지의 품으로 스며들어 버렸고

 

사람들은 모두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어

그들은 끊이지 않고 매일 들려오는 대장장이의 귀곡성(鬼哭聲)

천천히 미쳐가는 스스로의 자아(自我)를 느껴야 했어

 

누군가 외쳤지

 

저 대장장이 때문이야!

이 미친 폭우가 끊이지 않고 계속 퍼부어지고

모든 농작물이 비에 젖은 땅속에서 썩어버리고

사람들이 미쳐가는 이유는 모두 저 대장장이 때문이라고!”

 

모두 힘을 합쳐 대장장이의 보석을 부수려 했어

원래 도시에 살던 사람들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몰라 타인의 눈물을 약탈해야만 하는 자들도,

더 이상 미칠 것만 같은 귀곡성을 듣고 있을 수 없었어.

 

꺼지지 않는 소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화덕에

사람들은 얼어붙은 대장장이의 보석을 집어넣었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있는 힘껏 열정의 풀무를 움직였지.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은 광기어린 헛수고

 

모두 살고 싶었어.

굶어 죽기는 싫었어.

미치기는 더욱 싫었고,

눈물조차 바위로 만들어 버리는 얼어붙은 태양일망정

사람들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짓말 같은 해를 보고 싶었어.

 

대장장이의 슬픔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네까짓 놈이 울거나 말거나 우린 살고 싶다고!”

 

하지만 대장장이의 보석은

소망의 불꽃 속에서 타오르는 얼어붙은 눈물은

녹기는커녕 달아오르는 일 조차 없었어.

사람들은 지쳐가기 시작했지.

 

이 저주받을 보석아 제발 부서져 버려!”

 

울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은

울지 마

울지 마 이 악마 같은 보석아!

 

사람들의 악에 받친 절규와는 무관하게

단지 울음소리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어.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86

 

한눈에 보아도 개구리왕눈이의 동화 같은 설정과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다르죠?

굳이 어떤 이론을 대입 할 것 없이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 된 것이 그냥 느껴집니다.

 

그런데 드라마 도깨비의 경우에는 이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도깨비가 슬프면 세상에 비가 오는데 그 세상이 세상 전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지역이 상징하는 것이 주인공과 조연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메타포로써의 암시부터 발랄하고 순수한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와

그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적 암시까지(도깨비-왕눈이-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의 슬픔에 세상 모두가 동감을 한다.) 원작과 동일한 방법으로 슬픔이라는 인문학적 요소에서

어떠한 철학적 관념을 이끌어내어 그것을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끌어내지도 못한 것입니다.

 

즉 정확하게 개구리 왕눈이의 수준으로 저의 작품을 표절 한 것이죠.

여기에 더해서 겨울에 피는 비현실적인 꽃으로 주인공의 기쁨을 상징하고

 

여주인공 또는 주인공이 불꽃과 검을 다루는 공통점에

초자연적인 이동능력으로 여주인공과 주인공의 신비감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에

여주인공이 주인공을 구원하는 스토리 라인에

그 여주인공이 주인공을 구원하는 방법이 사랑고백이라는 공통점에다가

사랑 고백할 때 뒤통수 방향에서 마법 같은 햇살이 여주인공을 후광처럼 빛나게 해주는 이미지에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관계가

여주인공이 주인공을 구원하는 과정에 가까운 지인을 희생해야하는 운명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와

김고은이 검을 뽑고 주인공을 죽이지 않으면 김고은이 대신 죽어야 하는 설정상의 유사점에다가!

빗자루 안 쓰는 마녀에 빗자루로 안 변하는 도깨비에

본래 둘 다 이동 능력 같은 거 없는 캐릭터들이 하필이면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고

하필이면 불꽃 속에 검을 납검하고

하필이면 주인공의 소망이 혹은 주인공이 먼지처럼 흩날리게 되는 장면의 유사점에다가

주인공이 얼어붙은 태양이라고 하는 권위에 짓눌려 고통 받고 신의 미움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2중의 고통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신에 의해 부활 하며 심장에 검이 박히고 미친 왕에 의해서 고통 받는 신하의 인물 구도로 바꾸어 표절하고

(이 경우 가공이 있었다 할지라도 전체의 인물구도를 정확하게 카피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물구도로 창출하려는 작품의 이미지나 느낌 모티브 주제의식으로 향하는 논리전개가 원작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대결구도의 상징적 이미지의 표출이 불꽃과 얼음의 대결구도라는 점까지 이르고

여주인공과 신의 내기가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는 여성의 운명에 우주적인 변화를 주는 내용을 그대로 카피한 삼신할머니와 육성재의 술자리 대화에,

 

이것은 그냥 제 작품 하나를 철저하게 카피한 것 이죠.

 

특히나 도깨비 제 12는 도저히 클리셰나 오마쥬의 관점으로는 볼 수가 없는 작품의 내용을 그냥 카피한 수준의 작품이기에(패러디로는 더더욱 보기가 힘든 수준의)

해당 장면은 신이라는 존재를 피조물이 처음으로 맏닥뜨리게 되었을 때 피조물이 느끼기에 충분한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은 긴장감과 첫인상을 표현 하였는데요

도깨비 제작진과 김은숙 작가는 바로 이 첫인상을 도용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원작의 첫인상과 주제의식 및 전반적인 느낌과 작품의 내용 전체에 큰 피해를 끼치는 지적재산권과 저작권을 침해한 사례에 해당합니다.

(요점은 정말 다른 것으로 재창조 하였느냐 아니면 그런 과정 없이 그냥 도용하였느냐의 차이인 것이죠.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느냐? 아니면 소재만 바꾸어서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느냐? 하는 차이)

 

클리셰란 운명이나 대장장이, 마녀, 환생 등(도깨비나 저승사자 등도 마찬가지) 이미 일반적으로 너무나 널리 사용되어져 도저히 다른 것으로는 대체가 불가능해진 인문학적 예술적 요소들을 지칭하며

이번 사건처럼 전체 구조와 내용 거기에 대사 까지 3중으로 카피한 경우는 그냥 표절입니다.

 

제가 이 작품의 원작자가 맞다는 사실은

도리어 지난 2017713발생한 구속수사와 부당한 실형집행이 증명합니다.

 

이 작품은 2007부터 현재까지 무려 11

blog.daum.net/japhikel에서 공개적으로 집필해온 작품이며

이 작품의 주제의식의 前身이 바로 앞서 설명 드린 부당한 검색제한조치를 당한 네이버 오픈 백과 게시물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 봅시다.’입니다.

이것은 성조기를 빗대어 표현한 작품상의 단편

 

순간과 과정 그 기나긴 터널 No2.(The long tunnel at the moment and processes)에서 밝혀지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간과 과정 그 기나긴 터널 No2.(The long tunnel at the moment and processes)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12(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12)

 

마지막 영국 침략자들의 후예들이

시간을 거슬러 그들이 약탈한 보물을 들고

여왕을 알현하러 버킹엄 궁에 나타났다.

그들은 지금 막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명을 침략하고 약탈한 후였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황금을 노리며 잉카문명을 침탈할 때

그들은 중미 전역을 유린하였다.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영혼을

조상의, 조상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한 의식의 흐름과 지혜를 숨겨야만 했다.

자신들이 죽었을 때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그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온

위대한 영혼의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그랬듯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영혼의 흐름

그곳을 향한 귀일과 합류는

그들의 염원이었다.

 

영국의 침략자들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톨릭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처음으로

종교적 망명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그 프로테스탄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칠 제물을 찾아

인디언들의 위대한 영혼의 흐름을 찾아내어 파괴했다.

그로부터 태양과도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얻었다.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총으로 쏘아죽이며

사람 가죽을 벗겨 담배쌈지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추악하고 파렴치한 순간들을

기나긴 과정으로 연결하여

피로 점철된 기나긴 시간의 터널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하늘의 별을 두 손으로 거머쥐어

자신들의 여왕의 어전에 바칠 제물로써 얻어냈다.

그리스도에게 바칠 제물을 얻었다.

 

그렇게 그들은 시간을 초월하여 버킹엄 궁 앞에 나타났다.

 

비켜라~! 나는 노포크(Norfolk) 공작가문으로부터

방계 혈족으로 이어져 내려온 스펜서(Spencer) 백작가문의 차남

앨리엇 데포풀라토르스펜서(Elliott ‘Depopulator’ Spencer) 자작이다.

여왕폐하께 바칠 찬란한 보화를 가져왔노라

 

황금색으로 빛나는 빅토리아 여왕이 내려다보는

한여름 땡볕아래 엿가락처럼 늘어진 트라팔가 광장 앞에서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곰털 모자를 뒤집어쓴 사내들과

말똥을 연신 아스팔트 위에 싸대는 백마를 탄 기마경찰은

고열과 현기증을 호소하며 단체로 정신 착란을 일으켰고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태양빛 아래에서

침략자들은 궁 안으로 안내되어 여왕을 알현 했다.

 

저희는 신을 모르는 야만인들을 살육하고

살육하고 살육하는 순간의 과정을 거쳐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저희가 그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는

그들의 영혼의 응집체를 부수어

하늘의 별을 지상으로 강림시켰나이다.

이것이 바로 그 별이옵니다.

이것을 여왕폐하께 바치고자 하나이다.”

 

자작의 뒤에 시립한 사내가 나무로 된 궤짝을 열었고

그로부터 하늘의 별이 지상으로 강림하였다.

그것은 마치 천상으로부터 강림하는 예루살렘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별은 질문 하였다.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나를 사랑하니?”

 

앨리엇 자작이 말했다.

 

너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질 제물일 뿐이다!”

 

다시 별이 말했다.

 

그래 너는 나를 원했지

너는 네가 원하던 나를 죽였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지겨워지면

간혹 나의 머리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삼았고

내 피부를 벗겨내어 담배쌈지를 만들었고

내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며 즐거워하기도 했어

너는 그토록 이나 나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던 모든 것들을 주었어.

너는 그만큼 나를 원했어.

또 나를 원할 거니?

나에게서 더 무엇인가를 원하니?

무엇을 주면 되니?”

 

앨리엇은 소리 질렀다.

 

너는 얌전히 마른 장작이 하늘처럼 쌓인 제단에 올라

그 장작불이 타오르며 내뿜는 불꽃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쳐지면 그만일 뿐이다!”

 

여왕이 입을 열어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네가 나에게 이야기하던 그 모습을 닮았어.

너라고 하는 여성은 언제나 조용히 거절만을 말해왔지

너는 나를 원하지 않았어, 언제나

 

나는 매 선택의 순간마다 간절히 바라왔어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강림하고

신과 천사들이 강림하여 나를 구원해주기만을

하지만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에게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술래였어.

숨어있는 너를 찾아야만 했지

한 번도 너를 찾을 수는 없었어.

언제나 엉뚱한 인물이 미끄럼틀을,

정글짐을, 평행봉을, 그네의 기둥을 때리며

자랑스럽게 외쳐댈 뿐이었지 야도~”

 

나에게 있어서 순간이란 너에게 말을 건네는 것

과정이란 그 모든 순간들의 연속

기나긴 터널의 끝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별이 다시 말했어.

 

원하렴.”

 

별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더라도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강림하지 않더라도

신과 천사가 나를 구원하여 영생을 불어 넣어주지 않더라도

기나긴 터널 끝에 기다리는 결과가 설혹 허무일지라도

 

여왕은 피로 물든 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를 제단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노니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놓아두고서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거라.”

 

별은 말했다.

 

나에겐 너희들처럼

간단하게 영면에 빠져들 수 있는

진정한 신의 축복이 허락되어있지 않아

단 한순간 11초도 잠들 수 없어

나는 온전히 너희들을 느끼고

나는 온전히 너희들에게 베풀며

나는 온전히 너희들이 되어서

나는 온전히 너희들이 느끼는 것을 느끼고

나는 온전히 너희들의 마음속에서 갈망할 뿐이야

네가 설혹 나를 불 지른다 하여도

나는 불에 타지도 않을 거면서

그 모든 뜨거움을 느껴야만 하겠지

나는 망각도 할 수 없고 미칠 수도 없어

그 어떠한 종류의 인지 회피도 허락되어있지 않아

그냥 네가 원하는 것을 하렴

 

그러자 너는 나에게 말했어.

마치 버킹엄 궁에 거주하는 기품이 넘치는 여왕님처럼

너는 그토록 이나 애처로운 별을 향해 말했다.

 

나는 너를 원하지 않아

 

앨리엇도 별도 트라팔가 광장과 버킹엄 궁도

그리고 노년의 여왕님도 모두 사라져버렸어

 

그래

 

너는 결국, 별을 원하지 않았지

너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줄 수 있는 그런 별을

너는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일까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들은

한 방울의 눈물의 연속들

 

다시는 너에게 말을 걸지 않을 거야.

하지만 별은 언제나 너에게 말을 걸게 될 거야.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80

 

보시다시피 저의 2006아니 2005年 末 에 집필된 오픈 백과 내용과 그 내용이 연계되는 작품입니다.

 

저의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japhikel 은 현재 표시되는 누적방문자 수만 70만 명일 뿐

본래 2010에 자살기도당시 제 손에 의해서 삭제될 당시에도 누적방문자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기 때문에

실제 누적방문자 수는 무려 100만 명을 가볍게 상회하며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봅시다.’를 포함시킬 경우 연관 게시물 총 누적방문자 수는 180만 명에 달합니다.)

맑은누리 문학회도 이 작품을 잘 알고 있으며

도서출판 창작과 비평쪽에 2015부터 지속적으로 이 작품의 출판문제를 상의해 왔습니다.

작품 내용 중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의 집필 시기는

20151202153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221

 

이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원수를 사랑하라는 화두(話頭), 구원에 대한 화두, 도덕과 양심과 책임감과, 논리와, 이 세상 모든 고결한 가치들과, 사랑이라고 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호감이라고 하는, 자아의 본질적인 근원인 타인에 대한 배척에도 불구하고,

자아란 타인을 배척하지 않으면 그 정체성을 절대로 유지 할 수 없는 우주적인 본질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타인에게 호감을 품는 것은 과연 유의미한 일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바로 이 화두에 대한 무려 11간의 각고 참오의 결과입니다.

 

일단 중간발표 포스팅 한 번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죠.

 

용서가 바로 이 화두의 열쇠였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어느 순간에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었고

바로 그러한 타이밍의 문제로 인하여 우리는 이 순간을 알 수가 없으므로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운명과,

운명을 구성하는 세상 전부에 대한, 용서와 호감의 끈을 결코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메시지와

무수한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끝없이 다가오는 운명이란

결국 세상 모든 들이 각자의 의지대로 행동한 결과물이 의 의지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신의 의지의 개입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개입이 되더라도 혹은 되지 않더라도 역시도 하나의 자아로 해석이 가능하다면 결과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되는 문제이기에 논리적 추론에 곤란함이 많은 신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나 자세한 설명 등은 작품에서 생략되어졌음 다만 간략한 힌트 정도가 여러 차례 등장함) 이는 결국 가 다른 에게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과 같은 것이 되므로

 

(작중에서 정의되는 환생의 개념은 별도로 설정을 잡아두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아의 인식 그 자체가 영원불멸하다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의 라는 자아의 인식이 지금의 라는 자아를 인식하는 그 현상 자체가 단지 지금 현재의 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살았던 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고

그 뿐만 아니라 지금의 , 죽은 뒤에 새롭게 다시 태어날 에게도 적용되는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각각의 는 사실 완벽하게 별개의 자아이지만

바로 그 완벽한 별개의 자아라는 독립성으로 인하여

그 하나의 자아가 를 인식하는 그 순간에 결국 는 자기 자신의 하나 뿐인 것으로 인식 되게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의 생애에 끈끈한 유대감과 애착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절박함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럼으로 인하여 각각의 생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아의 인식이라는 현상 그 자체는 결코 종결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고 하는 자아의 인식은 영원불멸성을 획득하게 되고

이는 실제의 자연 현상이며 절대불변의 고정된 진리이고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불멸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현재의 자아로써 의지를 가지고 저지르는 모든 행동이

결과적으로 미래에 다시 태어나 생을 인식하게 될 또 다른 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의 죽음 뒤에 다시 태어나 생을 인식하게 될 또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일 가능성조차도 지극히 희박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의 작품의 설정에만 국한된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진실입니다.

저는 과학적으로 진실이 될 수 있는 이야기만을

저의 작품에 수록하였고

논리적으로 그 어떠한 문제도 없다. 라는 수준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리기까지

굉장히 많은 時間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작품의 설정이

천국이니 지옥이니 서방정토니 극락세계니 아수라도니 하는 식의

사후세계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어떤 특정한 종교의 교리 등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판타지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제로도 사후세계 같은 것은 없는 단 하나 뿐인 세상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었고

이것이 진실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상기의 설정은 두 곳에서 확인이 가능한데요.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독수리 오형제(科学忍者隊ガッチャマン-Gatchaman)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6(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6)

 

나에겐 뼝이나 용이, 혁이, 수나 같은 동료가 없어,

친구들은 있지만

그들에게 나의 적과 함께 싸워달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나의 적은 세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의지가 행동하여 만든 결과물

운명

 

세상은 지금 여기 살아 숨쉬는 이외에도

다른 수많은 들이 얽히고 섥혀 있어.

그 많은 들이 저마다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면

그 모든 결과물들이 하나로 합쳐져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다가와

 

어릴 때는 전혀 몰랐어.

내가 매 순간마다 우주 전체와 싸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G1~5호기를 타고 지구 곳곳을 누비며

강력한 버드미사일과 초 버드미사일로 악당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불새가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너희들

너희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추억 해 보며

 

나도 모든 번뇌를 떨쳐낸 진정한 권리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 해 본다.

나에게 잠시나마 용기를 심어주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여

즐거웠다.

우리 서로 만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96

 

세계관에 대한 용어 해설(The commentary for term of the world)

 

세 가지의 생소한 개념 앞에서 독자 분들이 혼란을 겪으실 것이 분명한바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로 합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불연속(不連續)Discontinuity 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의 기본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객체와 시공간 그리고 물리 법칙들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의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들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안 그리고 밖

정확하게 그러한 구분들은 수치로써 그 명확한 값을 가지기에 이릅니다.

명확하고 분명한 값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存在)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가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바탕인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는 세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실재하는 모든 객체들은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는 근원적인 특징 때문에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게 되며

이는 우리가 사는 인생의 철학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 됩니다.

 

너와 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객체들은 결국 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들은

서로 각자 인식하는 주체 이외의 모든 들을 라고 부르며 배척 합니다.

모든 들은 결국 자기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위에

자신보다 소중한 가치로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에 라고 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정서, 혹은 감정

상대에게 느끼는 호감이라는 감정이

서로를 배척하는 본질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상대를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기적을 발휘 합니다.

자아의 정체성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며 자기 자신 이외의

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의 시작입니다.

그 호감의 대상은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부모, 형제 일수도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국가의 독립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 어떤 대의(大義)

개인이 혹은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관(價値觀) 이나

종교(religion 宗敎)적인 혹은 도덕(道德)적인 신념(信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종교 역시 가치관의 일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아마 종교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호감이란 결국 라고 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는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 혹은 영역까지 확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호감의 대상이 전 인류가 아닌 이상

결국 배척하는 또 다른 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호감의 한계이며

결국 호감역시도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의 일부에 속한다고 작가는 생각 합니다.

 

전 인류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호감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선순위를 매길 수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절벽에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달려 있습니다.

주변에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향해 신과 운명을 향해

 

나는 세상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부모님을 구해주세요

 

라고 간청할 것입니까?

아니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기로 119에 구조신호 보내놓고

헬기가 도착하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것입니까?

당신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형성한 호감도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그 순간 이미 누군가를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함 받지 못한 인물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를 배척하는 객체들이 가지는 어쩔 도리가 없는 본질의 한계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 중 불연속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속성(連續性)continuity 이란

 

불연속이라는 세계의 특징이 분명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재를 바탕으로 나온 개념인데 반하여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개념으로써 철저하게 철학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객체들이 심지어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상대를 접촉(接觸)’ 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서로를 배척하는 모든 불연속의 객체들이

어떠한 하나의 바탕 위에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객체들의 접촉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즉 연속성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의 가장 큰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연속성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 위에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면 현존하는 물리법칙과 개념을 초월하여

불연속과 불연속이 연속하여 이어지는 무한히 먼 시공간의 반대편의 현상을

인과(因果)를 초월하여 내 앞에 구현 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How to)? 가 되겠지만

작가는 본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이후의 모든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에서

그 중에서 인문학이 아닌 작품들에 공히 등장하는 세계관으로써 상기의 개념을 등장시킬 것이며

그 중에서 마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철학적 바탕으로써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차용 하고

보다 시적인 표현으로 어머니의 바다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마녀와 대장장이가 발휘하는 모든 마법적 개념들은

이와 같은 논리적 전제를 바탕으로 구현 되는 것들이며

구태여 해당의 마법의 분류를 따진다면 위시(Wish) 주문呪文(Spell) 계열의 마법들로써

별도의 스펠이나 소매틱(Somatic) 행위, 일체의 촉매觸媒(Catalyst) 또는

여타의 주술적인 제물祭物(Qffering)의 사용이 필요치 않은

마법의 근원에 가까운 형태의 주문으로써

강한 염원이나 감정 등이 마법적인 현상으로 구현 되는 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라는 존재의 연속 -

 

상술한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 중에 라고 하는 객체가 잠시 등장했는데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데카르트의 격언은 잊어두죠 생각 한다는 것 혹은 사고 한다는 것은 존재의 인식 이라는 행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우리가 현재 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현재 자기 자신 스스로가 인식하는 라는 존재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라는 존재의 인식은 그것으로 영원히 끝인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객체가 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라는 존재의 인식은

명명백백하게 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현상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백일하에 드러난 명명백백한 현실 앞에서

전혀 인식하지 못한 진실들 중에 하나는

굳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나 야훼의 약속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전승의 개념을 차용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이미 영원불멸永遠不滅(Imperishability)’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유사성을 따지자면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윤회전승이 열반을 통한 초월이 목표라고 한다면

본 작가의 개념은 그러한 종류의 자기완성을 위한 일체의 행위

위선적인행위로 규정하고 배척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작가의 개념은 업보라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우리의 생이 종식된 이후 새롭게 인식하게 될 라는 존재가 무엇일지는

순전히 무작위에 의해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천상계나 지옥도 아수라도 따위는 철저하게 배제한 채

단순히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만으로 놓고 볼 때에나

혹은 그러한 초자연적인 개념을 포용 할 때에나 상관없이

우리의 다음번 생애는 무작위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자연적인 세계를 포용할 때에는 영혼의 개념을 차용하고

인과응보의 개념도 차용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겠지만 그것은 추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단순히 현재의 작품인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만 보면

작중에서 라는 존재의 연속은 철저하게 무작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자아는 생을 삶에 있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연습 없이 언제나 첫 실전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생애에 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에 따라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지독하게 위선적이고 불평등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타고나는 능력이 다릅니다.

감정이나 유혹에 약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인지능력이나 사고능력이 부족하게 태어날 수도 있으며

외모가 추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불구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벌레나 물고기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 지점부터가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데

게다가 연습도 없이 첫 실전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의 질문 앞에서

어떠한 대답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자아의 대답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죄업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그 굴레를 현생을 초월 하여 내세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작가의 사고 관으로는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세계를 주관하는 신이 너무 악질적으로 묘사되어야 가능한 이야기로 사료 됩니다.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회의 질서를 위하여

우리들 스스로 법이라는 테두리를 정해두고

각자의 자아들이 운명의 질문 앞에 내놓은 대답을 평가하고

그 신상필벌을 결정하는 일 자체를 폄하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자아의 본질에까지 죄업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작가는 결코 찬성하지 않습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넘어와서

우리는 결국 영원불멸하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다른 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던

그 행동과 의지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운명의 흐름

결국 다음번의 자아 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가 다른 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건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작중에서 운명이 마녀에게 부탁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다른 에 대한 호감 이라고 하는 소중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유사하죠.

3차원 세계에서 어떤 객체가 일으킨 변화는

세상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 하나의 사건을 던짐으로써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킵니다.

이런 물리법칙이

공교롭게도 인간의 집단인 사회에서도 발생합니다.

 

모래시계 -

 

작가는 본 작품에서 운명의 흐름을 모래시계에 비유 하였습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객체들이

이 세계의 물리 법칙과 각자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라고 하는 객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작가는 작중에서 정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일련의 흐름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이는 주역(周易)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만물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에 따라 순환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만물은 그 성질이 극에 달하면 성질이 반전(反轉) 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쉬운 예로 달의 위상변화가 적합한 예입니다.

달은 그 위상이 표현되지 않는 그믐에서부터

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보름달 까지 그 위상이 변하게 되는데

어떠한 사물의 성질이 한자리에 고정 되지 않고

일정한 순환의 법칙 안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죠.

 

물론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는 법칙의 존재는

우리의 우주가 무한하게 무질서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감소하고 쓸 수 없는 에너지가 증가 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지만

그 무질서의 끝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전체 에너지의 총량에는 변화가 없고

단지 확률이 증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풀어 쓰자면 전체 확률이 언제나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면

그 역으로의 진행 즉 확률이 감소하는 방향으로의 진행이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신비는 아직 끝이 없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어떠한 법칙이나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 이러한 법칙은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우주는 무한하고 인류의 문명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각설하고 작중에서 등장하는 모래시계는

이러한 일정한 방향을 가지는 운명의 흐름을 상징하고 있으며

구태여 모래시계를 모티브로 삼은 이유는

이러한 운명의 흐름의 방향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방향성이 역전 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착안한 설정입니다.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을 설명할 때 이미 상술한 내용이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객체들은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 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배타성을 현재 우리의 운명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향성으로 설정 하였고

그러한 배타성의 발전 양상을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하여 표현 하였습니다.

슬픔이 슬픔으로 보이지 않고 한낱 돌멩이로 보이는 공간

심지어 그 슬픔을 어루만져보아도 차가운 돌의 감촉으로만 느껴지는 공간

실제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배타성은 점차로 증가하다가

근대에 이르러 전 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인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그 배타성과 폭력성이 점차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작가는 핵무기의 등장시점을 분수령으로 이러한 배타성의 방향이 역전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시기 까지 인류의 배타성과 폭력성은 점차로 증가 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폭력과 유혈의 시대로

작가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부터

미국인에 의한 원주민 말살까지의 수 백 년간을 꼽고 싶습니다.

현재의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수 백 년 동안 백인들과 투쟁했던

6천 만 명에서 1억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그 인디언 원주민들은

현재 30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댄 브룩(Dan Brook) 교수의 저서 학살을 경축하며(Celebrating Genocide!)’

또는 디 브라운(Dee Brown)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등의 저서를 통해 확인 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탄압을 비롯한

정부조직 주도하의 각종 비 인륜적인 행태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여담이 길었는데

이렇게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인류의 역사도

점차로 비폭력적이고 보다 화합을 추구하는 배타성의 반대방향으로

그 흐름이 점차로 역전되어가고 있다고 작가는 생각 합니다.

의식주가 안정되어가고 전반적으로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며

문화와 인류애가 발전하며 우리를 둘러싼 운명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더 이상 폭력적으로 변화했다가는 전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핵무기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아직도 사회의 일각에서는 여전히 반인륜적이고 폭력적인 사회현상들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러한 현상들이 점차로 감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작가의 바람 또는 염원을 작가는 모래시계의 역전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마녀가 운명과 대적하여 마침내 운명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대장장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그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우주의 모래시계가 역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 이래 최초의 역전 이었습니다.

그 모래시계의 역전이 가장 처음으로 표현되는 장면이

본편 제 19편인 사랑의 본질을 논하며(Discuss the essentials of love)‘에서

그리움의 주인공이 대장장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표현 됩니다.

한 결 같이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해오던 타인이

처음으로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그 출발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장장이를 둘러싼 운명의 흐름이 배타적인 것에서

호의적인 것으로 역전된 현상을 그 최초의 변화상을 캐치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이후 소망의 검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마녀와 대장장이가 만나고 마녀에 의해

슬픔의 바위 사막 이라고 하는 우리의 배타성이 집약되어있던 그 가상의 공간이

마침내 소멸하고 우리들 모두가

각자의 운명 앞에 당당하게 마주하게 된다는 설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운명의 변화와 대장장이가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사건은

마녀가 대장장이 에게 건넨 한마디

 

나와 함께 가요

 

로 축약되어 집니다.

그 이전까지 그저 대장장이 홀로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오로지 대장장이만이 흘려 왔던 필요에 의한 한 방울의 눈물

슬픔으로 제련된 사랑이란

결국 상처입기 쉬운 스스로의 속내를

기어코 타인 앞에 표출하여 그의 사랑을 그의 호의를 구하는

 

단 하나의 진실 된 행동으로 표출되어

마녀와 대장장이 두 사람을 진정한 운명의 벽 앞에 동시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스웨터라는 뮤지션의 1집 앨범 staccato green 이라는 앨범 수록 곡 중에서

길을 건너면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

신호등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횡단보도라는 가사에서 착안하여

전체적인 개념을 재정립한 것입니다.

 

이상의 개념들은 온전히 작가 스스로 창조해 낸 개념들이며

어느 누구 다른 이의 철학을 전혀 차용하지 않은 개념들이기에

그 어떠한 철학 서적들이나 예술 작품

또는 심리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에도 등장 하지 않는 개념인바

작가 혼자만 알고 있는 개념을

독자들에게 무조건 이해해 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태여 위와 같이 차용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첨언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작가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서로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영도씨의 세계관과 작가의 세계관은 서로 상치 됩니다.

 

*원문에 비해서 내용이 길어졌습니다.

보너스 트랙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합니다.

지독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는 불안한 심리상태로 쓰기 시작한 글이었지만

이제 저는 평안한 마음으로 이 글을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는 기분입니다.

 

운명이 항상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편 中篇(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second volume)은 제 생애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는 붕어 맞습니다. (작중에 몇 번이나 표현 되죠)

10년을 여자 한 사람을 쫒아 다니고도 아직도 방황하며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중략...

 

추가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보충설명

그리고 새롭게 정비된 이야기들을 진행할까 합니다.

 

연속성 즉 아날로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과 선 그리고 면이라는 3가지의 기본적인 실체와

시간이라고 하는 배경이 하나로 합쳐져

시공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제가 세운 하나의 가설로써 실제 물리법칙과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화두로 삼아 고민해온 과제이고 현대의 물리법칙에 비추어보아서 큰 무리는 없는 추론이며 사유의 결과물임을 밝힙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가설 - () 상대성 이론

원자 내부의 모델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의 제시

가설 창안자 - 김선홍(金善弘-Kim Seonhong)

 

저는 원자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다른 세계라고 하는

두 가지 세계의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원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단지 필자의 생각일 뿐이지만

여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두 가지 개념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연속과 연속성 - (不連續)Discontinuity & (連續性)continuity

 

불연속(不連續)Discontinuity 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의 기본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객체와 시공간 그리고 물리 법칙들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의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들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안 그리고 밖

정확하게 그러한 구분들은 수치로써 그 명확한 값을 가지기에 이릅니다.

명확하고 분명한 값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存在)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가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바탕인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는 세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실재하는 모든 객체들은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는 근원적인 특징 때문에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게 됩니다.

 

연속성(連續性)continuity 이란

 

불연속이라는 세계의 특징이 분명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재를 바탕으로 나온 개념인데 반하여

정 반대의 개념으로써 철저하게 철학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객체들이 심지어 시공간조차도 명확한 좌표로써 서로를 배척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상대를 접촉(接觸)’ 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서로를 배척하는 모든 불연속의 객체들이

어떠한 하나의 바탕 위에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객체들의 접촉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즉 연속성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의 가장 큰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연속성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 위에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면 현존하는 물리법칙과 개념을 초월하여

불연속과 불연속이 연속하여 이어지는 무한히 먼 시공간의 반대편의 현상을

인과(因果)를 초월하여 내 앞에 구현 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이 도출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How to)? 가 되겠지만

 

연속성 즉 아날로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과 선 그리고 면이라는 3가지의 기본적인 실체와

시간이라고 하는 배경이 하나로 합쳐져

시공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인간의 시각은 2차원 평면데이터를 기반으로

그 평면 데이터 상에 X축 좌표를 추가로 기록하는 불완전한 3차원 데이터입니다.

인간의 모든 시각정보는 완벽한 3차원이 아니며 엄연히 2차원 세계입니다.

무슨 말이냐

겹쳐지는 방향의 3차원 데이터를 전혀 인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빅뱅이론은 다들 아실 테죠.

어떤 하나의 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혹은 그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 곤란한 무엇인가가

엄청난 폭발을 통하여 팽창을 하며

그로부터 시간이라고 하는 사건의 모든 인과가 생겨나고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하며 물질들이 만들어졌다는 이론,

흥미로운 이론이구요. 단지 이론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세기동안 천체의 운동을 관측한 결과

실제로 우주는 팽창을 하고 있으며

이 팽창 속도의 변화의 관측을 통하여

실제 빅뱅 당시의 우주 팽창속도에 대한 면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완벽하게 정립이 되었으니까요

 

상대성 이론 이야기가 곧 등장을 하게 될 테니

이 부분도 정립하고 이야기를 넘어가겠습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은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은 별개의 무엇인가가 아니며

각각의 모든 공간좌표는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각자의 시간의 흐름의 속도를 가지게 되며

모든 운동하는 물체들은 그 운동속도의 차이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도마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시공은 중력장이라고 하는 어떠한 필드의 힘에 의하여

그 형태가 리만 기하학적 구조라고 하는

어떠한 구조로 왜곡이 되고

실질적으로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사과의 떨어짐 이라는 것은

지구가 사과를 물리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리만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는 시공의 구부러지고 왜곡된 구멍으로

사과가 굴러 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블랙홀이 천체를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관측된

사건의 지평선을 따라서 흘러들어가는

물질의 원반을 관측하며 거의 증명이 되다시피 한 이론입니다.

 

다시 빅뱅이야기로 넘어와서

모든 이야기들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인간의 시각은 겹쳐지는 방향의 데이터를 인식할 수 없느냐

그것은 빅뱅이 발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이위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빨간색으로 찍었다고 가정 하죠.

그 위에 파란색의 점을 찍으면

우리의 눈은 두 개의 점을 인식하겠습니까?

아니면 보라색의 점 한 개를 인식하겠습니까?

 

겹쳐지는 방향의 데이터를 2차원 평면상에 기록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되어있고

완벽하게 다른 두 개 이상의 시공간 좌표를 가지는 점 두개를

하나의 점 안에 동시에 기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건을 빅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들은

저의 개념상에 등장하는 불연속적 객체의 본질적인 최소 단위가 되는

최소의 그 객체들은

완벽하게 서로가 별개의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1,2,3,4,5................

숫자들이 있습니다.

12의 자연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소수 무리수 유리수 허수 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중간 지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수를 아무리 잘게 쪼개고 또 쪼개고 또 쪼개도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서로 다른 객체들이 될 뿐이지

실질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숫자가

서로 겹치는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상에서

어떤 객체 하나가 소멸하거나 그 상태가 변화하거나 에너지로의 변환이 발생하거나

그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여도

 

본질적으로 그 사건은 우리가 사는 세계 그 자체의 변화가 되지는 못합니다.

 

단지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다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이 될 뿐이고

그것은 전체 확률의 증가라고 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이어집니다.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원자의 내부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단순히 전자 하나

또는 원자핵속의 양성자 하나

각각의 미립자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미립자들

쿼크 반쿼크 물질 반물질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 중의 단 한 개만 그 상태가 변하거나 소실되거나 증가되거나

혹은 그 어떠한 종류의 사건의 변화만 발생하여도

심지어 전자가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기만 해도

(이 경우 전류의 흐름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지만요.

물론 이 때에도 각 원자가 보유한 전자의 총 량에는

절대로 변화가 없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만...)

 

이러한 사건이 원자의 내부에 발생하면

원자라는 세계 그 자체가 붕괴하여 에너지가 되거나

다른 물질로 변화해 버립니다.

하나의 세계 그 자체가 말이죠.

 

물론 온도의 변화라던가 여러 가지 텐서함수의 변화는 원자의 내부

또는 원자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만.

(이 온도조차도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핵융합이라고 하는

원자의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죠)

 

실질적으로 원자의 내부와

원자의 외부는

사실상 별개의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한

어떠한 하나의 관점이 성립되기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원자의 내부는

제가 상정해둔 연속성에 보다 가까운 형태의 세계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원자의 내부에는 상대성이론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그 어느 누구도

원자 내부의 완벽한 3차원 모델을 제시할 수 없었고

이는 이 미립자들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운동들이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시각에

관측되지 않는 공백지점들이 발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2차원 평면세계를 기반으로 모든 정보를 인식하는 인간의 시각이

3차원 입체의 전 방위 데이터를 모두 획득하지 못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그곳은 이미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에서조차도

어떤 하나의 객체의 모든 상태변화는

세계의 엔트로피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원자의 내부에서는

아주 작은 미립자단위의 단 하나의 변화조차도

원자라는 세계 자체의 완벽한 변화를 창출합니다.

 

각자의 객체들 간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 자체가

 

3차원 세계와

그리고 원자 내부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이죠.

 

네 영향력이 완전히 다른 것이고

이 객체들 간에 미치는 영향력은 물론 작은 크기이기는 합니다만

3차원 세계에도 적용되는 논리입니다.

 

완벽하게 독립적인 어떤 객체들 사이에

명백하게 모두가 하나의 바탕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 어떤 규칙들이 적용되고

이러한 규칙들에 의해서

실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본래는 접촉지점이 없다.

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까 숫자이야기를 했는데요.

 

원자의 세계에서

수소원자를 기준으로

원자핵의 크기에 비해서 전자의 크기는 145000분의 1 수준입니다.

어마어마한 거리가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나머지는

완벽한 진공입니다.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실체들이야 원래 거리가 멀어져도

중력이나 여러 가지 필드 전류 흐름이라는 여러 가지 규칙에 의해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냐?

라는 의문이 대두 될 수 있습니다만

이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엄연히 이라고 하는 무언가로

모든 최소 픽셀이 구성되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하나의 시공좌표를 가지는 점에는

이 점과 중복으로 겹치는 데이터를 가지는

시공좌표의 점이라고 하는 데이터의

침범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 점들은 하다못해 서로 붙어있기는 한 것인가?

숫자이야기에서 엄연히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잘게 쪼개어 중간 지점을 만들어 놓아도

각각의 숫자들 사이에는 엄연히 무한대의 거리가 발생한다는 명백한 사실을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 픽셀은 점이고

이 점 안에 모든 데이터가 기록됩니다.

시공좌표와 텐서함수 물질이나 객체가

각자의 모든 어떠한 실체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사실 이 에 기록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 시공조차도

이 점이라는 최소단위에 이 데이터가 기록되는 것이 맞다면

 

각각의 시공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고

중력장 같은 필드의 형성 자체도 애초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현대의 과학기술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세상의 모든 규칙들은

하나의 중대한 논리적 대전제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되는 것이죠.

 

각각의 점들은 어떻게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을까요?

 

이 명제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자라는 세계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3차원의 세계가 아닌

완벽하게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이 작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보다 작은 들 간의

비밀을 파헤쳐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고

이 비밀을 파헤침으로써 그럼으로써 실질적으로

우리는 연속성에 도달 할지도 모릅니다.

 

가령 지름이 1인 점이 한개 있다고 합시다.

이 점이 중력장에 의해 리만기하학적 구조로 왜곡된다면

이 점의 지름은 여전히 1입니까?

구체적으로 값을 명확하게 표시할 수 없는 어떤 추상의 영역에 이 점이 도달하지 않을까요?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명확한 값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연속성의 영역을 통하여

각각의 시공의 점들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닐까요?

 

중략...

(너무 길어서 ...)

 

상기의 이론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원문 링크를 참조바랍니다. 굉장히 긴 내용의 가설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0

 

꽤 긴 내용으로 설명되는 과학 이야기에 잠시 이야기의 논점이 흐트러지는 감은 있습니다만 ...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실체들의 본질인 배척에 대한 과학적 추론의 결과물이고

이 추론 자체도 2006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저의 작품 설정 상에서 모든 실체는 서로를 배척하는 근원적 특징에 의하여 실체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자아의 실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 대인관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그런 수준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세상에 우리 자신이 피투(被投) 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으로 피투 되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오로지 단 하나의 존재 즉 신만이 아시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사고 관을 굳이 작품에 반영하며 어떤 낭만적인 이야기로의 전개가 가능한 사후세계의 이야기들을 배제한 이유는

단지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 또는 해답을 얻기 위한 고찰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운명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우리들 자신 또한 용서하기 위하여서는

세상의 모든 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하고 믿고 베풀려는 그 마음을 단 한시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고 후술하겠지만 여기에 우선순위가 존재하는 문제가 끼어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미움과 호감의 동시간대 양립은 불가능한 것이 맞지만

내적갈등을 통한 고민과 현실적인 해결방안의 모색을 통한, 어떤 외적 갈등을 통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현실의 시공간적 지점과 과정, 또는 과제 등을 찾아내는 실제적 행동과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슬픔이란 과연 무엇인지(이영도씨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슬픔이 무엇인지를 굳이 정의 하지는 않았으며 해당 작품은 저의 작품의 토대가 되어준 원작이 맞습니다만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다르고 기본적인 철학적 관념과 사건의 해결방법이라고 하는 논리적 결론이 정 반대의 양상으로 상치 되는데 이 내용도 곧 후술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엇에 의하여 의지와 행동이 구속되는지를 그 근원부터 파헤친 작품입니다.

 

대장장이의 망치에 의해서 하필이면 대장장이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그리움의 주인공의 보석이 파괴당하는 장면도,

 

마녀와 운명의 체스대결에서 마녀가 절대로 운명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는 것도(아마 여기서부터는 작품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표절을 진행한 듯합니다.)

 

모두 두 사람이 용감하고 지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일단 용서하고 이해하려 한 뒤 보다 맑은 정신으로 객관적인 사건을 관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며 이는 무조건 상대를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려 하던 아니면 용서하려 하던 어느 쪽이던 일단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급격하게 차오르는 분노에 모든 것을 내맡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영원한 관계의 단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일단 용서하고 이해한 뒤 결정을 해야 하는데 두 사람이 이것을 하지 못했다는 그런 말입니다.

 

하여 이와 같은 운명적 조우의 순간 역시도

꽃의 이미지와 함께 총 3번 작품상에 등장을 하는데

그 마지막이 작은 마녀에 의한 슬픔의 대장장이를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운명의 마녀에 대한 질문

 

너에게 슬픔의 바위 사막을 알려준 그 다섯 번 째 마녀의 생명을

네 손으로 끊어봐라 그러면 그를 되돌려주지

 

이 질문은 사실 그 시초가 타이타닉입니다.

주인공이 죽어야 하는 거냐

여주인공이 죽어야 하는 거냐

둘 다 살리는 것이 불가능 할 때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이냐

사실 이것이 신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데도 우선순위라는 경쟁을 통하여 우리를 시험 할 수 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입니다.

자아는 타인을 배척하지 않으면 유지 될 수 없는 그 진실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문제이기도 하죠

 

그런데.

