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Flood present 김선홍 金善弘 작
화자 소개 및 시놉시스
Introduce the poetic narrator and the synopsis
Thomas Flood
화자 소개 및 시놉시스
Introduce the poetic narrator and the synopsis
도마는 어리석게도 끝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하였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성서가 지목하는 사단의 화신이자 뱀으로 묘사되는
바로 그 용의 심장이 가슴에서 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토마스 복음서라는 신약성서의 외전중의 하나에서는
그를 그리스도의 쌍둥이 형제라고도 전한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오로지 그만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했던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스도의 상처를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겠다고 말한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진짜 그리스도가 맞다는 것을
세상에서 처음 말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부활한 그리스도 앞에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사람이었다.
사실 인간은 신을 판결하거나
추론하거나
증거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능력도 없다.
나는 그것을 믿음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신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신을 증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우리가 그것을 신의 말씀이라고 믿을 뿐이지
신의 말씀이라고 증거 되거나 누군가가 판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녀에게 용의 심장으로 보였던 것이다.
마치 도마가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을 대고
그 상처를 확인 하여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던 그 사건처럼
그녀도 나에게
자신의 신성을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에게는 역린(逆鱗)이 있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이던
용의 역린을 건드린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또는 그 역린을 찔러 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용의 급소이기에
용이 죽음을 당한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는 나에게 역린이었다.
그리고 나는
급소를 찔린 용이며
죽어가는 용이며
부활할 수 없는 인간이며
나의 상처를 누군가가 헤집어 만져서라도
나를 증거 하여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단의 창이다.
도마는 파르티아(Parthia)에서 전도를 하다가
이교도의 창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의 심장은 나의 역린과 함께 관통당하여
오래전에 그녀와의 추억 앞에 순교하였고
나의 심장과 역린을 관통한 그 창이란
‘혀’ 라는 것이었다.
망자의 귀곡성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 섥혀
의미가 변질된 눈물들이 거대한 바위의 미로를 이루는 몽환의 공간 속에서
보석으로 이루어진 육신 이라는 무간지옥 속에 자아를 감금당한 죄수,
그저 단단하고 의미 없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단지 빛깔이 아름답고 속이비치는 투명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어떤 아름다워 보이는 불행을 담은 육신에 자아를 감금당한 수인(囚人)이
거짓 선지자를 자처하는 바로 나 의심하는 토머스가
눈물이 없는 울음을 오롯이 소리로 토해내고 있는
사단의 혀와 피로 붉게 물든 책의 표지에 도달한 것을 축하한다.
자신이 있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고서
내가 말한 사단의 혀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을 이야기하는 나는
명백히 사단이며 용이니까
성서가 지목하는 바로 그 사단이자 용이니까
내가 바로 성서가 지목하는 그 거짓 선지자 이니까
*회의론의 원조
‘의심하는 토머스(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은 예수의 12사도 가운데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한 사도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요한복음 20장에 따르면 도마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처를 보기 전까지는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부활한 예수가 형벌에서 생긴 몸의 상처를 보여주자 도마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도마는 의심 많은 자라기보다는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밖에 성서가 도마라는 사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그가 디두모(‘쌍둥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마드라스 부근에서 순교했을 것이다.
인도의 아주 오래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마르 도마(Mar Thoma, ‘도마 님’)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 명칭이 후대의 도마라는 복음 전도자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 믿을 만한 전설은 그가 파르티아(지금의 이란)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1972년에 도마에게 인도에 간 사도라는 직함을 부여했다. 성 도마의 축일은 7월 3일이다.
도마(토머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권의 모든 나라에서 남자 이름으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이른바 도마복음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성서에 포함되지 못한 많은 복음서들 중 하나였는데,
그 복음서들(각각 해당 사도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은 대부분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심각한 라이벌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썼다.
아시아의 바우히니아 토멘토사(Bauhinia tomentosa)라는 관목은 ‘성(聖, Saint) 도마 나무’라고 불린다.
꽃의 붉은 반점이 도마가 인도에서 순교할 때 흘린 피를 나타낸다는 이유에서다.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몇몇 명제(대부분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명제)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철학적 의심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었다.
절대적 진실은 부정확하다는 관점을 취한다. 불가지론의 원래의 의미는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반대 개념이다.
불가지론자들 중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거짓 모습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경우 본질적 실재는 완전히 불가지(不可知)라는 흄의 설과, 그것은 신앙의 영역에 관한 문제라 하여 남겨 놓는 칸트의 설도 있다.
감각이나 표상은 본질적 실재가 자기를 인간에게 제시하기 위한 상형문자(象形文字),
혹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프레하노프 등의 상형문자설도 불가지론의 일종이다.
아마도 화자가 대한민국에 불가지론이라는 철학적 관념에 대해서
최초로 공개 토론을 진행했던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2005년 당시 네이버 실검 1위에 몇 달을 머물렀던 화자의 오픈 백과사전을 공개합니다.
전체 조회 수가 815,977 회이며
2005.12.27. 03:09 에 작성된 글입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어원
서양 제어에서 불가지론은 언어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Agnosti-’와 주의를 나타내는 어미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Agnosticism이고 프랑스어에서는 Agnosti“cisme”이라고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어 αγνωστικισμός(Agnosticismos)에서 나온 단어이고,
이 단어 역시 ‘모르는’이란 뜻의 그리스어 agnôstos와 “앎 혹은 지식”이란 뜻의 gnosis, 두 개가 합쳐져서 나왔다.
여기서 앎 혹은 지식이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의 앎이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지식 (gnosis)을 말한다.
불가지론은 자주 형이상학, 계시, 예언 등의 적절성에 자주 문제 제기를 하는 인식론적 입장을 취한다.
Agnosticismos이란 단어는 토머스 헉슬리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종류
불가지론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것(신의 존재 여부 혹은 초자연 현상)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
어떤 사람(예를 들면 계시에 의해)이 그것을 알 수 있을 수 있지만,
그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과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신의 존재 여부)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고 계시 혹은 인식조차 불가능하다.
불가지론을 따르는 데에는 종교의 유무, 종교의 종류는 상관이 없다. 불가지론은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
불가지론은 종종 철학의 다른 개념과 연관 혹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가지론은 무신론(無神論)과는 다르게 신의 존재를 논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신(들)의 존재나 초자연적 현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분명함 아래에 있다는 회의주의와도 구분이 된다.
또한 불가지론은 설명할 수 없는 한 명의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신론(理神論)과도 다르다.
결국 불가지론은 철학적 관점이지 종교 자체는 아니다.
통계
미국의 2007년 통계에 따르면 불가지론자들은 전체 인구의 21%, 즉 6천3백만 명에 이른다고 조사되었으며,
2008년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 캐나다에서 해리스 드시마(Harris Décima)사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가 불가지론자였다.
Harris Interactive 연구소가 진행하고, 2006년 12월 파이낸셜 타임즈에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의 32%가 불가지론자이고 32%가 무신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칠레 전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와 프랑스 전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였다.
위키백과 발췌
종교의 자유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어떠한 종교를 믿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국가 또는 법이 신을 정의 내릴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과 일맥상통합니다만
명확하게 합치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국가 또는 법이 개인의 종교를 강제하거나 할 수 없는 이유는
실질적으로 불가지론에서 기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Thomas Flood present
*논리적으로 이 우주의 탄생에 어떠한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시작이 적어도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 맞다. 라고 하면
그 시작에는 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저는 세상에 신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실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성서를 신의 말씀으로 판결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서는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답변만을 드릴 수가 있을 듯합니다.
