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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독립문 이야기(펌)


자료 출처 :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75126


혹여라도 이 자료가 삭제당할까봐 두려워 펌해옵니다.





독립문 네거리 독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독립문. 그 뒤로 서재필 동상이 멀리 보인다


서대문 네거리에서 무악재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네거리가 하나 나타납니다. 그 네거리의 이름은 ‘독립문 네거리’입니다. 이 네거리명은 이곳에 있는 ‘독립문’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원래 독립문은 현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70m 가량 떨어진 도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979년 성산대로 공사 때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잇는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말하자면 도로공사 때문에 역사 유적이 자리를 내준 셈이죠.

독립문은 첫눈에 봐도 전통 한국식 건축 양식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화강석을 층층이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습니다. 또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李花]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양 위의 앞뒤에는 한글(시내쪽)과 한자로 ‘독립문’이라고 쓴 돌 현판이 붙어 있고, 그 양옆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독립문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 주초(柱礎) 2개가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개선문을 본떠 만든 독립문


대체 독립문은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을까요? 오늘의 주제는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만, 사전공부를 겸해 독립문 건립 경위부터 먼저 간단히 짚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던 그 해, 조선정부는 일본의 지원 하에 3차에 걸쳐 갑오개혁(갑오경장)을 단행했습니다. 조선정부 내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한 주체들은 개화파 관료들로 이들은 이를 통해 권력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그 무렵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여 귀화한 뒤 컬럼비아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미국명 필립 제이슨)이 과거의 동지인 개화파들의 잇따른 귀국 종용으로 1895년 12월말 12년만에 귀국했습니다.



송재 서재필


귀국 직후 1896년 1월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는데, 그와 개화파들은 국민계몽과 정부의 개화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의 재정지원(4,400원)과 각계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자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이를 기념하여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함)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기념 첫 사업으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 건설을 주창하였는데,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에 서재필, 윤치호 등은 개화파들의 지원 하에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모태로 독립협회를 결성(1896. 7. 2)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서재필은 고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밖에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 김종한, 이상재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이듬해 11월 중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인근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 하단부는 돌 주초, 상단부는 목재 문으로 구성돼 있다




영은문을 헌 자리에 세운 독립문. 가운데 한옥은 모화관을 개조한 독립관이며, 원내는 영은문 주초(柱礎)임


그러면 여기서 이들이 주장하는 ‘독립’은 누구(어디)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독립문이 세워진 1897년 당시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체결(1905년)은 그로부터 8년 뒤의 일이며, 1910년의 국권상실은 그로부터 13년 뒤의 일입니다. 그러면 이 때 ‘독립’ 얘기는 대체 왜 나온 것일까요? 다음 두 가지에서 우리는 그들이 주장한 ‘독립’이 누구(무엇)로부터의 ‘독립’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문을 세운 위치이며, 다른 하나는 독립문 건립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가 보인 자세입니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는 도심 한가운데인 광화문 자리도 아니고 서울의 관문이랄 수 있는 남대문 자리도 아닙니다. 과거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헌 바로 그 자리입니다. 결국 이는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바로 중국(당시는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이 점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문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세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보다 더 분명한 증좌가 있습니다. 독립문 건설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는 "조선이 몇 해를 청(淸)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으로 독립하였다."며 기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통해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려는 것이었고, 그런 연유로 독립문 건립 위치를 대중(對中)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 자리로 잡은 것입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1895년 일본과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 천명한 바 있어 독립협회가 언급한 ’하느님‘은 결국 일본인 셈입니다.


청-일간에 시모노세키오약 체결 장면 (1895년)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왜 그때는 조선의 ‘독립’을 원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조선 침략의 마수를 드러낸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약 제1조에서 놀랍게도 '조선은 자주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이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에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명시(아래 박스 내용 참조)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속셈은 오랫동안 중국의 손아귀에 있던 조선을 중국(청나라)에서 떼어놓는 것이 1차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20년 전, 즉 '운양호사건'(1875년) 때부터 이를 심모원려(深謀遠慮)하였던 것입니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주요 내용]                     [병자수호조약'의 주요 내용]
1.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할 것          1.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짐
2. 타이완[臺灣]을 일본에게 할양함                        2. 조약 체결후 20개월내 부산 등 2개 항 개항할 것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함               3. 개항장 내에 조계(租界)를 설정할 것




그러나 독립협회를 이끈 개화파 세력들은 일제의 이같은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정적이랄 수 있는, 친청파 명성황후와 청나라간의 유대를 차단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개화파들의 이런 정치적 의도는 묘하게도 일본과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청나라와 결탁한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할 목적에서 개화파를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1884년)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으며, 김옥균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은 김옥균 일당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했었지요.