 

어떤 이야기에서

이 질문으로 모든 것을 결정 해버리면

우리는 절대로 타이타닉보다 더 훌륭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가 없고

그게 드라마 도깨비의 한계입니다.

 

애초에 제가 이 질문을 구성 할 때

구도를 주인공과 여주인공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하는 구도에서

질문을 살짝 비틀어서 윤리적인 감정을 건드리기는 하겠지만

주인공과 여주인공 양자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질문을 구성한 이유는

이야기의 결론을 타이타닉 수준에서 벗어나서 보다 깊은 철학적 화두로의 진입을 위한 목적으로 이렇게 설정을 해 둔 것입니다.

 

검을 뽑고 무()로 돌아가 안 그러면 저 아이가 죽어

삼신할머니(배우분이 꽤 미인이시던데..)의 대사는 물론 매력적인 대사이고 장면 전개가 꽤나 위압적으로 보이며 멋있어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물구도가 타이타닉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도깨비의 결말이 그 모양이었던 것이죠.

 

상기의 운명의 질문 혹은 대사는

작은 마녀가 그 지시를 실행에 옮기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사실 이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이고

어쩌면 그 행위의 선택에 정답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고 운명은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기지 않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입니다.

이어지는 장면들과 대사들을 가만히 보셔도 잘 아시겠지만

운명은 자신이 마녀를 놀렸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다시 대사를 옮겨와 보죠.

 

나는 아직 포기 하지 않았어요!”

 

승부에 대한 불복

자신의 가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오기

그러나 여인이여

당신의 오기와 치기는 어떻게 그토록 이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운명이 잔인하게 말 했어.

 

포기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쩔 거지?

네 능력으로 보석이 되어버린 대장장이의 굳은 결심을 되돌릴 수 있나?

그가 갇혀있는 스스로의 심상의 세계 속에서 그는 과연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눈에는 그의 남은 수명이 보인다.

너는 그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나?”

 

그래요!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대답

운명이 잔인하게 웃으며 대답 했어

 

너에게 슬픔의 바위 사막을 알려준 그 다섯 번 째 마녀의 생명을

네 손으로 끊어봐라 그러면 그를 되돌려주지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

 

나는... 나는...”

 

여전히 잔인하게 웃는 운명

 

그건 조금 어렵나?

그럼 이건 어떨까

네 손으로 무언가를 죽일 필요는 없어

그건 내가 하지

너는 선택만 하라고

네가 살고 있던 마녀의 숲을 없애버릴 거야

그 대가로 그를 되돌려주지 어때?

너는 마녀의 숲과 그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거지?

너는 둘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어

이건 좀 쉽나?”

 

놀림 받은 사실을 깨달은 마녀는 발악하듯이 외쳤어

 

그래요! 나는 그를 선택하겠어요!

당신이 무어라고 이야기하건 어떤 조건을 내걸건

나는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나직하게 웃는 운명

 

그가 네 외모가 별로라며 네 사랑을 거부하면 그땐 어쩔 거지?”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를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운명은 마치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어

 

어쩌면 그는 너의 사랑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수도 있어

그가 너의 사랑보다는 너의 육체나 재물 혹은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너를 버릴 수도 있지

아니면

그가 끝끝내 그리움의 주인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너의 사랑을 영원히 외면할 수도 있어

네가 그와 다른 사람의 생명 가운데에서

그를 선택하고 그를 구해준 그 순간에

정작 그가 너를 선택하지 않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너의 사랑이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정도면 다행이게

그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너 자신과 너를 사랑한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네가 나의 첫 번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서

다섯 번째 마녀를 네 손으로 죽였다고 해서

내가 너와의 약속을 현실로 이행해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지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어리석은 거야

손해 보는 행위고 바보짓이지

 

너희들과 나는 어머니의 바다에서부터 태어났다

어머니의 바다는 여전히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

너와 나, 여기부터 저기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라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 불연속적이고 배타적인 객체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 더불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연결점

그 어떤 구분도, 그 어떤 경계도, 심지어 안과 밖의 구분조차도 없는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

세상이라는 불연속은

그 객체들은

어머니의 바다에 기대어

그 바다위에 서로 무한대의 거리를 마주하며 떠있는 작은 섬들

 

너의 마법은 그 연속성에 가 닿은 너의 위대한 정신이

너희 객체들의 한계인 심상의 세계를 초월하는 그 힘을 원동력으로

어머니의 바다를 이용해 불연속과 불연속을 초월하여

연속성으로 연결된 불연속의 반대편의 현상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기술

인과의 천칭의 눈금을 속이는 기술

인과를 재정립하는 기술

 

그러나 아이야

너의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자유로이 심상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네 정신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그는 그이고 너는 너라고 하는 객체가 가지는 한계

그가 너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네가 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우주적인 한계

너와 내가 그리고 그와 그녀가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객체라는 본질의 한계

 

내가 장난처럼 너에게 내건 조건들은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잔인한 악당들이 지금의 나처럼 야만스럽게 네 킹을 쓰러트릴 때

 

아이야

발악해봐야 소용없단다.

그래도 그를 사랑할 것이냐?"

 

마녀는 그제 서야 깨달은 잔혹한 현실에 눈물 흘리며 대답 했어.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할겁니다

 

그가 너의 호의를 너의 희생을 견딜 수 없어

그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려고?”

 

단호한 마녀의 대답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 할 겁니다.”

 

그 순간

온 우주가 통쾌하게 웃었다

전 우주가 우리의 선택의 순간을 위해

1초의 순간을 위해 움직여온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처음으로

전 우주가 웃었다

 

모든 본질들이

태초 이래 최초로 기쁨과 환희의 1초의 순간을 맞이했다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부다!

바로 그것만이 내가 너희들에게 영겁의 세월동안 던지는 질문!

 

좋으냐?

싫으냐?

얼마나 좋으냐?

무엇보다도 좋으냐?

언제까지 좋으냐?

어떻게 해도 좋으냐?

끝끝내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너희들이 살면서 쟁취하고 상실하는 그 모든 것들에게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 1초의 순간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

 

마녀야

네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쟁취하던

혹은 실패하던

비겁한 선택이던 어리석은 선택이던

모두 다 긍정된 사건들

긍정된 우연가운데 하나일 뿐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가 1부터 6까지 어떤 숫자를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하늘로 던져진 그 순간에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일 뿐

너 자신에게 패배자라는 꼬리표를 내걸고 실망할 이유 따윈 없다

괜찮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절대 현재의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라!

내일의 일은 내일 걱정해라!

 

마녀야

내 질문은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네 삶이 끝나고 난 후

또 다른 객체가 자신을 라고 인식할 때

영겁의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라는 존재의 인식

이 우주에 라는 객체가 존재하는 한

내 질문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마녀야

네가 다른 에게

무슨 행동을 하던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이다.

부디 지금의 네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다오 아이야

 

마녀와 운명이

소망의 화덕 안에서 불타오르는 보석을 바라보았어.

 

운명이 다시 말했지

 

온 세상 가득히 만연해 있는

나에 대한 그 수많은 편견의 벽에 기대어서

오직 나만의 공간에서

오직 나만이 느껴온 그 고독한 시간들

 

너는 마침내 모든 심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에게 도달하여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마주하여 나에게 이 우주에게

진실로 기쁜 단 1초의 순간을 선물해 주었다

 

태초 이래 처음으로

우주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너를 위해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그녀와 그녀의 연인과 대장장이를 서로 만나게 해주어라

너의 운명의 결말과 마주해 보거라 용감한 소녀여

 

그 순간

 

전 우주의 모든 것이 융합 되었어

그리고

발가락 사이사이 백사장 모래알 촉촉하게 닿는 그 느낌처럼

낱알, 낱알 보드랍게 흩어져갔지

 

가까이 혹은 멀리

망망한 대해의 수평선과

발등에 속삭이는 파도의 흰 포말

가까이 혹은 멀리

 

위와 같은, 운명이 거론한, 옳지도 못하고 개인의 행복과는 거리도 멀고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모든 사건들은

자아의 본질인 배척

우선순위를 가리는 경쟁의 본질 사이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점차로 미움에 물들어

더 이상 눈물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 우리들 모두의 실제의 생활상입니다.

 

하여

운명은 마녀에게 질문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사실 마녀의 대답은 평범합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대답 안에 진리가 숨어 있었죠.

마녀는 지금 이 순간 절대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선언을 합니다.

 

사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어느 한 쪽의 무조건적인 희생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 같은 것은

저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명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

그런 일들이 실제로 발생을 했었나요?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려워서

고백조차 못한다면

그건 바보겠죠?

 

단순히 연애의 관점을 떠나서도

세상이 설혹 실제로 그렇다고 하여도

마녀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그 사실에 대해서

그녀의 마음속에 진실로 정말로 단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온전하게

 

자신은 슬픔의 대장장이를 현재 사랑하고 있다는 대답을

다른 대상도 아닌 운명(運命)’ 에게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운명 혹은 신이 원한 대답

혹은 그녀가 바란 진실로 고결한 심장이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배척과 우선순위에 따른 경쟁이라는 우주적 본질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죄악의 실행을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써 완전히 거부하는 것

이것을 하기 위하여 상대를 일단 용서할 줄 아는 마음과 또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을 항상 견지하는 것

 

결국 이와 같은 마녀의 고결한 심장으로 말미암아

운명이 그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자기 자신만의 시공 속에 갇혀서

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이들의 손가락질과 원망 속에서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를 진실로 이해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조차 없이 맹목적인 맹신이 아니면 맹목적인 분노밖에 품을 줄 모르는 무수한 편견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실제적인 해결책을 찾아보면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구원만을 바라는

어떤 한 인간이나 자아가 세상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어야만 자신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믿는 어리적은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에 그 자아를 수인처럼 감금당한 채

도리어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손가락만 한 번 잘못 까딱 하면 부스러져 내릴지도 모르는 애처로운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채

행사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아가며

인간이라는 수많은 자아들이

자신들이 살고 싶은 만큼 살 수나 있게 해 주었다는 진실은

그들이 살고 싶은 만큼 원 없이 자유롭게 살 수나 있게 해주었다는 데에 대한 그 어떠한 보답도 듣지 못한 채

(신이 인생의 모든 순간에 걸쳐서 너 이리로 가고 또 저리로 가라, 라고 간섭한다면

따르기는 하실 겁니까?)

마치 죄인처럼 고독하게 숨어 지냈던 그 모든 시간들 동안 쌓여온 신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퇴적물들이 일거에 역전을 일으킴으로써

신의 마음속에서 발생했던 모든 사건들이 해결 되고

운명은 그야말로 간곡하게 마녀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니 마녀야

네가 다른 에게

무슨 행동을 하던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이다.

부디 지금의 네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다오 아이야

 

모든 사건의 해결과 모든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암시? 혹은 힌트?

 

운명의 마음속에 퇴적된 퇴적물이라는 표현은 다음의 원문을 참조 바랍니다.

 

Goodnight My Dear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16(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16)

 

밤은 고요한 태평양의 수면 아래

태고의 시간이라는 물결을 헤집고 내려온

어슴푸레한 햇살의 화석이다.

 

해수면상의 파도가 남긴 물결무늬조차도 무의미한

그 가장 오래된 화석의 빗살무늬 같은 시간에

빗살무늬를 이루고 있는 가장 고운 입자 같은 너를 사모한다.

 

바닷물처럼 어슴푸레한, 너라는 시간의 지층을 파내려가다, 파내려가다

곡괭이처럼, 혹은 고고학자의 솔질처럼 너의 편린을 더듬어가던

어설프고 서투르며 거칠기까지 한,

별빛이 쏟아지는 마당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은 사유조차도

물푸레나무 가지가 두레박에 담긴 그 빛깔보다도 더 푸르른

남반구의 바닷물보다 더 투명한 너라는 전설로 말미암아

차츰 차츰 쪽빛으로 물들어 가는데

 

너의 뺨의 살결을 간질이는 나의 얼굴에 난 검은 터럭 같은 이 밤이 싫어

너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나의 심장의 고동소리 같은 이 밤이 싫어

너의 안면을 방해하는 연애편지 같은, 나의 사모로 이루어진 이 밤이

나는 정말로 싫어

 

내 심장 고동소리가 없는 좋은 꿈을 꾸어줘

제발 부탁이야.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76

 

어떤 마법 같은 바다의 해수면 아래로 펼쳐지는 광선의 침잠을

지층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고고학자의 곡괭이질과 솔질로써 표현하고

두근거리는 화자의 심장 고동소리에 행여나 깨어날까 두려운 그녀의 안면을

결코 방해하고 싶지 않은 화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운명의 모래시계를 통하여 신의 마음속에 퇴적된 퇴적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독자여러분들께서 행여나 눈치라도 채실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의 화자의 내면이기도 하구요

 

지층에 빗대어 표현한 다른 작품 하나 더 소개합니다.

 

가슴의 문을 두드리다 fin.(Knock on the door to your chest fin.)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22(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22)

 

구월의 햇살이 한가로운 버스정류장을 사선으로 침범하여

공용 의자위에 앉아 오가는 행인의 줄에 매인 강아지와 소통하는

하염없는 기다림을 감내하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어긋남이란 인식할 수 없는 접점에서 교차하여

마치 햇살과 나의 조우처럼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한번쯤 한마디씩 하고는 한다.

 

내가 기다려 온 것은 네가 아니야

 

사실 내가 기다려왔던 것이 구월의 햇살이 아니었던 것은 맞다.

심지어 그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보이던 야트막한 동산도,

갈대와 가을 풀들과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운데

내리는 땅거미와 함께 풀벌레 우는 소리 고즈넉이 울려 퍼지는 것조차도

모두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날 구월의 햇살이 가슴 졸이며 나를 기다려 왔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내가 거절당할 까봐 애간장을 새까맣게 태우며

간절하게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지난 시간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다.

단지 햇살은 무심하게 지평선을 넘어갔을 뿐이다.

 

황혼을 투과하는 버스 정류장 유리창,

투명하여 빛으로부터 유리(流離)*된 침묵의 벽을 따라

희로애락은 모두 불타오르는 추억이 되어

다가오는 밤을 향해 막힌 둑을 터뜨려 오열(嗚咽)을 방류하고

 

반근착절(盤根錯節),

흐르는 별빛은 수많은 지류들로 흩어져

동양 여인의 눈동자 속에 숨어있는 어둠만큼이나

맑고 깊은 하늘 가득히 역동적으로 굽이치는데,

 

겨울이 지나고 초봄이 다가와 바람의 마음이 뒤바뀌면

채 쌀쌀한 기운 가시지 않은 날씨에 이름 모를 나뭇가지 꽃눈 틔우듯

그 열기에 녹은 얼음 사이로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흐르는 것처럼

서리가 내리고 어둠만이 흐르는 행성의 표면아래

알 껍질 속 작은 공룡의 심장만큼만 뜨거워지는 일

 

*유리의 한자를 일상적 언어와 다르게 표기하였습니다.

서로 분리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의미 입니다.

 

*녹은 얼음 사이로 흐르는 맑은 하늘 이라는 표현은 '짙은' 이라는 밴드의 December 라는 노래가사에서 빌려온 표현입니다.

원작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품은 의미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원작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됩니다.

 

찬란했던 겨울 호수 얼어붙은 기억

깨진 틈 사이로 흐르는 맑은 하늘과

귓가에 부서지는 눈 쌓이는 소리

잊었던 날들 떠올리며 멍해지는 머리

 

원작의 의미가 차가운 기억 사이사이 맑은 하늘과 같은 청명한 마음들

차가웠던 기억들 사이사이 아름다웠던 추억들과 같은 기억을 중심으로 모티브를 구성했다고 한다면

저는 차가운 얼음과 같은 운명과 화자, 그리고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살아 숨 쉬는 따스한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어지는 행과 대비하여보시면 의미가 분명해 지지요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66

 

사실 작품 중에 나와 있는 문제이지만

를 유지하려면 는 끊임없이 다른 를 배척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다른 를 먹기까지하죠

적어도 이 부분까지는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와 그 주제의식이나 모티브 등이 완전히 겹치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세상 전부를 사랑하고 싶다 하여도 반드시 그중의 누군가 하나는 배척이 되거나 타인에게 먹혀야만 하는, 절대로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적인 본질

 

내가 굶어서 죽지 않으려면

나는 반드시 다른 를 먹어야만 합니다.

나는 닭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을(음식을 - 음식은 전부 생명입니다. 일부 합성 착향료나 색소나 약품이 아닌 이상 물을 제외하고 -물속에도 미생물이 있지만 - 인간이 먹고 마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생명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먹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적자생존의 절대적인 경쟁의 원칙이죠.

 

사실 여기에 대안 따위는 절대로 없습니다.

설혹 기술이 한없이 발전하여서 초지능이 나노 로봇을 활용하여 허공에 고기와 곡식과 과일을 생산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그 고기는 엄연히 DNA 분자로 구성되어져 있는 피가 흐르는 생생한 살입니다.

 

뭔가 엄숙해지는데

생각을 좀 전환해서

이 부분부터가 이영도씨와 저의 생각이 180도 달라지는 부분인데요.

 

근데...

닭 잡아먹었다고

난 닭을 미워한 거니까

평생 세상의 모든 닭들과는 원수같이 지내실 건가 봐요?

다른 닭이라도 다시 사랑하고 싶지는 않으세요?

귀엽고 예쁘잖아요.

다시 먹고 싶어지는 문제는 좀 잊고,

 

치킨은 사랑 모르냐구요 이사람 들아.

 

그냥 먹을 때마다 닭들한테 미안하다 하구 용서해 달라고 하구 감사하구 또 사랑하구

왜 어릴 때 밥상머리 교육 받은 건 기억 않나요?

 

아 진짜 소 잡아먹었다고 평생 소들이랑은 원수할 거냐고 이 사람들아 ~~

 

소나 닭이 우리를 용서 하지도 않을 것이고 걔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이해를 바라야죠.

사랑하니까

그 마음 잃지 않게

 

점점 해답에 근접 하죠?

고민을 끝내드릴게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절벽의 하필이면 양쪽 정 반대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매달려 있다면

그 때 누구를 구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이 먹고 먹히는 관계가 대인관계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임을 암시합니다.

그런 질문이에요.

 

결국 정답은 누군가를 구하기는 해야 한다. 라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반드시 구하고 싶은 사람인 것이죠.

 

이 역시 사실상 아무런 대안도 없는 그 어떤 대안도 없는 절대적인 명제인 것이고

예를 들자면 같은 반 친구 하나가 우라질 정도로 속이 뒤집어질 만큼 시험을 잘 보는데 자신은 그걸 못 한다던가 ...........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우선순위에 따른 배척 혹은 우열을 판가름하는 경쟁의 본질이죠.

 

이것이 절대적 진실임을 마음속에서부터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고통을 가하는 입장의 인물이 자신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이 용서가 받아들여질 때 까지 갈등은 계속 됩니다.

시험 잘 보는 것이 죄는 아니죠.

그걸 질투한다는 명목으로 저지르는 나쁜 일들이 곧 죄인 것이고.

시험을 잘 보는 이라 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면 그것 역시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겸손해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즉 갈등의 종식이야말로 곧 구원이 되는 이 등식은

오로지 생의 순간에만 구원이 실재하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입증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며

저의 작품에 사후세계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신은 우리들 모두를 하나같이 애절하리만큼 사랑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자아간의 우열은 반드시 존재 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는 절대로 그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천국도 지옥도 굳이 수고스럽게 만들어야만 할 필요성이 상실되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단 하나도 없고 심지어 더 아프고 덜 아픈 것만으로도 윤리적인 자괴감에 의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하물며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두고 차별까지 하라뇨 ......

 

절대로 둘 다를 구할 수는 없고 둘 중 하나밖에 구할 수가 없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둘 중의 하나가 반드시 지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열의 분별이 가려지는 순간은 세상에 자아가 실재하는 이상은 절대로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 모두에 비일비재한 선택의 순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구할 것인가? 라는 명제에는 정답이 없을 지라도

그렇다 할지라도 정작 누군가를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 라는 진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라는 것이 바로 결정적인 힌트였고

그것이 바로 절대로 불변하는 단 하나의 진리였으며 사랑의 유일한 실천이었습니다.

그로인하여 혹은 그것을 위하여

누군가를 반드시 배척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신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여도 그 사랑이 불변하여도 자아의 우열의 판가름과 호감의 우선순위에 의하여 누군가는 반드시 배척받을 수밖에 없고

심지어 신 자신조차도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하여도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택의 순간에 반드시 누군가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고

구함 받지 못한 존재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의 마음을 전하여 갈등을 종식시켜야만 하는 명제였던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중간 포스팅 한 번 더 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하죠.

 

제가 어린 시절

서울 특별시 강서구 외발산동에서 부친께서 화훼 농장 사업을 하실 때에

5동 정도 되는 비닐하우스에 굉장히 많은 식물들을 키우실 때였는데

제가 5살 이었나 5살 이었나

하여튼 굉장히 어렸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그 지역은 그린벨트로 묶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시골이나 다름없어 산길을 30이나 걸어야 초등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발산초등학교였는데요.

그 동네에서 저희 집에서 걸어서 10정도 거리에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네요.

집 뒤편 야트막한 뒷동산에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 있었고

살구나무에 열매들 탐스럽게 익어서 떨어질 때 주워 먹고

뒷동산에서 엄마에게 혼나고 난 뒤 화풀이로 돌멩이 던지다가 하필이면 지나가던 땅 주인집 딸한테 실수로 큰 상처를 입혀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ㅡㅡa;;;;;;;

 

.., 아무튼 제가 4살 이었나 5살 이었나 되게 어릴 때

그 때가 아마 한 겨울이었을 겁니다.

굉장히 추웠었는데요 ...

함박눈이 휘날리던 그 추운 겨울 날

그 슈퍼 앞 공중전화의 작은 플라스틱 박스 안에

새빨간 얇은 피부의, 아직 눈도 뜨지 못 한 어떤 알 수 없는 동물의 아주 작은 새끼 4마리가 꿈틀대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 때 그 동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는데요.

자라면서 성장 이후에도 동물이나 생물학 등에 또 동물도감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기어이 인터넷 사진으로 그 동물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매우 징그러워하는 시궁쥐의 새끼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그게 도대체 뭔지도 몰랐으면서

누가 무슨 의도로 거기다 둔 것인지도 모른 채

그 손가락 마디보다도 더 작은 빨간 생명체가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 꿈틀대는 그 모습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아서, 그만 그 동물들을, 그 아가들을, 심지어 아주 사랑스럽다고까지 느끼면서, 글쎄 그걸 그만 집에 데려와서 아주 행복해하기까지 하면서 따스한 방안의 공기를 녀석들에게 쐬어주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했었는지 모릅니다.

아 근데 ㅡㅡa

저희 어머니께서는 녀석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셨나봅니다 T^T

(울 엄니가 딴 때는 두더지도 잡아다가 줄에 묶어서 기둥에 매어두고는 애완동물 삼으라 하시던 분이셨는데 그 때는 하필 왜 그러셨는지 ... 엽기인가 ㅡㅡ ㅋ)

 

아주 그냥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던 겁니다.

(어머니께서는 특히나 쥐나 뱀 같은 건 굉장히 싫어하시는데, 이게 사실 저는 그런 아가들을 꽤나 좋아라 하는 편이라서 .a)

어머니께서는 어디 집안에 감히 쥐새끼를 들이냐 시면서... (당연한 이야기인가요? ㅠ ㅠ 누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ㅠ ㅠ) 화를 아주 버럭버럭 내셨고 (꽤나 엄하셨습니다. ㅠ ㅠ 매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 이셨던 지라. ㅠ ㅠ) 심지어 당장 내다 버리라고 (!!!) 매우 호통을 치셨고,

그 순간에 저는 제 눈앞의 그야말로 손톱만큼이나 작은 그 빨갛고 꼬물거리는 아가들을 어떻게 감히 한겨울 눈보라 속에 내다 버리고 집에 돌아올 수가 있는지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어떤 저의 마음과, 또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라는 것이 정면으로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최초의 순간 이었을 겁니다.

너무나 이른 그 너무나 작고 어린 사춘기의 반항은 그야말로 너무나 어이없게 종식이 되었는데요.

5살배기 어린 남자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이기는 것이 아무리 무리였다고 할지라도

제 손으로 다시 그 추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공중전화부스에 그 아무것도 모른 채 꼬물거리기만 하는 작고 귀여운 아가들을(실제로 아무리 시궁쥐 새끼라고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사진 보시면 꽤나 불쌍해 보이고 또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형입니다. ㅠ ㅠ, 실제로 생기기까지 사랑스럽게 생겼 다구요. ㅠ ㅠ) 그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을

진짜로 제 손으로 내다 버리고 나서 힘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다는 게

진짜 단지 춥다는 생물학적 이유 때문에 주제에 저만 살아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다는 게

이게 진짜 아직도 제 마음 한 구석에는 깊은 흉터로 남아있는 멍울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께서 그걸 바라셨다고 해도,

실제로 저를 쫒아내시기까지 하셨다고 해도,

그냥 그 작고 불쌍했던 아가들과 함께 거기 남아있을 걸...

그렇게 같이 녀석들하고 눈이라도 맞아주면서

죽을 때 까지 같이 있어보기라도 할 걸...

진짜 죽을 때 까지 녀석들을 품에 안아보기라도 할 걸...

그 작은 당시에는 절대로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어떤 미지의 동물의 아가들을

최초의 사랑을

5살배기 어린아이가 제 손으로 한겨울 눈보라 몰아치는 공중전화 부스에 내다 버리고 돌아서면서부터,

어떤 후회와 결여가,

안타까움이,

제 안에서 신생아처럼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부정하는 비정한 미움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그 어린 나이에 그게 뭔지를, 아니 화두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꼬맹이 주제에

실제의 경험과 감정으로 겪어버리고 나니

제 안에서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아무리 그것들이 심심하면 사람들이 때려잡고 쥐약 먹여 죽이고 쥐 덧, 놓아 사로잡아 패대기치는 게 일상다반사인 인간사에 해악만 끼치는 쥐였다고 해도

그 녀석들이 제가 주는 그 어떤 먹이도 받아먹을 수 없고

젖을 주려고 해도 그걸 녀석들의 입안에 흘려 넣어줄 스포이드 한 개 조차 구비되어있지 않았던 비닐하우스에 무허가주택 마련해놓고 연탄불로 아랫목 구들장이나 데우던 그야말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주택 환경이었을지라도

최소한 그 아가들이 정말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라도 하다못해 추위만큼이라도 막아 줄 수는 없었는지

그날 얼마나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던지...

나에게 그 아가들은 부모를 제외한 최초의 사랑과 진심어린 유대감의 대상이었는데...

 

이게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배척이라는 것을 제가 본의 아니게 강제로 배워야만 했었던 최초의 순간이었고 첫 상실의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아이들이 어떻게 죽을 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구원을 바라며 죽어가고 있었을 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또 알고 있으면서 내다버린 것이었거든요.

지금도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요...

 

이 배척이라는 것에

도저히 그 어떠한 다른 대안도 전혀 절대 없을 때,

심지어 생존을 위해서, 정말로 생존을 목적으로 정말로 인육(人肉)을 먹어야만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심지어 정말로 먹었다고 하더라도,

신을 용서하기, 신을 구원하기, 신에게 또 구원받지 못한 대상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받고 구원을 베풀어 주기...

모든 자아의 모든 선택의 결과는 모두 필유곡절(必有曲折) 하므로

그 모든 대상들과 운명에게 품었었던 호감을 버리지 말고,

사랑했던, 사랑하는, 그 마음을 절대로 잃지 말고,

용서하고 또 용서를 구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니니 설득이라도 해보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고 덤비지 말고,

세상이 단 하나 뿐이면 충분한 이유이죠.

이것은 구원이 절대로 죽음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였습니다.

비단 살아서 숨 쉬며 매순간 세차게 뛰는 심장과 감정을 믿어야만 한다는 감정적 증거 이외에도,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이 세상이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하다못해 외계 행성이든

자아가 존재하는 모든 곳은 똑같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이 결국 나와 당신들이니까요.

처음부터 그런 문제이니까요.

 

아무리 나에게 소중한 것을 운명에 의하여 상실하게 되었을지라도(운명 = 타인)

내가 설혹 타인에게 상실을 강요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더라도

그렇다 할지라도 운명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을 모르면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운명에게 패배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라는 것을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그 단 하나의 장면 속에 압축하여 넣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적 조우를 3번을 반복하죠.

최초에 대장장이와 운명이 조우하여 서로 싸우게 되는 결론

후에 마녀와 운명이 서로 맞닥뜨려서 대결을 벌이지만 결국 마녀도 운명에게 패배하는 장면

그리고 마침내 패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마녀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진실로 정답이었기 때문에

마녀가 대장장이와 마침내 조우하게 되는 장면

 

결국 운명이 마녀에게 마지막 조언을 하게 되는 장면도 사실 마녀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에 조언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조언 자체가

정말로 누군가를 반드시 배척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그 어떤 대안도 절대로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배척당하게 되는 그 대상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와 이해를 구하려는 마음을 제발 절대 잃지 말아달라는 당부였습니다.

대장장이도 마녀도 둘 다 그걸 못했으니까요.

모든 인생의 순간을 즉 신의 마음을 제발 사랑하여 달라는 간절하고도 애절한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반대는 결국 미움이죠.

왜냐면 무관심은 관계가 아니라 단지 혼자, 즉 허공이거든요.

빨간색의 반대말을 도화지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파란색이 바로 빨간색의 반대말인 거죠.

 

결국 슬픔의 대장장이와 마녀의 만남 즉 세 번 째 운명적 조우의 순간의 유일한 해법이 자연스럽게 결론이 도출이 됩니다.

 

에게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일단 사랑하고

배척하기 이전에 제발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하여 이해하려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용서의 마음을 잃지 말고

누군가는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이고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결이 되는 문제도 아니니,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문제인겁니다.

(마지막에 소망의 검으로 냉혹한 태양을 베어낸 마녀의 손에 그동안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도 속에서 서로의 인육까지 먹어가며 생존해야 했던 죄악에 물든 사람들까지도 전부 다 새로운 운명 벽과 마주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사실 .a;;

작품을 좀 난해하게 써 놓기는 했었죠, 제가 .a;;

죄송합니다. m__m;;

 

결국 작품을 관통하는 모든 문제의 진실한 해법이란

슬픔의 대장장이가, 또한 대장장이뿐만 아니라 대장장이의 연인인 작은 마녀도, 또한 대장장이의 소망의 검과 이를 사용한 마녀에 의해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비로소 탈출하게 된 그 모든 인물들이 그들 모두가 각자의 운명의 벽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에,

그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진실로는 신을 용서 할 줄을 몰랐던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죄악(罪惡)임을 인정하고, 즉 회개(悔改) 하고

그럼으로써 죄악을 인정하고 그 죄를 끊어내고,

다시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사랑하기

즉 믿음의 회복입니다.

 

실제로 믿음이라는 나침반

이를테면

이 세상의 유일무이(唯一無二) 하고 절대불변(絶對不變) 하는 진실로 단 하나 뿐인 어떤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진실에 대한 그 진리만큼이나 변하지 않을 굳건한 믿음의 회복은,

처음부터 슬픔의 바위 사막을 모든 캐릭터들이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써

처음부터 작중에 사건 해결을 위한 실마리로써 등장합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가 혹은 그것을 하기가 너무나 아프기만 한 인생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을 지라도

나는 그것만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사실 배척과 배척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그 순간에

용서와 사랑의 실마리를 찾아 낼 수 있는 그 시간이라는 것은

그 기회라는 것은 정말이지 얼마나 아찔하리만큼 짧은 시간에

쏜살과도같이 빠르게 지나가버리게 될까요?

그 의사결정의 즉 구원의 순간이란 것은

그야말로 번개같이 빨리 지나가 버리고

미쳐 의식하기도 힘들 만큼 짧은 순간에

너무나 하찮게 여겨지는 의식에 의해

너무나 손쉽게 결정되어져 버리는 것이 일상의 다반사이므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고

설혹 그 순간을 놓치고 지나가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결코 절대 호감이라는 감정을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아야만 하는 겁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내일 또 하죠

이제 한 절반 했네요.

... 나머지 내용은 본문 인용 할 일이 없으니 .....

좀 짧게 끝나려나...

 

여담이지만 왜 하필 여주인공이 영웅이 되어서 남자주인공을 구원하는 스토리라인이냐고 물으신다면 .a;;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걸 할 수 있는 위치의 실제적 사회의 권력자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문제인데

이게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하는 수준의 이야기라서 ...

반쯤 농담 섞인 스토리라인이라고나 할까요 .a;;

 

물론 그들이 그걸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어떤 사회 제도적인 장치들은

작품이 아닌 실제적 사회제도의 보완책을

이미 청와대 비서실을 거쳐서 관련 부서에 안건제출을 마친 상황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그 내용 전문을 보다 더 다듬어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척과 배척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에

용서를 찾아내는데 걸리는 시간이란 얼마나 짧은가에 대하여서

아마 성서에서도 주님의 나라가 오시는 순간에 대하여서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 기록이 있을 겁니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열 처녀의 비유로 천국 문을 비유하심)

열 처녀의 비유란 밤에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들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처녀들을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어떤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였는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처녀들도 사실상 자신들이 사용 할 양 만큼밖에 되지 못하여

이를 나누어가지지 못한 처녀들이

기름을 가지러 다녀온 사이에 신랑들이 다녀가고

이미 성문은 굳게 닫히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 한 처녀들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이야기를 비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되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어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도리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二更) 에나 혹 삼경(三更) 에 이르러서라도

종들이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중략...

 

이와 같은 말씀들은 천국이 그야말로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도둑처럼 벼락처럼 어느 때인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느닷없이 들이닥쳐 올 것인데 너희가 그 때를 알지 못하고 그 를 알지 못하노니 항상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저도 작품을 쓰며 삶을 통해 화두에 깨달음을 얻고 보니 성서가 신의 말씀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조금은 생깁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감과 용서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통하여 사랑과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에 대한 호감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일이 없이 대화의 여지를 남겨놓아야만 합니다.

결국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눈물이라는 고결한 값어치를 인정 할 때 슬픔이라는 감정을 스스로가 용인하게 될 때에 이를 통하여 용서가 뒤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항상 그러한 마음을 견지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호감의 동시간대 양립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눈물과 슬픔이 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함을 이해하고 항상 용서하려는 마음가짐을 견지함으로써 상황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항상 견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이는 내적갈등의 빠른 전환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호감이라는 그 감정에 대한 희망의 끈 자체를 결코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설혹 실패를 겪게 되더라도

물론 어떠한 시도에 대한 성취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 맞지만

느린 성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보다 더욱 중요하며

도리어 빠른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고 모든 것에 비관하여 멈추어 서 있는 바로 그 자세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을 항상 견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호감을 결코 포기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거절해야하는 것은 바로 호감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체념의 감정이었던 것이죠.

저의 작품 설정 상에서는 절망의 뒤에 찾아오는 행복으로 표현이 되는데요.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가 그토록 사랑하던 그리움의 주인공의 실제연인인 가상의 인물로 표현되는 용사에게(이름은 없습니다. 설정 상 가공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의 인생을 의탁하는 과정에서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이 본인이 마법의 무구로 활용하던 절망의 창 한 자루 뿐 이었기에

그것을 용사에게 선물하는 장면으로 표현되는데요.

 

사랑의 본질을 논하며(Discuss the essentials of love)

슬픔의 바위 사막 제 20(Rock desert of sorrow part. 20)

 

마침내 모래시계는 뒤집히고

다시 모래알이 떨어질 때까지

전 우주의 시간이 그대로 멈췄다

 

모래알은 언젠가 다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전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꿈처럼 흐르는 전 우주의 주마등(走馬燈)

운명이 모래시계를 뒤집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성취되지 못했던 우주의 춤

 

나의 1초를 위하여

우리의 1초를 위하여

 

전 우주가 움직여 표현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표정 없는 판토마임

아니,

가장 풍부한 표정의 변검술(變臉術)

천극지화(川劇之花)

 

환영과 환영의 사이사이

꿈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잊혀진 기억과 거짓된 환상들이

천년을 자라난 거목들 마냥

장엄하게 늘어선다.

기만되고 왜곡된 추억의 숲속 한가득

안개처럼 흐르는 것은

넓은 가슴에 수줍게 내리는 첫눈의 설레임

마녀와 그리움의 주인공과 용사는

몽환의 숲속 한가운데

쏟아지는 빗방울과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진눈깨비에 노출된

기도하듯 울고 있는 대장장이를 만나게 되었어.

 

오랜만이군요.”

 

그리움의 주인공이 대장장이에게 건넨 인사

아마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건넨 한마디

 

대장장이는,

마치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작렬하는 고통에 반응 하듯이

경련하는 어깨를 튕겨 올리듯 들어 올렸어

 

마치,

젖을 물리지 못한 갓난아기 같은 얼굴

눈물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땅바닥 위로 깃털 하나만 떨어져도

거대한 행성이 두 조각 나버릴 것 같은

끔찍한 침묵이 몇 초간 흘렀어.

 

그리움의 주인공이

그런 대장장이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이제 나도 알아요.

내가 갇혀있던 심상의 세계를 벗어나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당신과 마주한 지금

이제야 나는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가 있어요.

하지만

부디 이런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요.

나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토록 그가 원했던 것

그토록 내가 원했던 것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상냥한 한마디의 말

혹은,

그녀가 지인들을 대할 때 보여주곤 하는 부드러운 미소

그 기품 어린 태도 같은 것

 

단지 그것만을 바랐던 거다.

 

대장장이는 이내 눈물을 거두고

태양처럼 밝게 미소 지으며

그리움의 주인공과 그녀의 연인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말했어.

 

당신이 나로 인하여 그동안 겪어야만 했던

그 모든 고난들 앞에서

나는 영원히 죄인입니다.

이제야 드디어 당신이 짝을 찾음으로써

당신과 나 사이의 모든 인과의 고리가 끊어지고

비로소 우리의 운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앞날이 찬란히 빛나기를 바랍니다.”

 

대장장이는 이내 용사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어.

 

당신이 그녀의 연인이군요.

당신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모든 걱정이 사라집니다.

증오공포는 제가 만든 것

그것들은 강력한 의지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마음을 지배하는 마법의 무구

그것들을 무리 없이 사용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무기가 없군요.

드릴만한 것이 절망밖에 없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용사가 말했지

 

나는 지금 우리의 사이를 흐르는 우주의 주마등 속에서

당신과 그녀사이의 모든 이야기들을 보았다

결코 스스로가 원하는 만큼이 될 수 없었던 가련한 이여

결코 운명을 이겨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없던 나약한 이여

그러나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지금 이 순간 그대의 마음이 전 우주에 반향 되어

가장 아름다운 나비로 우화(羽化)하려하는 우리 모두의 아들이여

그대가 그대 스스로 품고 있던 절망마저 나에게 주고나면

그대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대장장이는 웃으며 이야기 했어

 

나에게는 아직 분노인내가 남아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소망의 화덕과 함께

나에게는 무한한 의미가 남게 됩니다.

소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저의 선물

아니 운명이 당신에게로 인도할

절망을 보듬어 안아주시길.”

 

가벼운 손동작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법의 언어와 함께

마녀와 그리움의 주인공과 용사는

백일몽의 불꽃 속에서 피어난

대장장이가 머무른 몽환의 숲을 벗어날 운명의 문 앞에 서게 되었어.

마녀가 대장장이와 용사에게 이야기 했지

 

잠시 남자 분들은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제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꿈이 커튼처럼 사람의 인연을 가리고

그리움의 주인공과 마녀가 대면하게 되었지

마녀가 그리움의 주인공에게 질문했어.

 

당신에게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실례를 했군요.

그것을 질문해도 될까요?”

 

그리움의 주인공이 웃으며 대답했어.

 

질문 하셔도 돼요

 

마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어.

 

어째서 용사를 당신의 연인으로 선택한 거죠?

어째서 대장장이를 선택하지 않았나요?”

 

그리움의 주인공이 잠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볍게 웃었어.

그리고 마녀를 잠시 똑바로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마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두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렸어

그리고 질문했지

 

내 눈동자 색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나요?”

 

마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리움의 주인공이 마녀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 했지

 

갈색이에요.”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같았어.

 

이것은 내가 나를 사랑한 많은 남자들에게

내가 내준 시험 문제

그는 처음으로 이 시험 문제의 정답을 맞춘 사람이에요

나의 눈동자 색까지 기억할 만큼 나를 사랑한 거죠.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고른 거예요.”

 

마녀는,

 

대장장이를 구하기 위해

전 우주의 의지를 뒤흔들어야만 했던 마녀는,

 

아마 그리움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사람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든 여성들이

마찬가지로 겪고 있는 우주적인 장애와 직면하게 되었지

마녀는 자신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는 거야

 

설마 정말 고작 그따위 이유였다는 거야?

 

참으로 가련한 사람이군요.”

 

마녀의 입에서 기어코 비어져 나온 탄식에

그리움의 주인공은 발끈했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마녀는 차분히 설명해주기로 했어

 

이거 아나요?

대장장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지금 우리사이를 흐르고 있는 우주의 주마등 속에서

그가 겪어야만 했던 7년간의 시행착오를 보면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마음의 진실성이

결코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부여해줄 수 없다는 것을

진정 알 수 없나요?

당신이 당신의 눈동자 색이 아닌

그 어떤 심원한 지혜를 필요로 하는 시험 문제를 출제 했다 할지라도

또 그가 그 문제의 정답을 맞추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마음의 진실성에 대한 척도가 될 수는 없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의 눈동자 색까지 기억할 만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만난 것뿐이에요.

 

사람의 마음의 진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당신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운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만이

오롯이 그 사람의 진심을 판별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 이외의 모든 시험 문제는

마음이 아닌 머리를 시험할 뿐이죠.

 

백번을 양보해서

당신이 선택한 용사의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보상을 줄 거죠?

 

그와 밤을 함께 해주면 적절한 보상이 되나요?

그와 함께 살면

그러면 적절한 보상이 되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죠?

상대의 눈동자 색을 기억해 주는 것?

그 보답으로 당신이 그의 눈썹 개수라도 기억해주면

그것이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나요?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이죠?

 

남자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죠?

그에게 과연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에게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대장장이의 진심과 지금 당신의 연인이 된 용사의 마음을 떠나서

당신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냉소적인 마녀의 질문 앞에

그리움의 주인공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어.

그 바보 같은 모습에

마침내 마녀는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어.

 

왜 나의 질문에 대해서

나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대답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서

그토록 이나 자신이 없나요?

 

상대의 사랑의 크기를 먼저 가늠해 보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겁이 나나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감정의 크기를

자신의 감정의 크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 마치 장애인처럼 스스로의 사랑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의 크기에 위탁하는 것이

그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인가요?

누군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먼저 가늠 해보고 그에 대한 보답을 내리는 것이

그 철저하게 계산된 거래가!

고작 그따위를 사랑이라고 말할 건가요?

사랑이란 것은 그딴 게 아니란 말이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에요!

 

좋아 하는 것!