하필이면 왜 우리 모두를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어야만
겨우 생존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 하셨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서는
적어도 과학법칙과 물리법칙이 통용될 수 있는 실체로써 실제적 존재로써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그 방법 밖에 없지 않았나?
라는 어떤 생각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렇지 않고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그야말로 실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것이 가능해 진다고 하여도
단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는 삶이라는 것은
사실상 황폐한 것일 것이고
그것은 어떠한 철학적 관념의 한 가지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
어떠한 획일적인 기준 하나에 통합되고 종속 되는 삶일 것입니다.
머리를 떠나서
가슴으로 생각 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살아 숨 쉬는 심장이 멎은 뒤에 찾아올 천국을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심장과 감정을 믿으시겠습니까?
바우히니아 토멘토사(Bauhinia tomentosa) 이미지
슬픔의 바위사막 시놉시스
저자 : 김선홍 金善弘
本名 Thomas
약력 : 2014년 12월 2일 제 2회 항공문학상 시부문 장려상 수상
한국항공진흥협회주관, 국토교통부, 한국공항공사, 인천국제공항,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후원
2015년 맑은누리문학회 여름호 문예지 작품 3점 기고
2016년 신춘문예공모나라 공동발간시집 '날개를 접는다면 우리는 아직 절망을 모르리' 작품 1점 기고
1980년 4월 25일 생 학력은 인문계 고교 졸업(원종고등학교)
시놉시스(내용상의 변동은 총 63화로 끝맺고 체스판의 마지막 64번째 칸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려다가 독자여러분들께 보내는 편지 한 장을 더 추가한 것입니다.)
제목 : 슬픔의 바위 사막
부제 : 가시나무새의 울음소리
주제 : 자아와 운명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눈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왜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의 가슴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한 방울의 눈물이란 과연 무엇인가?
운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파헤침으로써 눈물과 사랑의 본질 그리고 그 의미를
진솔하게 되새겨 보는 것
작품 의도 : 우리가 운명을 맞이하는 태도의 변화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한 일이 닥쳤을 때 운명을 원망하고 싶어질 때
운명이란 과연 ‘누구’ 인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
사랑을 함에 있어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
그럼으로써 더 이상 슬픈 사랑을 하지 않도록 길을 제시하여 주는 것
장르 : 복합서사시(창작 장르)
본편과 외전을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구성,
본편은 최대한 서사시의 형식을 따라서 작성
수필의 영역에 속하는 작품이 몇 개 있음
외전은 일반적인 시집의 형식으로 구성
다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엮여져 외전 자체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됨
다른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도 함께 수록
본편과 외전을 오가며 순차적으로 모든 에피소드를 피카레스크 형식이라는
소설의 한 형식으로 엮어낸 작품(작품 구상단계에서는 형식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음)
서사시와 서정시를 오가며 각각의 작품들이 일련의 흐름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지도록 구성에 신경을 쓴 작품
자유 판타지 장르의 문학임(외전은 전통적인 서정시와 문학비평 등으로 구성)
주인공 : 슬픔의 대장장이, 그리움의 주인공, 마녀, 용사, 운명, 그리고 전체적인 작품의
모든 내용을 인지하고 설명하는 전지적 작가시점의 가상의 화자, 헬리오스, 셀레네
분량 : 작가 소개 1편, 머리말 1편, 프롤로그 1편, 본편 24편, 외전 27편,
등장인물 편, 작가의 당부 편, 체스 규칙 2편, 세계관에 대한 용어해설 1편, 에필로그,
보너스 트랙 3편 독자 여러분들께 보내는 편지 1편 도합 64편으로 구성 A4 용지 기준 374 페이지
본편 22편에 상세한 설정에 대한 개념과 등장인물 소개가 추가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보내는 편지 편에는 송선미씨(가명입니다.)께 보내는 편지글을 비롯하여
몇 가지의 글이 추가되고 작가의 그림과 추억할만한 사진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세계관에 대한 용어해설 편에 추가 보충 설명이 추가되었습니다.
어떠한 관점과 물리법칙을 근간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써내려갔는지
왜 ‘구원’ 이라는 작품이 추가되었는지
작가의 모든 설정을 공개하였습니다.
*송선미씨에게
아래 계약서가 작성되기 이전에
본인이 먼저 유고시에는
작가의 가족과 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송선미씨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는바
아래 계약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이 책은
그녀가 없었으면 탄생할 수가 없었던 책이므로
그녀의 인생이
온전히 보답 받아야 하는 문제이므로 어떤 선물을 그녀에게 주고자 합니다.
반드시 그녀가 받기를 희망합니다.
아래 내용은 아직 실제 계약서가 아님을 고지합니다.
책의 출판 시
저작권의 지분자체를 타인과 분할하거나
인세의 일부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본인이 인물을 특정하여 해당 인물과 저작권과 관계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특정인물에게 출판 당시에 저작권 또는 인세의 일부를 분할 또는 증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동의하에
일정한 양식의 계약서 작성이 필요하며
작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사와의 계약에서도
송선미씨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성을 작가인 제가
법적으로 특정하여 지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이 문제는 송선미씨와 저와의 연락이 재개되기 전에는 거론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연락이 재개 되면
이 책의 저작권의 모든 지분을 그녀와 정확하게 양분할 것입니다.
다만 양분된 지분으로 발생한 재화로써의 모든 이득은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
귀속된 재화를 어찌 처분할지는 송선미씨 본인 자유입니다.
책이 출판된 이후 연락을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결혼을 한 여성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어떤 악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2007 년부터 그녀가 결혼을 하기 한참 전부터
인연으로 엮여있던 남성의 순수한 호의의 발로일 뿐이며
그 어떠한 사심 없이
이것을 그분이 순수한 호의로써 받아주시기를 희망하는 마음에
이 내용을 공개합니다.
실질적으로 저작물 계약이 이루어지게 되면
저의 사망시
이 저작물의 모든 권리는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귀속될 것이며
그녀가 사망할 경우에는 이 모든 권리가 온전히 저에게로 귀속 됩니다.
본인 또는 그녀의 생존 시 모든 권리는 정확하게 양분 됩니다.
만약 저의 유고 후
송선미씨에게로 온전히 저작권이 귀속 되었을 때
그녀가 정상적으로 나이가 들어 자연사 또는 병사 등으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을 경우
이 저작권은 그녀의 직계존속에게로 귀속 됩니다. (그녀의 자녀 또는 친 부모)
그러나 본인 유고 후 그녀가 사고사나 급사 등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경우
또는 극심한 폭력이나 협박 등에 시달린 사실을 본인에게 알린 경우
(협박이나 폭력의 주체는 불특정 다수 또는 개인을 모두 막론하고
그녀의 가족이나 지인까지 모두 포함하여)
그 경우 이 저작권은 반드시 저의 외사촌 형
연호선씨와 그 직계존속에게로 귀속 됩니다.
이후 이 저작권은 두 집안 중 어느 한 집안에게로
그 직계존속을 기준으로 영구히 상속됩니다.