1883년 미국방문길에 나선 개화파 일행. 앞줄 오른쪽 두번째부터 서광범, 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 네번째는 유길준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등 ‘독립’ 두 글자만 들어가도 순사들이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에도 독립문은 '독립' 두 글자를 달고도 온전히 살아남았습니다. 탄압은커녕 오히려 당국의 보호와 배려를 받앗습니다. 총독부는 1928년 10월 경성부(현 서울시)를 통해 독립문 상단부에 대해 보수공사를 해주었으며, 8년 뒤인 1936년 5월엔 독립문을 아예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 영은문 주초는 '고적 제59호'로 지정됨)

'독립' 두 글자라면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던 일제가 대체 왜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재필 등 개화파들이 주도해서 세운 ‘독립문’은 처음부터 일제(일본)가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따라서 현재 독립공원 입구에 있는 독립문이 마치 항일투쟁의 정신적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독립문’에는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이 너무도 짙고 또 깊게 배어 있습니다.

독립문에 배어 있는 이완용의 ‘흔적’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문 건립에 이완용이 크게 기여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독립문의 상징인 현판을 그가 썼다는 점입니다.

이완용은 당시 친미성향의 '정동파'의 핵심멤버로 독립협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초대회장 안경수에 이어 제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독립협회 운영비 전체 모금액 510원 가운데 100원을 그가 내는 등 협회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회장이 된 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협회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독립협회 자체가 사실상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였던만큼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의 최대 공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이런 공로(?) 때문인지 <독립신문>은 1997년 11월 11일자 1면 논설에서 이완용을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이라며 칭송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완용이 썼다는 '독립문' 현판 글씨. 왼쪽 한자는 무악재 쪽이며, 오른쪽 한글이 시내쪽임


다음은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점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재까지 나온 객관적 기록과 방증자료만을 가지고 얘기한다면 독립문 현판은 이완용이 쓴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제기된 주장들과 관련 자료들을 총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유일한’ 역사적 기록은 일제 당시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名物)'이라는 고정연재물이 실려 있는데, 독립문을 다룬 이날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고 기록한 <동아일보> 기사(1924. 7. 15)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기록은 현재까지는 이 기사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대로 이완용의 자서전 <일당기사(一堂紀事)>에는 그가 66세 되던 해인 1923년 1월 11일, 직지사에 2개의 편액(대웅전, 천왕문)을 써서 내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독립문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의 일개 사찰에 써준 현판도 기록해놓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큰 독립문 현판을 썼다면 이 역시 기록해뒀을 것으로 생각되나 의외로 기록이 없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반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동아일보> 기사에 반론을 펴는 사람은 김자동(83)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으로 그는 구한말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손자입니다. 김가진은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 때 이상재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 건립에도 기여한 인물입니다. 단지 이런 인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1918년 이완용 주도로 서화협회가 결성되었을 그해 10월 제1차 정기총회에서 김가진은 이완용 등과 함께 고문으로 선출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김가진 역시 당대의 명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동농 김가진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은< 한겨레>에 기고한 글(2010. 1. 3)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김씨는 또 <중앙선데이>(2010. 09. 18)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서예 전문가나 정통한 감정가라면 한눈에 알 수 있는 문젭니다. 52세의 농익은 동농 글씨가 분명해요. 동농 선생은 송나라 때 명필 미불의 글씨를 즐겨 쓰셨어요.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게 보여서 중후하고 넉넉하지요. 이완용은 당나라 안진경체를 즐겨 썼는데, 이완용 글씨는 세로로 길고 옹색한 맛이 있습니다. 글씨에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요.”



김가진이 쓴 안동 천등산 봉정사 현판


그러면 김씨의 주장대로 서예 전문가의 의견은 과연 어떨까요?

“감정 권위자인 서예가 김선원(66)씨는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단언했다.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위는 같은 날짜 <중앙선데이>에 실린 기사 내용입니다. 김선원 씨는 독립문 현판 글씨는 체형과 서법으로 볼 때 이완용이 아닌, 동농 김가진의 글씨라는 얘깁니다. 감정가이자 그 자신이 서예가이니 그의 식견을 경청할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김가진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고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김가진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면 그 역시 어디엔가 관련 기록이 남아 있을 터인데 현재로선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또 <장강일기>를 쓴 정정화는 김가진의 며느리인데다 이 책 역시 1998년에 출간된 것이어서 객관적 신뢰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윤덕한 씨가 펴낸 <이완용평전>


결국 김자동씨 측의 주장도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하다보니 이 역시 반론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반론을 편 사람은 언론인 출신으로 지난 1999년에 <이완용평전>을 펴낸 윤덕한(도서출판 중심 대표, 65) 씨입니다. 그는 위의 <중앙선데이>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통해 독립문 현판은 이완용이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100% 이완용 글씨입니다. 정동파가 중심이 돼 창립한 독립협회지요. 외부대신 이완용은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이 되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어요. 김가진도 발기인이긴 했지만 그는 친일파였어요. 정동파가 주도한 사업에 현판 글씨를 쓰겠다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윤씨는 특히 독립문 현판이 글씨체가 굵고 힘이 있는 것이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이완용이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들었습니다. 특히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또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정황상으로도 이완용이 썼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윤씨의 주장은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 기사와 함께 여러 정황 등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현재로선 독립문 현판은 이완용이 썼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이를 뒤엎을만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독립문 완공 직후 모습. 독립관 주변으로 초가들이 있고,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둘러처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