원하는 것!

 

상대를 보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로인해 상대를 원하게 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사랑의 전부라는 것을 왜 모르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게 되고

질투하고

희생하고

한없이 자신을 건네주고도 부족해서

더 줄 것이 없는지 고민하고

상대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상대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하는 동안 저지르는

그 숭고한 모든 이야기들과

웃기는 모든 이야기들이

 

오로지 하나의 감정

 

좋아한다는 순수한 감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왜 모르나요?

 

상대에게 사랑을 주기 전에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면 그 사랑의 진실성이 증명될 수 있나요?

 

진정으로 좋아하고

진정으로 원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운명의 질문 앞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평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진실로 서로를 원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큰 보상은 오직 하나뿐

그 사람도 역시 나를 사랑해 주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나요?

 

너의 사랑을 증명해 봐

그러면 너를 사랑 해 줄게

 

라는 요구가 그 자체가!

상대를 잔혹하게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정말로 모르나요?

자신의 진심을 상대에게 증명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정말로 모르나요?

 

아무런 형체도 없고 아무런 한계도 없고

결코 영원성을 장담할 수 없는 마음의 진실성을 요구하는 것이

단순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로 모르나요?

 

당신은 용사를 향해 사기를 친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대가로 약속했으니까!

상대의 진심에 진심으로 보답할 줄 모르니까!

아니 하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눈물이 필요해지면 타인의 눈물을 빼앗을 뿐이에요!

 

차라리 시간을 달라고 하지 그랬나요?

차라리 그냥 싫다고 하지 그랬나요?

 

그가 당신의 연인에게 건네준 절망의 정체

운명이 당신의 연인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어떤 시험문제를 출제할지

저절로 알게 되는군요.

 

부디 당신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인연을 가린 커튼이 걷혀지고

용사와 그리움의 주인공 그리고 마녀가

다시 마법의 문 앞에 서게 되었어.

 

아기가 옹알이 하듯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 거리는 그리움의 주인공을

마녀는 그녀의 연인과 함께 이곳 몽환의 숲으로 부터 추방해 버렸어

그들은 다시 스스로의 심상의 세계 속으로 갇히게 되었지

이곳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고

용사는 절망을 손에 쥔 채 운명을 개척해 나가게 될 거야.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시공간상의 거리조차도

동화 속 세상과

이른 아침 출근길의 거리만큼

아주 멀리

멀어져 가게 되겠지

 

마녀는

마침내 온전히 대장장이와 마주하게 되었어.

 

*작중에 등장하는 그리움의 주인공이 이야기한 눈동자 색 시험이야기는

유명 배우 올리비아 핫세가 결혼 할 때 기자가 한 질문

 

당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하필 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올리비아 핫세의 대답입니다

참고로 그녀의 눈동자 색은 녹색이라고 하네요.

그 기사를 보며 느꼈던 황당함과 분노

저만 황당한가요?

저만 화가 나나요?

 

*SNS 상에 유명한 이야기 하나 있죠.

 

옛날에 어떤 여인을 사랑한 남자에게

여인이 요구 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 달라고

남자는 그것을 해 주었어요

 

이번에는 하늘의 달을 따 달라고

여인은 당돌하게 요구했어요.

 

남자는 그것을 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마지막이라는 조건을 달며 요구한 것은

그 남자의 어머니의 심장 이었습니다.

 

남자는 죽도록 고민을 했지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도저히 져버릴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 했지요

그래서

자신의 어머니의 가슴을 가르고 그 심장을 꺼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드디어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고

그녀에게로 달려갔지요.

 

하지만 달려가다가 넘어진 그 남자에게

어머니의 심장이 말을 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상대에게

 

너의 진심을 증명 해 봐

 

라는 말은 폭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시 여자 보다는 어머니가 더 소중한 거야

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당신은 저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가 더 소중 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연인이 더 소중 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바보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

그가 어머니의 목숨을 취했기 때문에 바보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 할 가치가 없는 여성을 사랑 한 것이 바보 같은 것입니다.

 

이야기의 형태를 조금 바꾸어서

어떤 악당이 남자의 연인과 어머니 둘을 잡아놓고

둘 중 한 사람을 스스로 죽여야만 자신과 살아남은 한 사람을 풀어줄 것이며

만약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모두 잔인하게 살해할 것이라고 조건을 바꾼다면 어떻습니까?

 

누구를 죽일 것이며 누구를 살릴 겁니까?

혹은 헛된 저항을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그로인해 두 사람이 지독한 간살을 당한다고 해도?

 

누구를 구할 것인가 혹은 누구를 희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이야기 속 남자가 바보 같은 이유

이야기 속의 여성이 나쁜 여성인 이유는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론한 악당들과 마찬가지로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어떤 극한 선택의 상황이 아니고서는 증명 할 방법이 없고

또 그 선택의 순간의 결정이라는 것에

절대로 영원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앞서서

진심을 먼저 요구하지 마세요.

진심을 증명 할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믿음을 요구하지 마세요.

당신이 남자건 여자건

상대에게 그런 사기를 치지 마세요.

상대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 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진심 이어도

상대가 부정하면 그 순간 진심은 거짓이 됩니다.

그것이 형체가 없는 마음의 속성이랍니다.

이야기는 그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죠.

 

만약 그것을 요구하는 상대를 만나시거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연장자든 어린아이든

그 상대는 당신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성공이나 다른 것을 미끼로

당신의 마음의 진실성을 이용해서 당신의 성실성을 이용해서

당신에게 단지 사기를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런 사람은 사랑 할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거론한 악당들에게 당신이 혹은 제가

순순히 애정을 헌납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성실하게 대해 주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운명이 마녀를 시험 할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이 궁금하신가요?

당신의 운명을 향해 물어보세요. 왜 그러는지

저도 간혹 물어본답니다.

운명이란 과연 누구일까요?

 

*운명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망을 먼저 선물하는 것 같습니다.

 

체념을 할 것인지

체념을 거절 할 것인지

선택은 절대로 쉽지 않더군요.

 

둘 중 무엇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 따위가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확실히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7

 

상기의 원문 상에

사랑에 대한 저의 기본적인 관념이 표현됩니다.

 

많은 문인 분들이 저게 고작 뭐냐 라고 이야기들을 하시고

저에게 다른 설정으로 바꾸어 보라고 조언들을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절대로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분명이 일정부분에 걸쳐서 거래의 속성을 띕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상대도 나를 사랑하게 되기만을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아와 자아가 서로 단절되어져 있어

그 누구도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없는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의 작품상에서

작은 마녀라는 캐릭터 하나가

기어이 우주를 뒤흔들 만큼의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딛고

그만큼이나 큰 고민과 사고를 통하여서

또한 헬리오스와 셀레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지표면위로 창공을 가로지른 時間 의 양 만큼이나 많은 지혜를 전달받고서야 겨우 이해하게 된 내용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가 구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마음을 온전히 상대에게 표출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 내면을 알 수가 없는 상대의 내면에 대한 믿음?

혹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 욕망?

혹은 그 둘 다에 의하여서

 

자신의 감정의 표출 뒤에 찾아올 철저한 배신이라는 대가를 감내하고서라도

그 감정을 표출하여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이는 단순히 본능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의 관계의 형성에 가장 기본이 되는 심원한 지혜입니다.

 

혹자는 말을 하죠.

승리가 없는 힘이 없는 정의는 비참한 것이다.

 

저는 말 합니다.

등신이냐고

 

그럼 말로 할 때에는 절대 안 들을 생각이냐고

그러니까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거라고

(추악하고 사악한 모습으로 그 누구에게도 진심이 될 수 없는 모습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좀 기억 좀 하라고)

(단순한 폭력이라는 것은 절대 누구 하나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니까)

(착각은 자유이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대화와 토의, 상호간의 유대감과 애정을 통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면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비극은 종식 되지 않습니다.

 

하여 제 이야기 속에서 작은 마녀는

운명이 제시한 수많은 배신에 대한 가정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생각

사랑하는 감정을 품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으며

그것은 상대에게 표출이 되어야만 한다.

라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나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로 바뀌어야 한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진리입니다.

 

사랑 그 자체는 상호작용이기에 거래의 성격을 띠지만

그 감정이 표출이 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이 모험의 순간을 지나야만 합니다.

이 세상 모두가 전부 다요.

누구 한 사람만의 모험과 용기만으로는

절대로 아무것도 해결이 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해를 따오면 무얼 하나요?

달을 따오면 무엇을 하죠?

 

과연 이야기속의 청년이 진실로 자신의 어머니의 심장을 바쳤을 때

그녀가 그 청년의 심장마저도 요구한다면

 

사랑이라는 거래는 성립이 된 것인가요?

 

무조건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같이 하기 위하여서는

상대의 마음을 계산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내 마음이 이렇다고 그냥 좋아해주는 쪽이 낮습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해주기 전에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주기 전에는

사랑하지 않겠다고요?

 

그런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있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은

그냥 말 한마디로도 전달이 가능한 것이고

그 마음의 진실성의 크기라는 것은

억지로 측정하고자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측정하고 난 뒤에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음은 그 형태가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냥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그냥 일단 좋아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발생할 문제에 대하여 아무리 숫하게 고민을 해보아야

당신은 절대로 그의 진심을 알지 못한 상태로 그를 믿는다는 그 현실을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연애 공식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공식이 너무 많아요.

공식을 따지고 싶다면

그보다는 집안 어른들 조언을 따라서 맞선을 보거나 결혼정보회사에 문의하여 비슷한 조건을 찾는 쪽이 훨씬 더 솔직하고 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그쪽이 훨씬 더 객관적인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져 있거든요

어설픈 개인의 깜냥 수준을 아득히 초월 할 만큼

조건을 내걸고 조건을 따지는 순간부터

너의 진심을 증명해봐

이런저런 밀 당 공식으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 봐

 

 

그런 건 전부 가식인 것이고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연애 사 문제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대인관계에서

신뢰관계의 구축을 위해서는

구하는 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맞는 것이고

그 관계의 구축은 내미는 손을 의심 없이 맞잡는 방법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언제쯤 깨달으시겠습니까?

 

이권이 걸린 사업이나 계약에서 철저하게 따지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그걸 대인관계까지 확장을 하자고요?

 

그래서

그런 대인 관계가

정말로 행복 하다면

 

사랑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란 건 도대체 뭘까요?

멀쩡히 직장 잘 다니고

번듯하게 생기고

마음씨 따스한 것 이외에

 

그 이상의 모든 추가의 조건은

그냥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이야기가 많이 옆길로 샜는데요.

 

그래서

상기 원문에서 표현되는 절망 뒤에 찾아오는 행복이란

어떤 대단한 시련과 고난과 역경 뒤에 찾아오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사랑과 호감을 포기하고 계산과 실리를 쫒고 싶어지는 그 체념 이라는 형태의 절망의 바로 그 뒤편에

 

진짜 행복과 구원이 도사리고 있다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냥 믿어야 해요

그냥 사랑해야 해요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그냥 주저 없이 표현 하세요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굳건하게 믿고 표현하세요.

 

살다보면 상대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많습니다.

될 수 있다면

현실적인 불가항력에 부딪히기 이전까지는

너무 쉽게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마세요.

단지 감정적인 문제 때문에

책임감을 져버리고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마세요.

 

삶 자체가 절망의 창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인간도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대인관계에도 시행착오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 자신과 상대 모두가 절대로 완전하지가 않으니까

 

신이라고 해도

자아를 나누어 수많은 자아를 세상에 창조한 이상

어떤 특정한 자아 하나를 사랑 할 때

바로 상대가 되는 자아의 불완전성 때문에라도

그 관계는 완전성을 획득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불가인거죠

시행착오와 그 끝에 다가올 불행한 이별이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하고

머리와 실리를 따져가며 사랑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항상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상 본래 여성들은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방어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니

무어라고 탓할만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를 사랑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 라서는 곤란하다는 말인 겁니다.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이유이건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전하는 진심을 거절하는 그 순간 당신의 진심은 거절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과 이유에 의해서 거절을 하였더라도 거절을 하였다면 절대 사랑에 대해서 상대를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변한 문제라면 이번에는 진심을 표출하는 쪽이 무조건 당신 쪽이라야 하는 것이지요.

즉답으로 거절이 나올 만큼 싫은 상대에게 무슨 조건을 또 얼마나 왜 겁니까?

당신이 상대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도 당신을 모릅니다.

이 조건은 누구에게라도 서로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건이기 때문에

진심의 표출에 어떤 조건을 거는 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겁니다.

그건 그냥 장난이죠.

혹여 조건을 걸어서 실패한 자에게

또 조건을 거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진심은 시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표출 그 자체가 시험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상대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고

그것이 바로 용사의 절망입니다.)

 

역시 모든 대인관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대인관계의 기본은 믿음과 사랑이니까요.

 

여담이지만

올리비아 핫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녀의 연인이 된 것이라고 한다면

시험만 통과하면 그 누구라도 그녀의 연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나요?

 

그건 정말 아니지 않나요?

올리비아 핫세 본인이 그를 사랑해야만이

두 사람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간절함 말고

쌍방 간에 서로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상대에 대한 사랑을 고백 할 수 있어야만 이야기가 끝이나게 되는 것이며

여성이기 때문에 보호받고싶다는 이유 하나로

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는 절망만이 찾아 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체념을 거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체념에 대한 거절은 유명 애니메이션 헬싱의 아카도의 대사인데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체념을 거절할 때 진정한 권리인이 된다. 라고 하죠.

재패니메이션 치고 꽤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대사를 많이 남긴 애니메이션인데요.

다만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체념을 거절해야한다는 이유만으로 무관용의 유혈 폭력을 선호한다면 세상은 그냥 다 같이 망하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건 그냥 미친 생각이고.

만약 아카도가 옳다고 주장을 하시겠다면 그건 저랑 싸우자는 말이라는 거 잘 알아 두시구요.

저는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유혈폭력이 좋아라고 말을 딴지를 걸어오시면 제 입에서 나올 말은 욕이 가장 솔직한 진심의 표출이 되겠죠?

싸우자고 말해놓고 예의 차리시게요?

 

따라서 용사의 손에 쥐어진 절망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은 자신의 사랑 혹은 시험, 혹은 시험 이후에는 사랑을 받았을 지라도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스스로가 느꼈을 자존심의 상처 그 자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아는 그리움의 주인공 본인에게도 이것은 크나큰 절망과 시련이죠.

온같 별의 별짓 다시켜서 자존심 시험 해 놓고

이제 와서 나도 너를 사랑해?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준다 치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기억나는 자기 행동 때문에라도

상대를 온전히 믿기가 힘이 들 텐데요?

 

그러니까

힘이 없는 정의는 비참 어쩌고 헛소리 삑삑 하는 사람들에게

저도 자신 있게

그러니까 네가 그 모양 그 꼴로 살지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나에게 힘이 있거나 없거나 내가 그리고 상대가 어떠한 입장에 있거나

정의는 정의이고 진리는 진리입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논리란 정교하게 머리를 써서 만드는 그물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명제 앞에서 자기 양심에 거짓이 없는 것이 바로 논리인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궤변이구요.

 

나에게 힘이 없어도

나는 상대를 설득할 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으며 의사표현이란 눈만 깜빡일 수 있어도 가능한 것이거든요.

 

체념을 거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슬픔의 대장장이가 그리움의 주인공과 함께 찾아온 용사라고 하는 이름이 없는 가상의 캐릭터에게 굳이 절망의 창을 선물하게 되는 것도 절망 뒤에 승리라는 말 대신 굳이 행복이라는 표현을 써둔 것도

전부 호감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암시였고

승리보다는 배려와 호감을 보다 우선시하여 마지막의 순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그 순간을 찾아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기회의 여지를 반드시 남겨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한 설정이었고요.

또한 마녀와 그리움의 주인공을 동일인물로 설정한 것 역시이러한 과오에 대한 반성을 누군가 타인이 대신 해 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반드시 본인이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그 내면의 내적 갈등을 두 가지의 캐릭터로 표현하여 과거의 자신과의 영원한 이별과 과거의 자신이 바랐던 현실상에 존재할 수 없는 영우에 대한 갈망, 혹은 그 무엇인가를 전설과도 같은 동화 속 어딘가로 날려버리게 된다는 그런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호감을 포기하지 않는 일에 만약 실패하게 되더라도 다시 한 번 더 도전 할 수 있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운명이 마녀에게 간곡한 당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의 순간은, 구원의 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려, 미쳐 인식하기도 어려울 만큼 순간적으로 모든 상황이 지나가 버리고,

운명은 그 모든 순간에서 진정한 행복과 구원을 찾아서 우리에게 끝도 없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운명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요.

배척과 배척이 충돌하는 순간에, 기적만큼 재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단 1초의 순간을 찾아서, 그 순간을 위하여 영원히

 

이영도씨의 작품과 저의 작품이 다른점은 (보다 정확히 하자면 다른 점 중의 하나는)

눈물을 마시는 새는 눈물을 마셔야만 하는 것으로, 즉 고통의 극복을 위하여 반드시 해결해야할 어떠한 문제로써 인식하고 모든 작품의 구성 논리가 전개되는데,

이는 결국 고통을 배척하는 것이며 그 정의되는 눈물의 의미가 자아가 또는 사회나 집단이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 고통을 당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정의 내려지게 되며 결국 슬픔을 극복해야만 하는 어떠한 문제로써 인식하는 의미가 됩니다.

 

케이건 드라카의 대사를 굳이 빌리자면 - ‘눈물을 마시는 새의 주인공 -

 

(사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도깨비라는 종족, 피에 무한한 공포심을 느끼며 울기도 잘 우는,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장난꾸러기로 묘사되며, 자신이 죽을 지언 정 절대로 스스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극단적인 비폭력주의자로 묘사됩니다.)

 

도깨비들은 단지 함께 울어주기만 할 뿐, 눈물을 마시지는 않아,

왕은 눈물을 마셔야만 해

함께 눈물을 흘리면 눈물만 많아질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왕은 눈물을 마셔야만 해.”

 

이 부분이 정말이지 저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부분인데요.

앞선 개구리 왕눈이의 설정 이야기를 보셔도 알겠지만

주인공이 슬퍼서 울 때

옆에서 친구들이 같이 울어준다면

눈물은 많아질까요?

아니면 소멸될까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간의 슬픔이 완화되고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어떠한 집단의 지성의 발휘의 계기가 되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지혜가 빛을 발할 순간이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요?

 

왕은 눈물을 마셔야만 해

 

이 말은 세상에 눈물이 만연하면 그것이 곧 세상 전부에 독이 되니 왕이 그 눈물을 마셔주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왕이라는 어떠한 특수한 존재 하나가??(혼자서 무얼 어떻게 ... 타인의 동감이나 호감에 기대지 않으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못하는데, 심지어 본인의 작품 내용 중에도 왕 그 자신보다는 그를 왕으로 떠받들어주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본인이 직접 써놓고?) 그 모든 눈물을 마셔야만 눈물이 해소가 된다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도 되어야 하나요?) 내용이 되고

이것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전체 내용의 가장 중요한 주요 내용의 골자가 됩니다.

사실 이러한 케이건 드라카의 자기 혼자만의 주장은 추후에 사모 페이와 륜 페이에 의하여 저지당하는 내용도 작품 내용 중에 들어있지만 그 내용이 케이건 드라카의 내면에서 나가라는 종족에 대한 완전한 용서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심지어 작품은 계속해서 왕이라는 소재에 주목을 하고 있죠.

그것은 케이건 드라카로 부터 비롯된 비극을 끝내는 것 역시 케이건 드라카로 설정되어져 있는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아니죠.

나가와 케이건 드라카와의 원한 관계라는 것은 절대 케이건 드라카 혼자서는 끝낼 수 없고

나가라는 종족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인데

케이건 드라카는 이것을 얻지 못 한 상태로 모든 이야기가 종식되는 것이 눈물을 마시는 새의 결말입니다.

사모 페이와 륜 페이의 두 개인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여전히 나가라는 종족은 나가 살육자를 증오하고 있는 설정으로 마감되거든요.

또한 케이건 드라카 역시도 나가라는 종족을 완전히 용서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나가들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어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은 카시다의 거대한 바윗덩어리 카시다 암각문앞에서의 케이건 드라카의 행동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불 분명 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어느 정도 해답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이영도씨 본인 스스로 자기 자신의 해답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어려우셨던 것으로 추측 됩니다.

 

또한 대호왕이 된 사모 페이가 기적 같은 아이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체가 되었던 카린돌 마케로우의 태중에 있다가 출산된 그리미 마케로우를 데리고 거대한 나무처럼 변해버린 용() 아스화리탈과 사모 페이 대신 전장의 작살검을 맞고 쓰러져 작살검 그 자체와 함께 쇠와 육신으로 이루어진 나무로 변해 버린 용인(龍人) 륜 페이를 보기 위하여 폐허가 되어버린 하텐그라쥬로 향하였을 때

사모 페이와 그리미 마케로우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도그라쥬에서 보내온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케이건 드라카의 행동 역시

자기 자신의 왕이었고 또한 자신에게 호감을 보내주었던 사모 페이 개인에 대해서만이 그 애정이 표출되고 다른 나가들에게는 여전히 그 공격성을 유지하는 모습 등을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끌 것도 없이

이영도씨의 작품과 저의 작품의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결정지어집니다.

사모 페이는 케이건 드라카로 표현되는 광기어린 맹목적 분노가 정신 나간 행동임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의 사랑의 감정의 표출로 케이건 드라카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며 이는 륜 페이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실질적으로 륜 페이가 작살 검을 사모 페이 대신에 맞은 순간(역시 타이타닉의 인물구도죠) 륜 페이가 죽어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용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을 통하여 그 죽음을 뒤로 미루고 나무가 되어버리며 사모 페이의 순수한 사랑이 아닌 륜 페이의 어떠한 술책에 의해서 그의 내면에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는데 이 모든 이야기가

이러한 관계상에서의 갈등의 전환이 곧 구원임에 주목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종족의 완전성쪽으로 이야기가 번져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영도씨 본인이 작품상에 써둔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이는 이영도씨 본인 스스로도 본인의 해답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로 글을 진행하였다는 것에 대한 상황의 반증입니다.

즉 케이건 드라카의 내면의 변화와 여기에 기여한 사모 페이와 륜 페이의 행동들이 작품 전체의 해답으로 주목되는 사건들이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끝내는 과정상에 필요로 인하여 등장한 우연의 설정이며

어떤 철학적 주제의 완성이 아니라

갈등이 생기면 그것을 종식해야만 한다. 라는

스토리 구성기법상의 논리에 따라서 도출된 행동들임이 증명되는 내용입니다.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 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출처 : ‘눈물을 마시는 새양장본 제 416춤추는 자마지막 페이지 (214P.)

출판사 황금가지

4권 전체 분량 444P.

 

11 쇄 펴냄 2003118

111 쇄 펴냄 2005715

 

반어법에 의한 암시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냉소적인 문장이고

이러한 형태의 비꼬는 냉소적 문장 표현은 이영도씨 작품 전체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으로 그런 경우에 반어법의 암시의 용도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 문장구사를 하신적은 단 한 도 없으십니다.

결국 이영도씨는 명확하게 어떠한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절대 있을 수 없다. 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작품을 구상하였음을 이영도씨 본인 스스로 밝히는 내용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과는 그 입장이 완전히 정 반대에 있지요.

 

저의 입장은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불면하는 그야말로 태양과도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 라는 입장이거든요.

 

그 유일한 진리란 바로 사랑입니다.

(신과 우리들 자신 스스로의 모두가 자기 자신 스스로 진심으로 발휘하는 사랑 말입니다.)

 

슬픔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사막 안에서

눈물을 쓸모없는 돌멩이로 바꾸는 것은 단지 미움이라고 하는 차갑고 냉혹한 눈가리개 태양 뿐이며, 이 미움이라고 하는 거짓이 눈물을 배척하기 때문에 그토록 고귀한 눈물이라고 하는 보석이 한낱 쓸모없는 돌멩이로 바뀌는 것일 뿐,

본디 세상의 모든 눈물은 그 눈물이 만들어진 이해 당사자들 간의 운명에서

그 고통을 해소하고 구원에 이르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 이며

’ (슬픔의 대장장이) 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키 위하여

이 세상 모든 눈물들을 제련하리라 라는 설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작품이 정의하는 슬픔, 즉 눈물이라는 개념이 또한 원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와 다른데요.

 

저의 작품상에서 눈물이란 호감이 무언가로부터 배척을 받을 때로 정의되어집니다.

이를테면 적용되는 카테고리의 상, 하위 개념이 달라지는 이야기인데요.

보다 상위의 카테고리의 설정은 바로 저의 설정입니다.

또한 슬픔의 정의에 대한 카테고리의 개념에서 가장 최상위의

보다 더 높은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가장 최상위의 카테고리입니다.

 

사실상 다음 개념역시, ‘호감무언가에 의하여 배척당하는 개념의 하부 개념이죠.

어려움에 봉착을 하고 슬픔이 생기거나 또는 이겨내어도 눈물이 흐르는 개념은.

이영도씨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영도씨는 이 눈물이라는 주제와 개념을 끝까지 성찰하시지는 못하셨습니다. (깊이는 있습니다만)

가령 사모 페이가 두억시니들을 위하여 나무로 다리를 놓는 이야기를 살펴보죠.

사모 페이는 분명히 설정 상, 케이건 드라카의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캐릭터입니다.

 

빗줄기가 바위를 때리며 사방으로 암흑을 뿌렸다. 물론 사모 페이가 가진 나가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다.

물은 열을 삼킨다.(나가는 열을 볼 수 있습니다. 파충류거든요.) 비통하기까지 한 불투명을 바라보며 사모 페이는 한 숨을 내쉬었다.

마루나래의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고, 정신적으로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산비탈 아래쪽, 급류 저편에 있는 두억시니들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인간들의 도시들을 지나쳐왔구나.>(말로 이루어진 대사가 아닌 정신의 언어 곧 니름입니다.)

불신자들은(인간) 슈라도스라 부르지만 사모에겐 그저 인간들의 도시인 곳을 지나칠 무렵,

사모는 두억시니의 무리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억시니들은 자보로도, 슈라도스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경악한 인간들의 눈앞을 지나쳐왔을 뿐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하던 사모는 그냥 안도하기로 했다.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모는 인간과 두억시니를 놓고 볼 땐 인간에게로 감정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대 확장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나가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사모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모는 두억시니들에 대해서도 증오를 느낄 수 없었다.

<하늘 아래에 그 처참한 모습을 보여야 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더냐?>

두억시니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 때문에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튀어나온 바위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사모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든 두억시니들이 급류에 휩쓸려간 이후로 두억시니들은 물에 뛰어드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두억시니들은 강물을 갈라서 길을 내려 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노성을 토하며 두억시니들은 끊임없이 두 손으로,

혹 손이 없을 경우에는 입으로 물을 머금어 강물을 파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부피의 흙에 대해서라면 소용이 있었을 그 방법도 거세게 흐르는 급류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두억시니들은 아무리 파내어도 줄어들지 않는 강물에 난처해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두억시니는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수백의 두억시니가 강변에 몰려서서 강물을 퍼내고 있었고,

그보다 많은 두억시니들이 그들의 배후에서 의미를 빚지 못하는 단어들로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무익한 목적에 바쳐진 과도한 노고가 자아내는 것은 웃음이나 슬픔뿐이다.

사모의 경우에는 슬픔이었다.

사모는 쇼자인테쉬크톨에 묶여 있는 그들 남매의 운명도 저 두억시니들의 모습 앞에서는 비탄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쇼자인테쉬크톨이란 나가라는 종족의 사회에서 어떤 범죄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그 친족에게 범죄자의 살해와 그 목을 들고 오는 것을 일임하는 무거운 벌로 륜 페이는 나가 사회에서의 성인식인 심장 적출을 거부하고 나가의 사회 그가 살던 도시 하텐그라쥬를 도망쳐서 자신의 친구인 화리트 마케로우가 인간들의 어디에도 없는 신을 위한 사원인 하인샤 대사원에 전갈을 전하려던 임무를 대신 떠맡게 되고 이 과정에서 화리트 마케로우의 살해혐의를 누명쓰게 되는데 누명을 씌운 주체는 화리트 마케로우를 살해한 그의 누나 비아스 마케로우 이며 사모 페이는 비아스가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생이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채로 나가들이 살아가기에 지나치게 기온이 낮은 - 파충류는 변온 동물이죠 - 한계선 이남의 지역에서 동생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쇼자인테쉬크톨의 다른 부분, 즉 범죄자나 친족 둘 중의 하나만 죽어도 가문에 부과되는 피 값이 면해지는 점에서 착안하여 동생인 륜 페이를 위협하여 그의 손에 살해당한 뒤 륜 페이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들고 하텐그라쥬로 되돌아와 그가 이듬해에 무사히 심장을 적출 하고 나가 사회에 편입 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여기서 쉬크톨이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등장하는 모든 무기류들 가운데에서 레콘이라는 종족이 지구의 남쪽 끝 최후의 대장간에서 모든 이 보다 낮은 여신의 선물인 별철로 만들어지는 무기류를 제외하고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명검입니다. 친족의 피를 찾아내는 기능을 가진 검입니다.)

결국 사모는 모든 정신을 열어젖히며 닐렀다.

(나가는 니름이라고 하는 정신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종족입니다.)

<제발 그 짓 그만둬!>

그러나 두억시니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는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니름을 토해내던 그 유해의 뱀과 달리 두억시니들은 그녀의 니름을 듣지 못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쥐며 개념을 전달했다.

(마루나래는 그녀가 탑승하는 거대한 대호입니다. - 산마루의 흰 나래 山雲을 의미 하죠. 이것은 극중 주인공인 케이건 드라카의 풀이입니다.-)

마루나래가 포효했다.

거대한 야수의 호통에 산맥이 전율했다.

그리고 사모는 기대했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두억시니들은 강물을 퍼내는 동작을 중단한 채 건너편 산비탈을 올려다보았다.

사모는 목청껏 외쳤다.

그 짓을 멈춰라! 제발! 그쯤이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만하지 않느냐?”

쏟아지는 비 속에서 두억시니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모는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것을 들었다.

침묵한 채 바라보던 두억시니들이 갑자기 비명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크낙새 뿌리 무침? 파란 냄새 삼각형!”

팔짝 뛰는 토끼 색 칠한 재채기 세 쌍만 던져!”

그리고 두억시니들은 더욱 처절한 열정으로 강물을 퍼내었다.

사모는 결국 그 슬픈 모습에서 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사모는 오른손으로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쥔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출처 :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양장본 제 2길을 준비하는 자’ 39P.에서 42P. 첫머리까지

 

출판사 황금가지

2권 전체 분량 627P.

 

11 쇄 펴냄 2003118

111 쇄 펴냄 2005715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밤이 되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렸다.

바위 위에서, 마루나래는 사모 페이의 등에 몸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사모 페이는 모아 쥔 두 무릎을 가슴에 당겨 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지만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해 온 일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벌써 몇 십 명(사모는 주저하면서도 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다.)의 두억시니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고 그보다 많은 수가 범람하는 계곡물, 혹은 뒤에서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다른 두억시니에게 떠밀려 격류에 휩쓸려 내려갔다.

두억시니들이 퍼낸 강물 때문에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수렁처럼 바뀌어 있었다.

짆흙과 빗물 속에서 광기어린 헛수고가 영원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모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실,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했다.

사모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이었다.

그녀의 손으로 베푸는 죽음에 대한 결단.

사모는 결단을 내렸다. 사모는 일어났다.

흑사자 모피 속으로까지 파고든 빗물 때문에 그녀의 동작은 느렸지만 마루나래는 긴장하며 일어났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턱을 쓰다듬어준 다음 그 등에 올라탔다.

사모의 의지를 받은 마루나래는 가벼운 동작으로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번득이며 내려오는 대호를 보며 두억시니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뒤로 조금씩 물러난 두억시니들은 쏟아지는 비속에서 침묵한 채 마루나래와 사모를 바라보았다.

마루나래의 등에 앉은 사모는 격류 건너편,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두억시니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모는 다시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그 개념에 따라 마루나래는 강폭이 좁아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두억시니들의 눈, 혹은 다른 것들이 마루나래의 움직임을 쫒았다.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에는 강물 또한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었지만 사모에겐 큰 불편을 주지 않았다.(나가는 귀가 어두운 종족입니다.)

사모는 마루나래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두 손으로 쥔 채 높이 들어올렸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사모는 쉬크톨을 사정없이 옆으로 휘둘렀다.

거대한 나무에 쉬크톨이 박혔다.

사모는 힘겹게 쉬크톨을 뽑아 든 다음 다시 휘둘렀다.

물소리마저 잠재울 듯한 나무의 비명과 함께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가라는 종족은 다른 종족들과 다르게 어두운 귀로인하여 음악이 없고

열을 감지하는 경이로운 시각으로 인하여 뜨겁거나 차가운 물감이 없는 문제로 인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동물을 산채로 잡아먹는,

정확히 말하자면 산채로, 통째로 삼켜버리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고

산 것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은빛의 액체이고 그것은 은루(銀淚) 라고 지칭됩니다.

나무를 대단히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용인(龍人) 륜페이는 작살검에 맞은 채로 나무가 되며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용() 이란 씨앗의 형태로 땅속에 몇 백 년이고 숨어 있다가 주변에 적대적인 것이 사라지면 발아하여 용이 되고

성장 과정 중에 겪는 문제나 환경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든지 진화하여 그 형상이 달라지고

성체가 되면 주변에 포자를 뿌리는데

발아한 용의 뿌리를 용근 이라 하며

이 용근을 먹은 이들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용인(龍人)이 됩니다.

륜 페이는 누나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하던 중, 하인샤 대사원의 부탁을 받아 화리트 마케로우를 데려오려고 출발한 케이건 드라카와 도깨비 비형 스라블그리고 대적자인 레콘 티나한과 조우하기 전 나가들의 비약인 소드락이라는 약을 먹고 전속력으로 도주하다가 강가에 이르러 구토를 하게 되는데 이 소드락은 본래 식물의 성장을 촉진 시킬 목적으로 개발 된 약이었고 하필이면 그 약 성분에 영향을 받은 세상의 단 하나뿐인 용근이 발아하여 후에 용() ‘아스화리탈이 됩니다.

아스화리탈은 륜 페이와 함께 거대한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사모는 얼굴을 때리는 나뭇조각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쉬크톨을 휘두른 사모는 쉬크톨의 칼날이 단단히 박히자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돌멩이로 쉬크톨의 칼등을 내려쳤다.

나무와 쇠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사모는 계속해서 돌멩이를 휘둘렀다.

불꽃이 튀어오를 때마다 쉬크톨의 날이 나무 속살을 가르며 나무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녀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고인 은루(銀淚)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돌멩이를 휘두르는 사모의 손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쉬크톨이 나무의 중심부까지 파고들자 사모는 돌멩이를 팽개쳤다.

땅바닥을 구르는 돌멩이에는 사모의 살점이 묻어있었다.

(나가가 심장을 적출하는 이유는 불사의 획득을 위해서이며,

심장을 적출한 성인 나가 여성은 전사이고 그녀들은 목이 잘려도 시간과 영양분만 충분히 공급된다면 잘려나간 머리조차도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똑같이 느낍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가라는 종족은 대단히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종족으로 묘사 되는데 흔히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이, 라고 하면 이처럼 냉혹한 이들이거나 철혈의 이미지로 묘사되기 마련이고 이 또한 저의 작품상에서 표현되는 논리의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내용입니다.

특히 케이건 드라카를 논리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사모 페이를 보다 비논리적인 인물로 묘사 하는 등의 차이가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여실히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반드시 이미지의 차이에 국한되지 않고 작품의 구성과 해석 전반에 굉장히 큰 차이를 불러오게 됩니다. 후술하겠습니다.)

사모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쥔 채 사납게 외쳤다.

마루나래!”

어루루루룽!”

산맥을 진동시키는 포효와 함께 마루나래가 뒷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거대한 두 개의 앞발로 나무를 밀었다.

3(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바다코끼리의 체중이 1.2톤입니다.)이 넘는 마루나래의 체중으로 두어 번 밀어붙이는 것으로 충분 했다.

나무는 허리가 부러지며 쓰러졌다.

비탈을 따라 조금 구르던 나무는 곧 튀어나온 바위에 걸리며 고정되었다.

사모는 튕겨져 나간 쉬크톨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두억시니들은 아직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사모는 그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마루나래를 엎드리게 한 다음 사모는 그 등에 올라탔다.

가자!”

마루나래는 빗줄기를 꿰뚫으며 바람처럼 산비탈을 타고 올랐다.

마루나래가 산 정상 가까이 뛰어오를 무렵 저 아래쪽에서는 두억시니들이 외나무다리라는 개념을 힘겹게 시험하고 있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사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 속을 향해 그녀가 살해한 나무에 대한 사과의 니름을 닐렀다.

먼 곳의 산봉우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출처 :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양장본 제 2길을 준비하는 자’ 48P.에서 51P. 중간 까지

 

출판사 황금가지

2권 전체 분량 627P.

 

11 쇄 펴냄 2003118

111 쇄 펴냄 2005715

 

우연히도 사모 페이가 자신이 살해한 나무에 대한 사과의 니름을 토하는 장면이 말미에 표현 되지만

이는 작품 설정 상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나가라는 종족이 특별히 나무를 사랑하는 종족이라는 설정 상에서 기인한 행동일 뿐 이것이 작품의 주제의식으로까지 연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대호왕으로써의 사모 페이는 자신의 종족인 나가에 의하여 자신의 아내를 살해당하였던 케이건 드라카에게 나가라는 종족을 대신하여 사과하는 내용이 작품에 포함되어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케이건 드라카는 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야기로 끝이나버리며

용인 륜 페이가 나가를 증오하는 동료 장수가 휘두른 작살검을 사모 페이 대신 맞고 쓰러진 뒤에 용인으로써의 능력의 개화를 통하여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의 모든 사건들을 관조한 뒤 케이건 드라카 즉,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라고 하는 특수한 조건하에 있던 케이건 드라카에게 엉뚱하게도 나가라는 종족 전체의 사과가 아닌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은 인간, 나가, 도깨비, 레콘의 4 종족의 모든 남성의 눈에 공통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는 신비의 미녀?’ ‘나늬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케이건 드라카의 내면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

갈등의 종식이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케이건 드라카의 원래 부인이 될 수가 전혀 없는

현 시대나늬라고 하는

다른 여자로 스토리가 마무리 되게 되는데요.................

(물론 케이건 드라카는 끝내 결국 현 시대의 새로운 나늬를 안지도 않거니와

수 백 년을 살아오시는 동안 이미 다른 여성분들과 정분도 많이 나셨던 캐릭터인지라 ...

이게 작품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맞기는 한 것인지

도리어 사랑이라고 하는 행위에 대한 냉소적인 농담이 섞여있다고 보아야 할 수준의 결말인지라...

과거 케이건 드라카가 고대 아라짓 왕가의 혈통으로써 나가를 사랑하였다가 나가로부터 배신당하여 자신의 아내를 잃어버린 아픔을 결국 하텐그라쥬를 파괴하여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인지

사모페이가 진심어린 사과를 하여서 그 고통이 완화된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로써 자신이 인간들에게 본래 주었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신으로써의 임무를 깨달음으로써 내면에 변화가 온 것인지

 

도저히 케이건 드라카가 사과를 받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회복했다 라고는 전혀 생각 할 수가 없는 결말이고

심지어 그가 나가 살육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그의 손에 목이 잘린 나가여인 세페린의 오라비였던 나가 사회의 사제 즉 수호자갈로텍과의 대면 상황에서도 의미심장한 대사를 이야기 합니다.

 

나에겐 물이 필요해, 물이 가장 날카롭거든,

그 물에 독()을 풀어 세상을 중독 시켜야 해

 

라는 대사는 그것이 설혹 사랑을 지칭하는 대사라고 백번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냉소적인 비아냥거림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나가들의 여신인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이 물의 힘이라는 설정을 고려하면

케이건 드라카는 신으로써의 자신의 임무를 깨닫고 4 종족 전체의 완전성의 획득을 위하여

순수하게 어떠한 임무로써의 필요성에 의해 나가라고 하는 을 용인하기로 결정하였고

갇혀있던, 자신의 신랑인 나가 사회의 수호자들에 의해 신체의 상태로 냉동고에 감금되어 있던, 즉 카린돌 마케로우의 몸 안에 갇혀 꽁꽁 얼어붙어 있던 물의 여신 발자국 없는 여신이 지금 필요해 졌다. 라는 의미로 해석됨이 마땅하고

이러한 물의 여신에게 독을 풀어 세상을 중독 시켜야 한다는 대사는

자신은 여전히 나가들을 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용서와 화해를 통한 갈등의 해소가 절대 아닌)

나가들의 여신인 발자국 없는 여신이라는 물에게

그녀의 자손들인 나가라고 하는 ()’을 풀어서 세상에 내어놓아야만 한다는 의미의 대사가 됩니다.

앞선 나늬 라는 신비한 미녀의 설정을 상정 해 보면

이것이 4 종족 전체가 동시에 사랑을 깨닫기를 바란다는 설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만

(하필이면 미녀가 인간에게 내려준 신의 선물인 이유를 다른 것으로 상정 할 수는 없겠죠.)

그것을 정말로 구원이라고 이영도씨 본인 스스로 생각한다고 보기에는 앞서 설명드린 미심쩍은 설정들이 한두 개가 아니고

처음부터 작품의 내용상 케이건 드라카의 내면 심리의 변화의 요인이

어떤 감정적인 요인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4 종족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그 목적이 됩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나가라는 종족은 여전히 케이건 드라카 혹은 나가 살육자에게 끝도 없이 증오를 불태우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게 됩니다.

 

한마디로 ...

고통을 가한 이가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통한 갈등의 종식이 곧 세상의 구원이라고 하는 저의 작품과는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는 것이며

 

심지어 상기 두 개의 인용문에서 보여 지다시피

케이건 드라카와는 그 작품상에서의 역할과 사고관이 줄곧 반대의 입장이었던 사모 페이 조차도

눈물 혹은 슬픔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일의 해결을 위해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장애물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사모 페이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나무를 베어내어 문제를 해결 하였다 라는 스토리의 구조 자체가

케이건 드라카의 대사

왕은 눈물을 마셔야만 해

그 논리구조가 완전히 동일 한 것으로

슬픔에 대한 이해와 관조로써 서로가 마음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두억시니들의 바보 같은 헛수고를 종식 시킬 목적으로

자신의 슬픔을 억눌러 이겨내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대상인 나무를 죽여서라도

그러한 대속을 통하여 두억시니들을 구원한다 라는 스토리는

어딘가 그 전개가 어색하죠.

그 순간에 사모 페이가 진심으로

자기 자신 스스로가 사랑하는 대상이

나무냐 아니면 두억시니냐 에 대한 고민이

정말로 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 저울질을 피할 수가 없는 고민이 생략되어지고

엉뚱하게 인간과 두억시니 사이에서의 저울질이 사모 페이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모습은

이 두 개의 인용문에서 보여지는 사모 페이의 태도가

당연히 나무 보다는 두억시니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고민 할 가치도 없는 일이고

사모 페이가 정말로 나무에게 가진 감정은

언제든지 필요하면 도구처럼 쓰고 난 뒤 미안해한마디면 충분한 그런 수준의 감정이었음이 분명한 것이며

물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이영도씨 스스로 작품을 씀에 있어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로 설정되어져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은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먹어야만 생존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신이 우리를 창조 하였다.