만약 본인이 유고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저의 외사촌 형 연호선씨와 그의 일가친척 어느 누구
또는 본인의 친족들 중 집안 어른의 어느 누구에게 알려도 무방합니다.
만약 본인의 친족들 중 집안 어른 분께 알린 경우
저작권은 그분의 직계존속을 기준으로 영구히 상속됩니다.
만약 그녀가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본인 유고시 현재 유서상의 실제 상속자인
저의 어머니 동청자씨 에게로 모든 권리를 귀속 시킬 것입니다.
유서상의 재산권 집행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재 작성을 할 계획입니다.
만약 송선미씨가 이 권리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본인이 유고하여 이 모든 권리가 그녀에게로 귀속이 되었을 때
작가의 직계존속 중 생존자의 한 명에게
그녀에게 발생하는 모든 수익의 50%를 증여해 줄 것을 명합니다.
직계존속 이외의 증여가 가능한 인물은 연호선씨 에게로 한정지어집니다.
작가는
살아생전에 자식을 나을 계획이 전무하므로
현재의 직계존속 이외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책의 저작권을 상속 시킬 사람이 없는바
인물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자
지난 10년간 인연으로 엮여져 고통 받았을 그녀에게로
이 저작물의 합리적인 상속을 위하여 이 모든 내용을 작성하였으며
그녀가 생존해 있을지 모를 작가의 가족들을 염려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의 문제들은 순수한 개인적인 호의의 발로이며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의 치명적인 인생의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작가와 그녀의 사적인 그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 어떠한 오점도 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의 교류가 전부였으며
굳이 그녀가 저에게 호감을 표시한 구체적 사례를 꼽으라면
계단 승강장을 뛰어올라온 저를 굳이 뛰어서 뒤따라 쫒아 올라와
잔뜩 삐쳐버린 얼굴 표정을 제 앞에 들이 밀은 정도가 되겠군요.
참고로 작가는 실제로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그녀를 실제로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그녀가 결혼을 하기 몇 년 전의 이야기들로
결코 그녀의 결혼생활에 어떠한 누를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권리와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적인 문제는 과거의 추억으로 온전히 덮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그녀의 배우자가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그 어떠한 의심을 할 만한
실제적 사건 자체가 전무하였음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감정의 교류의 문제에 대하여
그녀가 사실을 부정하건 그렇지 않건
본인에 대한 그 어떠한 종류의 모욕이나 비난도
절대로 가만히 용납할 생각이 전무함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 실제의 인물의
그 어떠한 이름이나 사진 정보 등이 전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독자들은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고
그녀와 그녀의 배우자 가족 지인들 중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본인과 본인의 지인 또는 본인의 가족
그 어느 누구와의 그 어떤 접점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이 문제를 들추어내시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전화 상 으로 음성이미지 만으로 판단을 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부분이니
송선미씨 본인이 배우자 또는 믿을 만한 분들을 대동을 하시고
배우자분은 반드시 대동하고 오시고 혼인사실 증빙서류를 지참하여 오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혼자서 오셔야만할 혹은 배우자를 대동 할 수 없는 특별한 사유가 있으신 경우
(그럴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만)
혼자 오셔도 됩니다.
다른 가족분과 오셔도 됩니다.
(이 경우 배우자 신분증 지참을 요청합니다.)
그 이후 본인과 직접 만나서
송선미씨 본인 신분증과 배우자 신분증과
서류상의 인물이 일치하는지 확인만 끝나면 됩니다.
다른 조건은 전혀 없습니다.
이후
그분들과 함께
저에게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을 상속 받기를 원한다고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절대로 그 어떠한 종류의 부담감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엄연히 송선미씨가 당연히 받아야만 할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드리려는 겁니다.
처음 인연 시작 이후
한동안 많은 개인적인 사건들을 겪어야 했고
그 사건들이 송선미씨와 직간접적 연관성은 없으나
얼마전 범죄조직과 휘말린 사건처럼
송선미씨 개인의 신변에 어떤 위협 요소가 될 만한 사건들이 많아
함부로 송선미씨에게 접근 할 엄두를 못 내다보니
(개인적인 원한을 많이 사는 편입니다.
이번 범죄조직사건 직전에도 개인이 SNS 상의 시시비비를 가지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주먹다짐을 벌일 뻔한 사건도 있었죠.
실생활에서 직장 내에서 물건들 본인의 우산이나 시계 등이
캐비넷 안에 보관 되어있던 물건이 파손을 당하고 손괴를 당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을 했고
이 문제로 경찰에 조사요청을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생활공간 상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일 다 처리하려다가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한동안 정치판에 뛰어들어 온같 집회현장 다 따라다니다 보니...
실제로 저는 18대 부정대선 무효소송 소송인단 소속에
한동안 횃불집회 시민연대에 소속되어 이번 최순실 게이트 터지기 수년전부터
박근혜 퇴진 운동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여자문제에 욕심낼 처지가 아니었던 점 양해 바랍니다.
네이버 에서는 gkstprjs 이라는 ID 로 수년 동안 그러니까
극히 최근까지 종교문제로 한국 교회와 싸워왔었습니다.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 봅시다.
라는 오픈 사전인데 작성일자가 2015.12.27. 로 조회수는 815959입니다.
한동안 네이버 실검 1위였는데
이 문제로 개인 신변보호 요청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를 많이 들었습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아무튼 그러다 보니
어느덧 결혼도 하셨고
책은 출판할 지경이 되었고
그냥 입 싹 씻고 저 혼자 다 가지려니
너무 미안해서 드리려는 것일 뿐입니다.
또 저의 접근 자체가 송선미씨 개인에게
인연 초반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현재에는 악연인 것이 분명한바
사죄의 표시도 포함됩니다.
이상의 모든 내용들은 아직 실제 계약서가 작성된 상태가 아니며
송선미씨 본인이 저작권의 상속을 거부하거나
본인에게 그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는다면
책의 출판 이후 이 책에 대한 모든 권리는
본인에게로 귀속됨을 다시 한 번 고지합니다.
출판 이후라도
계약서의 작성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의사를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 했었습니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신변에 위협요소가 많았으며
개인적 질병과 여러 가지 사적인 문제로
이제야 이 선물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미안합니다.
독자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에 충분한 보다 객관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송선미씨와 저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썸이라고 할 만한 사이에 있었던 사람들이고
위에 예를 든 사례들 이외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표시한 사례들은 많았습니다.
전부 다
송선미씨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들일 뿐이지만요
그러다가
본인에게 어떤 신변의 위협적인 요소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송선미씨의 행동반경이나 출퇴근 시간 장소 등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만날 수가 없게 되었죠.
당시 저는 수많은 사람들과 SNS 상에서 다투거나
그 문제로 현피를 뜨기 위해 만나려고 하거나
법적 고소고발 문제 등을 진행하던 상황이었고
재직했던 수많은 직장들에서 만났던 사람들 역시 모두 거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저에게 남긴 인상들은 하나같이 수틀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송선미씨가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시점에
제가 그녀를 구해 주었을 때
그 어떤 감사도 그 어떤 공포도 그 어떤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표시하지 못한 채
마치 로봇처럼 무감각하게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치한에게 희롱 당하던 시점에 공포를 표출하는 것이 보통이고
만약 누군가 그것을 구해준 것이 맞다면
안도의 한숨과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그 때 그 순간에
그 어떠한 감정적 반응도 저에게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제가 그녀에게 남겨준 인상이
“어차피 신뢰 할 수 없는 사람”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제 입장에서 그녀의 모습은
“완벽한 협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상태”
로 비추어졌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 신변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개인적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가까운 지인들조차도
저와 의견 충돌이 잦았고
제가 맞는 말을 해도
단지 기분문제 때문에 저라는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 투성 이었죠.
한마디로 저는 완벽한 고립무원의 상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실제적 협박 사건들은 끊이지 않고
제가 사랑했던 여성은 치한에게 희롱당하는 사건에 대해서
그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여러 가지 우연의 일치들로
저는 그녀를 단지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어떤 지나가는 사람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제가 지켜내야만 하는 사랑하는 여성으로 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검암역이 아닌 다른 실제적 장소에서 찾아내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녀와 연인관계가 되거나 혼인관계가 아닌 이상
단지 저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는 완벽하게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실제적 필요성과 불안요소가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점에
송선미씨는 다른 남성과 교제를 시작하고 실질적으로 결혼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질적으로 그녀의 신변에 어떤 위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의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저와 썸을 타던 그 시점에서는
그녀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그것은 그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출퇴근을 하던 시기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을 거라고 저는 추측 합니다.
10년을 사랑한 여성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사실이 분명해진 지금
지금 제 감정 크기는 저조차도 추측 불가이고
이런 감정 상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꿈꾼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도덕하게 느껴집니다.
해서 저에게는 앞으로 자식을 나을 계획 자체가 전무합니다.
물론 앞날이 어찌될지는 신만이 아시겠지만
그러나 향후 가족계획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상기의 계약 내용은 그와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송선미씨 본인이 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말도 않되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말이죠.
그리고 저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그분은 그렇게 부도덕한 여성분이 아닙니다.
지금 와서 과거의 기억을 반추 해 보면
그녀가 다른 남성분과 교제 또는 결혼을 꿈꾸고 있었을 그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감정
자신의 행동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과거의 저와에 있었던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된
그러면서도 저라는 사람의 인격 그 자체를 무시하지 않는
그야말로 현숙한 여성의 처신이라는 것을 저에게 보여 주었으니까요.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저와 그녀 사이의
그 어떠한 종류의 불쾌한 상상도
자제 해 주시기를 독자 제현 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남편 분께도 말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제가 자살이라는 수단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그녀의 신변에 불안 요소가 생기는 근본적 원인이 저에게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녀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나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야 한다는 어떤 결론
두 번째로
지독한 감정적 방황상태
저 스스로도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다음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불안한 심리상태
이제는 감정적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 되었고
그녀도 이미 결혼을 해서 신변의 안전에 대해서 제가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그냥 앞으로 주어진 제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송선미씨 께서 저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시거나
연락을 직접 하시기 곤란하시다면
gkstprjs@naver.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본인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용건을 적어 보내주시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연락처는 010-2656-725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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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네이버 게시물 인류 최대의 학살자에 대하여
그 내용의 전문을 공개합니다.
현재 해당의 게시물에는 검색의 제한 조치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의 상황이 주변에서 끊이지 않는 협박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범인이 반드시 네이버일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만 관련은 있습니다.
오픈백과
인류 최대의 학살자 그 이름을 밝혀 봅시다
프로필이미지김선홍(gkst****) 2005.12.27. 03:09조회 816,002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살육이 이루어졌던 현장과 그 배경
결코 이글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방이나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방은 아닙니다.
다만 이글을 읽으시는 기독교인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들이 몰랐던 기독교의 역사를 접해보시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닌가를 점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욕설등을 사용하여 릴레이를 이어 가시는 분들은 릴레이에 참여하실 자격이 없는 분들입니다
아래 내용은 인용문입니다.
유사 이래 최대,최악의 학살자는 과연 누구일까하는 질문에
대부분의 지구촌 사람들은 히틀러라고 답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듯 싶다.
우리는 교과서와 영화 등을 통해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약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음을 알고 있다.
나치스의 홀로코스트 만행은 이제 거의 종교적 외경으로 까지 보편화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해보기로 하자.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이 정말 “세계사의 전대미문의, 유일한, 최대의 대형 범죄”였을까?
물론 제2차 대전 때 나치스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학살은 특출하게 끔찍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겠지만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홀로코스트 신화보다 더욱 끔찍하고 처참했던 비극의 현장으로 안내하고져 한다.
1)컬럼버스의 일기장
컬럼부스가 1492년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을 부터 인류 최대의 비극은 이미 예고되었다고 판단된다.
그가 남긴 항해 일지의 몇 귀절을 우선 인용하겠다.
["배에서 내린 유럽인들을 보고 타이노 원주민들은 호기심에 가득차 기뻐하며 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왔다." ]
["그들은 무기나 폭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칼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이상하게 생기고 빛이 나는 물체를 손으로 만져보려고 했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하루 중 불과 몇시간만을 일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그저 편하게 쉬고, 서로 어울리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문화를 창조하며 보낸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거나, 원할 때면 아무 때나 사랑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섬에서 나는 조그만 금조각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치장했다." ]
컬럼버스의 관찰과 고백이 진실하다면,
타이노 원주민들이야말로 유토피아에 살고 있었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원주민들의 행복하게 보이는 삶이 컬럼버스의 질투심을 유발했을까?
그는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토로한다.
["50명의 남성만 있으면 원주민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서 그들이 가진 황금을 전부 빼앗아버릴 수 있다"]
2)컬럼버스의 만행
[백인들은 “야만적인” 타이노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의 부(富)를 약탈해서 유럽으로 가는 배에 싣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손을 도끼로 자르고, 여성들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임신한 배를 갈라내고, 아기를 공중에 던져서 땅에 떨어뜨리거나,
칼이라는 이름의 그 이상한 빛이 나는 물체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 문명화,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착취당했고,
원주민 대부분이 잔인한 폭력, 과도한 노동,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해버려,
종족이 전멸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
댄 브룩(Dan Brook) 교수의 ‘학살을 경축하며(Celebrating Genocide!)에서 인용
컬럼버스는 원주민들의 친절과 비폭력에 대한 보답으로 칼과 살륙을 선물하였다고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컬럼버스의 꿈같은, 성공적인 모험담은 무수한 유럽인들에게 전염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살륙의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3)메이플라워호 그리고 원주민 학살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대륙으로 종교적 망명을 했다고 한다.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피난을 선택했던 백인들이
이제는 박해자의 입장이 되어 종교적 명분이라는 변명하에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음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닌가 한다.
컬럼버스의 만행 그리고 청교도들의 학살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숫자는
적게는 6천만명 많게는 일억명 정도에 이른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 한다.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의 숫자는 겨우 25만명 정도라 하니....
미국인 선조들이 저지른 이 만행과 죄악은 누가 책임을 져야만 하나.....
매년 11월 넷째주 목요일은 미국인들이 최대의 명절의 하나로 꼽고 있는 추수감사절이라 한다.