라는 화두에 대해서

이영도씨 본인 스스로 그 화두에 대한 해답을

어떤 진실한 사랑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써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4 종족 전체의 동시 완전성 획득 이라고 하는

현실상에 있을 수가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일에 의해서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도 절대로 용납 할 수가 없는

완전무결한 공존을 추구하고 있음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누나의 계략에 휘말려 자신의 사이커(‘나가의 전통적인 일반 도검) 로 사모 페이를 찔러버린 륜 페이가,

자신을 하인샤 대사원으로 데려온 하인샤 대사원의 사제들과 케이건 드라카를 향하여

사모 페이를 살려내어 함께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십시오!”

라고 외치는 그 절규가

이영도씨 내면의 진실한 바람이었던 것이죠.

 

왜 성경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소재죠

사자와 토끼가 서로 평화로이 풀을 뜯는 낙원 같은 것

 

반면에 저의 작품에서 눈물이라는 것은

모든 단절을 해결 해 낼 실마리입니다.

 

앞서 개구리왕눈이 설정에서 잠시 언급 했지만

누가 슬퍼서 울고 있을 때

 

눈물은 나약한 것이야! 극복해야해!”

 

라고 다그쳐버리면

눈물이야 사라질 수도 있기는 한데

대신 짜증이 솟구치고 분노가 그 자리를 잠식하겠죠.

그러나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때

진심으로 옆에서 다른 누군가가 함께 울어준다면

슬픔과 눈물은 희석되고

감정이 해소되고 완화되는 심리작용에 의해서

보다 맑은 정신으로 사건을 관조하고 이해하게 되며

집단의 지성 또는 개인의 지성과 지혜의 발휘를 통한,

사건 해결의 가능성이 보다 더 높아집니다.

 

이게 논리죠

철혈도 냉혈도 아닌

옳고 그름의 명제 앞에서 추호도 자신의 양심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이걸 하려면 사람이

자기 대답 뒤에 발생할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건한 의지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 옵션으로 장착 되어져 있어야 가능한 겁니다.

 

따라서 슬픔이란 것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이 분명히 대인관계의 어떤 부분이나,

일이 진행되는 과정상에서 대화 혹은 소통 또는 자연적 불가항력적 요인 그 무언가로 인하여

일의 해결이라는 긍정적인 호감의 한 종류가 결국 단절된 데에 대한 그 슬픔을

누구나가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울어도 되는 겁니다.

그런다고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도깨비처럼

모드가 다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사회구성원간에 진심어린 교감과 관계의 회복이 가능해지고

결국 일의 해법으로 보다 쉽고 빠른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여 눈물이 세상에 독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 배척과 단절이 많아 어려움도 덩달아 커졌기 때문에 눈물이 많아지는 것이고

이 슬픔을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진심으로 공감하며 있는 그대로 용인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호흡하며 울고 웃을 때,

자신과 타인의 눈물을 차별도 구별도 없이 사랑하고 이해할 때

진심어린 용서의 마음도 발휘가 가능하고

감정의 무게가 완화되어 서로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혜를 발휘하기가 훨씬 더 용이해지며 그를 통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현실적인 해결방안이라는 얼구로써 우리에게 다가 올 기회가 생긴다는 그런 뜻의 작품이었던 겁니다.

저의 작품이란

 

결국 진정한 논리란 냉혹함도 아니고 냉철함도 아니고 철혈은 더더욱 아니며

그런 건 그냥 성격이 독하고 못돼먹은 것일 뿐입니다.

 

논리란 다시 말하지만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 앞에서 추호도 자신의 양심 앞에 거짓이 없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어도 인내하며 그 노화를 삭힐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인내심의 발휘는 상대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 아니라면 절대로 발휘가 되지를 않습니다.

또한 나의 답이 불러올 파장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 또한 필요하며

서로 예의를 지키며 존중하고 배려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사랑과 관용이 필요하고

양심의 잣대에 끊임없이 유혹하는 유혹에 흔들리거나 상황의 유, 불리에 따라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의지력이라는 것 역시도

그냥 정신력만 짱짱 강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 자기 자신 만이 아닌

이외의 또 다른 를 나와 똑같은 동일선상에서 그 가치를 존중 해 줄 수 있는 진심어린 사랑이 있을 때에나 실행이 가능한 일로써

결국 이타심이라고 하는 사랑의 감정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역시나 실행이 불가능한 이야기인 겁니다.

 

좋은 머리를 잘 굴려서 정교한 그물을 치는 문제는

논리의 영역에서 앞서 설명한 모든 가치들에 비하여 상당히 부차적인 문제인 겁니다.

물론 사람은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 같은 것은 없으므로 좋은 머리 역시 지혜를 창출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해당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정교한 그물이 그 그물 자체가 아무리 정교하다고 할지라도

진짜 필요충분조건인 양심에 옳고 그름에 대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진실함이 충족 되지 않는 모든 논리는 그냥 논리가 아니라 궤변입니다.

그런 것은 상황의 유, 불리에 따라서 거짓을 말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하나의 트릭일 뿐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인내와 용기(분노?)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기 위한 즉 끝없이 체념을 거절하기 위한 열정?

사랑과 믿음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향한 꺼지지 않은 불꽃같은 소망 혹은 염원

이 모든 것들이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주인공인 슬픔의 대장장이가 미움으로 얼어붙은 돌멩이가 되어버린 눈물을 물리적으로 제련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설정은

절대 우연이 아닌 의도적 설정들입니다.

분노의 망치, 인내의 모루, 소망의 불꽃, 열정의 풀무, 소망의 눈물로 만들어진 화덕 등 말입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을

저는 분명하게 감정이러고 명시까지 해 두었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논리라고 하는 무기

절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염려가 없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지칭되는

냉철한 이성으로 표현되는 논리라고 하는 하나의 섭리를 바라보는 관점

저와는 완전히 180도 정 반대방향의 관점인 것입니다.

 

일단 중간 포스팅 한 번 더 하고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아직 멀었네. ㅠ ㅠ

 

결국 저의 작품상에서 모든 눈물은

그 눈물을 흘린 자나 다루는 자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그것이 어떠한 상황 하에서 발생한 눈물이라고 해도

바로 그 눈물 자체가 세상을 구원할 실마리인 것으로

저의 작품상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단절 그 자체를 슬픔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공감을 할 때에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교감하고 공감을 할 때 서로에 대한 이해의 기회가 생성되고

이해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구원으로 이를 실마리는 영원히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가 않는 문제입니다.

관계란 어떠한 경우에도 상호보완적이고

일방적인 단절 상황 하에서는 절대로 갈등이 종식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진심을 열어 보이는 자 혼자만의 감정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고

그 진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 역시도 그 진심에 호응을 해 주어야만 하는 문제이고

폭력적인 억압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마음을 열지 않겠다.

라고 자기의 입장을 고수 하는 그 순간 그는 인생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상급자 혹은 국가 통수권자 혹은 그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를 짓밟는 문제에 대하여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상기의 김연아 양이 일본 언론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상기하여 보시기를

그게 당신의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문제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어린애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절대로 구원을 얻지 못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얼마나 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연예기획사의 문을 두드렸다가

더러운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억울한 여성들이 악성 채무에 시달리다

사채 끌어 쓰다 유흥가로 진출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 단지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 뿐이라고?

 

단지 내가 폭력을 써서 잠시 유리하니까 나는 그렇게 살아갈 거야

라는 존재가 지금 그거 하나뿐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되는 문제인데

상위 0.001% 만이 행복하고

99.99%가 불행한 세상에 동의 해놓고

다음 세상에

혹은 현 생이라고 해도

당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을 때

그게 아무리 커도 아니면 조그마해도

불평불만은 말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이의 작은 눈물 하나가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 마음껏 짓밟은 대가로

당신들이 누려야 할 삶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게 좋으면 그렇게 살아가세요.

나도 거기 편승 좀 하게

어차피 나 혼자서 무슨 짓을 해도

나 역시도 혼자서는 절대로 이 세상을 바꿀 수가 없는 문제인 것이니까

 

이를 테면 위의 남자 어머니의 심장을 요구한 여자의 이야기를

좀 더 순화시켜서 현실에 맞게 각색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거죠.

 

내가 그냥 턱걸이를 20개 정도 겨우 할 때쯤

그녀가 요구 했다.

 

야 그냥은 재미없어서 싫고

30kg 바벨을 등에 매고

똑같이 20회를 해봐

그걸 하면 너랑 사귀어 줄게

 

문제는

그때 당시에 난 그걸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야 난

지금 당장은 그걸 못해

그걸 하려면 시간을 들여서 훈련을 해야 하고

그 훈련이란 건 결국 비용이 발생하는 스포츠고

그러려면 난 알바도 하나 더 뛰어야만 해

내가 계획을 일단 세웠고

실행 중이거든?

조금만 기다려 줄래?”

 

그러자 옆에 다른 놈 하나가 와서

그놈이 정말로 턱걸이 20회를 할 수 있는 놈이었건 아니었건

그걸 떠나서

단지 어떤 입장과 역할의 관점에서

 

그 조건을 수행하기가 단지 나보다

조금 더 유리할 뿐인 누군가가

그녀 앞에서 그 조건을 수행해 버렸다.

 

참고로 나는 작가이고

육체적 힘을 쓰는 일은

물론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차피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무리해서 수행하다가 다치기 보다는

합리적인 계획을 제시 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남자를 따라갔다.

그 남자가

과연 나처럼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는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경제적 능력은 어떤지

대인관계는 어떤지

그런 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녀가 그를 사랑해서 선택한 것인지

턱걸이 20개 때문에 선택한 것인지

 

솔직히 그것도 모르겠다.

 

다칠까봐 무서워서 턱걸이 20개를 실행하는 대신에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 하는 것이

 

나약한 일인가?

 

그걸 하다가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문제라면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겠지만

 

다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그 부상의 크기에 따라서

나의 남은 인생이 짊어져야 할

리스크의 크기가 달라지는 문제이고

무얼 어떻게 따져 봐도

내가 지금보다 조건이 더 나빠질 경우

그녀가 내 연인이 되었을 때 짊어질 리스크 역시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문제다.

 

약속의 신뢰성을 떠나서

실행에 옮길 가치를

굳이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일까?

 

한번 만 하면 된다?

그건 도박사들이 호구 등쳐먹을 때 쓰는 말 일 뿐

행위 자체는 단 한 번의 행동이지만

못 하는 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시행착오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합리적 계획의 수립과 동의어 이고

그걸 동반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은

결국 인생을 망친다.

 

사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노력을 해봐도

남 좋아하는 여자를 중간에서 가로채겠다고 덤비는 친구가

 

다른 조건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심성은 올바른 친구는 아닌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뭐 나쁜 남자라고 나름의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런 남자 선택해 놓고

 

제발 나중 가서 배신당했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은 금물이다.

 

뭐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죠.

꼭 남자여자 문제가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문제로 확대해서 적용을 해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고민을 하는 문제로

모든 설정을 바꾸어 치환해놓고 생각을 해 봐도

바로 현실에 적용을 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는 그런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즉 심성의 문제가

현실을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아니

절대의 모든 인간들의 인생에서

단지 뜬 구름 잡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인생이 행복해지느냐

아니면 불행해지느냐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는 것이죠.

이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결정하는 문제에요.

 

이와 같은 의사결정의 흐름을

어떤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사결정들이 반복되는 모습들을

저는 저의 작품 속에서

 

노래하는 고속도로

라는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노래하는 고속도로(The 'Highway of singing')

슬픔의 바위 사막 외전 제 1(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1)

 

그러니까 내가 OO 테크 라고 하는

하수처리시설 기계의 제작, 판매, 정비를 업으로 삼는 기업에 취직해서

전국팔도를 출장이랍시고 누비고 다니며 자동차 여행을 즐기던 시점이었다.

 

서울 외곽 순환고속도로를 따라서

판교 방면으로 시흥 톨게이트를 지나 고개를 하나 넘어

별 생각 없이 길 위를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노래하는 고속도로라는 팻말이 보이고

4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면 노래 소리가 들린다.

 

멜로디는 이렇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이것은 괴담이 아니다.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파서

타이어 스스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거친 콘크리트 노면에 파여 있는 홈에 의해서

말랑말랑한 고무타이어가 제 스스로 소리를 내고

도로가 설정한 멜로디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었지만

나는 유달리 그 멜로디가 서글펐다.

 

어린 시절 즐겨듣던 동요처럼

소년의 마음은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깊은 연심을 품은 소녀가

소년에게 순결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조금이라도 순수할 때

조금이라도 어릴 때

때 묻지 않은 젊음 이라는 것을

소녀에게 넌지시 건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이 엷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짧은 촛대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붉은 장미꽃잎처럼 여린 젊음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어린아이의 동요처럼 순수한 시절에

그대로 몸과 마음의 시간을 매어 둘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으련만

거친 콘크리트 노면에 파여진 무수한 홈과 같은 인생길에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처럼 시간은 무섭게 달려간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았던

완벽하게 무의미 했을 것이라 여겼던 지난 날 모두가

제각각 내가 지나온 과거라고 하는 고속도로에

저마다의 간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홈으로 파여져 남겨져 있다가

거친 노면을 따라 무심코 그 길을 다시 거세게 달려가는, 그때 그 순간

검은 고무 타이어가 연주하는 멜로디로부터 불러일으켜진 마음의 풍랑과 함께

휘날리는 먼지가 되어 눈앞에서 격렬하게 휘몰아치며 물결치고

거센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 바위에 부서지듯이

미지의 운명들이 또한 시야 한 가득,

고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유리창 밖 풍경들과 함께

무모하게 달려와 덧없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끝없이 뒤로, 뒤로 밀려간다.

 

오수와 오물들과 동물의 사체 조각과 부위를 알 수 없는 지방 덩어리들,

내장 부스러기들이 검게 썩어 형언 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그 동물성 침출수에 잠겨있던 슬러지 압착 설비를 정비할 때는

갠지스 강에 몸과 마음을 정화 하는 힌두교 신자가 된 것 같았다.

더럽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어쩌면 지독한 질병에 걸릴 지도 모르는 그 끔찍한 죽음의 물에

겁도 없이 몸을 담그고 기계를 정비했었다.

그 기계는 지방 어딘가의 OO 닭 공장과 도축장에서 흘러나오는

몇 종류의 동물의 사체와 연관된 폐수에서,

최종적으로 걸러지는 슬러지를 처리하는 설비였다.

마치 나 스스로가 이 사회의 최극단, 모든 죽음과 더러운 것들의 끝에서

먹어대고 마셔대는 현상의 이면, 죽음으로부터 유리된 사회의 그림자

모든 끔찍한 오염들의 종말처리장치가 된 것 같은 기괴한 나날들이었다.

단지 나는, 거친 홈을 밟고 달리는 타이어가 노래를 부르듯

나의 마음이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 음침한 노래하는 고속도로를 셀 수 없이 내달리며

거리낌 없이 이 지방 저 지방에 동가식서가숙하며,

이 나라 전체에 산재해 있는 그 모든 종말처리설비들과

마치 동요를 부르는 어린아이가 서로 인사를 나누듯이

서슴없이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안부를 나누곤 하였다.

오염에 찌든 수많은 기계들을 가슴을 열어 정비할 때마다

이루 헤아릴 길 없는 다종다양한 오염원들과 거리낌 없이 부대낄 때마다

나의 허영으로 가득한 마음을 씻어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비행기라는 동요가 서글픈 멜로디처럼 느껴지게 된 지금

나의 젊음은 이제 정말 이삼년도 채 남지 않았고

그 뜨거운 젊음을 건네어줄 소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만약 그 오염된 침출수들을 나의 가슴으로 뜨겁게 덥힐 수 있다면

화산 암반사이의 온천수가 끓어오르는 증기의 압력과 함께

용암처럼 가열된 간헐천을 하늘높이 솟구쳐 오르게 하듯이

오염과 함께 침체 되어 가라앉아 있던 모든 아픔들이,

소년과 소녀의 간절했던 염원들이,

타오르는 젊음과 함께 맹렬히 분출되어, 동요속의 비행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될 그 순간을 말없이 인내하고 기다려 왔지만

버드나무가지가 바람결을 향해 손을 흔들듯이

끝없이 소녀를 향해 손짓 해 왔지만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 옛날 소녀의 꿈꾸는 눈동자 어디쯤인가부터 출발하여

마주 달려가던 소년의 혈관이 돋아난 종아리 까지 이를 만큼

아득히 멀고 먼 길, 노래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더 이상 갈 길을 잃어버린 소년의 젊음은

그 날 노래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앞 유리창 가득히 밀려들던

광기어린 속도로 차량의 앞을 향해 마주 달려오던 풍경들과 함께,

회한의 시간 너머로 바람과 함께 흩어져갔다.

 

도대체 운명이 나를 위하여, 나의 인생의 후반부를 위하여

어떠한 원대한 계획을 세워두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나의 시간은 불가해(不可解)의 고속도로를 지나

노년(老年)이라는 갈래 길, 고즈넉한 지방 국도 어디쯤인가로

서서히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슬픈 동요와 같은 시점이다.

 

*노래하는 고속도로 원리(관심 있는 분만 읽으세요)

원리는 콘크리트 포장 그루빙, 즉 노면에 파인 홈을 차량이 통과할 때

바퀴와 홈과의 마찰음이 발생하는 것을, 홈의 간격과 길이를 적당히 조정, 노면소음을

규칙적인 음계로 변환하여 멜로디 화함으로써 과속 또는 졸음방지 등 주의력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홈(그루브) 를 배치할 때

그 홈을 밟고 지나가는 타이어는 그루브의 간격만큼의 주파수를 가지는 음향을 발생시킵니다.

 

가령 도, , , , , , , 도 의 음의 경우 440hz 의 고유 주파수를 가지게 되는데

이 고유 주파수를 발휘 할 수 있도록 그루브의 간격을 조절하면

일정한 속도로 자동차가 그 위를 주행할 때 저절로 그 음계의 음향을 발생시키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루빙 산출 간격

그루빙 간격 [m]= 차량속도 [m/s] ÷ 진동수

단위에 주의 하세요 Km/h 가 아닌 m m/s의 단위 입니다.

: 100km/h에서 라 음을 내려면

27.78m/s(단위 변환) ÷ 440 = 0.063m = 6.3cm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음계를 설정하고

음계의 단위가 되는 그루브 집단의 길이를 조절하여 해당 음계의 길이(박자)를 조절합니다.

즉 원하는 시간만큼 원하는 음계에 해당하는 그루브를 배치하고

또 다음 그루브 부터는 다른 음계의 다른 길이의 그루브 집단을 배치하는 방식인겁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음계와 박자로 일정한 리듬과 선율을 가지는 음악을 발생시키는 원리이지요.

이러한 노래하는 고속도로는 자동차가 어느 정도 속도로 달려 주어야 정확한 박자의 음악이 발휘되고 또 정확한 음계가 표현됩니다.

그루브의 간격이 정확한 주파수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속도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귀라는 것은 오묘한 구석이 있어서

일정한 규칙성과 선율에 따른 음향이 발생할 경우 그것이 꼭 정확한 주파수를 가지지 않더라도

저절로 일정한 음계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오차범위 내의 속도차이에서는

그냥 박자가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정도의 차이밖에 느끼지 못한답니다.

하지만 자동차가 일정한 속도로 주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나 한적한 지방 국도 외에는 건설이 불가능하고

도로 포장이 콘크리트로 되어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현재 이 노래하는 고속도로의 기술 특허는 일본이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도로가 건설된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005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았던

완벽하게 무의미 했을 것이라 여겼던 지난 날 모두가

제각각 내가 지나온 과거라고 하는 고속도로에

저마다의 간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홈으로 파여져 남겨져 있다가

 

바로 이 이 지칭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저의 작품상에서 표현되기로는

앞서 설명 드린 여러 이야기들 중

바로 배척과 배척이 격돌하는 바로 그 순간의 모든 의사결정의 순간을 지칭합니다.

또한 그 의사 결정들로 인하여 발생하게 되는 모든 행복과 눈물, 그리고 고통과 구원 전체를 암시합니다.

 

이 작품의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이동욱(저승사자)씨가 일순간에 어떤 특수한 상황을 통하여 모든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모든 죄악들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진짜 화가 날 정도의 이미지 카피이죠.

 

어떤 후회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끔찍한 고통을 겪는 자아라는 이미지를

그것이 하필이면 지난날 모두가 한꺼번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고통 받는 이미지로

또한 그 모든 것이 스스로의 과오에서 비롯된 이미지로

어떤 한 두 개의 사건들이 아닌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 전체가 일순간에 한꺼번에 떠올라서

그것이 죽기 직전이나 어떤 사건이 끝난 뒤의 후회가 아닌

즉 스토리가 종결된 이후의 후회로써의 장면조차도 아닌

정확하게 스토리의 중간에서 이러한 후회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

라는 명확하게 바로 그 암시를 던질 목적으로

다 떠나서 누가보아도 그 이미지 자체가 너무나 비슷하기 짝이 없게 카피한 것이고

앞서 지적했던 다른 표절범위들과 조합하면 표절 범위가 한층 더 넓어지는 일입니다.

 

각설하고 작품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노래하는 고속도로라는 작품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들은

결국 위에 예를 든 턱걸이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대단히 편리한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를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며

단지 매력만을 쫒아서 즉흥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무책임한 사고활동과 의사결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들이고

이 모든 문젯거리 들은 결국 지속적으로 세상에 피드백을 던지게 되며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 생활과 운명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고

단지 지금 현재의 하나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며

그것은 의 죽음 이후에 새롭게 태어날 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흔히들 이런 말들 많이들 하죠?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세상에 태어난 거냐.”

이생망, 다생기.”

이번 생은 망했고 다음 생을 기다리자.”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들 즉

들이 만들어온 세상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위의 세문장이 변할 일은 없어 보여요.

 

그 어떤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를

현실의 명제로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진실을

모두가 다 이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었거든요.

 

만약 그것을 정말로 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결국 진짜 구원이라는 것을

속에서만 느낄 수가 있게 될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았던

완벽하게 무의미 했을 것이라 여겼던 지난 날 모두가

제각각 내가 지나온 과거라고 하는 고속도로에

저마다의 간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홈으로 파여져 남겨져 있다가

거친 노면을 따라 무심코 그 길을 다시 거세게 달려가는, 그때 그 순간

검은 고무 타이어가 연주하는 멜로디로부터 불러일으켜진 마음의 풍랑과 함께

휘날리는 먼지가 되어 눈앞에서 격렬하게 휘몰아치며 물결치고

거센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 바위에 부서지듯이

미지의 운명들이 또한 시야 한 가득,

고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유리창 밖 풍경들과 함께

무모하게 달려와 덧없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끝없이 뒤로, 뒤로 밀려간다.’

 

마치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던 어떤 의사결정의 뒤로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온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어떠한 결과들이

새로운 나쁜 일들에 대한 원인이 되어서

언제나 좋지 않은 일들만이 계속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단지 발생하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이 모두 당신들 자신들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사실상 이야기의 상황뿐만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 역시도 마찬가지로

무슨 상황을 어떻게 바꾼들

단지 그 사람이 추진하는 일의 수준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법이고

올바른 일을 추진하느냐

나쁜 일을 추진하느냐

그 차이일 뿐

무엇을 추진하고

또 이루려 하려고 하느냐

그 차이일 뿐

그 어떤 것도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 쓸데없는 생트집만 잡으면서

심지어 이루어진 현실조차 부정하는

NHK 방송 같은 걸 신봉하겠다면

뭐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현실은 행동하는 자가 만드는 것이니까요.

다만

그런 세상을 원해놓고

또 그에 동조하는 행동들로 또 다른 나쁜 일들의

새로운 원인까지 만들어놓고서

어디 가서 억울하다는 하소연 따위는

절대로 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이번 한 번의 생에도

그 나쁜 일들이 그것을 저지른 당사자 본인들에게

정확하게 귀속 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예언하는데

생은 절대 하나로 끝나지 않는

영원불멸의 게임이니까요.

 

이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을 구성하는 데 무려 11의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인생을 통하여 진심으로 울고 웃으며 제발 나에게 해답을 알려달라고 매일 밤을 신과 운명을 향하여 울부짖었죠,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어서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상, , 하편

사랑의 본질을 논하며

4개의 작품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중편

운명의 대사 한 장면으로 압축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질문으로 압축하는 것에도 성공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부다!

바로 그것만이 내가 너희들에게 영겁의 세월동안 던지는 질문!

 

좋으냐?

싫으냐?

얼마나 좋으냐?

무엇보다도 좋으냐?

언제까지 좋으냐?

어떻게 해도 좋으냐?

끝끝내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희망을?)

(작중에 표현은 되지 않지만...)

(문맥상 누가보아도 이 말이 들어가는 것이 정답인...)

 

너희들이 살면서 쟁취하고 상실하는 그 모든 것들에게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 1초의 순간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

 

마녀야

네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쟁취하던

혹은 실패하던

비겁한 선택이던 어리석은 선택이던

모두 다 긍정된 사건들

긍정된 우연가운데 하나일 뿐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가 1부터 6까지 어떤 숫자를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하늘로 던져진 그 순간에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일 뿐

너 자신에게 패배자라는 꼬리표를 내걸고 실망할 이유 따윈 없다

괜찮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절대 현재의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라!

(희망을 버리지 말아라.)

내일의 일은 내일 걱정해라!

(네가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고서도 실패하였다면 다시 한 번 더 계획을 세워서 다시 도전하면 그 뿐 세상은 ’-혹은 문맥상 너-로부터 어디로도 도망가지도 않고 도망 갈 수도 없는 독안의 쥐 일 뿐이다. 단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뿐인 이야기에 아무것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그런 문제다.)

 

마녀야

내 질문은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네 삶이 끝나고 난 후

또 다른 객체가 자신을 라고 인식할 때

영겁의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라는 존재의 인식

이 우주에 라는 객체가 존재하는 한

내 질문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자아와 자아의 배척과 경쟁이 절대로 멈출 수가 없는 문제이므로)

 

그러니 마녀야

네가 다른 에게

무슨 행동을 하던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이다.

부디 지금의 네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다오 아이야

(배척과 배척이 충돌하는 그 순간에 제발 용서와 사랑의 여지와 시간을 찾아내어 주어라)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중간발표 한 번 더 하고

오늘 중으로 이어서 포스팅 한 번 더 하고

나머지는 내일 천천히 ...

 

사실 제가 글을 써 온 시간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1학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라

1996부터 저는 혼자서라도 계속 시를 써왔으니까요.

작품 구상도 그때부터였고 사실은 ...

그 때 구상하던 작품이 지금 이 작품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글이라는 것을 쓰기 위해 준비한 모든 時間의 총 합은

오늘 이 時間 까지 무려 22입니다.

그림을 그려온 시간들도 마찬가지이구요.

 

현재의 작품에 대한 가장 주요한 화두(話頭)

그 시작이 앞서 말씀드린 작은 동물의 새끼를 제 손으로 내다버렸을 때부터이고

그 어린 5살 어린나이에 벌써부터 저는 슬픔이라는 게 도대체 무언지

그냥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다들 물고 뜯고 싸우지 못해 안달복달인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가사의를 마주하는 기분 속에서 세상을 살아왔죠.

 

그리고 불연속과 연속의 개념과 그 과학적 정립의 개념은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발산초등학교 때인가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초등학교 다닐 무렵 과학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그리고 의 개념을 설명하실 때 그 때 아마 수학의 한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과 그 이상의 차원들에 대한 최초의 개념 설명이 아마 초등학교 과학 시간 아니면 수학시간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되는 게 맞을 겁니다.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거든요 ...

이 내용을 점차로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한 것은

2006에 특정 오픈 백과를 작성하면서 부터였는데

솔직히 유치한 수준의 오픈백과거든요

 

0.999999...1이 동일 할 수 없는 이유

 

답글로 쓰느니 작성 하겠습니다.

먼저 계산이 가능한 수와 계산이 불가능한 수의 관점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수학은 아날로그 식 접근법과 디지털식 접근법 2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0.33333333....=1/3인가요?

13으로 나누면 0.3333333....이 나옵니까?

13으로 나누면 1/3이지 0.33333.....이 결코 아닙니다.

1/3은 아날로그 식 계산이고 0.333333....은 디지털식 접근법입니다.

0.99999999....는 실지로 정의 내리는 게 불가능한 수입니다.

이게 디지털식 접근법인 소수의 한계죠

이것은 아날로그 식 접근법으로는 절대로 계산 하는 게 불가능 합니다.

 

정의 내릴 수 없으므로 불가능 한 거죠.

 

우리가 저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다른 어떤 미지수라던가 그 무엇으로 치환을 하여 계산을 하는 것은 편의상 필요하지만 실은 논리전제의 오류입니다.

(그냥 a 라고 가정하고 수학의 공식에 끌어들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를 정의 내릴 수 있는 미지수로 표현하고 계산 하니 처음부터 근사치밖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계산을 하는 의도 역시 근사치를 얻기 위한 거죠.

복잡한 계산 수식이 필요한 이유가 없습니다.

대학교 수준의 수학을 논하기엔 제가 가방끈이 짧으므로 여기까지만 이야기 합니다만

굳이 이 상황을 해명하는데 대학교 수준의 지식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수는 디지털적 접근이나 아날로그 식 접근에서 모두 접근이 가능 하지만

 

0.9999999..... 같은 무한소수는 처음부터 아날로그 식 접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반복은 되지만 각 자리의 수가 분명한 값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1/30.3333333....과 동일 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1/3은 이것으로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아날로그의 값입니다.

0.33333333.....은 분수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디지털기계의 값입니다.

 

출처 : https://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3&docId=610405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개념도 정립되지 않은 엉터리 수학자들 보시 구료.

 

0.999999...= 1 이라는 등식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지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죠.

가령 앱실론델타의 정리에서

0.999999.... 가지고 사칙연산을 하면서 '정해진 어떠한 값' 이라고 가정을 세워두고 이야기를 하는데 즉 미지수 x로 가정을 하고 시작을 하는데

이는 명백한 논리전제의 오류입니다.

0.999999X 로 정의 하고 어떠한 계산의 수식에 일단 끌어들여서 계산이 가능한 수로 개념을 잡고 시작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이야기라는 겁니다.

원래는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이지만 편의에 의해서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붙여놓은 이름표가 무한소수의 본질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라는 개념을 풀어서 쓴 것입니다.

사실 필자가 수학적으로 그 실력이 쓸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기본 개념은 정확히 잡았다고 생각하기에 쓴 글입니다.

 

주제가 0.99999....= 1이 될 수 있는가? 즉 무한소수는 '정해진 값'을 가지는가?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증명하는 증명 식에서 애초에 '정해진 값'을 가진다. 라고 가정을 하고 시작을 해버리죠 (미지수 X 로 치환하여 공식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미지수 X 는 정해진 값을 가지는 것이다. 라는 논리전제의 오류를 범했다는 말입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정해진 값은 무엇이냐? 그게 디지털입니다.

정해진 값을 구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무엇이냐?

그게 아날로그입니다. 적어도 수학에서는

디지털은 '불연속적' 이라는 뜻입니다.

 

내부나 외부 혹은 위치나 시간상으로 구분이 지어지고

명확하게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디지털에 속합니다.

아날로그는 완전한 연속성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실현이나 실존이 가능한 개념이 아니죠.

무한 소수가 정해진 값을 가진다는 건 애시당초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다.

(당시에는 흥분하여 글을 쓰느라 잘 몰랐는데 언어가 거칠었군요.

성질을 돋우는 인물들이 그때도 많았던지라...)

 

무한소수가 정해진 값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도처에 깔리고 깔렸습니다만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죠 그래야 승복들을 하실 테니

 

가령 파이=3.141592.... 이라는 등식은 거짓입니다.

전자 파이 즉 원주율을 뜻하는 기호는 이미 그 값이 정해진 그 무엇 즉 '이름표' 입니다.

이것은 계산이 불가능한 그 무엇을 계산 할 수 있도록 그 정의를 내린 기호이죠.

그러나 실제 원주율의 값이라고 할 수 있는 3.141592....은 그 값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초고성능 슈퍼컴퓨터가 아직도 계산 중에 있으며 인류가 멸망하거나 수학이 없어지지 않는 한은 영원히 계산만하고 값은 못 구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름표로 계산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라는 말입니다.

 

이름표로 계산을 하는 게 가능하네?

어 그럼 이건 처음부터 계산이 가능한 수라고 가정을 하고

증명 식을 진행해도 되겠네?

그런데 우리가 이름표를 정해둔 이유는 뭐라고요?

값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정해진 값이 있는데

왜 그 값을 실제로는 못 구한단 말입니까?

 

이건 미지수 x나 파이처럼 사칙연산이 가능한 개념의 수가 아닙니다.

보다 이해가 빠를 수 있도록 탄젠트 90도를 예로 들어 설명 드리죠.

무한소수가 정해진 값을 가진다는 소리는

탄젠트 90도에서 x축의 값은 0이고

y축의 값은 무한대가 아니다

라는 소리와 동격입니다.

 

탄젠트 90도에서 x축의 값은 영원히 0에 가까워지고 y 축의 값은 무한대로 뻗어갑니다.

이게 정상적인 무한소수죠

루트2 라던가 파이 혹은 미지수 x등의 '이름표'

무한소수 상태에서는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임의로 이름표를 붙인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무한소수와는 그 값이 다른 겁니다.

왜냐면 전자는 값을 정할 수 없는데 후자는 값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이미 두 수의 정의에서 논리 전제부터가 다른 수입니다.

(값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 - 본질)

(계산을 위해서 붙인 이름표 - 이름표 그 자체는 숫자가 아님 즉 본질을 대변할 수는 없음)

(무한소수가 1과 동의어라면 왜 그 값을 정말로 계산하여 구해 낼 수는 없나?)

 

후자는 아날로그를 어떻게든 디지털식으로 표현 해본 것이고 따라서 표기되는 숫자는 디지털 기호이지만 그 값은 아날로그

 

전자는 아날로그로는 계산이 불가능 하니까 아예 디지털로 환산

 

도대체

 

앱실론 델타의 정의라는 엉터리 증명 식 한 가지,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일부 지식인들 보면 한심해서 지식인 오기가 싫다가도 일단 와서 마이지식 디렉토리 살펴 보다보면 그 꼴이 눈에 밟혀대니 참다 참다 글 쓰는 겁니다.

 

무한소수의 값을 혹은 원주율의 값이 정해져 있고

그 값을 구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논리전제의 오류로 시작되는 수식 말고

정말 그 값을 끝까지 다 구하고 난 다음에 보여주세요.

 

불가능하니까 무한소수고 원주율이고

구할 수 없으니까 이름표가 붙는 건데

값을 구할 수가 없어서 붙인 이름표로

그 값이 정해져 있음을 증명 한다고요?

뭘 로 뭘 증명하겠다는 말 인건지 ...

 

출처 : https://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3&docId=629949

 

... 이것도 검색제한 걸렸어 ...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기본적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

그리고 의 개념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개념도 이때부터 차근차근 정립을 시작했죠.

세상의 모든 객체들이

정말로 서로를 배척하는 것을 그 본질로써 삼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저 스스로 증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독창적인 환생개념 역시

그것이 정립된 시기는 고교시절 그러니까 1996이지만

본격적으로 성문화를 한 것은 이번 작품부터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2007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2010자살기도당시 블로그가 통째로 삭제되었다가,

2011다시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다시 재 집필을 하게 된 그런 작품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치킨을 한 마리 먹으면 모든 치킨과 원수인가요?

심지어 그 먹은 치킨과는 원수라서 먹은 건가요?

살기 위해서 먹은 거죠?

물론 그 치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당연히 우리를 원수라고 할 테지만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구요.

특별히 그 치킨을 먹는 과정 중에 가학적 취미의 만족을 위해서

별다른 나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먹은 치킨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만 가지면 됩니다.

소를 먹었다 쳐도 마찬가지이구요.

친구랑 싸웠다고 평생 원수로 지내나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기준이란

그 죄악의 크기가 과연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라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는 죄 뿐입니다.

 

반드시 먹어야만 할 때에든지 혹은 싸워야만 할 때라고 해도

미안해 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 또한

마음 한 구석에 남겨두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 때에조차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라도 지키게 되는 것은

정말로 그 마음이 미안해 할 줄을 알기 때문이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작은 먼지 한 톨 만큼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크기를 무한대까지 키우는 것 역시도

인간 따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왜 자칭 죄인이라는 작자들은 절대로 알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 주제에 할 수 있는 죄악의 크기라고 해봐야

그 주제에 실행이 가능한 일의 크기까지가 한계인 것을

천상천하 어지럽히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왜 모르는 것인지

 

저의 작품상에서 표현되는

필요에 의하여 흘리는 단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표현의 의미란

바로 이러한 표출되지 못하는 내면의 진심이 밖으로 표출되는 현상을 지칭합니다.

무언가를 먹기 위하여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투쟁을 위하여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용서하려 하고 사랑하려 하는

양심과 논리를 따라서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 앞에서 자기 잘못 정도는 반성하고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그 단 한 방울의 눈물이

다른 모든 눈물들과 마주하여 배척을 호감으로 바꾸어 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미움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줄 수가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모든 갈등의 해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순간에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 것은 그냥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진대

스스로 흘리는 눈물이 거북하다 하여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면

결국 타인의 눈물을 훔쳐야만 하는 명제로 바뀌게 되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고 타인의 눈물을 훔치도록 도와주는 것

혹은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미움이며 또한 배타성이므로

이것이 저의 작품 안에서 타인의 눈물을 훔치는 행위로써 정의 됩니다.

약탈의 개념이고 그 본질도 약탈이며 표출되는 행동과 행위도 모두 약탈입니다.

 

드넓게 펼쳐진 세상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지를 도저히 알아내기가 힘들거나

혹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입장과 역할의 역학관계상 소리 내어 말하기 힘든 바로 그곳에 있는

타인이 흘린 눈물을 약탈하는 사람들과 도적떼들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운명의 질문 즉

좋으냐 싫으냐에 대한 무한루프로 반복되는 운명의 질문이라는 것은

자아가 실행하고자 하는 목표지점의 위치까지가

그 간절함의 정도가

아주, 아주 미약해서 너무 귀여워서 미소 짓게 만들거나 혹은 바보같이 느껴져서 실소를 자아낼 수준부터 시작해서 그야말로 그 간절함이 하늘 끝에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혹은 그조차도 지나쳐서 도저히 측량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수준의 그 어느 지점과 방향에 우리의 자아와 자아의 바람이 존재하더라도

그중의 어느 지점과 시간에 우리의 의지가 멈추어 있어도 혹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어도 절대로 멈추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더라도 상관없으니

 

다 때려치우고(모든 복잡한 고민을)

호감만 잃어버리지 말아달라는

운명의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그 모든 시작부터 끝까지의 어느 지점과 방향과 시간에서도

해답은 오로지 하나 호감 즉 희망뿐이기 때문입니다.

 

...

부제를 어느 날 갑자기 판도라의 상자로 설정한 게 겉멋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고 보니 이보다 더 적절할 수가 없어서 ...

 

각설하고

그렇게 해서 작품을 처음부터 꾸준하게 읽어서

본편 19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second volume’

(‘Alawys through the question to us from the destiny Second volume.’ 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네요.)

을 읽게 되었을 때

 

마치 인간이

피조물이

처음으로 신을 만나게 되었을 때

드디어 신을 정면으로 맏닥뜨리게 되었을 때에 충분히 느낄만한

어떤 가슴 벅찬 장면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여러 암시들과 장치 문학의 논리기법 등을 통하여서

또한 어떤 감성적인 키워드를 통하여서(특히 슬픔의 대장장이가 사용하던 마법의 무구들은 문학기법상의 표현의 논리라기보다는 정말로 논리적인 생각을 할 줄 알고 또 행동 할 줄 아는 사람이 느꼈을 혹은 그런 사람이라면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으로 감성의 편린을 키워드로 표현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한 모든 장치들을 통하여서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모든 여지들을 남겨놓았으며

특히 체스의 룰을 설명하고 스테일메이트 무승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또한 킹의 자살수 금지와 체스 규정상 킹을 쓰러트리는 것은 해당 킹을 운영한 선수 자신뿐이며

이것은 예의와 도덕의 기준으로 이루어진 정당하고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어떤 승부의 논리에서 그 승부의 결과가 승부사들의 인생 전반을 갉아먹지 않아도 되도록

승부의 결과에 선수 본인이 동의한다는 뜻에서

정당한 승패의 결과에 승복하는 의미로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선주 자신이 자신의 킹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경기가 끝나고

만약 다른 선수의 킹을 강제로 쓰러트리는 어떤 무례한 선수가 발생할 경우

그가 야만인으로 취급되며 선수 명단에서 영구제명 된다는 규칙의 설명은

또한 작품 내용상에서 운명의 이러한 행동에 분노하는 작은 마녀의 모습 등은

 

지금까지 제가 수차례 설명 드린 그 모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방식과 상황과 장면을 이용한 암시를 통하여 힌트를 주는 양자 모두의 방법으로 모두 작품 안에서 서술되고 표현 된 내용들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승부를 바라보는 관점과 저의 작품 안에서 제가 표현하고자했던 승부의 관점의 차이점과 바로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용서와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라는 것을 승부의 관점의 차이를 서술함으로써 핵심 주제를 암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장기의 룰이 야만스럽다. 라는 그런 수준의 이야기는 아니고

뭐가 어찌되었거나 룰이 있고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준수한다. 라는 것은

그 자체가 서로에 대한 배려를 의미하는 행위이고 그것을 되새기는 행위이기에 본질적으로 누가 더 야만스럽다. 라는 주제로 이어져서는 곤란합니다.

다만 경기를 진행하는 선수들이

한 번만 더 서로에 대한 배려를

끝없이 떠올리며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한 체스의 룰이

보다 더 제 작품의 성격에 알맞음을

꽤나 명징하게 서술하여두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비교서술 그 자체를 암시기법으로 활용하였죠.

 

본문을 인용하자면

 

체스에서 스테일메이트의 개념

The concept of Stalemate in chess

 

본래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중언부언 첨언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자인하는 꼴인지라 좀 혐오하는 편이지만

체스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포기하기 싫어 다루게 되다보니 필연적으로 최소한의 고증이라는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더군요.

픽션이 팩트를 바탕으로 최대한 팩트에 근접하는 이야기일 때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기에 부득이하게 고증을 거치고 체스라는 문화가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부연설명을 첨언합니다.

 

체스의 룰에 대해서 설명하기에 앞서서

체스라는 게임을 지배하는 기본 정신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행마법을 비롯해서 자세한 룰에 대한 설명은 대략 8편 뒤에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장기(將棋)나 바둑(围棋)은 불가능 하지만

체스는 대수기보법에 의해 온전히 글월만으로도

그 다이나믹한 승부의 전모를 전할 수 있기에 최대한 신경 써서 표현할 예정입니다.