그날 하루 동안 약 5,000만 마리 정도의 칠면조가 소비되고 있다하는데,
그들은 칠면조를 살륙하면서 그들의 조상들이 원주민을 학살하던 그때의 향수를 맛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4)미국 위정자들의 인디언관과 정책
1776년 7뤌4일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이날을 깃점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모든 원주민 학살은 미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러면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인디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조지워싱턴: 우리의 당면 목표는 인디언 부락의 전면 파괴와 유린이다. 기본적으로 토지작물을 파괴하고, 더 이상 경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 지상의 문명인들을 위해서 저 미개인들을 근절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술(알콜)이 적절한 수단이 될 것이다.
*존 마셜 대법관:
이 땅에 살았던 인디언부족들은 전쟁을 직업으로 삼고 숲에서 나오는 산물로 생계를 이어온 야만인이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법,
그리고 규정해야만 하는 법은 그러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그 대륙을 매입하든 정복하든, 인디언의 점유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 창조주로부터 많은 사람을 도와 그 지역을 문명화시킬 운명을 부여받은 경우,
과연 소수의 야비한 미개인들이 거주하는 곳을 자연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공평한 분배일까?
*필립 셰리던 장군: 내가 지금껏 보아온 인디언 중 선량한 자라고는 죽은 인디언 뿐이었다.
5)인디언들의 절규
나름대로 자족하며 자연과 평화를 벗삼으며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그제서야 백인들의 정체에 대해 눈을 떴을거라고 추측된다.
인디언들의 대표적 절규 몇마디를 모아 보았다.
[‘이 땅에 들어온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그러나 지켜진 것은 단 하나,
그들은 우리 땅을 먹는다고 장담했고 정말 우리 땅을 먹어치웠 다.’(수우족 추장 '붉은 구름') ]
[“백인들은 고유한 생활방식을 가진 우리를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
(샌태 수우족의 추장 ‘큰 독수리’) ]
[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 만족하기를 바란다면
강물이 거꾸로 흐르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을 것” (네즈페르세족의 추장 ‘조셉’) ]
["백인이란 종족은 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는 봄 홍수와 같다."
(수우족 대추장 '앉은소') ]....이상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서 발췌
그리고 이 책에서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충격적인 한 장면만 인용하겠다.
[1864년 시빙턴 대령은 “인디언의 머릿가죽을 모을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샌드 크리크 학살’이다.
미군과의 안전보장 서약에 따라 미국기와 백기를 올리고 있었던 샌드 크리크 지역에는 남부 샤이엔족 600여명이 있었다.
“무차별 살육이 눈앞에서 벌어졌다.…여섯살 정도 된 어린 소녀에게 백기를 들려 보냈다.
그 소녀는 몇 발짝도 못가 총에 맞아죽었다.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릿가죽이 벗겨졌으며,
한 임신부는 배가 갈라져 있었고 태아가 옆구리에 놓여 있었다.
안전보장 서약을 믿었던 일흔다섯살의 추장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렸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쌈지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
6)아메리카 침략과 가나안 침공 사건
오늘을 살아가는 미국의 위정자들이 그들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나 그외 프랭클린같은 견해를 발표했다가는
언론의 뭇매에 의해 그들의 정치 생명 자체가 존립할 수 없으리라 본다.
대부분의 미국인들 그리고 지구촌 인류들은 미국의 옛 선조들의 만행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사과하기를 거절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성역화시켜 배상문제를 야기함으로 거액의 위자료까지 챙긴바 있는 미국인들이
왜 그들의 조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하고 있을까?
결국 그들의 마음 밑바탕에는 조상들의 행위에 이미 면죄부를 주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드는데,
이러한 합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게 그들이 신봉하는 바이블 탓으로 보여 진다.
*즉,영국땅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건은 출애굽쯤으로....
*그리고 그들 조상이 신대륙을 침략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침공쯤으로....
*원주민 학살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가나안 민족들을 몰살시킨 전례를 본받아서....
가나안땅은 야훼의 약속과는 달리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그저 척박한 땅이었지만,
아메리카는 분명 젖과 꿀이 가득한 황금의 땅,약속의 땅이 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일까? 야훼의 은덕에 감사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유럽과 달리 아직도 야훼의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아래에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침공 사건과 학살 장면을 간략히 정리해 두었으니,
청교도인들의 아메리카 침략과 어떻게 비슷한 지 비교해 보시길 바란다.
*예리고 점령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 버렸다. (여호수아 6:21) >>
*아이 점령
<<광야 벌판에서 이스라엘을 쫓던 아이 주민은 그 광야 벌판에서 다 죽었다.
그들이 한 사람 남김없이 칼날에 쓰러지자 온 이스라엘은 아이로 돌아 가 그 백성을 도륙하였다. (여호수아 8:24) >>
*팔레스틴 남부를 점령하다
<<그들은 그 날로 그 성을 공략하고 주민을 칼로 무찔러 숨쉬는 것이면 하나도 살려 두지 않고 모조리 없애 버렸다.
이렇게 라기스를 해치운 것처럼 해치웠다. (여호수아 10:35) >>
*가나안 북방을 정복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성들에서 취한 전리품과 가축을 마음대로 가졌지만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칼로 쳐 쓸어 버렸다.
이렇게 코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지 않았다. (여호수아 11:14) >>
*가나안 정복을 끝내다
<< 그 때에 여호수아가 출동하여 산악지대에서 아나킴이라고 하는 거인족들을 전멸시켰다.
유다 전 산악지대에 있는 헤브론, 드빌, 아납 그리고 이스라엘 전 산악지대에서 그들을 전멸시켰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성읍째 없애 버렸다. (여호수아 11:21) >>
7)남미와 북미
WASP가 주류인 북미와 혼혈 민족이 주류인 남미는 역사에 대한 인식도 그 피부빛만큼 차이가 다르나 보다.
최근의 두 보도는 인디안 문제에 대한 접근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는 듯하다.
[“콜럼버스 원정대가 처음 도착한 이후 150여년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영국 등 서방 침략자들이 10분에 1명꼴로 원주민을 학살했다”면서
“그결과 원주민 인구는 1492년 1억 명에서 1640년대 300만 명으로 절멸되다시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 침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악랄했다”고 비난했다.]
[차베스는 지난 해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과 일부남미 국가에서 제정한 이 날(‘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공표한 바 있다.
그는 특히 35만 원주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저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과이카이푸로(스페인 침략자에 저항한 원주민 추장 이름) 계획’을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2003,10,13 한국일보
["(인디언들과의) 화해 이전에 인정과 참회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것이 화해를 위한 출발점"]
["몰살,낙태,강제 이주, 전통종교 불법화, 성지 파괴 들을 자행한 협정 위반 및 잘못된 연방 정책 등을 인정하고,
모든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미국민들이 저지른 폭력, 학대, 방치 등에 대해 미국민을 대표해 사과한다. ]
....샘 브라운백(공화.캔자스) 상원의원/2005,5,26 프레시안
미국은 아직까지 최소 6천만 명에서 최고 1억 명으로 추산되는 인디언 원주민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그저 일부 의원들이 공식 사과하자는 결의안 정도로 왈가왈부하는 중이라 한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인들의 행동 패턴은 너무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엔 포장된 예수의 사랑으로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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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포장된 사랑이라는 말에 혹시라도 신성 모독이라 하실 분들에 대해서
예수의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례를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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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성인이 예수,석가,공자,마호멧인지 소크라테스가 포함되고
공자 혹은 마호멧이 삭제되는 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어쨋던 우리는 상기 인물들을 성인으로 추앙한다, 반면 그 성인들의 흠집잡는 것 또한 즐겨한다.
*석가는 부귀를 단념했지만 자신의 처와 자식을 포기했다더라....즉 사회 생활 도피자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공자의 마누라는 악처로 유명했다더라....공자와 그 자식은 둘다 본처를 버렸다더라....
*마호멧은 돈많은 유부녀의 도움을 받아 출세했다더라....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를 경멸했으며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더라....
그러하다.
아무리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하더라도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철학,인생관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뿐이며
그러한 행위야말로 우리가 이성과 오성을 가진 존재임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예수는 어떠한가?
이상하게도 예수에 대한 험담은 별로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기독인들의 처절한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예수가 완벽한 삶의 본보기를 실제로 보여 주었는지....
사람들은 사실 유무의 진실 여부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한데,
진실한 예수의 삶에 대해 오해를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공로자는 간디가 저질렀다고 판단된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그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가?"
과연 그러한가?
혹시 진실은 따로 있는 것은 아니한가?
결론 부터 내리자면 간디는 오해를 하였고
그는 바이블을 한번도 읽었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가 되겠다.
예수는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기독인 즉 영국인들의 잔인함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간디의 말은
간디 자신이 예수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간디의 간단한 이 격언이 인구에 회자되어
예수의 성인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 셈이 되어 버렸는 데
오늘 현재도 목사들은...기독인들은....나를 모욕해도 예수를 욕보이는 짓은 하지말라고 절규하고 있으며
보편적 일반인들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음이 현실이 되겠다.
자 그러면 간디를 감동시켰다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1)예수는 원수를 사랑했는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마태 5:40)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
그 유명한 산상설교 중의 한 귀절이 되겠다.
자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절규 이전에 원수라는 단어의 정의 부터 내려야 하겠다.
불행하게도 바이블에는 원수에 대한 한계 혹은 그 정확한 뜻을 설명한 바 없다. 할 수 없이 일반적 견해 즉
사전의 도움을 받기로 하자.
사전에는 [자기 또는 자기 집이나 나라에 해를 끼쳐 원한이 맺힌 사람]이러고 명시되어 있는 데 그러면 그 당시 예수의 원수는 누구였을까?
*예수의 가족에 대해 누군가가 해를 끼쳤다는 내용은 바이블에 전혀 기록이 없으므로 일단 제외하자.
*예수의 히브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유대를 통치했던 로마는 그의 원수 목록에 들 수 있겠다.
*그 다음은 예수 자신에 해를 끼친 사람을 정리하는 순서가 되겠는 데 이 경우....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리스트에 등재되겠다.
*우선 예수를 배반한 유다 그 다음엔 예수의 포교를 방해하고 대적한 바리새인,사두개인 등 유대교 율법학자와 제사장들....그외 헤롯 왕가의 사람들....등등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사탄, 마귀, 귀신 등도 예수의 원수임에 틀림없을 터이고...
이제 예수의 원수라고 진단내릴 수 있는 그 대상은 대개 정리를 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그 원수들을 사랑했을까?
불행하게도 필자는 예수가 그 원수들을 사랑했다는 흔적들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원수들에게 악담을 퍼 부었으며 증오만 겨냥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져 한다.
바이블에 묘사된 예수의 육성을 인용하겠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 26:25) >>
*예수는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에게 충고 한 마디하지 않았으며 자살로 이어지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그저 방관하였을 따름이다.
예수는 유다를 사랑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 되겠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한 18:22,23) >>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설교한 예수,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쳐하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고 항의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 주고 만다.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 6:24) >>
*왜 예수는 부유한 사람들에 이렇게 증오를 퍼부어야만 했을까?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누가 11:42) >>
*바리새인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 붇는 내용은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는 예수의 일상사였다.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누가 11:51,52) >>
*율법사도 마찬가지....이제는 그 당시 시대 사람에게 조상의 책임까지 전가하고져 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누가 13,31,32) >>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하는 예수의 천박한 표현도 확인하자....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태 8:32) >>
*예수에게 동물 사랑을 기대함은 넌센스가 되겠다.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될 것을 예수는 왜? 애꿎은 돼지들을 몰살시켜야만 했을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 23:33) >>
*소위 성인의 입에서 독사의 새끼라는 험악한 욕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
*물론 지옥에 떨어져라는 말은 양념이 되겠고....
그러하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받는 방법은 그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야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누가 예수를 사랑의 화신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묘하게도 예수에게 정작 해를 끼친 민족의 원수...로마에겐 너무나 관대한 예수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마가 12:17) >>
*비록 자신과 신앙관이 틀렸다고 해도 같은 민족이었던 바리새인 등에게 그렇게 악담을 퍼붇던 예수가
실질적인 민족의 원수인 로마에겐 왜? 그렇게 관대했을까?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그 격언의 유일한 실천 사항은 로마에 대한 것뿐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오지 로마에 한정되었을 따름이었다.
*군중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예수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는데 그 뜻이 이해되시는가?
2)그러면 이웃은 사랑했을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태 19:19) >>
우리는 예수가 원수들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 그의 가족사랑, 이웃사랑은 어떠했을까?
예수는 말로는 정말 근사한 격언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흔하게 뱉어낸다.
우선 예수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행한 모습을 묘사한 바이블의 내용을 확인해 보자.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태 12:48) >>
*최소한 8명 식구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대하는 그 냉정한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태 13:57,58) >>
*예수의 가장 가까운 이웃 사람들은 역시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진정 이웃 사랑 실천의 모범을 보여 줄 의향이 있었다면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던 그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자 그 반응은 역시 냉랭하였다.
*그는 고향 이웃 사람들에게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았음이 너무나 확연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러하다.
예수는 가족들을 외면했으며
고향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애정도 표명하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기술인가"에서 사랑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a. 형제애
b. 모성애
c. 성애
d. 자기애
e. 신에 대한 사랑
예수는 형제애도...성애도....자신에 대한 사랑도 몰랐으며 더우기 실천에 대해서는 흉내도 내지 못하였다.
그저 신에 대한 사랑만을 자신 나름대로 실천하였을 뿐이었다.
그러하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원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에게만 온정을 베풀고 능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간디는 예수에 대해 너무나 엄청난 오해를 했음에 틀림없다.
간디는 아래와 같이 그의 말을 수정했어야한다.
크리스챤도 싫지만 예수는 더 더욱 싫다.
예수는 말로만 원수사랑 이웃 사랑을 외쳤고
크리스챤은 예수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했었다....라고.....
사족:예수의 사랑 이야기는 표절이었음도 확인하자. 혹은 너무나 흔한 경귀 였음도 확인하자.
*산상설교가 유대인의 또 다른 경전 "12족장의 경서" 그리고 샴마이와 함께 바리새파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힐렐"의 가르침에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던가
*혹은 불경 『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으며
『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등에서 빛과 소금에 대한 경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사족 하나 더 :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는 게 말만의 약속이 아니던가?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만 한다....知信行이라는 경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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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cafe.daum.net/antidogma 이드님의 계시글 중 간디의 엄청난 오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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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차례는 피에 굶주린 야훼처럼 학살과 살륙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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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시기에 야훼께 바치는 모든 제단에는 동물의 피였건 사람의 피였건 수많은 피들이 사용되었지요
신약의 시기로 넘어와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바뀐 듯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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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변명과 합리화는 바이블 책임으로 미루어 버리면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된다.