 

체스는

철저하게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명예와 도덕과 예절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게임입니다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말은 퀸입니다

마치 제 졸고 슬픔의 바위 사막에 등장하는 마녀와 같은 먼치킨캐릭터이죠.

전후좌우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든

칸수의 제한 없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물 점수도 9점으로 4점인 킹 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를 가집니다.

그러나 퀸은 다른 말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상대 선수가 쳐서 쓰러트릴 수 있으며

이동 경로에 다른 말이 있는 경우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체스에서 가장 귀중하게 취급되는 말은

다름 아닌 킹 입니다.

 

어느 정도로 귀중한가 하면

 

절대로

어떤 말도

해당 킹을 움직이는 선수 자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그 킹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체스 말은

상대편 킹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크라고 외치며 공격 의사를 밝히지요

 

그러면 상대는 킹을 움직이거나

다른 말로 자신의 킹에게 체크를 선언한 상대 말을 잡아서 막거나 피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체크를 막거나 피할 수 없을 때

체크메이트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체크메이트 상황에서

절대로 상대편 킹을 쳐서 쓰러트려서는 않됩니다.

그런 행동을 하면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며

국제 경기 등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영구적인 선수자격 박탈을 당합니다.

 

오직 체크메이트를 당한 선수 자신만이

스스로 킹을 쓰러트리며 패배를 선언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온전히 승패가 갈리게 됩니다.

남아있는 기물 점수로 승패를 가리는 경우도 있지만

또 여러 가지 다른 승부를 가리는 방식이 많지만

진정한 승부의 끝은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는

정당한 승패에 대한 온전한 승복으로 마무리 되게 됩니다.

 

군주에 대한 충성과 도덕과 예절과 정당한 승패에 대한

온전한 승복이라는 기사도 정신이 돋보이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와도 닮아 있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포기하기 전에는 결코 끝이 아니지요

 

킹에 대한 예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체스에는 킹에 한정되는 독특한 규칙이 두 가지 있는데.

킹의 자살 수 금지와 스테일메이트 무승부가 그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킹의 자살 수 금지에서 시작 되는데요

 

체스를 둘 때

킹은 스스로 상대의 공격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를 자살 수 금지라고 하는데요.

만약 실수로 혹은 고의로 킹을 상대의 공격권 안에 두는 자살수를 둔 경우 반칙패를 당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킹을 소중히 다루지 않은 대가죠.

이 경우에는 그 어느 누구도 킹을 쓰러트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체크메이트 상황에서 선수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는 상황에서만

오로지 선수 자신만이 킹을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킹을 쓰러트리지 않습니다.

 

간혹 컴퓨터 체스 게임등 에서는

킹으로 자살 수를 두게 되는 상황에서

해당 수가 무효임을 경고로 알려주기도 하며

자살수를 두는 경우를 반칙패 처리하지 않고

상대 선수가 그것을 알려주어

플레이어가 다시 수를 두도록 유도 하는 것이

정식 규정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살 수 금지 규정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규칙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스테일메이트 무승부 입니다

그 어떤 말도 킹을 체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킹이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체크를 피할 수 없는 경우

즉 상대로부터 자살 수를 강요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장기라면 외통수로 취급되어 패배를 자인하게 되겠지만

체스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너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행위로 취급하며

상대에게 반칙을 강요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승부 처리하게 됩니다.

이를 스테일메이트라고 합니다.

상대편 킹을 공격할 것도 아니면서

상대에게 자살을 강요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전체 칸수가 64칸에 불과한 비좁은 체스판 위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후에 다룰 폰의 프로모션에서 주의를 요하는데요.

프로모션이란 승작이라는 의미로

본디 폰은 오로지 전진밖에 없는 단순한 행마법을 가집니다.

그것도 첫 전진만 한 칸 내지는 두 칸 그 이후부터는 한 칸만 전진 합니다.

 

아무튼 전진밖에 할 수 없는 폰은 필연적으로 반대편 벽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물론 폰이 반대편 벽까지 살아서 도달하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그 어려운 위업을 달성한 경우 해당 폰을 승작시킬 수 있게 됩니다.

 

승작은 폰을 폰 자신과 킹을 제외한 다른 기물중 하나로 변경시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강력한 다른 기물들이 전사한 게임 후반부에

새로운 강력한 기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종의 히든카드 개념입니다

이론적으로 8개의 폰 전부를 승작시킬 수 있고 8개의 폰 전부를 퀸으로 프로모션한 경우

최초 지급되는 퀸 하나를 포함해서 총 9개의 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규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반대편 벽에 폰이 도달할 때까지 진행된 경기에서

폰이 하나 이상 살아있기가 매우 어렵고 따라서 양측 선수가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성립합니다.

간혹 비숍을 뒤집어서 프로모션한 폰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 프로모션이 주의를 요하는 이유는

체스에서 내 기물의 활동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상대편 기물의 활동범위가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64칸의 체스보드 안에서

남아있는 다른 기물이 얼마 없어서 진로를 가로막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전후좌우대각선을 칸수 제한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퀸이 2기 이상일 경우

스테일메이트 무승부가 발생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지며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순간

스테일메이트가 발생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로모션은 자신의 퀸이 잡힌 상황이 아니라면

나이트나 비숍 혹은 룩으로 진행하는 것이 게임을 서로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 룩도 2기 이상일 경우 상당히 위험하다고 봅니다만 퀸보다는 조금 덜하죠.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퀸이 2기 이상이어도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체스는 장기와는 다르게

킹을 공격할 때

공격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배려를 매 수를 둘 때마다 의무적으로 고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킹을 움직이는 선수 자신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움직이고 행사함에 있어서 그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이죠.

 

물론 장기가 체스에 비해서 야만적인 게임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장기도 룰이 있고 그 룰을 지키지 않으면 반칙패를 당하는 것은 체스와 마찬가지 이지요

다만 체스라는 게임이

게임에 임할 때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기 보다는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규칙을 하나 만들어두고

가장 중요한 공격의 순간에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함께 떠올리도록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은

비록 그것이 킹에 대한 예우라는 봉건정치를 기초로 나온 정신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되새겨볼만한 구석입니다

 

작중에서

운명과 마녀는 서로 예의와 도덕을 지키며

공격하는 순간에도 상대를 너무 궁지에 몰아넣지 않도록 매너를 지키며 경기를 시작 합니다.

그 단순한 행동 뒤에 숨은 의미들을 체스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모르기 때문에 굳이 이런 부연 설명을 첨언 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68

 

창비 출판사와는 2015부터 지속적으로 이 책의 출판 문제를 이메일로 대화를 주고받아왔고

그리고 제가 불의의 구속수사를 당한 바로 그 시점에

작품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와 설정들 그리고 주제의식 등을, 또한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장면의 모티브와 느낌, 작품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첫인상등을

그리고 원작자인 제가 팬들로부터 응당 받아야만 마땅한 사랑금전적 이득양자 모두 까지를

드라마 도깨비의 제작진과 배우들 그리고 김은숙 작가님께 빼앗기고 도용당하였습니다.

 

여담이지만 ...

운명과 마녀의 체스경기가 시작되는 장면의 모티브를 표절한 삼신할머니(...)와 육성재씨의 술자리 대화 장면은 ...

아 물론 그 배우분의 경우 제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미녀이시라는 데에 큰 이견은 없습니다만 ...

모티브가 삼신할머니라뇨 ㅠ ㅠ

그리움의 주인공과 작은 마녀가 동일인물로 설정되는 다른 이유로는 ...

그녀가 모든 사건의 해결사로 설정된 그 이유 자체가

모든 구원은 아름다운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에 의하여

아름답지 못한 이들이 또한 주인공까지도

진정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라는 어떤 상징적인 장치였는데 ㅠ ㅠ

-우리 선미 이뻐요. T^T 진리에요 T^T

 

만약 도깨비의 제작진 측에서

원작자는 누구이고 원작은 무엇인지를 선의로써 공표하고 밝혀 주신다면

또한 저의 작품의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신다면

고의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적절한 수준의 배상금 문제로 끝 낼 생각입니다.

 

드라마와 시집의 수익성 차이도 문제이지만

드라마의 경우 등장인물 즉 배우들의 인지도와 상품 광고 등의 작품 외적인 요소에 의한 흥행 성을 배제 할 수가 없고

해외 올로케이션으로 촬영된 드라마 도깨비에서 투자한 투자금액 역시도 흥행의 다른 요소가 될 수 있으며

촬영에 사용된 소품이나 차량 등의 작품 외적인 상품들 역시 흥행의 다른 요인으로 작용 가능한 문제 때문에

 

아무리 현행법상 표절작의 수익 전액을 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해도

현실을 고려하여 제가 양보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즉 보상금 문제로 누구를 말려죽일 생각 같은 것은 저에게 없습니다.

저는 저의 명예와 권리 작품의 저작권을 인정받고 정식으로 작품이 출판되기를 바라니까요.

도둑놈 이미지를 시작부터 타이틀로 걸어두고 출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는 되도록 빠른 결론이 필요한데

우후죽순 격으로 제 작품 이미지나 설정들을 도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화 SPACE BETWEEN US 나 일본 영화 심야식당 2 같은 경우가 그러하고

만화 중에서는 모기전쟁에서 저의 작품 주제의식을 도용한 사례가 보이더군요.

 

제 작품이 성서와 다른 점은

세계는 절대로 하나이고 구원은 절대적으로 오로지 생의 순간에만 존재하며 죽음의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구원은, 그것은 반드시, 그리고 오로지 생을 살아가는 이에게 그것도 바로 다른 그 어느 시간과 장소도 아닌 생의 모든 순간과 장소에서 꼭 필요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생의 순간에, 그 어떤 미지의 순간과 시간과 장소에만 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다른 그 어느 곳과 장소와 시간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을 찾아야만 한다. 라는

절대불변의 믿음입니다.

즉 구원은 사랑이며 갈등의 해소이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믿음입니다.

 

사실 구원받지 못한 채로 죽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뭐로 다시 태어날지는 몰라도 다시 태어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구원에 대한 저의 관념은 저의 작품상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됩니다.

 

만약 신이

나에게 믿음의 증거로

내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송선미씨의 안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면

물론 불가항력적인 문제이기에 그 요구에 응할지 저항할지

그것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그 존재를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규정할 것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비열한 세계의 신과 운명은

절대 그리스도와 동일한 인격체가 아닙니다.

 

구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였다.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너에게, 나는 구원을 이야기했다.

 

티끌 한 점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성인만이

우리를 모든 번뇌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구원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곪아 터진 종기에서 고름을 짜내듯

치유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나는 완벽한 천국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를 건너뛰고

다시 한 번 너에게 구원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비웃으며 임종을 맞이했다.

그것은 진정 비탄으로 가득한 순간이었다.

 

죽음 뒤의 영생과 구원에 대하여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죽음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온 한조각의 호의를 거절한 채

쓸쓸하게 임종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완벽한 구원의 약속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간절히 바랐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단 한번 만이라도

나의 마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만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행복했던 순간들 같은,

어린 시절 구정물을 뒤지며 미꾸라지를 천렵할 때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 종이컵 차기 같은 단순한 놀이를 할 때와 같은,

순수하게 호감으로 가득한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왔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당연히 네 죽음 뒤의 영생과 천국에 이르는 길 따위는 제시 해 줄 수 없었다.

단지 내가 너에게 건넨 것은 나의 온 마음을 담은 한 조각의 호의였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구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꿈꾸는 텔레비전의 브라운관과 디스플레이 너머로

일방적으로 서로를 시청하는 만화경 같은 세상 속에서

구원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풍진 세상 등지고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야만

비로소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자신을 믿으라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 자신의 호의를 담아 말했다.

 

당신을 믿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리스도를 구원하여 주었다.

그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아직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절대로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심장이 간절히 바라는,

단 한조각의 도움을 바라는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나의 호의를 건네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나의 심장이 멎은 뒤에 찾아올 천국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외쳤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5

 

등장인물편 마지막 설정 내용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란

아버지, 아버지 나를 버리시나이까? 입니다,

 

46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는 마태복음 제 2746절의 그리스도의 유언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4복음서로 지칭되는

통칭 공관 복음에 해당되는 3 복음서상의

그리고 요한복음상의 그리스도의 유언이 모두 상이한 가운데

작품에 필요한 마태복음 274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4 복음서들 가운데 그 집필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복음서이며 따라서 성경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상에서의 유언역시 마태복음과 동일하며

1634절에 마태복음과 완전히 동일하게 표현 됩니다.

 

누가복음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유언은 다음과 같은데

2346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또한 요한복음상의 그리스도의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1928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인데요.

28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 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海絨) -고운 베를 말합니다.-을 우슬초(牛膝草)에 매어 - 베로 된 천에 신 포도주를 적시고 그것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그리스도께서 마실 수 있으시게 해드렸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입에 대니

30절 예수께서 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은 전체 성경의 모든 내용들 가운데 그 집필 시기가 요한 계시록보다도 훨씬 뒤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경으로

추정 집필 시기가 AD 100에서 300사이로 추정되며

(AD 300 년이라는 연대 추정은 NIV 성경 상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는 정상적인 연대측정 자료입니다.)

마태복음의 집필 시기는 AD 50에서 70사이로 추정되며 이 또한 NIV 주석 성경 발췌 내용입니다.

 

원문 출처 :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신 국제 표준역본 주석 성경(스터디바이블을 간소화한 신학을 학문 목적으로 파고들이 위하여 만들어진 성경 - 개신교 성경)

1986121

NIV 주석 성경 편찬위원회 출간 성경에서 발췌

 

사랑은 그냥 마냥 한없이 좋은 것입니다.

죄악의 끝을 인간이 실행에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크기역시 무한하여 인간은 절대로 영원불멸의 영생과도 같은 이 환생이 끝나는 그 순간 까지도 절대 그 크기의 끝을 경험할 수가 업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세상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그냥 솔직히 인정하기만 할 줄 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

 

사랑은 너무나 좋은 것이고 모든 구원이며 행복인데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아와 자아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며

자아의 본질이 곧 타인에 대한 배척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이 배척으로 인하여 우열의 격차와 단절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서 그로인하여 태어나게 된 것이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배척하고만 싶어지는 바로 그것

미움 이라고 하는

그토록 모두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슬픔과 고통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의 뜻입니다.

 

고통도, 슬픔도, 사랑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용서와 사랑을 잃지 않기

 

지쳐 쓰러진 분노(Tired fallen anger)

슬픔의 바위 사막 제 16(Rock desert of sorrow part. 16)

 

거대한 바위가 가득한 끝없는 사막

폭풍은 바위 틈바구니를 가로지르며

맹포하고 음울한 포효를 내지르지

밑도 끝도 없는 바위의 미로 속에서

바람은 길을 잃고 헤매며

한없이 슬픈 목소리로 흐느껴

미쳐버린 풍신(風神)의 흐느낌은

길 잃은 여행자를 전율케 하지

 

마녀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어

거센 바람 때문에 우산을 펼치는 것은 포기해 버렸어

마녀는 조용히 폭풍을 가로질러 걸어갔어.

끝없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와

바람의 귀곡성이 돌의 미로 속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 얽혀버린 끔찍한 공명 사이로

간간히 인간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정신질환자를 미치게 만들 것만 같은

순수한 슬픔의 소리

마녀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 이었어

하지만

 

이 소리는 귀를 막아도 들려

눈을 감아도

미로 속을 헤매는 슬픔이 보여

마녀는 그것을 알 수 있었어

 

그것은 많은 사연이 담긴 어떤 남자의 인생에서

그가 자의와 타의 양자 모두에 의하여

그동안 흘려온 모든 눈물들의 총 합이야

그 남자의 가슴이 온통 불에 타고 남은 재의 가루들이

눈물이 말라버린 소리로 바뀐 귀곡성이야

생에 있어서 자아가 아닌 타자에 대한

그 어떠한 기대감조차도 남지 않게 되어버린

어떤 텅 빈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공허한 울림이야

좋은 것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좋은 것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보다도 억만 배나 더 나쁜 것들이

그의 자아를 현혹하고

그가 가장 무력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 대신에 그를 파괴하고

그를 미워하는 어떤 움직임들만이 가득한

어떤 배타성에 대한 적의가 소리로 바뀌어버린 거야.

마치 도와주는 것처럼 유예를 주다가도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하려는 어떤 순간에

때맞추어 그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려

몇 번인가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둘러싼 인지의 간격 밖으로 나가 보았어.

그리고 정말로 적의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느꼈지

 

단지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일 뿐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가 될 수 없고

그것이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때

그가 아닌 타인의 인생과

그의 삶이 함께 망가지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며 실제 말과 행동으로는

그와 타인의 삶을 모두 망가트리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현혹하고 헤매게 하고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은 빼앗으면서

있는 것은 빼앗지 않을 테니 믿으라 말하고

있는 것조차도 스스로 잃어버리도록 현혹하면서

무조건 믿어달라고 해

 

실질적인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모조리 다 빼앗아놓고

실질적인 삶의 의미가 되기 힘든 무형의 무언가를

아주 작은 무언가를 하나 주고는

믿어달라고 이야기 해

 

남자가 바랐던 것은 그런 시험이 결코 아니었어.

그의 가슴이 바랐던 구원이란 그런 시험을 이겨내고

승리의 성취감을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어.

남자가 바랐던 것은 이기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어.

남자가 일평생동안 자아가 아닌 타자에게 바라왔던 단 한 가지는

그에게 주어진 시험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였어.

 

아무리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을 향하여 피투(皮投) 된 것이라 하여도

껍질이 벗겨진 채 내동댕이쳐진 것이라 하여도

그가 원했던 삶이란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어,

적어도 그가 지난 세월동안 스스로 삶이라 믿으며 살아왔던 것과

그의 진짜 현실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괴리가 있었어,

 

아니 다 필요 없는 이야기야

그가 바라왔던 단 한가지란

그의 진짜 삶이 어떠한 것이었고

그의 삶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까

누군가가 재미삼아 그를 가지고 놀면서

그의 삶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건 나쁜 평가를 하건

그가 바랐던 것은 평가를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단지 살아가려 하다 보니 싸우게 되었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을 뿐

그것은 그가 바라왔던 것이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는 그가 바라왔던 그 한 가지를

절대로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그것을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주려 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실을

깨달아버렸으니까

그의 모든 부서진 마음들이 소리가 되어

의미가 변질된 눈물들이 바윗덩이로 변한 돌덩어리 같은 세상의 미로 속을

미친바람과 함께 나부끼고 배회하고 있었어.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마녀는

그의 마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지.

단지 마녀는 아직 스스로의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어.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결심이고

어떤 충동에 따라서 결정하면

반드시 후회하고 그 마음이 뒤바뀌게 되는 일이라고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절대로 없었으니까.

단지 그를 구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

 

확신을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확신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단지 그것을 몰랐을 뿐이니까.

 

남자가 일평생을 바라왔던 그 한 가지라는 것은

어떠한 시험의 순간에 정답을 말한 자 에게

어떤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품이나 경품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단지 몰랐거나 알고도 무시할 뿐이니까

시험을 치르고서 정답을 행해야 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미 보상이 되는 그 시점에

그가 바랐던 그 한 가지는

이미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그 엄연한 사실을

그녀는 몰랐거나

알고도 무시하고 있을 뿐이니까

아마 나중에 마녀는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게 되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절대로 남자는 아니게 될 거야.

 

마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눈물로 이루어진 돌들과 미쳐버린 바람의 미로 속을 걸어갔어.

이를 악물고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긴지 얼마나 되었을까

급류(急流)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슬픔의 격류(激流)를 거슬러 올라가는 그 길의 어느 지점에서

마녀는 습격을 받았어,

팔이 부서져 나갈 것 같은 거대한 충격

절망의 창은 분노와 부딪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갔어

마녀는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지

마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져

아다만타이트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꺼냈어,

초점조차 맞추기 어려운 눈으로 습격자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백일몽의 불씨를 사방으로 흩뿌려 환영을 만들었어.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굶주렸을까

깡마른 몸 위에 걸쳐진 헐렁한 셔츠 사이로

가죽에 들러붙은 쇄골과 갈비뼈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더러운 때 국물이 빗방울에 씻겨 흘러내리는 지저분한 몰골

얼굴 가득 묻어난 검댕이들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물방울

머리카락 올올이 덩이진 흙덩이들이

사내가 고개를 흔드는 대로 따라 흔들리다

바위며 땅거죽 따위에 사납게 부딪히지

 

미쳐버린 분노의 화신(化身)이 되는대로 망치를 휘둘러

돌의 미로는 제 형체를 잃어가고

사내는 기어코 지쳐 쓰러져 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어.

 

마녀는 샌드맨의 모래가루를 가방에서 꺼내어

쓰러진 사내를 향해 흩뿌렸어,

사내는 기어코 고개를 몇 번 가로젓더니

결국 잠들어버리고 말았지

세차게 진동하며 울부짖는 타오르는 망치

맹수의 포효소리 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그것은

마녀가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망치야

 

하지만 사내는 대장장이가 아니었어,

백일몽의 꿈속에서 모든 것을 본 마녀는

사내가 바로 미쳐버린 거센 바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조심스레 다가가 거센 바람의 손에서 분노를 빼앗았어.

거센 바람은 그제야 편안한 얼굴이 되어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

오랜 시간 먹지도 쉬지도 않고

끝도 없이 분노를 태우다 기어이,

모든 생명의 불꽃을 소진시켜버리고 말았어.

마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동정의 눈물들이

검은 보석이 되어 거센 바람을 덮어주었어

 

편히 쉬어요

 

마녀는 절망의 창과 분노의 망치를 갈무리하고

다시 길을 떠났어,

 

정녕코 이곳에 다시는 태양이 뜨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75

 

이 내용들은 마녀가 운명의 시험 앞에서 대장장이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표출하기 이전의 내용입니다.

사실 어떠한 마음의 진실성이라는 것은 그냥 그 마음이 행동이나 말등으로 상대에게 표출이 되기 까지일 뿐이지

그 이상의 시험이라는 것은 전혀 현실적인 의미가 될 수 없는

일방적인 약탈이고 착취이며 폭력일 뿐이죠.

 

굳이 인용을 한 이유는

신의 뜻에 대한 설명에서

 

사랑은 너무나 좋은 것이고 모든 구원이며 행복인데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아와 자아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며

자아의 본질이 곧 타인에 대한 배척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이 배척으로 인하여 우열의 격차와 단절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서 그로인하여 태어나게 된 것이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배척하고만 싶어지는 바로 그것

미움 이라고 하는

그토록 모두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슬픔과 고통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의 뜻입니다.

 

라는 내용이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져 있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또 하죠

자필진정서 전체 45P. 내용 중에서 34P. 초반까지는 정리가 끝났네요.

 

사랑에 대한 정의 역시

제 작품이 이영도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와 매우 다른 것인데요.

저는 어떤 제도적인 입장의 차이나 대인관계의 문제만이 아닌 우선순위라고 하는 우주적인 본질적 요소에 의한, 우열의 존재로 인한 절대로 대안이 없는 본질적인 고통을 인정하는가의 여부, 슬픔과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 - 화두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머무른 지점 - 의 차이를 두고

고통을 막을 수가 없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진실 앞에서, 정말로 누군가를 배척 해야만 할 그 순간에도, 또한 배척을 한 뒤에도, 항상 호감 그 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륜 페이나 도깨비처럼 나무가 되거나 불티가 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타이타닉의 인물구도를 취하거나, 정말로 살면서 그런 선택을 하기 이전에

정말로 그러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그 순간이 찾아오기 이전에

어떻게든 호감을 잃어버리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운명은 그렇게 질문을 바꾸어서 마녀에게 질문했던 것입니다.

 

사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비록 먹고 먹혀야만 하는 관계라던가 품에 안았다가도 얼굴을 다시 보려면 또 밀어내야 한다. 같은 (사모 페이와 륜 페이의 재회의 순간을 지칭 합니다.) 어떤 633

3배척과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의 접근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특히 용인(龍人) 륜 페이가 사모 페이 대신해서 검을 맞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용() 아스화리탈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죽음만은 피하였지만 사실상 사모 페이와는 영원한 단절에 보다 더 가까운 상태가 되는 장면이나 도깨비에서처럼 죽은 캐릭터가 환생을 하거나 도깨비 자신처럼 죽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죽지는 않았다더라 같은 설정들은 사실 굳이 입을 열어 이야기하자면, 타이타닉에 비할 경우 유치하기까지 한 설정들이고(신의 저주대로 검 뽑고 불티처럼 스러져서 다시 살아나면 살아나는 거고 죽는 거면 죽는 거지 무슨 별 거지같은...) 결국 이영도씨는 어떤 절대적 공존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제의식의 수준을 현실에 끌어들이지 못한 채 판타지적 요소와 흥행성에 두게 되는 그런 선택이었던 겁니다.

어떤 감정이 스러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주인공이 정말로 죽는 것은

그냥 본질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정말로 죽여야 이야기가 되는 거죠

장난하나요?

 

다시 륜 페이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쇼자인테쉬크톨의 운명적 저주로부터 륜 페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모 페이가 륜 페이를 격동시키고 륜 페이는 엉겁결에 자신의 사이커(륜 페이의 아버지인 그리고 케이건 드라카의 친구였던 요스비의 사이커)로 사모 페이를 찔렀을 때

재생능력이 강한 나가 여인인 사모 페이가 가사상태에 빠진 상황에 당황한 어린 륜 페이가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 신의 살해 계획과 관련된 모든 사건의 전모를 물어보기 위하여 나가들을 피하여 인간들의 사원이었던 어디에도 없는 신의 사원인 하인샤 대사원에서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내기 위하여 륜 페이 자신을 하인샤 대사원으로 데려온 케이건 드라카에게 억지라도 부리는 듯이 여신을 불러 줄 터이니 사모페이를 되살려내어 자신과 함께 하텐그라쥬로 되돌아가게 해달라!’ 라고 억지를 쓰는 모습은

 

그러한 륜페이의 모습이라는 것은

결국 어떠한 종류의 배척도 허락할 수 없고 절대적인 공존만이 중요하며

자아와 자아의 본질 즉 우열의 격차에 따른 배척의 결과를 용인하기도 싫고

그 어떠한 피해자(과연 억울한 게 맞는지는 전혀 고려치 않은 - 본인의 실수로 누명을 뒤집어쓴 처지에, 나가 사회의 룰을 무시하고 심장도 적출치 않고 도망을 친 것부터가 나가의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화리트 마케로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을 하고서도 도망칠 목적으로 수호자에게 고발도 하지 않아서 누명을 뒤집어쓴 주제에) 의 눈물도 자기는 용납 같은 거 절대 하기 싫으니 누구는 배척당하고 누구는 잘살고 난 이딴 거 절대 모르겠고 절대로 사모 페이만 되살려 내라 (절대로 배척 같은 거 없게 해라, 사자와 토끼가 사이좋게 풀을 뜯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라는 형태의

 

어떤 절대적인 공존의 추구를 위해서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눈물이나 고통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특히 배신당한 케이건 드라카의 분노의 표출이라는 것은 결국 정당한 신이 만들어둔 세상의 인과관계에 따른 슬픔을 배격하고 슬픔을 극복 또는 배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되며

 

이러한 모든 일들은 결국 세상을 만든 신에게 감히 원망을 품고

신에게 그 어떠한 종류의 배격이나 배척도 없이 완벽하게 행복하기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아무것도 모른 채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진정(陳情)’ 하는 행위에 가까운 설정들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진() 자는 늘어놓을진 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의 원작이었던(모방문학의 모티브)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의 슬픔과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한계 였고

이러한 관점과 인식의 한계에 의한 고정과념은 드라마 도깨비의 주제의식의 한계까지 이어졌습니다.

 

특히나 이야기의 끝이 레콘, 나가, 인간, 도깨비의 4 종족의 완전성을 목표로 하여

(말 그대로 사자와 토끼가 사이좋게 풀을 뜯는 완벽한 이상향을 꿈꾼다는 이야기죠)

절대적 진리를 완벽하게 부정하고

무한한 변화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이상향을 향한 주제의식의 추구 자체가

 

이미 이야기의 주제의식은 현실을 벗어난

어떤 판타지적인 요소가 목적이 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게 되는데

 

드라마 도깨비의 경우는 더 한심한 게

김고은을 정말로 죽이지도 못하고

기억을 지우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설정을 알 리가 없는 김고은이

(이동욱씨가 다른 망자에게 설명할 때 김고은씨가 옆에서 엿듣기라도 했나요?)

기억을 지우는 차를 마시지 않는 선택을 하고

(그 순간에 그게 그냥 자동으로 떠올라요?)

(그 긴박한 순간에?)

(사람이 감정적으로 격앙이 되면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멍청해집니다.)

(작은 마녀의 감정을 격앙 시킨 운명이 마지막에 체크메이트를 내려꽂는 게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감정 기복에 따른 인지능력의 변화 수준입니다. ㅋㅋㅋㅋ)

(마누라 혹은 남편가지고 나쁜 짓을 운운하는데 누구라고 흥분을 안 해 )

(뭐 이런 건 개인차가 있다고 쳐도 )

심지어 환생할 때 반드시 꼭 인간으로만 되살아난다는 기본적 설정도 없이

그냥 마지막 회에 인간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되살아나기까지 하고는

어떻게 캐나다 퀘백의 바로 그 도깨비 가족 묘소로 우연히도수학여행을 와서는 ㅋㅋㅋㅋ

(하필 그날 그 시간에 도깨비는 또 왜 거기에 있고?

화장실도 안 가?)

(우연이 아니면 절대 설명 될 수가 없는 결말)

하다못해 원래 도깨비랑은 인연이 될 수 없도록 훼방만 놓던 신이

(그동안 김고은이나 도깨비나 간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거늘 갑자기 왜 )

(간절함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서? 그 기준은 뭔데 )

(작가 마음대로? ㅋㅋㅋㅋ)

갑자기 무슨 사유로 변심을 하여 도깨비와 김고은을 축복을 다 해주느라고

김고은 뒤통수에서 찬란한 햇살까지 뿌려주시나요.

 

뭐 다 떠나서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서야 그제 서야 행복을 맞이한다는 그딴 설정이 ㅋㅋㅋㅋ

그게 도대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설정이라고 ㅋㅋㅋㅋ

 

차라리

당당하게

김고은은 아이들이 덤프트럭에 치여 죽는 꼴만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자기 사랑 그까짓 거 다 포기하고 확 죽어버리고야 말았다는 설정으로 가던지

아니면

아무리 비겁해 보이더라도

아이들이 덤프트럭에 치여 죽던지 말던지

자기 하나 살아서

그냥 도깨비랑 행복하게 살기라도 하는 그런 설정으로 가던지

 

결국 결말도 타이타닉 설정 같은 거 못 받아들이고야 말겠다는

사자와 토끼가 사이좋게 풀을 뜯는 이상향에 도달하지 않으면 난 무조건 불행해와 같은

눈물을 마시는 새와 같은 수준의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꿈꾸는 스토리로 가고야 말았던 거죠.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게

현실에 어디에 있느냐고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 의 슬픔 같은 거 무조건 싫다는 이야기잖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 Caprio)’ 의 희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는데!!

 

 

예의를 차리려고 해도 예의를 차리기가 너무나 힘이 드네요.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가리켜서

주제의식을 현실에 포커스를 맞추지 못하고 판타지적 요소에 기대고야 말았다.

라고 하는 거구요.

 

이런 도저히 현실에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이나 이상향을 추구하며

결론적으로 두 작품이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슬픔을 나약한 것으로 취급하며

또는 그냥 듣기 싫은 이야기 수준이라고

유치하게 배척하고 배격 할 때

 

(어린애 땡깡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혹은 덤프트럭에 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서)

(‘그냥 죽는 건싫어?)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절대로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그야말로 찬란한 태양과도 같은 단 하나의 진리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결코 불변하는 어떤 진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진리가 정말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적인 모든 생의 순간에

그런 현실적인 결론 안에

형이상학조차 아득히 초월할 수 있는 진정한 구원이 존재함을

믿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걸 맞는 어떤 롤 모델을

이야기의 마지막에

여태까지 홀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상처입기 쉬운 속살 같은 진심을 끝없이 표출하며

사랑이라는 구원을 전하려고 했던 슬픔의 대장장이에게

헬리오스의 후광을 받으며 그에 걸 맞는 사랑고백을 해 줄 수가 있는

작은 마녀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용감한 소녀의 모습으로,

그야말로 순결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의 모습으로,

하나의 롤 모델을 제시한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이죠.

슬픔의 대장장이는 이러한 완전무결한 작은 마녀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기까지 한 순결한 소녀로부터

절대적인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주제의 정당성을 입증할

하나의 섭리에 대한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 지도입니다.

바로 구원에 다다를 지도입니다.

 

슬픔의 바위 사막

하나의 세상보다도 더 넓다. 라고 작중에서 명징하게 정의 되는 그 슬픔의 바위 사막 과

현실과 판타지적 세상 전체를 초월하듯 여행하는 것으로

모든 스토리가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상에 나침반은 등장하는데

지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체스의 대수기보법을 언급 한 적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소재 자체가

지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임에도

굳이 지도, 언급을 안 한 것은

문학의 표현의 기법 상 생략의 기법이라고 해서

문맥상 다음에 표현 될 말을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 할 수가 있을 때

굳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 고의죠

작품 자체가 바로 지도를 상징하거든요

 

이런 생략의 기법의 다른 예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이라는 노래가사에서 그 예시를 찾을 수가 있는데요.

심규선양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네요

 

에피톤 프로젝트 선인장’ (Feat by 심규선)

 

햇볕이 잘 드는 그 어느 곳이든

잘 놓아두고서

한 달에 한 번만 잊지 말아줘

물은 모자란듯하게 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 하지 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게

그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때가 다시는 올 수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을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게

그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을게

 

출처 :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2738193&ref=W10600

멜론 뮤직

 

정말 많은 부분에 생략과 함축의 기법이 적용된

본격적인 시문학 작품 수준의 노래가사입니다.

 

일단 선인장이라는 식물에 대한 배경지식들이 함축 되고 생략 되어졌고요.

선인장은 거친 고열의 사막에 피어나는 식물이고

수분을 몸 안에 함축할 줄을 알며

사막의 새벽이슬을 바로 그 몸 안에 저장하는 수분으로 이용합니다.

 

이 새벽이슬이 눈물을 상징하고

또 화자의 눈물로 치환도 가능한

전문적인 시문학의 표현의 함축의 기법이 사용되어진 가사이구요

사막같이 황량한 화자의 내면 심리부터

새벽이슬 같은 고결한 눈물을 몸 안에 머금어 둔다.

라는 표현으로 부터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또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물을 주면 된다. 라는 표현도

나는 너무나 큰 애정까지는 바라지 않아라는 의미로 치환도 가능하지만

그로인한 다양한 상상력의 자극도 가능하지만,

이는 연역적 추론을 기반으로 하는 시 문학의 함축의 기법의 예시이구요.

연역적 추론이란 연상 작용을 통하여

문장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그 문장의 다른 영역을 추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앞서 예를 든 생략의 기법의 예시는 다음을 보시죠.

 

그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을게

 

봄에 서 있겠다. 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겨울이 생략되어져 있습니다.

선인장은 겨울에는 생기를 잃어버리는 식물이고

마치 우리들의 눈에는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찾아오면

앞선 가사들에서 표현된

눈물을 머금고 꽃을 피울 줄 아는

그 작고 아담하며 귀엽기 까지 한

그 식물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죠.

또한 겨울은 고난을 상징하며

화자가 맞이해야 할

살아가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는

겨울의 계절과도 같은 어떤 시련을 겪을 때

선인장 자신이 그 겨울을 앞질러 달려가

꽃이 피는 봄에서 꽃을 피운 모습으로

화자를 기다리고 있겠노라는 다짐이 되기도 합니다.

(문맥상 3인칭 시점의 주인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노래가사에서 화자는 선인장 자신이니까요)

 

이것이 시 문학의 대표적인 몇 가지의 표현기법중의 하나인

생략의 기법이죠.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미 표현된 문맥에서 충분히 유추하는 것이 가능한

어떤 단어나 문장, 또는 주제의식 등을 또는 어떤 특정한 인문학적 요소들을

굳이 소리 내어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작품 해석에 대한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의 폭을 넓히고

작가의 주제의식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더 넓은 해석의 방향과 자유로운 결론의 도출을 꾀하는 기법입니다.

 

그냥 작가가 내 작품은 이거다

라고 말해버리는 그 순간

해석과 결론이 하나로 획일 되어버리잖아요?

 

하지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둘 경우

보다 현명한 어떤 독자는

비록 작가의 생각과는 다를 지라도

보다 더 현명한 어떤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현대예술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이를테면 집단의 지성과 개개인의 생각의 차이가

작품의 표현력을 뛰어넘은 새로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 쪽에

보다 더 무게를 두는 것이죠.

 

다시 저의 작품으로 돌아와서

 

저의 작품에 박중원 같은 절대 악의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박중원이라는 캐릭터의 죄악의 크기 따위를 과연 절대 악이라고 말 할 수 있는 크기라고도 생각조차도 하지 않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인간은 악이라고 하는 행위의 크기의 끝을 경험하거나 행동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존재이기도 하거니와

 

정말로 실제로 제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단 하나의 라고 지칭하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용서를 구하려하지 않는 죄뿐입니다.

 

아무리 소소한 죄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하지 않는 죄는

갈등을 종식시킬 수가 없는 죄이기에

너무나도 큰 죄인 것이죠.

박중원이 그나마 대단한 악당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시청자들의 감정적인 요인이라고 할까요.

 

사실 저의 작품에는 절대의 악당도 없지만 절대의 영웅도 없는데요.

그 이유는 승리라고 하는 가치 자체를

저는 저의 인생에서 그렇게 비중이 있는 요소로는 생각하지 않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생각하며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가치는 그것이 충족되기 위하여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필요로 하고

그 중에는 물론 승리도 필요조건에 포함되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랑보다도 더 비중이 있는 요소라고는

절대로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저의 작품상의 원문을 인용하자면

등장인물편의

용사의 설정에 대하여서

 

용사의 이름이 미정인 이유는

해당인물이 실존인물인지 여부를 확인한 적이 없었고

확인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그냥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 같은

어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우리 모두의 고정관념 속에 존재하는

어떤 가상의 용사라는 존재를 형상화 시켰습니다.

별다른 중간과정이 생략된 이유는

그러니까 공포와 증오를 획득하는 과정을 굳이 표현하지 않은 이유가

어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완벽하게 헤쳐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마녀조차도 운명의 도움이 없으면 대장장이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저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이라는 사자성어를 아실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내용이 썩 기분 좋은 뜻은 아닙니다.

 

중국 괴이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포송령(蒲松齡)요재지이(聊齋志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한 선비가 자신보다 변변치 못한 자들은 버젓이 과거에 급제하는데,

자신은 늙도록 급제하지 못하고 패가망신하자 옥황상제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고,

만약 정의의 신이 술을 많이 마시면 선비가 옳은 것이고,

운명의 신이 많이 마시면 세상사가 그런 것이니

선비가 체념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았다.

내기 결과 정의의 신은 석 잔밖에 마시지 못하고,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이나 마셨다.'

 

'옥황상제는 세상사는 정의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에 따라 행해지되,

3푼의 이치도 행해지는 법이니 운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선비를 꾸짖고 돌려보냈다.'

 

상기의 고사 상에서는 그러니까 원작 상에서는

노력이라는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화자는 위의 내용에 어느 정도 동의는 합니다만

그 입장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운명을 이기는 데에는 어떤 결정적인 열쇠 한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곤란한 내용이고

또 그리 기분이 좋은 이야기도 아닙니다.

특정인을 지칭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단지 이야기속의 선비는 상징적인 추상적 자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바로 이런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에 반드시 처하게 되는

어떤 순간을 맞이하는데요.

그 순간에

악마의 속삭임을 듣고 포기할 것이냐

한 번 더 도전을 할 것이냐는

순수한 본인의 선택입니다.

다만 그 결과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작중의 마녀는

운명에게 패배하고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운명이 이에 감동하여 모래시계를 뒤집게 되었는데요.

모래시계라는 설정은 세계관과 용어해설 편을 참조해 주시기를 바라며

단순히 어떤 마음이 없는 순수한 장난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이 운명에게로 반향 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한 방울 이라죠.

이 모든 것은

어떠한 한 개인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순수한 개인의 역량만으로 모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선결되어져야 하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는 내용인데요.

그가 자신의 운명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총합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고 있어야합니다.

(영향력의 행사 가능성은 일단 논외로 하고)

단 한 가지라도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운명을 이길 수가 없고

실제로 마녀 역시도

마지막 수를 두는 순간에 나이트로 승작시키지 않고

퀸으로 승작시켰다가 운명에게 패배하게 되죠.

만약 나이트로 승작시켰다면 무승부까지는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건을 알거나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운명에게 패배하게 되죠.

(운명이 마녀의 사랑을 역이용하여

그 사랑하는 감정 자체를 자극해버리는 방법으로 현혹한 상황이죠)

마음의 순수함은

사람의 용기와 지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쩌면 사건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방해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간의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닌

어떠한 사건의 해결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면

단지 승리만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면

오로지 승리만이 모든 중요한 값어치의 최우선 선결과제가 맞다면,

사랑은 승리를 방해하는 최악의 방해물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승리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녀에게

승리자의 영광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운명역시도 마찬가지였고요.

(마녀는 사랑을 선택했기에 결과적으로 운명을 이긴겁니다.)

(운명이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운명은 깨끗하게 승부의 결과에 승복하고 마녀를 대장장이에게로 안내하여 줍니다.)

(대장장이의 마음의 구속을 풀어 줍니다.)

 

물론 어떤 중간 과정을 합리적으로 재미나게 쓴 작품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 어떤 승리자의 모습을 이야기 속에 써내려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원하는 수많은 승리자의 모습들과

또 그 이야기들과 표본들을 보면서

또 실제 인물들을 보면서

심각한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승리라는 가치에 집착을 하고 있는

어떤 병리적인 심리상태를 그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승리자를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승리를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을 혐오하는 편이죠

 

결국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용사란

승리를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형상화된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라는 용사의 이미지에

최대한 적합하게 부합되는 인물은

실존인물에 있네요.

성웅 이순신 장군님

그분은 진정으로 제가 바라는 용사의 이미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승리가 최우선의 가치여서는 곤란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 = 행복 이라는 가치관에 동의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여러분들의 삶을

아주 간단하게 단 한마디로 정의하여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로 행복에는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승리자이므로 행복하다?

당신 자신을 이 우주 전체에서 아무도 이길 수 없다면

당신은 승리자여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영원이라는 시간동안

진정으로 당신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지지 않고

영원히 승리라는 결과만을 얻을 수가 있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승리의 순간에는 잠시 행복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또다시 지고

그 순간을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의 삶은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당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나 되죠?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 같은데

그들이 당신을 굳이 이겨먹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며

어디 한번 살아봐라 굳이 건드리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내버려두면

그렇게 마리오네트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진정 행복인가요?