기독교는 피와 증오를 닥치는 대로 삼키는 불가사리 정도가 아닌가 한다.
*2,000년 가까이 유럽 대륙에서 야훼가 포식한 핏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십자군전쟁,30년전쟁, 마녀사냥 등으로....
*500년 정도 야훼의 입맛을 돋워주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은 언제까지 그 핏물을 공급할까....
*아마, 다음 차례로 선택된 게 아시아 대륙이고 그 전초 기지로 선택된 게 우리나라가 아닌 가 추측되는데,
이제 우리 인류는 당연히 거부해야만 한다. 야훼의 재단에 바쳐지는 그 피의 공양물들을.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허용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컬럼버스 가 만약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만약 컬럼버스 가 제대로 된 항해를 하여 인도에서의 후추 직수입 성공을 자축하는 장삿꾼으로 남았더라면....
*만약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행복한 삶에 감화를 받아 그곳에서 생을 마쳤더라면....
*만약 컬럼버스가 타이노 원주민 사회를 인류의 이상적 삶의 행태 정도로 규정하는 책을 출판했더라면.....그리고 유럽인들이 그 원주민의 삶을 본 받고져 했더라면....
미국인들 그리고 기독인들에게 불편한 책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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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시애틀 추장의 편지]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나?
이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가겠다는 건가?
이 땅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반짝이는 소나무 잎, 바닷가 모래밭, 짙은 숲속의 안개,
수풀과 지저귀는 곤충들 모두가 우리 민족의 기억과 경험 속에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숫물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우리가 땅을 당신에게 판다면, 기억하라. 공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공기는 모든 목숨 있는 것들에게 정신을 나눠준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을 쉬게 해 준 바람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둬갔다.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의 정신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니 우리가 땅을 팔거든, 이 땅을 신성하게 세속에서 분리시켜둬야 한다.
사람들이 찾아가서 꽂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칠 건가?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땅에 일이 생기면 땅의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생긴다.
우리는 안다. 땅은 사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모든 사물은 우리 몸을 연결하는 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인생의 직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 한 가닥일 뿐이다. 이 직물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의 신은 당신들의 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땅은 신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땅을 해치는 것은 땅의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운명이 어떨지 모르겠다.
들소가 모두 몰살당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야생마가 길들여지면 어떻까?
숲속의 신비한 구석이 사람들 냄새로 가득하고 말하는 데 쓰는 전선(전화줄)으로 언덕의 전망이 얼룩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귀뚜라미는 어디에 거할까? 사라져버린다.
독수리는 어디 사나? 가버린다.
잽싼 조랑말에게 인사하고 사냥에 나서는 것은 뭔가? 삶의 종말과 살아남기 경쟁의 시작.
마지막 남은 빨간 사람(인디언)이, 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기억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그림자가 될 때,
그래도 해안과 숲은 여전히 여기 있을까? 우리 민족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될까?
갓난아이가 엄마의 심장고동 소리를 사랑하듯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가 땅을 팔면, 우리가 했듯이 사랑해주라. 우리가 했듯 돌봐주라.
이 땅을 받았을 때처럼 땅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라.
모든 아이들을 위해 땅을 보존하고 사랑해주라.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땅의 일부이듯 당신들도 이 땅의 일부다. 이 땅은 우리에게 소중하며, 당신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안다. 신은 하나란 것을. 빨간 사람이든 흰 사람이든 사람은 나뉠 수 없다.우리는 결국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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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cafe.daum.net/antidogma 제일 마지막 게시판인 기독교와 권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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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모세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출 3:8) >>
분명히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그들을 데려가려 합니다. 신의 말씀이라 정당화를 시키면서....
그곳이 원래 이스라엘민족의 땅이었다구요?
다음을 보시죠. ...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거쳐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성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창 12:6) >>
아브라함이 이주하기 이전부터 가나안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노라고 바이블이 증거 하는 장면이 되겠습니다. ... ... ...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에돔 에는 이미 그 땅을 다스리는 왕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아래와 같다. (창 36:31) >>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이 일어나기 이전에 라는 문장과 이미 그 땅을 다스리던 왕들이 있었는데... 라는 문장이 똑똑히 눈에 들어오십니까?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근본적인 명분은 하나님이 시키셨다 입니까?
콜럼버스와 청교도들의 인디오 학살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군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 중에 분명히 기독인 여러분들의 신앙의 주체이신 신에 대하여 모독에 가까운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인정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 역시 기독인 여러분들께서도 인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의 의도는 신을 모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인 여러분들과 그 외의 지식인 사용자 여러분들께 우리가 몰랐던 기독교의 다른 얼굴을 알리려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실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라 하는 존재가 결국은 범신론적인 의미의 관념적인 신화 속에서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성경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음을
기독인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 이슬람과의 종교 전쟁과
그 외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피의 역사에 대해서도 재조명해주실 지식인 여러분들을 구합니다.
<<< 위의 내용들 까지는 수정되기 전의 본문입니다.
아래에 댓글들 중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어 올려봅니다
"사견을 버려라"
다음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어째서 관념적인 신화 속에서의 존재일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증입니다
즉 여러분들께서 말씀 하시는 저의 사견입니다
1. 기독교가 말하는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
2. 현재로서 근거는 성경 즉 바이블뿐 기도응답이나 기타 사례들은 직접증명이 아닐뿐더러
신의 개입 외에도 다른 초자연적 현상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제외
3.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
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라는 기독인들의 대답
5.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
6.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쓰여 졌으므로
앞뒤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신다면 가정으로 존재하는 신이 가정으로 신의 말씀인 바이블을 증명한다.
라는 논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환논리의 오류라는 것이죠.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의 눈에는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합리화가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의 자유를 방패로 삼는 말입니다
즉 내가 믿음이 있다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자유이다
그러한 나의 자유를 속박하려 하지 말아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겠다. 라는 말이라는 거죠
그러나 종교의 자유라는 것은 철저하게 유일신을 부정하는 논리라는 것을 기독인 여러분들은 인지하시지 못하십니다.
종교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종교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택하여 믿을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죠.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믿어라 라는 말은 결코 아닌 거죠.
즉 유일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만의 "사견" 일뿐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 이러한 기독교 자체의 논리적 모순에 대한 지적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경우
"소위 토기장이의 비유" 를 들어 인간은 신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건방진 소리는 하지 말아라.
라고 근엄하게 훈계하시려는 분들 많습니다.
소위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라는 불가지론 을 주저 없이 펼치신다는 말이죠.
이 역시 기독인 여러분들의 사견 일겁니다
물론 저 역시 신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어디까지나 보편적으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가지론이 진실 이라면 성경은 누군가가 날조한 문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지론이 진실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성경이라는 문서는 신이 직접 작성한 문서여야 하거든요
그러나 바이블 어디에도 신이 직접 성경을 작성하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예외라면 모세가 받은 십계를 적은 서판이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과연 그 시대에 도대체 어떤 문자를 가지고 적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한참입니다만 접어두기로 하구요
즉 바이블은 인간이 작성한 문서이기에 불가지론은 결코 진실성을 획득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유일신의 신성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겠지요.