 

승리는 행복이고

패배는 불행인가요?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의 정의와

불행의 정의에 대해서

남이 정해둔 가치관과 세인들에 시선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합리적인 기준이 없다면

설혹 성웅 이순신 장군님처럼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어떤 완벽한 승리에 도달했다 하여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아마 그분도 과연 나는 행복한지 자문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아마 징기즈칸 역시도

죽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우리가 야성의 발톱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모든 영화가 사라질 것이다

였다죠?

결국 대원제국은 역사의 사토 속에 묻힌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결국 영원한 승리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야 ...

제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불행하다고 느끼는 겁니다만 ...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고통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거든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각설하고

승리와 패배의 어느 갈림길에서

 

패배를 선택하고 선언하는 일이

절대로 불행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둘은 결코 동의어가 아닙니다.

 

패배를 선언하는 순간의 기분은 굴욕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패배를 선택하는 이유가

당면 과제의 승패 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면 말입니다.

 

가령

이기기 위해서 일가친척을 베어야 한다던가

도박에 승리하기 위해 집문서 땅문서 팔아치우고 무조건 올인을 한다던가

웃기는 이야기들을 예로 들었는데요.

눈앞의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팔아치우는 것들입니다.

 

고통

 

승부라는 것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 순간에는 오로지 승리라는 명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인생에서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보편적 가치들마저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싸구려처럼 팔아치우게 됩니다.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일보후퇴 이보전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앞에서)

마지막의 순간에 상대에게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상대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모조리 짓밟아 버리는 비인간적인 행동들

모욕은 애교고 폭력도 심심찮게 동원 되죠

양심을 속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들도

그냥 단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모두 싸구려로 팔아버립니다.

 

...

행복하세요?

 

윤리도 도덕도 가치관도 가족들의 명예와 눈앞의 상대의 고통과 자신의 양심,

모두를 다 배반하더라도 심지어 당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던지더라도

 

그냥 이기면 행복 하세요?”

 

당신의 별이 아마 그 순간 진정 행복했는지

당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할겁니다.

그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때까지

 

어떤 선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승리는 더 이상 소중한 가치가 아니게 됩니다.

그 선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세상에는 그 선에 대한 참조하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하고 또 많은

수많은 보편적 가치관이라고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아까워한다면

당신의 가슴이 필요로 하는 그 눈물을

타인이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눈물은

아무리 빼앗아도

절대로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가슴이 허전한 이유입니다.

 

스스로의 가슴이 필요로 하는 눈물을 흘리고

스스로의 가슴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그 눈물을 마셔줄 수 있는 존재도 없고

대신 흘려줄 수 있는 존재도 없습니다.

란 그토록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영도씨의 세계관과 저의 세계관이 명백하게 상치되는 이야기이죠.

 

완벽한 희생이 불가능하기에

사랑도 믿음도 그 크기에 끝이 있을 수가 없고

그 크기란 서로가 느끼는 호감의 크기에 비례하여

함께 살아온 세월에 비례하여

끝없이 그 크기가 커집니다.

 

미움역시 마찬가지이죠.

 

감정이란

심상의 세계란

결국 자아와 자아가 완벽하게 별개의 존재이기에

서로간의 감정의 크기와 심상의 세계의 크기는

우주만큼 광대무량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작품상에

거창하게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마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량의 세계를 뛰어넘는 마력으로

상식을 초월하는 마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5

다른 내용으로는 세계관에 대한 용어해설편의 말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패배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승리 할 것인가

승리를 위하여 어디까지 내어줄 것인가

혹은 어느 지점에서 포기 할 것인가

 

작가의 스타일이란 결국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불가능성이라는 벽에 부딪힐 때 까지

추진과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불가능성이란

현실상의 법제도

혹은 금전적인 한계

어쩌면 용기의 부재나

자아와 사회의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착각

심리적 불안요소 등에 의한 선택의 기로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황 등이 있겠지요.

 

이것은 거의 인간에게는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불가능성의 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벽은 비단 예로 든 상황들 외에도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에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지점들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인생의 어느 지점들입니다.

작가의 스타일이란

 

사실 어떤 착각이나 망각 혹은 인지능력의 상실

육체적인 능력이 상실감을 겪을 정도의 혹독한 스케줄, 또는 상황

사회의 법이 벌을 주겠다고 정해놓은 선

실질적인 금전의 부재라는 상황까지 내몰리기 전에는

당면 과제를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를 선택하려다가

당면과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혼란의 범주에 들어가므로 이 역시도 착각의 범주에 둘 수 있겠군요.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기준에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이 되겠죠.

평생을 이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입니다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러한 순간에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패배를 선언합니다.

이유는 저의 삶을 지켜야 가족들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패배의 기준입니다.

 

다만 대인관계에서 까지

저런 말도 안 될 정도의 가혹한 기준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지점들에서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승리 할 것인가?

패배의 기준을 승리의 기준보다 먼저 세운 이유는

승부는 마약과 같다는 내용에 대해서 등장인물 편에서 이미 설명을 마친 내용이므로

이부분은 생략하고

바로 마약에 취한 것 같은 승부의 순간에서

정말로 운명에게 지지 않으려면

생을 지키려면

 

먼저 어느 지점에서 포기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기라는 행동은 당연히 말 그대로 포기입니다.

당면 과제 그 자체를 영구히 상실하게 될 지도 모르는 사건이죠.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에

마치 이 승부를 계속하면 초자연의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힘이라도 줄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확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통계학적으로 볼 때 이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당면 과제를 상실하는 것보다

그것을 잃어버리더라도 그 대가로써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우리가 포기를 선언하고 패배를 선언 할 경계선입니다.

 

이 선을 높게 설정하든

낮게 설정하든

어디에 설정을 하거나

무엇으로 설정을 할 것인가는 온전히 개인의 자유이고

 

이 선이 꼭 반드시 언제나 지켜져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이 선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거리낌 없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패배를 선언 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이 패배라는 선을 정해둔 뒤에

승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승부 그 자체가

생을 삼켜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상대와의 투쟁이라도

이 투쟁이 1020년 인생의 교류의 문제로 이어지거나

사회의 공공의 문제로 확대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자 끝은 정해두었습니다.

이제 시작지점을 정해야

승부라고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은 언제나 처음과 끝을 올바르게 설정 한 뒤에 시작해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다.

 

완성된 그림의 처음과 끝이

시작지점의 그것과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이 불확실성의 판단 기준 속에서도

처음과 끝을 정해 놓고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이 승부를 시작하는 그 시작 지점은 어디인가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마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승부를 시작하는 지점이 됩니다.

 

작가에게 이 승부의 시작 지점이란

사랑을 방해받고 미움을 받게 될 때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게 될 때입니다.

당면 추진과제가 좌절을 겪을 때도 포함 됩니다.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싶을 때입니다.

 

결국

인생을 위하여 언제나 승부를 하지요.

 

여러분들의 승부의 끝은 어디까지 이며

시작 지점은 무엇을 위하여입니까?

 

그 승부의 모든 중간 과정들 상에 채워 넣게 될 모든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행동을 구속하여 세계의 선택의 기로에

모든 확률을 신의 불확실성에 추가시킨 사건

또 다른 엔트로피의 증가 전체가 되는데

 

당신이 승부에 임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운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게 지지 않는다.

라는 작가의 주제가

운명과 우리가 실제로 승부를 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닙니다만

그럭저럭 치환은 됩니다.

 

다만

승부의 관점을 떠나서

어쩌면 우리는 운명 또는 신에게

우리의 선택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을 전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선을 세우는 기준은 독자제현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생을 살고 스스로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도

역시 독자제현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이미 선을 세우신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상대와 나의 선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승부로 점철되는

아수라도의 삶과 같은 지옥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명확한 사실은

고통의 증가는 절대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마음의 고통이 행복이 되기도 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받는 주체가 나인가 타인인가에 따라서 말이죠.

상대를 미워한다면

나의 고통은 불행이고 타인의 고통은 행복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나의 고통은 행복이고 상대의 고통은 불행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객체가 서로 인연으로 엮여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곤란한 경우를 겪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 명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줄 이유는 없습니다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도

누군가를 미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도

누군가는 사랑하게 됩니다.

 

온 세상 전부를 다 사랑하거나

온 세상 전부를 다 미워하거나

 

불가능한 거 아시죠?

호감도 미움도

우선순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꼭 자로 재듯이 칼로 끊듯이 명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손익의 관점에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죠. 언제나

마음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구속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0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 각자가 살아온 운명의 길속에서,

그들 각자가 운명의 질문에 내어놓은 답안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질서의 유지의 필요성의 차원에서 어떤 규범의 틀을 세울 수 있고

그 규범의 틀을 근거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일말의 동정조차도 없이 완전히 미워하기만 해도 되는 그런 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역은 있어도...

 

그렇게 누군가를 완전하게 미워하고 싶어지는 바로 그 마음이 사탄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단 하나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단 하나뿐인 진리이자 절대적인 선의 개념이

타인을 향한 호감그 자체라면 (마녀 ~ , 선미 ~ )

 

그와 반대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 할 죄란

마음속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상대를 용서하려하지도 않는 것,

상대를 용서를 구하려고 하지조차도 않는 것,

주는 용서를 받지도 않는 것,

 

완벽한 단절은 곧 완벽한 슬픔이고,

용서를 주더라도 받지를 않는 것이기에

받을 수가 없도록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기에

용서받지 못할 단 하나의 죄

곧 사탄이 됩니다.

 

제발 마지막의 순간에

용서를 구하기 위한 1초의 순간을 찾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러한 미움을 영원히 유지 할 수 있는 존재도 없거니와

모두에게 이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다못해 아끼는 애착의 대상조차도 없는 그런 인간은 실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의 작품상에 박중원 같은 절대 악의 캐릭터는 등장을 하지 않고요.

박중원 조차도 사실은 왕여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므로

절대 악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죠.(권력에 대한 애착으로 바꾸더라도...)

 

용사 역시도 완전무결한 승리

곧 폭력을 통한 의지의 관철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폭력 자체가 단절이므로

결국 실존 불가의 캐릭터가 맞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사탄처럼 피어나는 미움이라고 하는 악을 없애야

진실로 행복과 진리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이란

모든 사람들을 용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리하여 보다 많은 눈물을 끝없이 재창조하면서도,

그 모두를 쓸모없는 돌멩이라도 되는 양

우리의 눈을 가려버리는 냉혹하기 짝이 없는

얼어붙은 채 불타오르는 차가운 태양,

 

물론 어떤 눈물들은 그조차도 이겨내고 스스로 보석이 되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현실이 바뀌는 것이 불가능한 문제이므로

이 눈물을 제련 할 수 있는 슬픔의 대장장이라는 캐릭터가 필요해졌고

대장장이는 차가운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을 녹여낸 진정한 논리라고 하는 마법의 무구들로,

이 눈물들을 제련하여 하나 둘 씩

우리에게 필요한 마법과도 같은 찬란한 도구 혹은 또 다른 마법의 무구로써 하나씩 재탄생 시키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무언가로 탈바꿈 시켜서

사랑을 제련해 냅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마법을 원했던 마녀에게,

그 누구도 제련 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답답한 현실과도 같은,

극도에 다다른 배타성의 결정체

즉 아다만타이트가 그녀의 손에 쥐어지고,

 

그것이 슬픔을 제련하는 것이 가능한 슬픔의 대장장이의 손에 의해서,

비로소 얼어붙은 태양조차도 베어낼 수 있는 소망의 검이 됩니다.

 

사탄을 베어낼 검이었죠.

 

사탄이 고정된 객체가 될 수는 없고,

단지 개념의 정립 정도는 가능한 우주적 본질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위치가 하늘 꼭대기의 태양을 차지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베어내자

마침내 진정한 마법의 태양 헬리오스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마녀와 대장장이도,

그리고 사탄을 마음속에서 몰아낸 모두와 함께

새로운 운명의 벽을 마주하는 시점에서 스토리는 종결됩니다.

 

이상의 내용들의 설정은 등장인물 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 되어져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어째서 그 분노의 망치아래 내려쳐짐을 당하는 슬픔이

인내의 모루위에 떠받쳐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대장장이가 사랑을 빚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라고 하는 결과물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분노라는 수단을 선택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상황의 어떤 변화를 주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이 대장장이의 목적이 절대로 아님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 모든 분노와 악영향을 통하여 변질된 그 악화된 모든 상황들과 슬픔들을

대장장이가 스스로의 인내로 감내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었죠.

그 모든 슬픔들과 분노로 인하여 내려쳐짐 당한 그 모든 고통들을

대장장이의 인내가 떠받치고 감내하게 됩니다.

어쩌면 영원한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한

어떠한 원동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열정이 등장을 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열정이라는 원동력을 지피면서

사랑이라는 결과를 빚어내는 마음을

대장장이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 모든 고통과 눈물의 과정들

대장장이가 사랑이라는 결과를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의 몸이라고 하는 어떤 마음의 주체에

(사실상 대장장이 자체가 화자의 분신이자 마음의 형상이므로

대장장이의 몸은 결국 화자의 마음이죠)

수도 없이 상처를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 모든 슬픔의 과정들은

실질적으로

작은 마녀가 그토록 원하였던 사랑을 얻기 위한 핑계거리

어쩌면 모든 사건의 시초가 될지도 모르는 작은 마녀의 어떤 작은 바람

처음에는 강력한 마법의 무구를 얻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이지만

그것이 온통 배타성으로만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임이 밝혀진 후

마녀가 얻게 되는 실망

어쩌면 이 배타성을 녹여내어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대장장이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마녀가 소망하였던 것은

강력한 마법의 무구가 아니라

어떤 사랑에 대한 갈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바람을 담아서 작품을 구성하였죠.

 

아무튼 마녀가 대장장이를 찾아서

신화적인 여행을 떠나게 되는

작은 하나의 핑계거리였던

소망의 검을 완성하면서

모든 분노와 인내와 소망과 열정들이

모조리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게 됩니다.

어차피 그것들은 처음부터 대장장이의 것들이었으니

언제고 대장장이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다면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처음의 그 소망도 아니게 될 것이며

처음의 그 분노도 될 수 없고

처음의 그 열정이나 인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어떤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을 묘사하는 이 상황이 암시하는 것은

제가 수년전

다음 블로그 자체를 갈아엎어 버리면서

이 작품 그 자체를 모조리 없애버렸던 어떤 사건을 암시합니다.

명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은 원작이 아닙니다.

원작은 화자조차도 그 내면에서

결코 그 본래의 형상이나 표현들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소망의 검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이 작품은

사실상 두 번째로 써진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작은 마녀로 표현되는 송선미씨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는

슬픔의 바위사막 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다시 쓰면서

어떤 설정이란 것에 유의하며 작품을 구성할 목적으로 쓰다 보니

처음의 원작이 가지고 있던 어떤 신비한 느낌이나 로망 같은 것이

굉장히 많이 희석되어져 버렸거든요.

송선미씨를 향한 화자의 내면에 최초로 지펴졌던

어떤 사랑의 불씨와도 같았던 원작이

본래의 의미와 형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이 사건이

슬픔의 바위사막 편에 등장하는

도저히 화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과 설정으로 점철된

슬픔의 바위 사막편이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수정을 하여도

화자 스스로 표현과 설정이란 것을 염두에 두게 되었고

도저히 처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나지를 않네요.

 

다만 원작 상에도

그러니까 최초의 원작 상에도

작은 마녀는 등장합니다.

 

아무튼

처음 화자가 내면에 지폈던 소망의 불꽃도

분노의 망치도

인내의 모루도

열정의 풀무도

사실상 이미 오래전에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 것들이며

화자의 마음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게 되는 어떤 사건이 던져주는

어쩌면 신성을 향한 걸음이 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도저히 불가해한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처음의 그 마음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의 표시입니다.

머리말의 환상적인 난해함이 이제 좀 이해가 되시는지요.

 

단지 멋이나 부리려고 써진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없습니다.

모두 그 감정의 마디마디가

올올이 솜털 하나까지 곤두서는 화자의 내면상의 슬픔과 고통

사랑을 향한 진정으로 순수한 갈망에서부터 비롯된 이야기들이며 작품들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작품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며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단 한 번도 진정이 아닌 위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자의 양심에 향하여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모든 우연의 일치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처럼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진심어린 표현의 선택들이

정확하게 계획에 맞는 설정들이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모든 설정들은

화자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지어낸 설정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믿거나 말거나

완벽한 우연의 일치들입니다.

저는 기법이나 어떠한 기본적인 설정들

그리고 어떤 계획이나 문학의 형식 그 자체를 벗어던져버리고

모든 것을 처음의 순수함을 되찾고자하는 단 하나의 염원으로

진실한 제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들을 표현하였으며

이 선택들에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결정을 되돌리지 않고

10년이라는 시간을 이 한 작품에 투자하면서

실질적으로 모든 설정들이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계획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마녀가 대장장이를 찾아 처음 슬픔의 바위사막에 도착하였을 때

모든 슬픔들과 소리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져

정신질환자를 미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돌의 미로에 도착하고

미쳐버린 풍신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거센 바람을 마주치는 사건들

마침내 대장장이가 슬픔을 제련하던 진정한 무기인 분노를 찾게 되는 설정들

그리고 마녀가 이 분노를 달래주고 상황의 악화가 아닌

진정으로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표현되는 내용들

그 모든 표현들이 바로 이 작품 그 자체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이러한 화자의 내면을 알아주고 인정하여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선택된 어휘들이고 표현들입니다.

 

이 모든 설정들은

그 의미가 아닌

처음부터 바로 그러한 의미의 감정들을 설정하여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감정으로 모든 표현과 상황을 설정했던 것입니다.

이해와 논리의 구성은 그 뒤에 따라오는 일련의 사건들일 뿐이었죠.

 

예술이란 결코 논리와 이성으로부터 비롯된 기술이 아니라

감성으로부터 비롯되어 감성의 충족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는 필자의 신념을

저는 이 작품으로 증명해내었다고 자부합니다.

 

조금 허무하실지 모르겠는데

화자가 생각하는 완벽한 논리란 그런 것입니다.

어떤 당면과제와 사건은 모든 편린들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그 모든 사건들의 총체적인 정보 모두에 대하여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라고

어떤 자신의 내면의 양심 앞에서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뜨거운 가슴이 없이는

절대로 논리가 제대로 구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뜨거운 가슴이 없는 잔머리만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은

결국 머리를 쓰다가 궤변을 늘어놓게 되죠.

나카가와 나츠미에 이미 등장하는 내용입니다만

완벽한 논리란

결국 완벽한 양심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물론 필요조건이고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만

이 필요조건이 결여된 논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궤변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참이 되는 명제입니다.

 

긴 나이프의 밤 이라는 제목은

어떤 역사적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제목입니다.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묘사 되는 인물이라면

아마도 이구동성으로 히틀러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히틀러 하면 떠오르시는 게 친위대일 겁니다.

SS 라고 하죠.

이 친위대의 전신이 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아직 정권을 완벽하게 잡기 전에

친위대가 창설되기 이전의 상태에 있었던 어떤 집단이 있었는데요.

 

미드 V 에 보시면 외계인들에게 협조적인 상태가 되는

민간인 청년들의 어떤 단체가 조직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바로 그 단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단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개인의 욕망과 권력을 향한 집념으로 탄생한 이 단체는

실질적으로 인간쓰레기들이라고 불리어 마땅한 불량한 젊은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정권을 유지시킬 목적으로 조직 되어

수없이 많은 불법적이고 초법적인 폭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단체의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돌격대가 맞을 겁니다.

돌격대가 나중에 친위대로 발전을 하지요.

이후 게슈타포등도 창설 되고

 

네 우리나라의 모 단체와 완벽하게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죠.

 

이들이

실질적으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던 그날 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실제로 죽였는데요.

그 밤을 긴 나이프의 밤이라고 역사가들은 지칭합니다.

 

대장장이가 처음 슬픔의 바위 사막이라고 지칭되는

가상의 심상의 세계에 도착 한 그 날 밤

바로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제목이었고.

실질적으로

지난 시간동안

이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모든 의문사와 대형사고

어떤 음모론과 연계되는 수없이 많은 죽음들은

본질적으로 긴 나이프의 밤과 동일한 역사적 사건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화자의 내면에서 발생한 수많은

자신이 흘린 눈물에 깔려 죽어버린 사람들이란

어떤 무형의 가치들에 대한 소중한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감정적으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5

 

모래시계의 개념을 설명 드리기에 앞서서,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미쳐 명확히 다루지 못하고

모호한 영역으로 남아버렸던 책임감이라는 것에 대하여서는

별도의 장편 소설인 나카가와 나츠미(那賀川 夏美) -부제 무궁화 꽃은 피었습니까?’

에서 별도의 개념을 정립한 뒤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편에 그 내용을 삽입하였는데요.

 

소설 자체는

 

2016714

715이 생일이셨던 후지이 미나(藤井美菜)’ 양에게

생일 선물로 작품을 완성하여 선물해드렸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저의 다음 블로그에서

후지이 미나양 카테고리와 장편카테고리 두 곳에서 약간 다른 버전으로 확인이 가능하십니다.

 

후지이 미나카테고리 작품

http://blog.daum.net/japhikel/894

 

장편카테고리 작품

http://blog.daum.net/japhikel/910

 

책임감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느끼는 고통을

내가 구원하고 싶은 마음 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그 구원하고 싶은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이 가능하지만요.

 

가령 어미 문어가

자기 자신이 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알을 지키는 모성본능을 발휘하는 모습이라던가,

어미 거미가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그 첫 식사로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행동들도,

비록 그것들이 무얼 알고 이해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어떤 본능이라고 하는 충동적인 감정적 지향을 따라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바로 그것이 책임감의 원형이므로

결국 책임감이란 어떠한 고통에 대한 자아와 타인간의 교감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절대 이성적인 어떤 논리구조나 이론에 따라서

진실한 감정을 배반하고 저지르는 위선의 개념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원문을 인용하자면

 

다음의 편지는 2016.9.19. 후지이 미나양에게

그림과 함께 전달한 편지내용을 수정하고 내용을 첨가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비겁함을 간직하고 있지요

누군가가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그 사람의 과거도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작은 허물들도 함께 끌어안을 때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분명히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일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더 이상 그 찬란한 빛을 뿜어내지 못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버리시겠습니까?

지금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는 그 사람도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영원히 그렇게 빛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책임감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할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어미문어가 100일이 넘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자신의 알을 돌보는 이유도

어미 거미가 자신의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주는 이유도

그 녀석들이 윤리나 도덕을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새끼들이 고통 받는 것이 싫은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달콤한 시간들의 뒤에 숨겨놓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이 싫어서라도

그 책임감을 져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 비록 지금 당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원히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하여도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놓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버리기 전 까지는 절대로요

여러분들도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건네 드립니다.

아마 독자 여러분들의 아버지도

여러분의 어머니가 더 이상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때

단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여러분들의 어머니의 손을,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런 남자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모든 사람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실제 그림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029

 

이 고통에 대한 교감이라는 표현 자체도 요즘 도용사례가 많이 보이구요.

 

마지막으로

운명의 모래시계의 흐름의 방향성에 대해서,

즉 운명의 흐름의 방향성에 대해서,

그 내용을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꽤나 비중 있게 다루었는데요.

운명의 흐름의 방향이, 배타성에서 호의의 방향으로, 혹은 그 역으로 흐름의 방향성이 변화한다는 개념인겁니다.

이 때 물극필반의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을 드렸는데요.

다만 해석에 주의하실 부분은

배타성 또는 호의가 극에 달하여 모래시계의 방향성이 뒤바뀐다는 표현이

운명의 모래알갱이가 끝까지 다 떨어지게 되어서 뒤바뀐다는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

 

배척과 다른 배척이, 또는 호감이 다른 배척과

서로 정면으로 격돌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지칭합니다.

이 때 배척이나 호감의 크기 따위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 되는데요.

 

마녀와 대장장이가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장면을 예로 들면,

그야말로 마녀도 대장장이도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는,

광활한 슬픔의 바위 사막 전체에서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 살아온 인생과 걸어온 운명의 무게만큼의 크기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생각들이,

그 배척과 배척이 서로 격돌 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바로 배타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라고 작중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의 인생은 앞으로도 무한할 것이기에

떨어지는 운명의 모래알갱이가 다 떨어져서 배타성이 극에 달하는 그런 사건은,

운명의 모래시계에서는 절대로 발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운명의 모래알갱이는

그 흐름의 방향성이나 역전의 여부

남아있는 모래알갱이의 양의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게

무한하게 떨어져 내리기만 하여

고스란히 신의 마음에 퇴적되기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표현되는 배타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란

마침내 마녀가 대장장이를 찾아내어 다시 만나게 된 그 순간에,

마녀가 대장장이를 향하여

우리 함께 갈래요?”

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이라고 명시되어져 있습니다.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태양이 후광처럼 뒤에서 빛나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만 같은 표정의 마녀의 얼굴이죠,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상처받기 쉬운,

순백색의 장미꽃잎 같은 여린 마음을

상대에게 드러내 보여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정말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도 아니면서,

행복과 슬픔의 그 어느 쪽의 결과를 불러올 선택이던지,

그보다 더할 수는 없는 단 1

누구나 다 이 순간이 그 순간임을 알아보라고

바로 이 순간이 그 1초의 순간이라고 명시까지 해두었죠.

 

모래시계의 역전이란,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하듯이

그동안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고,

용서와 화해를 통한 갈등의 종식만이

이러한 결론으로 슬픔의 대장장이와 마녀를 이끌어줄 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대장장이의 소망의 검으로 각자의 운명의 벽과 마주 할 수 있게 된

우리들 모두 또한 그러한 결론으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문을 인용하자면

 

운명이 항상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하편 下篇(Fate is always passed questions at us. the third volume)

슬픔의 바위 사막 제 21(Rock desert of sorrow part. 21)

부제副題(Subtitle) - 소망의 검所望之劍(The sword of the wish)

 

기나긴 각자의 삶이

서로 다른 악기처럼 상반된 선율로 흐르다가

마침내 하모니를 이루기 직전인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우주공간속을

세찬 격류처럼 흐르는 세계의 주마등(走馬燈) 속에서

 

마녀와 대장장이가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어.

 

마녀의 가슴속을 흐르는 그 격한 감동이

마치 그들 사이로 흐르는 광대한 우주의 기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지

하지만

마녀는 차마 대장장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 할 수 없었어.

 

그는 지금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과

이제 막 결별을 한 상태거든

 

피로한 표정의 대장장이

그리움의 주인공과 마주하던 그 앳된 소년의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

고독이 창문 넘어온 달빛처럼 배어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살짝 올라간 입 꼬리

자조(自嘲) 섞인 표정에 스며들고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을 깨고

대장장이가 마녀에게 질문했어.

 

만월(滿月)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당신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고민과 고뇌

지독한 사랑의 열병이

이제 나에게서 비켜나려 하는 것 같군요.

 

이 고독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는 결심 했었습니다.

이대로 나의 삶을 종식시키기로

나의 세계를 여기에서 그만 닫아버리기로

나를 시해(弑害) 함으로써

나의 세상을 시해하기로

나를 둘러싼 그 모든 유의미한 것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기로 말입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은 내가 그토록 바라고 갈망하던

그녀의 한줄기 미소

나를 향한 따스한 한마디의 말

가장 부드러운 한조각의 호의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나 자신 스스로는 결코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던

그녀와 나 사이의 우주적인 거리를 좁혀서

한 발자국 거리까지 서로 다가오도록 해주었습니다.

비록 내가 그 최후의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의 호의를

그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요.

무언가 당신에게 보답을 해 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질문 이었을 거야.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데

그 남자가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냐고 질문해오면

내가 죽도록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해야 하나?

 

마녀의 목젖 바로 한 치 아래에서

끝끝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결실을 맺지 못한 낭화(浪花)

 

전 우주의 지배자

운명의 앞에서도 당당했던 용감한 소녀

마녀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저 한낱 여인

수줍음에 어쩔 줄 모르는

가장 순수한 소녀

 

전 우주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의지를 강제할 때조차도

그녀는 그 어떤 이야기속의 용사보다도 용감하고 지혜로웠지만

대장장이의 앞에서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갈대와 다를 바 없었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꺼냈어.

 

일단 우리 이 장소에서 나가도록 해요

 

초라하게 피어난 백일몽의 불꽃 속에

냉혹한 태양의 조각이 스며들고

이내 첫눈의 설렘이 안개처럼 흐르던

몽환의 숲은 사라지고

가장 처참한 인세의 지옥도가

멈춰진 시간아래 정지된 장면으로 온 세상 가득히 펼쳐진

슬픔의 바위사막으로 바뀌었어.

 

싸우고

약탈하고

약탈당하고

굶어죽고

살해당하고

살해 하고

서로의 사체(死體)

한조각의 인육(人肉)을 목구멍 안에 우겨넣고자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 모든 지옥도가

억수 같은 빗줄기와 함께 모조리 정지되어버린

냉혹한 태양이 먹장구름 뒤에 숨어있는 세상

세상 가득히 만연해 있는 모든 미움들이

이곳에 모조리 모여 있는 것만 같았어.

 

마녀는,

분위기가 밝아지기는커녕

장소가 더욱 안 좋아진 것을 느꼈지

 

대장장이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대지에

무릎 꿇고 입맞춤을 하고 있었어.

눈물 흘리고 있었지

슬픔의 바위사막을 지배하는

냉혹한 태양조차도

결코 그것을

쓸모없는 바위로 만들지 못했어.

진정으로 뜨거운 한 방울의 눈물

마녀는 문득 아다만타이트 지팡이가 생각났어.

 

그래,

그에게 무언가 일거리를 주자

이 멈추어버린 시공간이 언제다시 움직일지 알 수 없지만

정지된 세상 속에서 그의 모든 감정을 소모시키자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대장장이가 마녀를 뒤 돌아보았어

마녀는 아다만타이트 지팡이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어.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이것의 이름은 아다만타이트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그 어떤 마법의 불로도 제련할 수 없는

진귀한 마법의 금속이에요.

 

하지만

누구도 제련할 수 없는 단단함은

저에겐 아무 쓸모가 없는 단단한 몽둥이에 불과할 뿐이죠.

 

나는 마녀에요

이것으로 마법의 무구를 만들기를 원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의 불꽃과

분노의 망치

인내의 모루라면

 

그것들이라면

어쩌면 이 쓸모없는 배타성의 극의

가장 불연속적인 이 물질에

마법적인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나요?”

 

결코 진심이 아닌 부탁에

대장장이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하여

정지된 세상 속에서

고독한 망치질이 시작되었지

 

대장장이는

진정으로 자신이 소망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힘으로 소망의 불꽃을 최고로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었지

필생의 열정을 다해 풀무질을 하여

불꽃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어.

 

한사람의 의지로 우주를 뒤흔든 유일한 소망이

그만큼의 열정의 날개를 달아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그 무엇에도 결코 변화 하지 않는다는

허구(虛構)의 영원불멸(令媛不滅)성이

점차로 붉게 달아올랐어.

 

마침내 태양처럼 빛나는 달아오른 아다만타이트를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라 해도

다시는 발휘 할 수 없는 인내심의 위에 올려놓고

결코 두 번 다시 타오를 수 없는 분노의 불꽃으로

온 힘을 다해 내려치기 시작한 거야.

 

내려치고, 내려치고 내려치다

식으면 다시 소망으로 달구고

열정으로 불을 지피고

다시 내려치고, 내려치고, 내려치고

 

이제 그녀도 떠나갔고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정 내가 바랐던

그 모든 비원(悲願)이 모두 이루어졌음에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뿐이구나

떠나가자

처음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감했을 때

기어코 스스로의 목에 차가운 칼을 꽂아 넣었던 그 마음

그 순간의 바람을

이제 현실로 이루어 내자

 

대장장이는 힘차게 열정의 풀무를 움직였어

소망의 불꽃이 새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마녀의 아다만타이트를 제련하고 있었지.

 

그 때 운명이 대장장이에게 이야기 했어

 

너는 결국 네가 바랐던 대로

그녀에게 너의 젊음을 온전히 건네어 주었다.“

 

왈칵 쏟아지는 대장장이의 눈물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려

대장장이는 도저히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어깨를 들썩거렸어

 

대장장이는 자문했어.

 

나 잘 한 거 맞는 거지?’

 

애석하게도 운명은 더 이상 대장장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망치질은 결코 멈추지 않았지

마치 스스로를 제련하고 담금질 하듯이

대장장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기세로

마녀의 아다만타이트를 제련했어.

 

그랬어.

그는 그녀를 사랑하던 그 마음 그대로를 투영하여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녹였고

흐르는 눈물은 더 이상 냉혹한 태양아래 바위가 되지 않고

그 순결한 빛깔 그대로 대지를 향해 떨어져 내렸어.

그는 정말 미친 듯이 울었어.

도저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눈물을

하루 종일 몇 날 며칠을 흘렸지.

그동안 이 슬픔의 바위사막에서

눈물에 깔려 죽을까봐 숨죽여야 했던

그 모든 인고의 순간들이

올올이 눈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어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어진 해방감에

그는 마음껏, 실컷 울고 또 울었어.

 

멈추지 않는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

대장장이는 검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제련하여

그 어떤 불에도 녹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고

그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불연속을 초월하여 연속성에 가까운 존재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닿을 수 있고

있을 수 없는 시간에 있을 수 있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보이지 않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세상을 베어낼 수 있는 검으로 만들려고 해

어쩌면 분노와 인내가 먼저 부서져 버릴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이 검을 만들고 나면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테니까

소망의 불꽃도 꺼버리고

열정의 풀무도 치워버리고

분노도 인내도 놓아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가려해

 

소망의 불꽃 속에서

아다만타이트는 마법의 금속이 되었어.

마력을 지닌 이의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낼

강력한 마법의 매개체가 되었지

풀무질을 할 때마다

무한한 열정을 전달받고

인내의 모루 위에서

분노의 망치로 단조 되면서

검은 한없는 인내심과 분노를 전달 받았어

이제 그 무엇으로도 이 검을 상하게 할 수 없고

이세상의 그 무엇도 이 검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게 되었지

 

검이 완성되자

자신의 모든 것을 검에게 빼앗긴

인내의 모루와 분노의 망치는

새하얀 먼지들처럼

바람결에 흩어져갔어

다시는 품지 못할 분노와

더 이상 발휘할 수 없는 인내심이

먼지처럼 바람결에 흩어져갔어

다시는 켜지지 않을 소망의 불꽃도

그 힘을 잃고 천천히 수그러들었어.

온 힘을 다해 움직인 열정의 풀무도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어.

대장장이는

더 이상 대장장이일 수 없었어.

 

마침내

소망도

열정도

인내도

분노도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눈물도

 

모두 먼지처럼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 모든 일장춘몽(一場春夢)을 제 몸에 아로새긴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이 완성 되었어.

 

마녀가 검을 받아들었어

 

소망의 검,

이 검을 소망의 검이라 부르겠어요.”

 

무한한 열정을 품은 검

자신을 손에 쥔 이가 소망하는 것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검

 

보일 듯 말듯 반투명한

자신을 손에 쥔 이가 소망하는 그 모든 것을

현실에 구현 시킬 수 있는 최강의 아티팩트Artefact

대장장이가 살아오며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

 

마녀는 소망의 검을 받아들었어

그것은 롱소드longsword 형식의 아름다운 검

만질 수 없어 그 어떤 검집도 품을 수 없는 이상한 검

검이 품고 있는 파괴의 본능이 너무 강렬해

무엇으로 감싼다 해도 저를 품은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난처할 정도로 올곧은 정직한 검

그 형체가 규정되어있지 않아

똑바로 바라보아 모습을 가늠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검

불가해(不可解)의 검신(劍身) 아래로

아름다운 문양이 돋보이는 가드gaurd

둥근 고리 형태의 폼멜pommel

검은 아름다웠어

소녀는 백일몽의 불꽃 속에 소망의 검을 납검(納劍) 했지

 

대장장이가 검을 만드는 동안

모래시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슬픔의 바위 사막에

다시금 냉혹한 햇살이 떠올랐어.

 

찬란한 태양빛 아래

역동적인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춤사위

 

그러나 누구도

마녀와 대장장이가 있는

소망의 화덕 근처로 다가올 수 없었어.

 

세상에 만연한 슬픔을 마주한 마녀가

한줄기 불꽃 속에서 피어난 소망의 검을 꺼내어

하늘위에 괴기스럽게 타오르는 냉혹한 태양을

그대로 갈라버렸어

 

전설속의 영웅 예(羿)

신병(神兵) 사일적천궁(射日赤天弓)으로

아홉 개의 가짜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것처럼

 

슬픔의 바위 사막을 지배하던

눈물을 바위로 만들어버리는 냉혹한 태양이 그대로 베어지고

마법의 태양 헬리오스가 그 자리에 나타났어.

세상은 다시금 헬리오스와 셀레네의 주목을 받게 된 거야

 

마녀는 소망 했어

이곳에 가득찬 모든 슬픈 사연을 가진 이들이

진정으로 모두 자신들의 행복과 마주할 수 있기를

그들이 진정으로 소망하던 그 모든 것들과

당당히 대면 할 수 있기를

더 이상 감정의 굶주림과 이성의 목마름으로

서로에게 상처 입히게 되는 일이 없기를

 

소망의 검이 찬란하게 빛나며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도록 했어

그들은 이제 모두 각자의 운명과 마주하게 될 거야.

 

진정 신()의 이적(異跡)과도 같은

그런 기적을 일으킨 두 사람

 

어느덧

눈물을 그치게 된 대장장이는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지금 여기 서있는 것은 그냥 빈껍데기

더 이상 아무것도 소망 할 수 없고

무엇에도 슬프지 않고

무엇에도 분노하지 않아

인내심? 그건 도대체 뭐지?

 

다시 떠나갈 거야

이름 모를 정류장에서

나락(那落)의 버스를 타고

이곳 슬픔의 바위 사막에 도착 했던 그때처럼

떠나가다 보면 도착하겠지 삶의 종착역(終着驛)으로

 

그런 나의 손을

마녀가 붙잡았어.

 

마치

몽환의 숲에서

그리움의 주인공이

나에게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네었을 때

내가 지었던 표정 같은

상처입기 쉬운 앳된 소녀의 표정이 그 자리에 있었어.

 

그녀는,

 

내가 살아오며 보았던 그 어떤 햇살 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태양 헬리오스의 빛을 머리의 뒤에 후광처럼 두르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으며 나에게 이야기 했어

 

나와 함께 가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표출 되지 못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웠던 소녀의 감성

 

끝끝내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억눌리고 억압받고 스스로도 자신조차도

가능성 없는 일이라며 포기해야 했던

가장 하찮게 취급되어진 자신에게

진정으로 자유를 주기 위한 행동

모든 가식과 거짓과 기만의 옷을 벗어던지고

상처입기 쉬운 가녀린 속살을 내비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털털이의 남자에게

아름다운 소녀가 건넨 단 한마디의 언어

 

그동안 내가 슬픔의 바위 사막에서 흘려 왔던

필요에 의해 흘려온 한 방울의 눈물의 정체

 

남녀의 서로 다른 소망이 마침내 교차하고

운명이 하늘로 주사위를 던지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종말로 이끌 수도 있는 소망의 검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결코 개입할 수 없는 1초의 순간이야

 

내가 마주했던 그 햇빛은,

눈물과 함께 떠오르곤 하는 그 찬란한 햇빛은,

그런 것이었어.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6

 

대장장이가 그리움의 보석을 향해 본의 아니게 망치를 휘두르게 된,

그 짧은 최악의 비탄의 순간도 1

운명이 마녀에게 자신이 찾아 헤매었음을 고백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도 1,

그리고 마녀가 대장장이에게 고백하고

대장장이가 거기에 답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

역시 1

 

공통점은

호감과 배척이 또한 배척과 배척이

서로 격돌하는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다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보라고

일부러 스토리상의 마지막 장면으로 설정까지 하고

고의로 그 뒷내용은 생략하면서,

바로 이 순간이 그 순간이라고

바로 그 1초의 순간이라고

명시까지 해두었죠.

 

좀 알아보라고

무엇과 무엇이 서로 충돌할 때

어깃장 놓고 삐딱선 좀 타지 말라고

당당하게 스스로의 정체를 마주해 보라고...

 

다음 내용은 원래는 마지막에 넣을 문장인데

잊어먹을 것 같아서 원문을 미리 인용합니다.

 

마지막으로 타임머신 이야기 좀 하죠.

을 언급한 김에 할 말이 있습니다.

 

타임머신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타임머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타임머신이 있는데요.

 

가령 어떠한 평행차원의 개념에 입각해서 혹은 다른 이론에 입각해서

우리가 과거의 자아와 완벽한 별개의 미래의 자아로써

과거의 자아 또는 사건이 존재하는 시점에 침투하여

그곳에 변화를 일으킬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타임머신이고

이 경우 진짜로 내가 살던 미래가 변화하거나

아니면 내가 살던 미래와는 다른 평행차원의 미래가 변하겠죠?

 

이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타임머신입니다.

이것은 과연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없을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애초부터

과거의 자아와

지금 미래에서 과거로 침투해 들어가는 자아가

서로 별개의 자아로써 같은 시공간상에 존재 할 수 있다면

이 두 자아가 일으킨 사건은

각자의 서로 다른 자아의

각자의 시공간 상의 변화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의문입니다.

결국 쓸모가 있을 리 있느냐는 의미이죠.

(여행은 재미나게 할 수 있겠지만 )

 

반대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타임머신이 있습니다.

 

그냥 여태까지의 모든 사건들 자체가 완전히 삭제되고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내용이죠.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로 과학적인 이유입니다.

 

아까 점, , 면 이야기를 실컷 했는데

하나의 시공좌표를 이루는 어떤 점에

완벽하게 다른 시공좌표 데이터를 가지는 점을

중복해서 겹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라고 증명을 끝마쳤습니다.

 

시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지요

이미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시점에

그 시간좌표에

현재의 시간좌표가

겹쳐질 수 있습니까?’

혹은

그 시간 좌표를 투과 할 수 있습니까?

시간좌표를 투과하여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착하였을 때

그때의 시간 좌표와

지금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간좌표가

동일한 좌표에 동시에 기록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이미 생성 되어졌고

이것을 과거로 되돌린다는 것은 이미 발생한 시간 속에 고정된

모든 사건들 간의 충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여태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완벽하게 삭제하고

그냥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건 불가능하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공간좌표는 시간좌표의 시점에 관계없는 이동이 가능합니다만

이미 발생한 또는 증가한 엔트로피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말이고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이

지금 현재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아마 있을 겁니다.

(사실상 두 번째 이유의 설명의 시작지점)

 

바로

 

그럼 이 신은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능력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왜냐?

 

자신의 기억도 함께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이 대가를 감수할 의지가 있다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반드시 지워야만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지독하게 슬픈 일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반드시 바로잡고 싶은 어떤 사건을 겪었다고 칩시다.

 

신이 시간을 되돌리려 한다면 바로 그런 사건이 신에게 발생을 했겠지요.

행복한데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럼

 

어떤 슬픈 사건을 되돌릴 필요성에 의해서

시간을 되돌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에게는 여전히 슬픈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신은 행복하겠습니까?

 

기억을 지우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었다고 합시다.

 

기억을 지우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사건이 발생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같은 자아라면

100% 똑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합니다.

그 어떤 나유타의 확률로도 변화는 창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 기억을 지운 것이거든요.

언제나 완벽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신이 말입니다.

자신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인간이라고 하여도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확률은 99.99999.................%

무한소수의 영역까지 확률이 올라갑니다.

어쩌면 인간 역시도 100% 이겠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신보다 인간이 우월해 보이는데

 

아무튼 신은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로 되돌아가 보아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신은 미래는 알 수 있을까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신의 자아가 도달했다고 합시다.

어차피 모든 사건들은

수많은 자아를 가진 객체들의 행동과 자유의지가 변화를 창출하는 것이고

이 선택들이 발생시키는 무수한 경우의 수들은

이미 결정의 순간에 모두 긍정되어져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자아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냐

그럼으로써 세계의 엔트로피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이냐

 

그것은 자아의 자유입니다.

신이 억지로 조종하지 않는 다음에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이 그런 행동을 해야 할 이유도 없죠.

 

그런 무의미한 짓거리를 무한한 시간 동안 반복 해 보아야

실제로 인간에게만 그 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도 그 행동과 생은 완벽하게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자아 신이 과거로 회귀하기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 신의 자아가

무수한 경우의 수로 확장되는 미래의 어느 지점을 방문한들

그것이 과연 진짜 미래일까요?

진짜 미래는 우리들의 행동과 의지가 없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 의지와 감정과 자아를 가진 존재가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무생물들만이 단지 물리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자아를 가진 존재가 무언가를 행동한다면

신도 진짜 미래를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정말로 그가 미래의 시점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기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 미래를 바꾼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는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신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무의미한 행동이거든요.

 

신이 진짜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진짜 미래를 방문 했더니

신이 미래를 바꾸고 싶어질 만큼 끔찍하게 슬픈 일이 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래를 바꾸고 싶어졌다.

그래서 과거로 회귀하기 위하여

그 모든 세상들을 삭제하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왔다.

 

진짜 미래에 존재하던 모든 세상과 소중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본인의 기억만을 가지고현재로 회귀하여 사건을 바꾼다?

 

문제는

그 원인이 신 자신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로 압축이 되면서 결론이 납니다.

 

신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여

그로 인하여 그가 슬픈 일을 겪었고

미래의 모든 사건들과 세상들과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그 무언가를

삭제하고 싶을 만큼 간절해 졌고 그 소중한 존재도 동의 했다면

신은 자신의 기억만 지우지 않고

미래를 삭제하고 현재로 회귀하여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는 신 자신의 행동만을 수정하면 되죠.

그런데

이 순간부터

신에게는 한 가지 불확실성이 생깁니다.

자신의 선택을 더 이상 신뢰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원인 그러니까 신이 슬펐던 원인이 신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매번 진짜 미래를 내다보고

다시 과거로 돌아오고 행동 수정해주고

 

그냥 맘대로 조종을 해버리고 말죠

 

그리고 무의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자신의 선택의 불확실성을 감수 한다는 가정 하에서도

혹은 슬픈 사건의 원인이 인간들에게 있어도

신은 미래를 바꾸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선택이니까요.

 

결국 어차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야기가 되니까요.

 

바로 우리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행동하면서부터

이미 신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지독하게 슬픈 사건들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조차 되돌리지 못한 채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 한 채

미칠 것 같은 고독의 시간들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미친다고 해도 이상한 사건이 아니죠.

 

우리가

모든 구원과 절망의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들 스스로를 구원해 줄 수 있을 때

우리가 그리고 제가 우리의 신을 그리고 저의 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신은 과거로의 여행에 대하여

행복했던 어떤 순간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기 위하여

과거의 어느 지점들을 방문하며 위로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곳은 이제 절대로 변화가 불가능 하고

유의미한 현재와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하여

과거의 지점들을 방문하여도 행복에 대한 감정은 희석 되고

결국 모든 현재와 미래의 어느 지점들에서

불확실성을 던지는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모든 감당 할 수 없는 고통들과

모든 진정한 구원의 순간들에 대한 기쁨을 함께 느낄 것입니다.

 

결국

논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절대적인 법칙이 됩니다.

온전한 연속성 그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 한

무엇인가가 너와 나 또는 어떠한 객체로 구분되어 실재하는 세상에서는

논리만이 절대적인 법칙이 됩니다.

신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신이

논리로 이루어진 세상을 굳이 창조한 이유는

아마도

온전한 연속성 그 자체의 끔찍한 침묵과 고독을 혐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와

논리감정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라고 하는 규칙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을 죽일 것입니까?’

아니면 우정신뢰를 줄 것입니까?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당신들에게

묻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는 과연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이나마

온전하게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신을

구원 하고 싶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0

 

상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어떤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한 일 자체를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실패가 있어도

좌절이 있어도

잠시 헤어져도

질병이나 죽음이 갈라놓더라도

그 모든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순간과 과정의 기나긴 터널의 안에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꽃잎 한 장 같은 사건들입니다.

결국 결과란 그것이 결과처럼 보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며

그 기나긴 과정들의 연속들의 길이만큼

우리의 생에 의미가 부여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5

 

저의 작품 중에 환생의 개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자아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은

정말로 한 자아의 완전한 끝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가령 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초 과학적인 복제인간이라고 하여도

결국 나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물론 인생은 되게 복잡하게 꼬이겠지만

그런 감정적 문제와는 별개로

앞으로 살아갈 운명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자아입니다.

 

어떤 자아와 자아가

동시간대에 같이 공존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다른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자아의 본질이

본래의 자아와 복제인간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간단하게

둘 다

죽음이나 어떤 이익 앞에서

자기 목숨 또는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넌 나의 복제인간이니까 내 대신 죽어주어야겠어.”

 

복제인간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결국 죽은 사람 되살려보아야

아무리 완벽하게 되살려 보아야

이전에 죽은 이와 되살아난 이가

절대로 같은 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혹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여도

 

죽기 전의 그리스도와

부활한 그리스도를

저는 다른 자아(自我)’ 라고 감히 정의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전의 그리스도와

부활한 그리스도를 서로 대면 시켜놓고

위의 복제인간의 질문을 똑같이 던질 경우

무슨 대답이 나오건

 

사랑이 아니면 배척

 

 

다른 자아(自我)’ 에서나 통용되는 어떤 거래 혹은 용서 혹은 이해와 관용 또는 배척이 필요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다른 것입니다.

 

결국 한 자아의 진정한 끝은 그 자아의 죽음까지이고

그 이후부터는 그냥 다른 자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서는

모든 이야기의 전체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정말로 누군가가 죽기 전에

그 자아에 대한 구원 또는 비극이라는 결론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며

 

(특별히 사람들에게 희망을 고무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동화적인 감성을 동원하여 부활을 거론하는 그 자체가

사실 본래는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

도깨비는 표절작인지라 감정이 ...)

 

결국 운명이 너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 둘 중 하나 죽어!

라고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이야기의 결론을 맞이해야만 하는 필요성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래서 운명은 마녀에게 질문을 던질 때

질문의 주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 질문하게 되었던 것이며

결과적으로 두 사람에게 정말로 비극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어떤 비극적인 암시 등을 현실로 이끌어내기 이전에

질문이 끝나야만 했으므로

 

마녀가 운명에게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한 시점에서

운명은 그 순간의 이후부터는 자신의 엄포를 현실로 만드는 것 이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운명 자신에게도 크나큰 고통으로 작용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운명이 던질 질문 자체가 사라진 상황을 맞이하였던 것이며

 

그래서 운명은 순순히 대장장이의 구속을 풀어주었던 것이고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설정된 마녀는

(설혹 이해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어져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토록 찬란한 헬리오스의 후광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슬픔의 대장장이에게 고백을 하는 그 순간에도

기쁨 속에,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기쁨 속에, 그만큼이나 커다란 슬픔을 내재한 상태로

그 슬픔이 표출되어진 표정으로

대장장이를 향한 자신의 사랑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마녀와 운명의 대화

기억 안 나실 테니

다시 대사를 옮겨와 보죠.

 

나는 아직 포기 하지 않았어요!”

 

승부에 대한 불복

자신의 가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오기

그러나 여인이여

당신의 오기와 치기는 어떻게 그토록 이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운명이 잔인하게 말 했어.

 

포기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쩔 거지?

네 능력으로 보석이 되어버린 대장장이의 굳은 결심을 되돌릴 수 있나?

그가 갇혀있는 스스로의 심상의 세계 속에서 그는 과연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눈에는 그의 남은 수명이 보인다.

너는 그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나?”

 

그래요!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대답

운명이 잔인하게 웃으며 대답 했어

 

너에게 슬픔의 바위 사막을 알려준 그 다섯 번 째 마녀의 생명을

네 손으로 끊어봐라 그러면 그를 되돌려주지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

 

나는... 나는...”

 

여전히 잔인하게 웃는 운명

 

그건 조금 어렵나?

그럼 이건 어떨까

네 손으로 무언가를 죽일 필요는 없어

그건 내가 하지

너는 선택만 하라고

네가 살고 있던 마녀의 숲을 없애버릴 거야

그 대가로 그를 되돌려주지 어때?

너는 마녀의 숲과 그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거지?

너는 둘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어

이건 좀 쉽나?”

 

놀림 받은 사실을 깨달은 마녀는 발악하듯이 외쳤어

 

그래요! 나는 그를 선택하겠어요!

당신이 무어라고 이야기하건 어떤 조건을 내걸건

나는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나직하게 웃는 운명

 

그가 네 외모가 별로라며 네 사랑을 거부하면 그땐 어쩔 거지?”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마녀를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운명은 마치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어

 

어쩌면 그는 너의 사랑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수도 있어

그가 너의 사랑보다는 너의 육체나 재물 혹은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너를 버릴 수도 있지

아니면

그가 끝끝내 그리움의 주인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너의 사랑을 영원히 외면할 수도 있어

네가 그와 다른 사람의 생명 가운데에서

그를 선택하고 그를 구해준 그 순간에

정작 그가 너를 선택하지 않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너의 사랑이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정도면 다행이게

그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너 자신과 너를 사랑한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네가 나의 첫 번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서

다섯 번째 마녀를 네 손으로 죽였다고 해서

내가 너와의 약속을 현실로 이행해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지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어리석은 거야

손해 보는 행위고 바보짓이지

 

너희들과 나는 어머니의 바다에서부터 태어났다

어머니의 바다는 여전히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

너와 나, 여기부터 저기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라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 불연속적이고 배타적인 객체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 더불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연결점

그 어떤 구분도, 그 어떤 경계도, 심지어 안과 밖의 구분조차도 없는

온전한 의미의 연속성

세상이라는 불연속은

그 객체들은

어머니의 바다에 기대어

그 바다위에 서로 무한대의 거리를 마주하며 떠있는 작은 섬들

 

너의 마법은 그 연속성에 가 닿은 너의 위대한 정신이

너희 객체들의 한계인 심상의 세계를 초월하는 그 힘을 원동력으로

어머니의 바다를 이용해 불연속과 불연속을 초월하여

연속성으로 연결된 불연속의 반대편의 현상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기술

인과의 천칭의 눈금을 속이는 기술

인과를 재정립하는 기술

 

그러나 아이야

너의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자유로이 심상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네 정신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그는 그이고 너는 너라고 하는 객체가 가지는 한계

그가 너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네가 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우주적인 한계

너와 내가 그리고 그와 그녀가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객체라는 본질의 한계

 

내가 장난처럼 너에게 내건 조건들은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잔인한 악당들이 지금의 나처럼 야만스럽게 네 킹을 쓰러트릴 때

 

아이야

발악해봐야 소용없단다.

그래도 그를 사랑할 것이냐?"

 

마녀는 그제 서야 깨달은 잔혹한 현실에 눈물 흘리며 대답 했어.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할겁니다

 

그가 너의 호의를 너의 희생을 견딜 수 없어

그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려고?”

 

단호한 마녀의 대답

 

나는 그래도 그를 사랑 할 겁니다.”

 

(이 시점 이후의 운명이 실질적으로 선택 가능한,

그러니까 마녀를 압박할 카드라는 것이

그동안의 모든 엄포를 현실로 구현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더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야기 쓰면서 짜증나고 구질구질하게

더러운 이야기를 계속 더 끝까지 썼었어야 했나요?

운명은 정말로 악당이기를 바라시나요?)

 

그 순간

온 우주가 통쾌하게 웃었다

전 우주가 우리의 선택의 순간을 위해

1초의 순간을 위해 움직여온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처음으로

전 우주가 웃었다

 

모든 본질들이

태초 이래 최초로 기쁨과 환희의 1초의 순간을 맞이했다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부다!

바로 그것만이 내가 너희들에게 영겁의 세월동안 던지는 질문!

 

좋으냐?

싫으냐?

얼마나 좋으냐?

무엇보다도 좋으냐?

언제까지 좋으냐?

어떻게 해도 좋으냐?

끝끝내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너희들이 살면서 쟁취하고 상실하는 그 모든 것들에게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 1초의 순간

진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

 

마녀야

네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쟁취하던

혹은 실패하던

비겁한 선택이던 어리석은 선택이던

모두 다 긍정된 사건들

긍정된 우연가운데 하나일 뿐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가 1부터 6까지 어떤 숫자를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하늘로 던져진 그 순간에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일 뿐

너 자신에게 패배자라는 꼬리표를 내걸고 실망할 이유 따윈 없다

괜찮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절대 현재의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라!

내일의 일은 내일 걱정해라!

 

마녀야

내 질문은 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네 삶이 끝나고 난 후

또 다른 객체가 자신을 라고 인식할 때

영겁의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라는 존재의 인식

이 우주에 라는 객체가 존재하는 한

내 질문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마녀야

네가 다른 에게

무슨 행동을 하던

그것은 결국 에게 하는 일이다.

부디 지금의 네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다오 아이야

 

마녀와 운명이

소망의 화덕 안에서 불타오르는 보석을 바라보았어.

 

운명이 다시 말했지

 

온 세상 가득히 만연해 있는

나에 대한 그 수많은 편견의 벽에 기대어서

오직 나만의 공간에서

오직 나만이 느껴온 그 고독한 시간들

 

너는 마침내 모든 심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에게 도달하여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마주하여 나에게 이 우주에게

진실로 기쁜 단 1초의 순간을 선물해 주었다

 

태초 이래 처음으로

우주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너를 위해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그녀와 그녀의 연인과 대장장이를 서로 만나게 해주어라

너의 운명의 결말과 마주해 보거라 용감한 소녀여

 

그 순간

 

전 우주의 모든 것이 융합 되었어

그리고

발가락 사이사이 백사장 모래알 촉촉하게 닿는 그 느낌처럼

낱알, 낱알 보드랍게 흩어져갔지

 

가까이 혹은 멀리

망망한 대해의 수평선과

발등에 속삭이는 파도의 흰 포말

가까이 혹은 멀리

 

 

다만

이 모든 고민과 설정을 창조한 저로서는

환생한 김고은씨가 햇빛 등지고 도깨비를 찾는 장면 떠올릴 때마다

이 악물고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저절로 혈압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죠.

 

내 여자 주려고 만든 선물 같은 성스러운 작품에

내 여자를 주인공으로 세워서 가장 화려한 포커스를 맞춘

헬리오스의 후광을 받는 마녀라는 설정을

마지막에 햇빛 포커스를 공유에게 맞추면서 도발하는 장면 하며

 

공유씨,

당신 여자 줄 선물 이미지를 내가 도용하면

기분 어떠실 것 같은가요?

댁이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라고 해도

왜 댁이 그 이미지를 도용 하냐고.

내 여자한테 무슨 관심 있어?

(송선미씨? 그래 이미 결혼 했어, 근데 내가 그분에게 선물 드리려는 건

그 결혼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인연때문이야!)

댁이 설혹 관심이 있다 해도 이딴 건 그냥 예의가 아냐!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어느 정도지

남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관심 드러내고 들이대는 건 어느 나라 법도냐고

단지 관심을 드러내는 것만 해도 짜증이 날판에

남의 선물 이미지는 왜 도둑놈처럼 훔쳐, 훔치길!

자신 있으면 자기 작품으로 승부를 보던가,

 

여담이지만

물론 이동욱씨에게 차에 대해 물어본 다른 어떤 망자와의 대화에서

이 차를 마시지 않아도 특별한 제약이 없다는 것은 물론 드라마 도깨비의 기본 설정이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김고은씨가 망자가 된 그 순간에

김고은씨가 이것을 모르는 채로 차를 안 마시는 선택을 했던 것이 문제죠

 

이를 테면 꼼수가 상황과 맞아떨어진 그런 문제인데요.

저승사자조차도 규율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을

김고은씨가 전혀 몰랐다면 그건 말도 안 되고

규율의 위반에 대하여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스치듯이 지나듯이

차를 마시지 않는 선택을 하는 시점에서,

(물론 이동욱씨나 도깨비가 별말 없었다는 시점에서 답을 반 쯤 준 것이기는 하지만)

(둘 다 신은 절대 아니죠)

(하다못해 김고은이 저승사자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지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치껏 별 말 없으면 그냥 넘어가? ㅎㅎㅎ)

(신을 상대로?)

(이동욱도 도깨비도 김고은의 운명과 신의 뜻 같은 거 전혀 모르면서?)

 

그냥 신한테 가서 부탁 좀 해 볼게요.

라는 웃기는 설정부터가 짜증이 나고

한마디로 다시 찾아온다는 약속 자체가

신 마음에 그 성사가 달린 일인데

 

작가가 신인가요?

인생 꼼수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쯤 되나요?

그건 그냥 꼼수잖아.

 

다시 슬픔의 바위사막으로 넘어와서

이 작품은

저의 블로그 대문에도 쓰여져 있는 설정이지만

이 작품의 저작권의 실질적인 권리의 절반을

송선미씨에게 이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송선미씨에게

 

아래 계약서가 작성되기 이전에

본인이 먼저 유고시에는

작가의 가족과 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송선미씨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는바

아래 계약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이 책은

 

그녀가 없었으면 탄생할 수가 없었던 책이므로

그녀의 인생이

온전히 보답 받아야 하는 문제이므로 어떤 선물을 그녀에게 주고자 합니다.

반드시 그녀가 받기를 희망합니다.

 

아래 내용은 아직 실제 계약서가 아님을 고지합니다.

 

책의 출판 시

저작권의 지분자체를 타인과 분할하거나

인세의 일부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본인이 인물을 특정하여 해당 인물과 저작권과 관계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특정인물에게 출판 당시에 저작권 또는 인세의 일부를 분할 또는 증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동의하에

일정한 양식의 계약서 작성이 필요하며

작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사와의 계약에서도

송선미씨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성을 작가인 제가

법적으로 특정하여 지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이 문제는 송선미씨와 저와의 연락이 재개되기 전에는 거론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연락이 재개 되면

이 책의 저작권의 모든 지분을 그녀와 정확하게 양분할 것입니다.

다만 양분된 지분으로 발생한 재화로써의 모든 이득은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

귀속된 재화를 어찌 처분할지는 송선미씨 본인 자유입니다.

 

책이 출판된 이후 연락을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결혼을 한 여성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어떤 악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2007 년부터 그녀가 결혼을 하기 한참 전부터

인연으로 엮여있던 남성의 순수한 호의의 발로일 뿐이며

그 어떠한 사심 없이

이것을 그분이 순수한 호의로써 받아주시기를 희망하는 마음에

이 내용을 공개합니다.

 

실질적으로 저작물 계약이 이루어지게 되면

저의 사망시

이 저작물의 모든 권리는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귀속될 것이며

그녀가 사망할 경우에는 이 모든 권리가 온전히 저에게로 귀속 됩니다.

본인 또는 그녀의 생존 시 모든 권리는 정확하게 양분 됩니다.

 

만약 저의 유고 후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저작권이 귀속 되었을 때

그녀가 정상적으로 나이가 들어 자연사 또는 병사 등으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을 경우

이 저작권은 그녀의 직계존속에게로 귀속 됩니다. (그녀의 자녀 또는 친 부모)

그러나 본인 유고 후 그녀가 사고사나 급사 등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경우

또는 극심한 폭력이나 협박 등에 시달린 사실을 본인에게 알린 경우

(협박이나 폭력의 주체는 불특정 다수 또는 개인을 모두 막론하고

그녀의 가족이나 지인까지 모두 포함하여)

그 경우 이 저작권은 반드시 저의 외사촌 형

연호선씨와 그 직계존속에게로 귀속 됩니다.

이후 이 저작권은 두 집안 중 어느 한 집안에게로

그 직계존속을 기준으로 영구히 상속됩니다.

만약 본인이 유고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저의 외사촌 형 연호선씨와 그의 일가친척 어느 누구

또는 본인의 친족들 중 집안 어른의 어느 누구에게 알려도 무방합니다.

만약 본인의 친족들 중 집안 어른 분께 알린 경우

저작권은 그분의 직계존속을 기준으로 영구히 상속됩니다.

 

만약 그녀가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본인 유고시 현재 유서상의 실제 상속자인

저의 어머니 동청자씨 에게로 모든 권리를 귀속 시킬 것입니다.

유서상의 재산권 집행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재 작성을 할 계획입니다.

 

만약 송선미씨가 이 권리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본인이 유고하여 이 모든 권리가 그녀에게로 귀속이 되었을 때

 

작가의 직계존속 중 생존자의 한 명에게

그녀에게 발생하는 모든 수익의 50%를 증여해 줄 것을 명합니다.

직계존속 이외의 증여가 가능한 인물은 연호선씨 에게로 한정지어집니다.

 

작가는

 

살아생전에 자식을 나을 계획이 전무하므로

현재의 직계존속 이외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책의 저작권을 상속 시킬 사람이 없는바

 

인물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자

지난 10년간 인연으로 엮여져 고통 받았을 그녀에게로

이 저작물의 합리적인 상속을 위하여 이 모든 내용을 작성하였으며

그녀가 생존해 있을지 모를 작가의 가족들을 염려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의 문제들은 순수한 개인적인 호의의 발로이며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의 치명적인 인생의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작가와 그녀의 사적인 그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 어떠한 오점도 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의 교류가 전부였으며

굳이 그녀가 저에게 호감을 표시한 구체적 사례를 꼽으라면

계단 승강장을 뛰어올라온 저를 굳이 뛰어서 뒤따라 쫒아 올라와

잔뜩 삐쳐버린 얼굴 표정을 제 앞에 들이 밀은 정도가 되겠군요.

 

참고로 작가는 실제로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그녀를 실제로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그녀가 결혼을 하기 몇 년 전의 이야기들로

결코 그녀의 결혼생활에 어떠한 누를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권리와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적인 문제는 과거의 추억으로 온전히 덮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그녀의 배우자가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그 어떠한 의심을 할 만한

실제적 사건 자체가 전무하였음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감정의 교류의 문제에 대하여

그녀가 사실을 부정하건 그렇지 않건

본인에 대한 그 어떠한 종류의 모욕이나 비난도

절대로 가만히 용납할 생각이 전무함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 실제의 인물의

그 어떠한 이름이나 사진 정보 등이 전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독자들은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고

그녀와 그녀의 배우자 가족 지인들 중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본인과 본인의 지인 또는 본인의 가족

그 어느 누구와의 그 어떤 접점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이 문제를 들추어내시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전화 상 으로 음성이미지 만으로 판단을 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부분이니

송선미씨 본인이 배우자 또는 믿을 만한 분들을 대동을 하시고

배우자분은 반드시 대동하고 오시고 혼인사실 증빙서류를 지참하여 오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혼자서 오셔야만할 혹은 배우자를 대동 할 수 없는 특별한 사유가 있으신 경우

(그럴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

혼자 오셔도 됩니다.

다른 가족분과 오셔도 됩니다.

(이 경우 배우자 신분증 지참을 요청합니다.)

그 이후 본인과 직접 만나서

송선미씨 본인 신분증과 배우자 신분증과

서류상의 인물이 일치하는지 확인만 끝나면 됩니다.

다른 조건은 전혀 없습니다.

이후

그분들과 함께

저에게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을 상속 받기를 원한다고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절대로 그 어떠한 종류의 부담감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엄연히 송선미씨가 당연히 받아야만 할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드리려는 겁니다.

 

처음 인연 시작 이후

한동안 많은 개인적인 사건들을 겪어야 했고

그 사건들이 송선미씨와 직간접적 연관성은 없으나

얼마전 범죄조직과 휘말린 사건처럼

송선미씨 개인의 신변에 어떤 위협 요소가 될 만한 사건들이 많아

함부로 송선미씨에게 접근 할 엄두를 못 내다보니

 

(개인적인 원한을 많이 사는 편입니다.

이번 범죄조직사건 직전에도 개인이 SNS 상의 시시비비를 가지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주먹다짐을 벌일 뻔, 한 사건도 있었죠.

실생활에서 직장 내에서 물건들 본인의 우산이나 시계 등이

캐비넷 안에 보관 되어있던 물건이 파손을 당하고 손괴를 당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을 했고

이 문제로 경찰에 조사요청을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생활공간 상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일 다 처리하려다가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한동안 정치판에 뛰어들어 온같 집회현장 다 따라다니다 보니...

실제로 저는 18대 부정대선 무효소송 소송인단 소속에

한동안 횃불집회 시민연대에 소속되어 이번 최순실 게이트 터지기 수년전부터

박근혜 퇴진 운동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여자문제에 욕심낼 처지가 아니었던 점 양해 바랍니다.

네이버 에서는 gkstprjs 이라는 ID 로 수년 동안 그러니까

극히 최근까지 종교문제로 한국 교회와 싸워왔었습니다.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 봅시다.

라는 오픈 사전인데 작성일자가 2015.12.27. 로 조회수는 815959입니다.

한동안 네이버 실검 1위였는데

이 문제로 개인 신변보호 요청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를 많이 들었습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아무튼 그러다 보니

어느덧 결혼도 하셨고

책은 출판할 지경이 되었고

그냥 입 싹 씻고 저 혼자 다 가지려니

너무 미안해서 드리려는 것일 뿐입니다.

또 저의 접근 자체가 송선미씨 개인에게

인연 초반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현재에는 악연인 것이 분명한바

사죄의 표시도 포함됩니다.

 

이상의 모든 내용들은 아직 실제 계약서가 작성된 상태가 아니며

송선미씨 본인이 저작권의 상속을 거부하거나

본인에게 그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는다면

책의 출판 이후 이 책에 대한 모든 권리는

본인에게로 귀속됨을 다시 한 번 고지합니다.

 

출판 이후라도

계약서의 작성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의사를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 했었습니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신변에 위협요소가 많았으며

개인적 질병과 여러 가지 사적인 문제로

이제야 이 선물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미안합니다.

 

독자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에 충분한 보다 객관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송선미씨와 저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썸이라고 할 만한 사이에 있었던 사람들이고

위에 예를 든 사례들 이외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표시한 사례들은 많았습니다.

전부 다

송선미씨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들일 뿐이지만요

 

그러다가

본인에게 어떤 신변의 위협적인 요소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송선미씨의 행동반경이나 출퇴근 시간 장소 등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만날 수가 없게 되었죠.

 

당시 저는 수많은 사람들과 SNS 상에서 다투거나

그 문제로 현피를 뜨기 위해 만나려고 하거나

법적 고소고발 문제 등을 진행하던 상황이었고

재직했던 수많은 직장들에서 만났던 사람들 역시 모두 거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저에게 남긴 인상들은 하나같이 수틀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송선미씨가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시점에

제가 그녀를 구해 주었을 때

그 어떤 감사도 그 어떤 공포도 그 어떤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표시하지 못한 채

마치 로봇처럼 무감각하게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시점에 공포를 표출하는 것이 보통이고

만약 누군가 그것을 구해준 것이 맞다면

안도의 한숨과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그 때 그 순간에

그 어떠한 감정적 반응도 저에게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제가 그녀에게 남겨준 인상이

어차피 신뢰 할 수 없는 사람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제 입장에서 그녀의 모습은

완벽한 협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상태

로 비추어졌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 신변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개인적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가까운 지인들조차도

저와 의견 충돌이 잦았고

제가 맞는 말을 해도

단지 기분문제 때문에 저라는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 투성이였죠.

한마디로 저는 완벽한 고립무원의 상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실제적 협박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고

제가 사랑했던 여성은 치한에게 희롱당하는 사건에 대해서

그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여러 가지 우연의 일치들로

저는 그녀를 단지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어떤 지나가는 사람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제가 지켜내야만 하는 사랑하는 여성으로 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검암역이 아닌 다른 실제적 장소에서 찾아내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녀와 연인관계가 되거나 혼인관계가 아닌 이상

단지 저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는 완벽하게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실제적 필요성과 불안요소가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점에

송선미씨는 다른 남성과 교제를 시작하고 실질적으로 결혼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질적으로 그녀의 신변에 어떤 위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의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저와 썸을 타던 그 시점에서는

그녀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그것은 그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출퇴근을 하던 시기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을 거라고 저는 추측 합니다.

 

10년을 사랑한 여성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사실이 분명해진 지금

지금 제 감정 크기는 저조차도 추측 불가이고

이런 감정 상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꿈꾼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도덕하게 느껴집니다.

해서 저에게는 앞으로 자식을 나을 계획 자체가 전무합니다.

물론 앞날이 어찌될지는 신만이 아시겠지만

 

그러나 향후 가족계획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상기의 계약 내용은 그와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송선미씨 본인이 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말이죠.

그리고 저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그분은 그렇게 부도덕한 여성분이 아닙니다.

지금 와서 과거의 기억을 반추 해 보면

그녀가 다른 남성분과 교제 또는 결혼을 꿈꾸고 있었을 그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감정

자신의 행동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과거의 저와에 있었던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된

그러면서도 저라는 사람의 인격 그 자체를 무시하지 않는

그야말로 현숙한 여성의 처신이라는 것을 저에게 보여 주었으니까요.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저와 그녀 사이의

그 어떠한 종류의 불쾌한 상상도

자제 해 주시기를 독자 제현 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남편 분께도 말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제가 자살이라는 수단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그녀의 신변에 불안 요소가 생기는 근본적 원인이 저에게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녀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나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야 한다는 어떤 결론

 

두 번째로

지독한 감정적 방황상태

저 스스로도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다음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불안한 심리상태

 

이제는 감정적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 되었고

그녀도 이미 결혼을 해서 신변의 안전에 대해서 제가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그냥 앞으로 주어진 제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송선미씨 께서 저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시거나

연락을 직접 하시기 곤란하시다면

gkstprjs@naver.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본인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용건을 적어 보내주시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연락처는 010-2656-7253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009

 

이 작품의 장르와 성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 창작 장르로써

기존의 문학의 역사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장르입니다.

창안자는 저 김선홍 金善弘 이며

명칭은 복합 서사시입니다.

 

복합 서사시의 구체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존의 서사시가

운율이 살아있는 시적 문장 즉, 운문(韻文) 의 형식의 문장으로

긴 서사(敍事)를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복합 서사시란

개별의 시() 문학 장르를 소설의 옴니버스구조의 기법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총칭하며

 

이 중간에 삽입 가능한 다른 구성요소들로

기존의 서사시가 섞이거나

수필이나, 소설(장편 또는 단편 소설의 전체나 그 일부 한 장면 등),

또는 기존의 산문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형식의 문학의 전체나 그 단편 등을

자신의 작품에 한하여

전체 서사의 구성 요소로써

자유롭게 삽입이 가능한 형태로 창작 된 장르이며

 

기본 논리구조는 소설의 옴니버스 기법을 따르는 형식의

새로운 개념의 서사시입니다.

 

본 작품

그러니까 세계 최초의 복합 서사시 작품인 슬픔의 바위 사막

그 구성을, 본편은 일반적인 서사시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외전은 개별적인 시문학장르를 소설의 옴니버스 기법에 따라서 서사를 구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상기의 복합서사시의 정의를 따르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장르 들을

제가 직접 모두 작성하여 자유롭게 스토리의 한 구성 품으로 삽입시켰으며,

 

본편과 외전이 서로 별개의 스토리라인을 구성하는데

본편과 외전의 서로 다른 서사가

마녀와 대장장이처럼 운명적인 합치를 이루는 구조로써

이는 소설의 피카레스크 기법을 응용한 것입니다.

 

스토리의 진행방식은 본편과 외전이 서로 번갈아 회 차를 진행하는데

반드시 본편 한 편 뒤에 외전의 형식으로 진행 되지는 못하였으나

최대한 번갈아서 회 차가 진행 될 수 있도록

비교적 느슨한 체계로 작품을 구성하였으며

 

작품 서사의 희극과 비극의 관점에서는

그러니까 작품의 성격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만년에 창안한 비희극(悲喜劇)

즉 로맨스 형식의 문학 장르입니다.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폭풍우(Tempest)’ 라는 작품이 있죠.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65200096

 

상기 작품은 분류로는 희곡이 되는데

이는 연극 형식의 무대 공연을 염두에둔 문학이라는 뜻이고

작품의 성격은 이를테면 일리야드나 오디세이야 같은 형식의 로맨스 문학

또는 서사시 문학에 보다 더 가깝습니다.

 

서사시의 기본 정의를 따르자면

요즘 인터넷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되는데요.

 

서사시와 좀더 짧은 영웅시, 덜 고상하고 규모가 작은 민간 설화와 발라드, 좀 더 일관되게 허황하고 환상적인 로맨스 등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아리오스토·보이아르도·스펜서의 이야기체 시에는 이런 특징들이 뒤섞여 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영웅시대의 전설과 구전으로 이루어진 '1' 서사시, 즉 전통적 서사시와, 세련된 시인들이 전통적 서사시 형태를 특수한 문학적·사상적 목적에 적용하여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2' 서사시, 즉 문학적 서사시를 구별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오디세이아 Odyssey1차 서사시이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와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2차 서사시이다.

 

가장 오래 된 서사시에 해당하는 작품은 BC 3000년경에 운문 이야기체로 씌어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중요한 서사시이자 서유럽의 2차 서사시에 형식과 특징을 부여한 주요원천으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BC 900~750년에 완성된 호메로스의 시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판에 박힌 묘사, 상투적인 수식어구, 정형화한 어구와 시행의 반복 등은 즉흥적인 시작(詩作)과 전수에서 서술의 전개와 운율의 충족을 쉽게 하기 때문이라는 데에 오늘날 학자들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해 있다.

 

서사시적 관행의 주요양상들은 군사적·민족적·종교적으로 중요한 영웅이나 반신(半神)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 거의 우주적일 만큼 넓은 지리적 배경, 영웅적인 전투, 장기간에 걸친 이국적인 여정,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등이다.

 

서사시는 대개 주제를 먼저 소개하고 뮤즈 여신에게 도움을 호소한 다음, 이야기의 본론으로 곧장 뛰어들어 이야기의 앞부분은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회상하는 형식으로 채워넣는다. 서사시는 친숙하고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초기 단계를 건너뛰어도 청중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서사시의 극적인 전개에 몰두할 수 있다. 주로 특정한 지역과 연관되어 주인공들의 이름이 계속 나열되는 것은 서사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그런 주인공들이 하는 말은 미리 준비한 공식적인 연설일 때가 많다.

 

서사시의 서술에는 장황한 서사시적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 가지 유사점을 근거로 하여 일단 비유가 시작되면 전혀 다른 경험의 영역에서 끌어온 장면이나 사건이 장황하게 전개된다.

 

영웅시대 이후에 나타난 문학적 서사시의 자의식과 그 문화 배경은 관례적 서사시의 소재 및 전통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적 전개, 또는 익살스러운 모방까지도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네이스에 이미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서사시적인 전투가 영웅적일 뿐 아니라 잔인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밀턴은 실락원에서 전통적인 서사시에서는 전쟁터의 영웅이 갖고 있던 특징의 대부분을 악당인 사탄에게 부여하고 있다. 형식적 인습과 초자연적인 '장치'(machinery) 및 획기적 사건으로 가득 찬 영웅들의 세계는 알렉산더 포프의 머리카락의 겁탈 Rape of the Lock·바보전 The Dunciad,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같은 시에서 풍자적 목적을 위해 시시하고 한심하며 부적절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테두리로 이용될 수도 있다. 헨리 필딩은 톰 존스 Tom Jones에서 서사시의 장엄함과 구조, 그리고 그런 웅장한 틀에 현재의 경험을 집어넣었을 때의 부조화를 이용해 익살스런 효과를 냈다.

 

반면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같은 후기 소설들은 호메로스의 소재를 재생하여 서사시의 수준에 도달했다.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시 서곡 The Prelude은 서사시의 진지함을 갈망하며 샘솟는 시적 상상력을 묘사하기 위해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무운시를 표현수단으로 이용한다.

 

베르길리우스가 2차 서사시를 널리 보급한 지 오래된 뒤에도 유럽에서 자국어로 영웅적인 경험을 기록한 1차 서사시는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스페인의 엘 시드의 노래 Poema de mio Cid11세기에 무어인과 싸운 전쟁영웅을 찬양하고 있다. 12세기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8세기에 피레네 산맥에서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와 사라센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를 기린 작품이다.

 

13세기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5세기에 부르군트족과 훈족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다. 앵글로색슨족의 베오울프 Beowulf는 영웅적 공동체를 위협하는 늪지대의 괴물들과의 투쟁을 묘사하면서 6세기의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 속에 포함된 역사적 요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신화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형태 속에는 다른 시대와 전설에서 끌어들인 다른 소재와 주제가 뒤섞여 있다.

 

1835년 처음 출판된 핀란드의 국민시 영웅들의 땅 Kalevala은 엘리아스 뢴로트가 구전되어 오는 고대의 짧은 담시들을 하나의 서술 구조로 통합하여 구성한 종합적인 1차 서사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서사시는 낡은 시 형식으로 간주되었지만, 이 장르의 방대한 규모와 웅장함은 다른 형식의 작품들, 예를 들면 프랭크 노리스의 미완성 3부작 장편소설인 밀의 서사시 The Epic of the Wheat(1901~03)와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영화 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1944~46) 같은 작품에 이따금 나타난다.

 

옥스퍼드대학교의 문헌학자 J. R. R. 톨킨이 쓴 환상적인 3부작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1954~55)은 세상에서의 모험과 탐구를 서사시 형태로 서술하면서,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영웅 이야기와 앵글로색슨족의 시문학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맛과 형식을 반영했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제일 먼저 꼽는데, 이는 고구려 건국과 관련하여 해모수·동명왕·유리왕 3대의 이야기를 전3편으로 나누어 쓰고 지은이의 소감을 덧붙인 작품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4년 발표된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꼽는다. 근대시가 대체로 짧은 서정시였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남녀의 사랑을 긴 서술체로 쓴 것인데, 이전의 서사시가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였던 것과는 달리 이 시의 내용은 민중들의 이야기이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서사시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처럼 긴 서술체 시 일반을 서사시로 본다면, 일제시대 한 가족이 유이민이 되는 이야기를 그린 이용악의 낡은 집도 서사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이야기시' 또는 '장편 서사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67년 발표된 신동엽의 금강은 전봉준·최수운·최해월·신하늬가 이끄는 민중들의 모습을 장중하게 그렸는데, 서화(序話본장(本章후화(後話)3부로 나뉘는 서사시의 기본형식을 따르고 있다. 근대와 현대로 들어서면서 서사시의 내용은 점차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3611a

 

로맨스 장르라 함은

일리야드나 오디세이야처럼

 

대략 10년 이상의 거대하고 긴 서사의 과정에

수도 없이 많은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고

그 거대한 스토리의 끝에 비로소 완벽한 희극으로 끝이 나는 장르를

 

비희극(悲喜劇) 즉 로맨스 형식의 문학 장르라고 합니다.

 

단지 여기서 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로맨스 문학은

인문학적 요소와,

마법과, 판타지, 초자연적인 다양한 존재들과,

신과,

신적 존재들까지

모두 등장하여

작품을 구성하고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되며,

 

비극과 희극이 수없이 교차하며

기어이 인생의 모든 질곡을 겪은 끝에 찾아오는 절대적인 희극이

그 작품의 결말이 되는 것으로

 

이러한 문학의 장르적 성격을 실제의 작품으로 완성한 사람은, 그리고 작품은,

앞서 설명 드린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폭풍우(Tempest)’입니다.

 

여기서 저의 작품이

상기의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그 성격이 달라지는 부분은

비희극 장르에서 최종적으로 찾아오게 되는 어떤 절대적 희극이라는 상징성에

 

세상에서 제가 처음으로

그 결말에 논리적인 절대성을 부여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실제로

슬픔의 바위 사막에 등장하는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

제가 본래 고교시절부터 구상하던 어떤 장편 소설의 일부이며

 

나카가와 나츠미의 경우는 정통 인문학 장편소설이지만

(판타지적 요소가 아주 없다고는 못하지만..)

구상중인 작품은 무한의 대륙 연대기라고

그냥 일반 판타지 소설입니다.

좀 스케일을 크게 구상을 했었는데 ...

지금 일단 계속 집필중이기는 합니다.

 

상기의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편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사대비극의 주인공들의 이름이며

사대비극과 오대희극이란

사대비극은 햄릿, 오셸로, 리어왕, 맥베드를 지칭하는 말이고

오대 희극은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십이야, 헛소동,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구분되며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 결말 속에 희극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따로 희비극으로 구분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희비극으로 떨어져 나가고

한 여름 밤의 꿈이 희극으로(저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편입되면서

4대 비극과 5대 희극이 되었습니다.

 

저의 작품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Planet of sunshine favorite princess room)

슬픔의 바위 사막 제 23(Rock desert of sorrow part. 23)

 

우주선은 기다림 은하계를 지나

불꽃심장 항성계의 작은 행성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으로

차근히 다가들고 있었다.

 

망망한 우주공간 가득히

너울지는 성운의 그림자

초신성 폭발과 함께 남겨진

미세한 입자들이 빚어내는

육리한 극광이 강물처럼 흐르는

도도한 빛의 커튼 사이로

진즉에 사라져 버렸어야 할

작은 행성을 향해 우주선은 나아간다.

 

승객들은 돔 형태의 스크린이 보여주는

인간의 시각과 똑같은 3차원 입체영상으로

우주선 밖의 경이적인 풍광을 감상하며

성운이 흩뿌리는 빛의 잔해사이로 울려 퍼지는

가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탄성을 자아낸다.

 

인공지능 컴퓨터의 안내 멘트가

우주공간 사이로 흩어질 때

긴 여행의 작은 간이역 하나에

마침내 우주선이 도달 한다.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은

우주를 뒤흔들었던 폭발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들을

하나도 숨기지 못한 채

 

거대한 성운의 찬란한 빛줄기 사이로

찢겨지고 부서지고 바스라진 파편들을

성운의 빛줄기가 흐르는 강물에 띄운다.

공전의 중심이 될 항성도 잃어버리고

자전의 중심축이 될 구심점도 잃어버린 채

빛의 흐름을 따라 부서진 행성의 파편들이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4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 No.2(Planet of sunshine favorite princess room)

슬픔의 바위 사막 제 24(Rock desert of sorrow part. 24)

 

최종회(Final episode)

 

우주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에드먼드(Edmond)가 말했다.