즉 바이블은 신의 말씀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초창기의 기독교는 다른 대다수의 미스테리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로 시작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기독교는 서서히 변질되어져 갔습니다.
바이블을 신격화 하면서 부터 사제가 신성시 되어져왔고
그것은 곧 권위 있는 자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저항권을 말살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개신교는 또다시 바이블을 신격화 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까지는 저의 사견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릴레이를 개설할 때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저에 대한 비난의 화살보다는
기독교를 통하여 삶의 희망을 찾아가시는 분들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러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기독교 자선단체가 여태껏 사회를 위해 봉사 해온 부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민들 역시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종교를 통해서 삶의 희망을 얻으시고자 하시는 분들 역시 많을 겁니다.
저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그런 분들께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Ps. dong2ugi 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며 스스로 올리신 릴레이의 삭제를 요청 하셨기에 전부 삭제 해드렸습니다
"이딴 릴레이로 내공 벌고 싶지 않습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스스로 대화를 포기하시더군요.
Ps2. 본문 중의 과격한 표현에 대하여 감정이 상하신다면 여러분들께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용 글이기에 제가 임의대로 하기 힘든 부분들 역시 많았으며
제 글과 인용 글이 뒤섞여 있는 관계로 자칫 임의대로의 수정은 인용 글이 제 글처럼 보이게 될 소지가 크기에
그리고 위에 적은 대로 논리적인 개연성 확보를 위해 수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답글로만 말씀 드리기보다는 이게 좋겠군요 ....
Ps3. 위에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종교' 라는 약간 모호한 표현에 대한 불만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다음은 저의 릴레이 작성 의도 이니 참고 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특정 단체를 노리고 쓴 글은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글 쓴 의도는 어디까지나 바이블을 100% 신의 말씀이라 믿는
혹은 그러한 근본주의자들을 흉내 내는 혹은 따라하는 그리고 이용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를 향합니다.
대상을 특별히 누구라고 지적하기가 힘들어질 만큼 현재 한국 종교문화가 왜곡 되어진 부분들이 많은지라
(꼭 근본주의나 문자주의 창조과학회를 꼬집기에 앞서서) 해당의 불특정 다수들의 그릇된 오해의 시발점이라고 할수 있는
바이블의 오류와 과거에 있었던 그릇된 믿음의 종착역을 예문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선택 했습니다
지식이 짧다보니 인용 글이 필요했고 인용 글에 부적절한 어휘들이 많아 당초 저의 의도를 100% 전달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은 인정 합니다
때문에 지속적인 릴레이를 작성하는 중이지요 아무튼 불편하게 읽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Ps4. 위의 순한 논리 오류를 통한 바이블의 거짓을 증명하는 논증에 대한 부연으로
115번 릴레이 신과 종교와 인간 을 작성 하였으니 참조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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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까지가 전체 본문 내용의 전문으로 당초 작성 의도를 명확하게 말을 하기에
스스로도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던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작성 의도를 지금도 명확하게 애초에 이런 뜻이었다고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추가의 내용의 보충과 모든 화두에 대한 의문들을 그동안 저의 작품 슬픔의 바위 사막으로 그 화두와 고민들의 해답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떤 존재 인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모습이 신의 모습이라면 저는 이것을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지칭 하겠다고
내가 원하는 신의 모습은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말하며 피와 살육을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
집안에 불이 나서 가족과 아이들을 먼저 구할 것인지 성경을 먼저 구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성경부터 구하라고 말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아름답고 선량한 모습이어야 했다고!
우리가 신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신을 강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원하는 신의 모습을 규정짓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기에!
또한 하나 더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그 문화 그 자체가 바로 잘못 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 사이비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 사회와 인류가 쌓은 업적을 종교의 이름으로 겁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와 반대되는 것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 신의 말씀이고 100%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이
그냥 따라야만 하는 문서라는 말에 처음부터 반대했던 것입니다
내가 생각 했던 신의 모습
내가 바라는 신의 모습과 정 반대의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제가 뭘 알고 말했건 모르고 말했건
이런 신의 모습을 용납하고 원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되어도
아무런 불만조차 토로 하여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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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아이디로 접속한 상태에서
네이버 메인의 지식 in 을 검색합니다.
이 화면에서 프로필 검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프로필 검색 결과입니다.
나의 오픈사전을 검색합니다.
나의 오픈사전 검색 결과 입니다.
검색이 완료됩니다.
저의 이름을 검색해도 저는 검색 되지 않습니다. 동명의 이인들만이 검색 됩니다.
저의 이름을 네이버에서 검색해도 저는 검색되지 않습니다 2
네이버의 본인 아이디를 검색한 결과
다시 이 화면에서 지식in을 검색합니다.
오픈 백과를 검색합니다.
사회 정치를 선택합니다.
종교를 선택 합니다.
개신교를 선택 합니다.
2006年 6月 19日 이전의 게시물이 검색되지 않습니다.
카톨릭을 검색합니다.
2006年 초부터 2005年 12月 까지 저의 게시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2006年 초부터 2005年 12月 까지 저의 게시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2.
보시다 시피 저의 게시물 작성 年度 는 2005年 12月 27日 입니다.
개신교 카테고리의 조회수 816.003 의 게시물을 개신교 카테고리에서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감추어진 게시물의 링크를 다시 한 번 붙여넣기 해 드립니다.
링크를 클릭하여 주십시오.
https://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0308
보시다시피 100 번째의 가장 첫 번째의 오픈 백과 게시물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의 네이버 아이디로 접속하여 정상 카테고리를 따라가도 99번째 까지만 검색이 됩니다.
기타의 다른 그 어떤 방법으로도 검색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 게시물에 대한 네이버측의 답변입니다.
(연관검색어의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목을 정확하게 끝까지 다 입력 하여도
최종적으로 검색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검색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제한 된 것입니다.)
네이버측의 답변
연관 검색어 비생성 됨
연관검색어 입력하여 검색하면 저의 게시물을 제외 한
당시에 릴레이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의 게시물들만이 검색됩니다.
제목을 입력하는 중간 까지는 검색어가 생성 됩니다.
검색어 생성이 중지되는 단계
검색어 생성이 중지되는 단계
보시다시피 2006年에 한참 릴레이가 진행중이던 시기의 릴레이 오픈 백과사전 집필에 참여하신 다른분들의 게시물들만이 검색이 이루어질 뿐
개설자인 저의 게시물은 더이상 검색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검색이 제한된 게시물에 접근하여 댓글을 남긴이들이
이와같은 게시물 검색 제한 조치의 배후 일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들의 목록입니다.
상기의 게시물은 2006年 당시 1年 내내 네이버 실시간 검색순위 1위를 기록했던 게시물이며
2006年 末 을 전후로 하여 더이상 사람들의 관심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검색의 제한 조치가 실제로 행해진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제로 댓글이 계속 게시되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모든 내용은 현재 검찰에 조사요청을 마친 상황 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상황이 이렇기에 검색이 제한된 게시물에 접근하여 댓글을 남긴이들이
이와같은 게시물 검색 제한 조치의 배후 일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들의 목록입니다.
상기의 게시물은 2006年 당시 1年 내내 네이버 실시간 검색순위 1위를 기록했던 게시물이며
2006年 末 을 전후로 하여 더이상 사람들의 관심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검색의 제한 조치가 실제로 행해진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제로 댓글이 계속 게시되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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