그는 왕립 마법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다.

벌써 3단계의 물질간섭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고작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인간의 DNA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생명간섭 마법이 발달한 무한의 대륙에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1만년에 육박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에드먼드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어쩌면 그는 자신들만의 아성과 영지를 구축한 채

왕국과 대립하는 마법사들 외에 최초로 시공간섭마법까지 도달할지도 모른다.

에드먼드의 출신지는 겨울별 왕국

왕국은 다른 왕국이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마법사들과 마녀들의 결집체인 마탑(魔塔) 이아고와 대립중이다.

 

무한의 대륙은 어쩌면 우주의 껍질

무한히 드넓고 평평하며 결코 둥글지 않다

어쩌면 우주가 무한히 넓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우주라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대지?

마법사들과 왕국들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립을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표면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늘로 우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무한히 넓은 대륙

무한한 자원

무한한 우주공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구와

무한히 팽창하고 성장하는 경제구조 속에서

우주개발은 하나의 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은하계와 항성과 행성들에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광활한 우주공간 가득히

모욕적일정도로 많은 우주선들이

진공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많은 우주선들이

검은 우주라는 공간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우리는 데스데모나(Desdemona)가 우주라는 공간이 있고

둥글고 거대한 항성과 행성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

우리가 사는 대지는 너무나 넓고 거대했으며 또한 평평하니까

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둥글고 거대한 행성이 있어

수많은 별들이 우주공간속에 있지

! 저런 행성에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난 저 둥글고 거대한 것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어.

3차원 입체영상이 아닌 내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에드먼드의 요구는 그 젊은 나이만큼이나 천진난만 했다

선장은 흔쾌히 에드먼드의 요구를 수용했다

우주선엔 진즉에 탑승한 승객들이 우주유영을 즐길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시스템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도도히 흐르고 있는 거대한 행성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은 불꽃심장 성운이 흘리는 빛의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부서지고 파괴된 모습이지만 그 파편들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빛의 강물 한가운데

발 디딜 그 어떠한 준거도 없이 홀로 유영하는 에드먼드가 있다.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끝없는 암흑 속에 각자 다른 깊이에 박혀 반짝거리는 보석들

에드먼드는 그 깊이를 헤아려보다가 그만 전율하고 말았다

 

꼭 연못속을 헤엄치는 개구리 같구나.”

 

코델리아(Cordelia)가 말했다

그녀는 겨울별 왕국의 공주로 에드먼드와 함께 왕립 마법학교를 졸업하고 우주여행에 동참했다.

리어왕(King Lear)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대륙 전체에 퍼져있다.

 

황홀해 우주가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야

 

기다려 우리도 곧 나갈게

 

거대한 우주선의 한편으로

모기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간속을 떠다닌다.

불꽃심장 성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불타오르고

빛의 강물 속을 도도히 흐르는 행성의 자태에 사람들은 전율한다.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이 저렇게 흐르는 이유는 과연 초신성폭발 때문일까?

어떤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품다가 기어코 터져버린 것은 아닐까?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953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이 작품은 애니 겨울 왕국이 나오기 이전부터 쓰여진

굉장히 오래전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Frozen겨울 왕국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도 엄연히 도용이죠.

 

하기야 저도 겨울 별 왕국 이라는 이름을

지인의 인터넷 아이디를 참조한 입장이니

헤어지고 시간이 꽤 지나서 허락을 구할 방도가 없네요.

 

아무튼 최초의 햇볕 드는 공주님 방 행성 편은 무려 2013129() 입니다.

同年 22에 완성 되었죠.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37

 

출처 : http://blog.daum.net/japhikel/138

 

상기 인용문과 동일한 형태입니다.

 

각설하고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왕(939~946 재위)입니다.

에드먼드 1세가 모티브이구요

(리어왕에 등장하는 악당이 아닙니다.)

코델리아는 다들 아시다시피 셰익스피어의 사대비극 중

리어왕에 등장하는 셋째 공주입니다.

리어왕 역시도 브리톤의 왕이죠

이아고 는 역시 사대비극중 하나인 오셸로의 등장인물이며

상당히 좋지 않은 악당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데스데모나 역시 오셸로의 등장인물인데요.

상당히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여인이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주인공 오셸로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여인이기도 해서

마치 지동설의 창시자인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갈리레이같은 역할을 맡도록 했습니다.

 

결국 에드먼드 하나 빼고 모조리 다 비극의 이름들인데요.

작품의 최종회는 그들 모두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낙원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낙원보다도 더 초월적일만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그렇게 결말을 맺고 끝낸 이야기였습니다.

 

일부러 작은 마녀와 슬픔의 대장장이의 결말은

아무도 모르게 감추었습니다.

사생활이거든요.

 

정말 이 글의 마지막으로

 

승리라는 것은 물론 행복을 중요하는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웬만해서는 양보란 것을 해서는 절대 안 되죠,

다만

이것이 결코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없지만

되어서도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승리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의 구성요건의 이야기도 물론 있지만

가령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실질적인 양심과, 사랑과, 사람과, 관계와 ,사회와,

이를 지탱하는 바른 신념들을 말하는데요.

 

정말로 사회구성원 전체가 양심이나 선악의 문제, 사랑 등을

모두 승리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라는 것을

간단하게 시뮬레이션 해드리겠습니다.

 

개인이 승리를 위해서 양심을 져버리면

양심적인 이를 쉽게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자에 비해서 후자에 있는 쪽이

행동의 범위와 선택 가능한 수단의 양과 선택의 폭이 또한,

인지하는 것이 가능한 시각의 폭 까지도

훨씬 적어지는 문제이거든요.

당연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세상 모두가 다 이러한 가치관에 동의를 하였을 때,

그 때에 가서

 

왜 아직도 나는 상위 1%가 아닌 것일까?’

 

라는 의문은

갖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원래가 그 영역은

그야말로 극소수의 인간들에게나 진입이 허락되는 영역인 것이고

사실상 심성 보다는

능력과 인맥, 자본, , 사람들의 인망이나 헤게모니 등의

많은 현실적인 요소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진입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 역시도 사회에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심성의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개인의 욕심 때문에

승리를 위해서

양심이나 사랑과 같은 고결한 가치를 알기를

길가의 똥처럼 알게 되는 날이 만약 온다면

 

당신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 같습니까?

 

상위 1% 의 지배자들이

과연 지금보다 더 양심적일까요?

그 반대가 될까요?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의식의 수준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바로 당신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사악해져도 되는지 마는지를 결정하는 참고 자료

그것도 최우선의 참고자료가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사회시스템은

지배계급과 지배의 역학 관계라고 하는 사회시스템 자체의 특성상

오히려 야생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참혹하고 더럽기 까지 한

야생보다도 더 치욕스럽기 까지 한 약육강식의 체계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절반 정도 이 길에 근접을 하신 듯, 하기는 하네요.)

 

그리고

그 때에 가서는 정말로 진짜 운명이 위와 같은 형태의 운명의 질문을

모든 개별적 자아들에게 던질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문제입니다.

 

아직도

심성의 문제가

현실이 아닌

뜬 구름 잡는 소리 같으신가요?

 

당신들은 그동안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권력 계층들에게

참으로 순진하게도

낚여 왔던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월요일에는,

 

한국 저작권 협회와 도깨비 제작진 여러분들께 전화 좀 거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하죠.

이 문제를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 놓아야 하는 그런 문제이니까요.

 

가벼운 대화와 협의로 끝날 수도 있고

법정 공방으로 갈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던

제가 이기는 게임이네요.

도깨비 제작진 쪽에서

만용을 부리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지간한 표절시비 같으면 모르겠는데

당신들은 제가 사랑했던 여성을 모욕한 문제가 겹쳐서

제가 감정 상태가 절대로 좋을 수가 없다는 점을

꼭 염두에 두시고

대화에 임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송선미씨와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그 여성분이 현숙한 여성분일 뿐인 문제를

치졸하게 걸고넘어지신다면

(끝까지 여자를 걸고넘어지면)

 

저는 당신들을 절대로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음은 저의 본래 정신과 진단서 입니다.




지능지수 130

동일 연령대 평균 남성 기준

상위 2.2% 지능지수 입니다.

그럼에도 행동지수가 낮게 나와서

종합지수가 122(상위 10% 수준) 에 머물렀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제가 받은 숫한 협박들이 원인입니다.

 

공유씨가 저의 송선미씨를 위한 설정을 도용한 문제들과 같이

제가 사랑한 송선미씨를 향한 더러운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이루 열거하기가 내 입이 더러워진다고 느껴질 만큼,

 

이 진단서를 부천지청에서 어떻게 바꾸어 법정에 냈는지는 다음을 보아주시겠습니까?





다음은 부천 세종병원에서 2010年 당시 심장박동수 급증으로 인하여 진료를 받은 기록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치매라고 부르는 질병의 정확한 명칭은 '알츠하이머' 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원인으로인한 다양한 종류의 치매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알츠하이머를 특정 지어서 그것만을 따로 '치매' 라는 명칭의 질병으로 분류합니다.)

두뇌를 구성하는 세포인 뉴런에 필요한 필수단백질분자가 파괴되며

이것이 두뇌 그 자체가 쪼그라들고 파괴되어가면서 물리적인 요인으로 절대적으로 인지능력을 상실하는 질병이죠

이는 MRI 영상을 촬영하여보면 그 질병의 진행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고

저도 역시 MRI 영상을 촬영하여 저의 두뇌 상태를 파일을 CD에 받아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야 말았습니다.

사진 자료를 올려드리고 싶기는 한데 아마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군요


아래에 몇장 정도만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와같은 알츠하이머를 가리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치매라고 부르게 되는데요

이것을 상기 진단서에서 MCI, Dementia 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겁니다.

비 알츠하이머성 인지기능 장애라는 뜻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초기치매의 수준까지는 아니고

환자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서 일상생활 수행에 약간의 문제는 있을 수 있으나

문제가 정말 없는 것은 아니고

일반인의 인지기능에 비해서 조금 뒤떨어지는 수준의 인지기능 저하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상태인데


이것이 알츠하이머와는 무관한 심인성의 질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흥분을 하면 눈에 뵈는게 없다라는 표현을 우리가 간혹 쓰고는 하죠?

심리적 흥분으로 인하여서 간혹가다 보이는게 지극히 당연한게 않보이기도 하고

들리는게 지극히 당연한 말을 못듣기도 하며

이것이 시각기능이나 청각기능과는 전혀 무관한 그냥 인지기능의 저하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기억을 하는게 지극히 당연한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채 그냥 넘어가버리고는 한참 뒤에 그것을 알게된다는 뜻입니다.


알츠하이머가 아니기 때문에

두뇌에 저장된 정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회복되고

그 때마다 바보같은 자기 행동 떠올리면서 자책을 하게 되고

그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그렇다고 진짜 알츠하이머 환자들 처럼 정말로 영영 기억을 잃어버리는 그런일은 또 없는


바보같은 행동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걸 모조리 다 기억해야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걸 '주관적 기억장애' 라고 진단을 해 주셨더라구요.


한마디로 말해서

주변에서 조금 모자란다 싶은 부분을

간단하게 조언정도만 해주면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충분히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다만 그 모습이 다른 일반인들의 눈에 조금 답답해 보이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미지를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충분히 작용이 가능한 그런 문제라는 뜻이죠


CDR 척도라는 것은

사람이 자립이 가능한가를 따질때에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얼마나 필요하냐를 따지는 척도입니다.


인공지능은 똑똑하지만 자립은 불가능하죠

사람은 인공지능만큼의 기능은 발휘할 수 없지만 자립이 가능하구요


CDR 척도가 0.5 점이라는 것은 (자립에 대한 타인에 의존을 요구하는 정도 50%)

주변사람들 마음씨가 조금만 따스하다면

대인관계 형성이나 사회생활시 업무 수행등에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이라는 말입니다.


따스한 마음씨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죠

딱 그만큼의 문제거든요


1점부터를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치매' 로 분류하는 것이 CDR 척도입니다.

(자립에 필요한 타인에 대한 의존도 100%)

(3점은 300% , 5점 50% 에 이르면 사망입니다.)


한마디로 ....

심계항진상태로 10年 가까이 살다가

인지기능에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심정지 발생가능성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걱정은 해야 하는 수준이 맞고,


아무튼 심인성의 질환이기 때문에

치료 그 자체는 가능하구요

알츠하이머는 절대 치료 불가이지만

주관적 기억장애는 치료가능합니다.


인지기능 회복이 된다는 뜻이죠


되는건데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협박이 계속 될 경우

치료가 않될 수는 있습니다.


물론 약물치료는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만....

후우 ....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경험상 우울증 치료제 쪽이

수면 유도 효과 약물에 비해서

월등하게 증상개선에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실제로 피부로 느껴질정도더군요...


아래는 몇장의 MRI 자료인데 혈관 조영자료가 포함되어져 있고

지극히 정상적인 두뇌의 모습입니다.


그냥 뭐랄까요


이런 자료까지 굳이 공개하는 이유?

성격 탓이랄까요?

불확실한 것은 좀 싫어하는 편이라

안 올리면 안올렸지


그냥 정상적인 두뇌에서 인지기능 장애가 발생을 하고 있는데

그게 그냥 심리적인 요인이고

사람들의 따스한 관심 정도면

얼마든지 회복도 가능하고 치료도 가능하고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가능한데


누군가가 절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주변사람들과는 항상


너 왜 이거 안 했어?

너 내말 안들려?

뻥치지마 엄살이냐?


이러고 맨날 싸워대니 ....


답답해가지구요


아프긴 아픈데


당신들 생각 처럼 구제불능으로 아픈것은 절대 아닌거고

그렇다고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닌데

심정지 가능성을 걱정해야하는 사람에게

제발 부탁이니 시비좀 그만 걸어주시고

따스한 배려와 온정을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 드려보는 겁니다.







혈관이 매우 굵으면서도 인삼 잔뿌리마냥 세밀한 부위까지도 모세혈관에 연결되는 부분들까지도 발달이 잘 되어있구요

대뇌피질도 전혀 손실없이 매우 정상적입니다. 아니 오히려 발달 정도가 우수한 편입니다.

두뇌의 어느 각 부분들에서 해마라던가 아니면 어떠한 감정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각 부분들이 

특출나게 망가져 있다거나 발달이 덜 되었다거나 그런것은 전혀 없구요


IQ 130의 두뇌가 맞습니다.


다만 인지기능 장애와 관련해서

신경전달물질들의 이동을 방해하는 요인을 관측이 일부 가능한


PET-CT 단층 촬영을 해 볼 필요는 조금 있습니다.


MRI 자료와 연계할 경우


대뇌의 발달 상태가 심리에 영향을 주는 다른 부분들은 없는지 정밀 진단이 가능하겠죠

가령 싸이코패스같은 경우 실제로 죄책감을 관장하는 영역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저에게 특별히 해당사항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심리치료 관련해서 뇌파측정도 해봐야 하는데 ...

(누가 자꾸 저를 조현병 환자라고 주장을 해대니 ...)


돈이 하염없이 들어가는 일들이죠 이게 전부


아무튼 조만간 우울증관련한 약물치료가 곧 시작 됩니다.

약물치료는 분명히 인지기능 회복에는 도움이 되기는 하는데 

결정에 꽤 큰 고민이 발생을 하고 있네요


몇가지 문제가 있다보니 .....


인지기능 회복에는 도움이 되는데 완치판정까지 약물로 인한 다른 문제의 발생을 피할 수가 없어서 말이죠 ...

기간 산정도 꽤 어려운 상황입니다.

(실제로 아직 포스팅에 올리지 않은 수용자의무기록부 자료상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기로도

심전도 그래프에서 우울증 치료제 투여가 빈맥증상 개선에도 확연히 도움이 되고는 했습니다.)


일단 심정지가능성 문제 때문에라도 당장에 요양치료가 필요한 상황인데

다행히 국가배상청구가 심의중인지라 ....


문제는 국가공무원 위법사실을 순순히 인정을 하느냐겠죠 ....

그동안의 정당한 협박사건 수사요청에 대한 장기간의 묵살 문제도 .....


다음으로

위조된 자필 진술서 표지에 적힌 괴한의 필적 보여드립니다.




맨 끝 228번이

법정 제출 문서 번호이구요.

저 뿐만 아니라

저희 집안 누구도

이런 필적 없습니다.

 

위에 보이시는 추가 보충 내용과 혐의 인정 내용의 일부가 보이실 겁니다.

저게 원미 유치장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 17P.

남아있는 2장이구요

나머지 원본은 원미 유치장 내부에서

괴한이 삭제폐기해놓고

저렇게 표지를 꾸며 쓴겁니다.

 

저게 제 1차 검찰 진술 조서에 반영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징역을 1씩이나 받았거든요




정확하게 증거 제출 필요성을 호소하는 내용이 삭제된 자필 진술서를 인용 한 모습입니다.

돌아버릴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정당방위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정당방위라는 것이

꼭 내가 공격을 받아야만 성립되는 개념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 형법에는 오상방위 라는 것도 있더군요





내 여자가 어떤 협박을 구체적으로 받았는지는

사생활 보호 목적으로 법정가서 떠들일이구요

증거는 무지 많습니다.

제출을 못해서 실형을 받은 거죠.

현재 재심 진행중인 재판입니다.




정당방위에 의한 방어행동이라는 것이

지인의 법익을 대변할 수 있는 강제적 권리까지로 이어질 수는 없다하지만

 

정당한 방어행동과 방어를 위한 합리적 요청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대가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면

 

이는 명백한 협박이고 모욕입니다.

왜냐면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이거나 명백한 고의였어도

저에게는 대변할 권리가 생기지 않을 수 있지만

 

정당방위를 목적으로 하지 말라고 요청을 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며

방어의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방어행동까지 표출이 이미 되었음에도

이와 같은 방어행동을 유도하는 상대의 행동이 계속 발생할 경우

 

이것은 엄연히 개인정보보호법의 맹점을 악용하여

저로 하여금 불필요한 방어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거나

방어행위를 하지 않을 경우 심리적인 수치심을 자극시킬 목적으로 자행되는 고의적인 협박이 됩니다.

페이스 북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의 수많은 시시비비 중에는 상대의 공통적인 반응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꼭 저의 맞춤법문제를 물고 늘어져서

저에게서 사과를 얻어내려 하는 점입니다.

마치 저의 심리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의적인 죄책감 부분을 자꾸 자극하면 얘는 자기가 먼저 사과할거야 라는

상대방의 어떤 일관된 행동 양식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죠.

어떤 공통되고 일관된 행동 양식을 바탕으로

같은 사건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안과 않 의 혼용문제가 그렇습니다.

 

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안 된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보시다시피 엄연히 혼용인데도 끝까지 이걸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단지 물고 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꼭 저에게서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는 공통된 행동양상을 보여줍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 것은 저인데도 말이죠.

맞춤법 시비는 적반하장으로 저에게서 사과를 얻어내려는 사람들의 대표적 행동 양상에서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 중에서 안과 않 의, 혼용 문제가 가장 큰 주류를 이루고요



아래는 저의 문학작품 표절 피해 사건과 관련하여

제가 언제부터 작품을 써 왔는지를 입증할

주요 스크린샷들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최초 6월에 대검에 제출한 진정서 원본은 아니지만

그 외에 필사본을 만들어둔 것으로써

본래는 송선미씨께 드리려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중국어 회화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내용이구요

발음이 不怕慢 (부파만) 只怕站 (즈파찬)

부파만 지파참 (아닐 부 두려워할 파 느릴 만, / 다만 지 두려워할 파 우두커니 설 참)

느린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멈추어 서있는 것을 두려워 해라



비희극에 대한 내용은 인문학 강의에서 참조한 내용입니다.

교수님 성함을 알 수가 없는데요

교정시설에서 꽤 재미나게 들었습니다.


저로서도 처음 작품 저작 의도가 고전문학의 뿌리를 찾겠다는 의도였지만

셰익스피어가 이미 먼저 이러한 문학을 완성을 하였었는지는 저도 이때 처음 알았죠



























다음은 대검에서 부천지청을 거쳐서 부천 오정경찰서로 사건이 이관된 이후의 진행상황에 대한 불만입니다.


A4 용지 4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저더러 한 번의 수사접견에서 모두 설명을 해보라더군요


간략한 요점이야 물론 짚어서 설명은 해 드렸지만

그걸 뭘 녹취를 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한국 저작권 협회에 정식으로 감정 요청을 촉탁한것도 아니면서


2018 형제 22212 호는(부천지청)

금일자로 공식 확인 되기로 검찰 불기소 의견 송치되어 각하 처분을 받았다고 하니


저로서는 황당하기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화조차 안받더군요.


찾아가는 것도 어느정도 저 스스로 이만큼 증거 확보가 된 이후에나 찾아가는 것이지

미란다원칙 무시하고

진술서 위조하고

법정 제출된 진단서 뒤바꿔치기하던 사람들한테

증거도 없이 찾아가서 무슨 할 말이나 있겠습니까?


이 건에 대하여서는


검찰청법 제 10조(항고및 재항고에관한 법률) 

6항 
항고 또는 재항고를 한 자가 자기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인하여 정하여진 기간 내에 

항고 또는 재항고를 하지 못한 것을 소명하면 그 항고 또는 재항고 기간은 그 사유가 해소된 때부터 기산한다 

에 의거하여 

부천지청과 송윤상 주임검사 
그리고 부천 오정경찰서와 원미유치장의 불법적인 수사와 
사문서 위조및 법정 증거물인 정신과 진단서를 뒤바꿔치기한 
법정 증거자료 위조사건에 대한 명백한 책임을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천지청으로부터 각하된 모든 사건은 
저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인하여 
그들이 저를 중상모략하기 위하여 고의로 각하시킨 사건들이므로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정당한 법적 책임을 진 날로부터 
항고 기간이 다시 계산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참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요청드린 민원  1AA-1810-010202


와 관련하여 추가로 요청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현재 녹취록등의 다수의 파일들이


이곳 신문고 파일첨부갯수 제한으로 인하여 추가 보충 자료 제출이 필요하며


현재 해당 사건은 

부천지청 2018 형제 22212 호로 분류되어

지난 2018年 8月 24日 각하 처분을 받았음을


今日 2018年 10月 2日 오후 2시경에 전화로 확인 하였습니다.


금일부터 항고기간이 다시산정된다는 답변역시 녹취록에 받아 두었으나


이를 떠나서


부천지청에 맞길 사안이 아니므로


부천지청의 위법 사실이 너무나 뚜렷하므로


서울지역


또는 이전 민원번호에 신청하였던 인천 중부경찰서 쪽으로 수사권을 이양을 부탁드립니다.


위 사항에 대한 법적 문제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저작권법 위반사항의 처리는


형사고소 이후 법원에서 한국저작권위원회 측에 저작권 위반에 대한 감정을 촉탁하여야 하며


부천지청에서의 사건 처리결과가 무엇인지


각하인지 내사종결인지를 알아야만 하고


각하일경우 항고절차가 있고

내사종결일 경우에는 

입증자료를 좀 더 보완하여

다시 고소를 하여야 합니다.


형사고소가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민사로도 방법은 있으나


형사고소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항고처리 기간이 설혹 지났다고 하여도

새로운 증거자료가 있을 경우에

재 고소가 가능하며

이는 검찰에서 충분히 수사할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 경우에 한하는데요


검경의 수사과정상의 불법이 섞인 사안이므로


항고기간에 대하여서는

항고자 본인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인하여 항고 기간이 지났아도 책임이 없는것을 소명하면 소명된 날로부터 항고기간은 재설정 된다는 것이


검찰청법 제 10조(항고및 재항고에관한 법률) 


6항 

항고 또는 재항고를 한 자가 자기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인하여 정하여진 기간 내에 

항고 또는 재항고를 하지 못한 것을 소명하면 그 항고 또는 재항고 기간은 그 사유가 해소된 때부터 기산한다 


에 의거하여 


부천지청과 송윤상 주임검사 

그리고 부천 오정경찰서와 원미유치장의 불법적인 수사와 

사문서 위조및 법정 증거물인 정신과 진단서를 뒤바꿔치기한 

법정 증거자료 위조사건에 대한 명백한 책임을 져야만 하며


그리고 이러한 부천지청으로부터 각하된 모든 사건은 

저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인하여 

그들이 저를 중상모략하기 위하여 고의로 각하시킨 사건들이므로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정당한 법적 책임을 진 날로부터 

항고 기간이 다시 계산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참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즉 항고 자체는 부천지청으로 진행 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나


지금 현재 상황은 부천 오정경찰서 이인기경사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녹취에는 동의치 않음)


최초 제가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서 아직 실형이 집행중이던 당시


2017年 7月 26日


제가 이인기경사님과 부천지청측으로 보낸 편지



두건의 증거 조작 사건에

단지 원미경찰서만이 연루된 것이 아니라


상고심 종결 이후

부천지청으로 이관된 법정 증거자료인 

정신과 진단서의 진단 년도가 2015年 에서 2017年

으로 뒤바뀐 명백한 사실 앞에서


이는 부천지청 전체 또는 부천지청의 일부 세력이

법정 증거를 조작한 명백한 증거에 해당하므로


또한


원고분량 400여 p. 의 내용을


단 한번의 두세시간 남짓한 수사접견에서 모두 설명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문제이므로


수사를 중지하여 주시고


이 내용을 가지고 출소후에 정리하여 한국 저작권위원회를 통하여서나


아니면 인천지검 또는 인천 중부경찰서등의


부천지청의 상급 기관을 통하여 다시 수사를 요청하겠다는 내용의 자필 편지에 의하여


이인기경사님이 부천지청의 지휘를 받아서


소송을 불기소 처분 의향으로 검찰에 송치하여 각하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어제 즉 2018年 10月 2日

전화로 통지를 받아 녹취록을 준비하였으며


녹취록 상에는 단지 각하 통보가 2018年 10月 2日 임을 확인 하는 내용


즉 항고기간이 前日인  2018年 10月 2日 로부터 계산된다는 내용에 대한 간략한 통지가 있었던 것인데요




이 사안의 처리를 위하여 앞의 내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행법상 제가 항고를 하려면


부천지청 쪽에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항고기간이 설혹 지난 사안이라고 하여도


검찰 판단하에 수사가치가 충분할 경우

또 새로운 증거자료가 발견이 된 경우


꼭 부천지청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사기관에서라도 수사는 가능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는 부천지청을 향하여 항고를 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수사기관


즉 인천 중부경찰서측에


부천지청의 위법사안에 대한 고소절차를 진행함과 동시에


이 저작권법 위반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드릴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천지청에서 설혹 이 사건을 다시 묵살하더라도


저는 합법적으로


다른 수사기관에 이 사건의 수사와


부천지청의 위법사항을 고소 고발할 충분한 법적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 정해진 기간 내에 제가 항고를 하였고


부천지청에서 설혹 다시 묵살하더라도


이는 부천지청에서 저라고하는 특정 개인을 향한 위법행동과 


그 위법행동을 통하여 저라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매장하려하였던 충분한 인과관계가 성립 되므로


항고기간이 지났어도


항고가 기각 되었어도


재항고 기간이 지나더라도


다른 수사기관에서


이 두가지 사안에 대한 충분한 수사 권한을 부여받을 수가 있으며


지금 당장 그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다.


이를 참조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부천지청의 위법사항 관계자가


위법 사항은 인정하되


처벌의 불원을 저에게 호소할 경우


처벌을 불원할 의사는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인물이


상기의 증거물 조작 이외의 그 어떠한 해악도


특히 저의 대인관계에


특히나 제가 사랑하였던 여성분에게


그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았음이 입증된 경우에 한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경우에 한합니다.


이는 이들이


저와 송선미씨와의 다툼 내용을


경찰 기록보관 연한이 지난 자료를 들추어내어


재판기록에 편철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 인천 중부경찰서 사건인데


지속된 어떤 송선미씨와의 인연 도중


본의 아니게 다툼이 발생하여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한 번 잡은 사건이 있었고


그녀는 곧장 경찰을 불렀고


이내 인천 중부경찰서에 방문을 하였으나


사실상 제가 그동안 그녀에게 해 준 것은 좋아한다는 고백과


그림 선물 의향을 밝힌 것 정도가 전부였고


그녀 스스로도


저에게 어떤 가벼운 경고를 던지고자 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송선미씨 본인의 처벌 불원 의사로써 훈방조치된


거의 8년 가까이 오래된 사건을


저를 미친사람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관계도 없는 재판정에 

해당 사건 기록을 무단으로 편철해버린것이 굉장히 저로서는 찜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문제에 대하여


부천지청


특히 송윤상 주임검사(위 사건 기록 편철한 자)


그리고 미란다원칙을 무시하고 무리한 체포를 감행한 최병주 경위


자필진술서 위조범


정신과 진단서 뒤바꿔치기한 범인 등이


철저한 조사를 받고


그 결과 만약 그들이 송선미씨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하나라도 발견될 경우


저는 절대로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며


그렇지 않을경우


즉 송선미씨가 무사함이 확인이 되고


또한 검경 수사결과 특이사항이 없을 경우


그리고 이들이


자신들이 뒤바꿔치기한 법정 증거 2개 사항과


구속수사당시의 불법에 대한 잘못을 깨끗이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경우에 한하여


처벌을 불원할 것입니다.


참고로


송선미씨 본인이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식의 의사를 전해왔다는 식의 말장난은 더이상 않통합니다.


이 문제로


제가 아닌 제가 호감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을 어떻게 해버릴 건데 너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식의


그야 말로 개떡같은 협박을 받고 살은지가 무려 10년 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저의 마음과 대인관계에 치명타를 가하고자하는 불법적인 협박이고


송선미씨 본인조차도 거부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협박으로 피해를 보는 것이 저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협박자들이 지목하는 대상중 그 어느 누구 하나의 안전조차 확인이 될 수 없다면


바로 그점을 악용하여 협박은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제가 살면서 송선미씨 아니라 누구를 만나더라도


똑같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인관계 형성이 불가능해지는 부분 - 아무도 무사 할 수가 없는데 아무것도 확인을 못하니까)


송선미씨가


정말로 제가 송선미씨와 갈라서기를 원하던


그 반대이던


이 안전의 확인에는


꼭 응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부분입니다.


특히나


부천지청이 송선미씨라고 하는 개인의 신상정보를


송선미씨 본인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저의 사건기록에 무단 편철한 이상


수사기관 관계자가 찾아와서 "그녀는 무사합니다." 라고 통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확인 입니까


저는 확인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협박을 받는게 저니까요


이 협박으로


인생이 망가지고 있는게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협박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더러운 협박과 불법 영상물등을 제작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든 자료는 현재 제가 보관중인것 이외에


인천지방검찰청 홍석기 검사님 검사실과


저의 사건 2018재노 4 인천지방법원 제 5 형사부


2018 가단 1065 위약금 부천지원 민사 3단독 재판부


2018 국배 제 114호 로 심의중인 사건


KBS 방송국


MBC 방송국


SBS 방송국에


이미 자료 전달이 끝난 사안이기까지 합니다.


저는 협박자들이 지목한 모든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확인을 요청합니다.


참고로


법정 제출된 정신과 진단서의 진단 년도가 바뀐 사건은


아직 부천지청에는 자료를 넘겨서 수사요청한 사실이 전혀 없는 사안이므로


자필 진술서 위조범에 대한 수사요청을 부천지청이 묵살한 것과 별개로


그 어떤 수사기관이라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정식 수사가 가능한 상태이며


자료는 앞서 말씀드린 모든 기관에 이미 배포되어져 있습니다.



자필 진술서 위조사건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부천지청이 묵살한 모든 진정사건들에 대한 재수사가


대한민국 어느 수사기관에서라도


수사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묵살되어져 왔습니다.


실제로 정신과 진단서 위조건에 대한 물증은


출소 후


그러니까 2018年 8月 11日 이후에 발견된 물증이고


출소 이후에 저는 단 한번도


부천지청에 그 어떠한 수사도 맞긴 사실이 없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두건의 증거 조작이란


출소 전


자필 진술서 위조사건에 대한 수사요청과


사건 피해자와 최병주 경위가 저의 합의 목적 방문 시간을 위증하여


저에게 재차의 주거 침입이라는 범죄를 무고한 사실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합의 목적으로 첫 방문을 하였던


2017年 7月 12日


오후 6時 30分 경


환한 대낮의 방문 사진이 CCTV 에 촬영되었음을 법정에 제출 하여 놓고서고


이를 20時 正刻 즉 어두운 밤이라고 위증을 한데 따른 수사요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몰이 느린 시간은


7月 15日 이며 이 때의 일몰 시간은 통상적으로 19時 59分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일몰시간은


사실상 대한민국 최서쪽 지역의 일몰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내륙지방에서는


이 공시 일몰시간에 통상적으로 해가 지고 난 뒤의


밤이 찾아오기 직전의 어슴푸레한 시간을 지칭합니다.


일몰시간은 하루에 1分 이 이동하며


7月 12日 의 일몰시간은 대략 19時 54分 에서 55分 사이가 되고


1年 에 182.5分 의 하절기와 동절기의 일출 일몰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사건 당일의 기상청 자료


그러니까


부천보다 오히려 서쪽에 있었던 부평의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2017年 7月 12日


일조량 데이터와 일사량 데이터를 분석하면


2017年 7月 12日 當日 에는

부천보다도 도리어 더 서쪽에 있던 인천광역시 부평구 기상관측 센터에서 조차도 

이미 20時 12分 에는 지상에서 그 어떤 태양에너지의 잔재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일사량과 일조량이란


일사량이란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의 총 량을 뜻하며


일조량이란 단위시간당 실제로 태양빛이 지표면을 비춘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써


2018年 7月 12日 에는 일조량이

18時 0.9(직전 데이터 까지 모두 구름 낀 날씨 0으로 표기됨),/ 

19時 1.0(해가 온전히 떠 있었다는 뜻,/ 

20時 0.1(1/10時間 즉 6分정도 햇빛이 지면을 내려쪼였다는 뜻으로 

20時 6分부터 지면에 햇빛이 완전하게 사라졌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때에 해가 졌다. 라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새카만 밤이 된 시간이 20時6分 이라는 뜻입니다.),/ 


로 표시되며


2017年 7月 12日 일조량은

12時 0.0(구름 낌), 

13時 0.7(0.7時間 즉 42分 동안 햇빛이 비추었고 그 이전에는 구름에 가려졌으므로 13時18分에 개었다는 뜻), 

14時 1.0, 15時 1.0, 16時 1.0, 17時 1.0, 18時 1.0, 19時 1.0, 

20時 0.2 (1/5 時間 동안 햇빛이 땅에 비추었으므로 20時 12分 에 완전한 밤이 되었음, 

완전히 지상에서 햇빛이 사라진 시간 - 그 이전부터 어두침침하긴 마찬가지)


상기 일사량 데이터와 조합하면


2017年 7月 12日

18時 에는

15時 2.43, 16時 2.08, 17時 1.62, 18時 1.06 19時 0.49, 20時 0.09 로 

18時에 태양 에너지 총량이 오후 3時 에 비하여 1/5 수준으로 다행히 구름 낀 날씨가 아니라 

그 시간동안 내내 해가 떠 있었기에 꽤 밝은 사진 촬영이 가능하지만

19時 만 되어도 마찬가지로 해는 구름 없이 내내 떠 있지만 태양 에너지 복사량이 

직전 시간의 절반에도 못 미쳐 광량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이 시간에 이미 일몰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려줍니다.

20時 12分 에 지표면에서 태양광이 그 어떠한 잔재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 밤이 되었으며

그 태양광의 양이 극히 미약하여

설혹 20時 正刻 이라 하여도 조리개 조절도 되지 않고 ISO 감도 조절도 불가능한 CCTV 화면으로 

밝은 사진을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데이터는 제가 수감 생활 중에 기상청에 정보공개 청구하여 받은 인천 부평구의 실측 자료들입니다. 

(즉 그때 그 날 당시에 기상청에서 인천 부평구라는 장소에서 실제 측정 장비를 가지고 정밀 측정을 한 결과라는 말입니다.)

(자료 스캔본 첨부합니다.)


다음은 2018年 7月 15日 20時 30分 의 야외 사진 촬영 자료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미 새카만 밤입니다.











피해자가 주장하는 대로 피해자가 제출한 본인 첫 방문 시점의 CCTV 화면이 

20時 正刻 에 촬영된 것이 사실이라면 고작 30分 만에 이런 기상변화는 불가능한 이야기 이지요


이 야외촬영이 이루어진 2018年 7月 15일은 年中 가장 느린 일몰시간을 기록하는 날로 이날 當日의 공시 日沒時間 은 19時 59分 이었습니다.

이 말은 사건 當日 에 해당하는 2017年 7月 12日 보다도 오히려 일몰 時間이 3分이나 더 느린 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날 20時 30分 에 촬영된 야외 촬영은 보시다시피 새카만 밤이며 장소는 부천과 그 경도가 비슷한 서울 여의도 물빛 광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일몰시간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최 서쪽 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이 시간에는 이미 해가 거의 다 지고 검푸른 빛깔의 밤에 보다 더 가까운 시간대입니다. 

사실상 사진촬영을 하면 밤으로 보이는 게 정상인 시간이고 동봉한 많은 사진자료들 중 

바로 이 공시 일몰시간에 촬영된 사진들도 있습니다.

매우 화면이 밝게 촬영되는(별빛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천은 밤이었죠.


따라서 피해자는 저의 첫 방문 時間을 고의로 위증을 한 것입니다.


후속방문을 유도한 사실을 감추고자 한 것이죠.


파일 첨부합니다.


이 방문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첫 방문 이후 후속방문인 22時 30分 까지


피해자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저의 방문 사실을 경찰이나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음으로써


마치 제가 방문을 해도 되는 상황인 것처럼 오해를 유도하고


실제로 3층 현관에서 문 사이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조차도


피해자는 저에게 퇴거를 종용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저는 재차의 주거침입이라는 범죄를 사실상 저지른 바가 전혀 없는데


최병주 경위는 피해자와 모의 하여


제가 경고를 듣고 나서도


방문을 무단으로 하였다고 위증한 사건입니다.


만약


사전 경고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첫 방문에 경찰 신고가 없었던 것인지가 절대로 설명되지 않으므로


이는 명백한 무고입니다.


  自家 辯論 要旨書 파일 새로 첨부합니다.


사실 앞서 제출한 검찰 진술조서상에서도 밝혀지는 내용이지만


최병주 경위는 저와의 진술조서 작성시


대단히 많은 내용을 고의로 누락하였으며


제가 말한 내용과 정 반대로 고의로 틀리게 기술하여


제가 지적하여 수정한 것만 2건입니다.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실 거에요.

이 문서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보여드린 내용보다

보여드리지 못한 내용이

몇 십 배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어제는 경찰분이 진작 신고를 하지 그랬냐 하시던데,

 

신고는 2007부터 꾸준히 하고 있었구요.

 

명확한 증거가 없이는 수사가 않 된다는 말에

그동안 증거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내용 어디가서 말을 해 본들

이상한 놈 취급이나 받고 말 이야기이고

그래서 지난 2007年 부터 계속 당해오기만하고 경찰도 수사를 안해준거거든요

사실 이것만 가지고는 잘 이해가 않되실테니 저의 피해상황부터 설명을 해드릴게요

 

지인 피해상황의 노출은 최대한 자제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이딴 댓글이 저한테 왜 달려야 하는거죠?

이게 저 뿐만인 내용조차도 아니에요





저와 페친이셨던 분들 대부분이 이런 더러운 음란물 링크 테러를 견디지를 못하고

결국 저와 단교하시거나 계정을 삭제하셨어요

저는 당연히 신고 많이 했죠

보실래요?







이런 상황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말로만 사람 현혹하던 협박이 온라인상에서 실체를 띄기 시작한 건 2017年 2月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고내역 처리결과가 언제였는지 아시나요?


제가 2017年 7月 13日 구속당할 그 때까지도

단 한건도 처리되지 않았구요


올해


2018年 8月 11日


출소하고 나서야 겨우 확인이 되었습니다.


출소 이후에는 또 어땠는데요
























이거는 뭐하는 새끼가 남의집을 쳐 기웃거리면서 노려보고가















이리 저리 왔다 갔다 기웃 기웃

이거봤다가 저거 봤다가

집안 구조 살피고 가시고


어떤 놈은 보이스톡으로 욕을하지를 않나




구글 계정 해킹시도


















연이은 해킹시도에




이게 우크라이나 계정은 오히려 절 도와준 거고

(스팸메일 발송함으로써 접속이 차단 되도록)

진짜는 국내 PC 접속 계정인데

이게 웃기는게

제가 밖에 외출중이던 시간대에 대한민국에서 누가 PC 로 저의 네이버 계정에 접속을 했었더란 말이죠 ㅎ








이 이상한 아이피주소는 도대체 뭐냐고

(마지막 사진은 다음 블로그 해킹시도입니다.)

이로써

구글, 네이버, 다음 3개 포털사이트 계정이 다 털렸었다는게 확인 되는거죠

(정정합니다. 구글 계정은 해킹 시도까지만)


거기에다가 물건들은 도난이나 당하고





































도대체 박스에다 빈통 두글자 적어두고 간 놈은 누구야?

어떤 개새끼냐고 씨발



아 ...

진짜 뼈아픈건 이거지























무려 125만원짜리 정품 다이아 귀걸이 도난 ㅋ


여기에다가

조민영씨 그림그려드릴 때 새로 산 2만원짜리 샤프도 사라졌고

샤프는 사진을 못찍었네 젠장


아 다음 사진 놀라지 마세요

주변에 정신나간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아 놀라셨나요?

이거는 어떤 사건이 있던 날 밤

경찰과 협조하에 XX 노래클럽이 어딘지 뒤적거리면서

동시에 국민신문고에 온라인 민원청원할 때

하필 그때 올라온 게시물이에요


그때 왜 신고가 늦어졌냐면

장소 특정이 무척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XXX씨가 자기 어디라고 죽어도 말을 않하더라구요



이런거에다가

낫살 처먹고 페친 여성분한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들이대는 미친놈에다가









딱 정확하게 저의 페친이 되신 여성분들 사진 위로 이딴걸 얼굴이랍시고 들이미니 속이 뒤집어질 수준






이상의 모든 내용들은 사실

그 피해상황이 대단히 축소된 상황이며

페친 여성분들 중에는


본인이 어딘가 다른 곳에 올려둔 개인 사생활이 담긴 영상이

전혀 무관한 제 3자의 손에 유포되어 스스로 계정을 삭제하신 분들도 있으며

이분은 그리 심각한 상황

즉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상황은 아니었으나

(영상물 자체가 원래 페친분이 스스로 만드신 영상이었는데

이걸 전혀 무관한 제 3자가 유포 한 것)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던 최악의 상황을 직면하신 여성분도

두분 계십니다.


불법 영상이 제작되어 유포되신 분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미칠 지경입니다..............

차라리 깔끔하게 날 죽이지 이게 무슨 드러운 짓인지






















아래는 도깨비 제작진들의 만행






당신들 햇빛으로 무엇을 비추었는지 소리내어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