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탑 (저자 김선홍)
(신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사회를 무너트릴 신벌)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모순
기준과 사회는 사람의 위에 존재한다?
사람은 기준과 사회의 위에 존재한다?
전자를 선택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기준과 하나의 사회 조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선량함 이라는 가치가 모든것의 가장 최정점에 설 수 있는 사회도 가능하죠.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이
사람의 위에서 사람을 지배하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 했을 때
비로소 사람과 사람간에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후자를 선택하면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판단 기준이 공통의 기준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누구말이 맞는가 보다
누가 하는 말 이냐가 더 중요해지게 되며
결국 대화가 단절되게 됩니다.
단순히 부조리가 발생하고 불행해지게 될 수도 있는 그런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탁! 하고 탁자를 치니!
억! 하고 죽더라!
그게 왜 내잘못이냐!
누가하는 말 이냐가 더 중요할 때
그 누군가가 했던 실제의 말
즉 현실입니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전자와 후자의 모든 선택자들이 한결같이 말 하는 내용
현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어느 한 쪽은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현실 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쪽의 주장을 망상이라고 서슴없이 선택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나의 인생의 화두였습니다.
나는 사람보다 기준과 선과 악과 사회가 더 위에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해 왔었습니다.
도덕과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사회를 비로소 공정 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무릇 현실주의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현실적인 목표이자 이상 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구축한 것은 사람 이지만 사회에 속하고 난 뒤부터 사람이 사회의 지배를 받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준과 법과 도덕과 관념 위에서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비현실적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하다.
얼핏 그럴듯 한 말 입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거나 범죄자이며 사악한 목적으로 하는 말 일때에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없다는것에 대한 동의가 포함 된다면,
사람이 법이나 도덕 보다 더 중하니까
내가 당신의 물건을 좀 가져가겠소
(권력자로써의 횡포이거나 궁핍이나 원한 기타 충동등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적 요인이 발생할 때마다.)
농담 같겠지만
현실이 되는 이야기라는것입니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부터
그에 반해서
도덕과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할 경우
범죄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 됩니다.
(그래도 범죄할 자들은 범죄를 하겠지만 잡기가 훨씬 수월해지고 그 숫자도 줄어들 것이며 따라서 공정한 판결이 발생하겠죠)
그것이 사회가 존재 시초부터 품은 모순입니다.
사회라는 시스템이 그 시작부터 떠안은 구조적 모순
사람을 위에 둘거냐
사회를 위에 둘거냐
그것이 바로 바벨의 탑입니다.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은 현실적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 벽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 할 능력이 부족함을 사유로 하여
타인의 창의성을 도둑질 해야만 할 현실적 필요성을
창의성이 풍부한 사람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되며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창의성을 타인의 창의성으로 억지로 부품을 갈아끼웠을 때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또다른 현실적 벽에 끝없이 부딪혀야 하며
그 때마다 끝도없이 타인의 창의성을 도둑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도덕과 법과 기준이 사람을 지배 하게 할 것인지
사람이 도덕과 법과 기준을 지배 하게 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위의 부족한 창의성을 가진 사람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고 함께 대화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사람이 기준보다 중할 때
저마다 다른 개인적 기준들은 완벽한 상호간의 대화의 단절을 불러오며
그 대화의 단절은 각자의 인생이 보다 더 중하다는 현실과 맞물려서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현실로 만듭니다.
언어가 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일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탁자를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과는
대화 그 자체가 그냥 불가능합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라는 소설은 바로 그 바벨탑의 구체적인 청사진에 해당하는 소설 입니다.
옴니버스형 소설이라서 일반 대중들이 읽기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또 작가분이 처음부터 저와 같은 주제의식을 가지신 것은 아니시지만
실제로 바벨의 탑의 가장 구체적인 청사진에 해당하는 소설 입니다.
기실 그 대화의 단절의 사유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나는 법이고 도덕이고 사회고 깡그리 무시하고 다 내멋대로 주물럭 거리고 싶어
라는
어떤이의 어린애같은 망상이 제때에 통제받지 못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 일 뿐입니다.
모두가 나면서 부터
통제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자제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웁니다.
사람은 머리를 쓰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쓰는 생명체에게
도덕도 법도 무슨 기준도 다 초월한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하고싶다
해놓고 보니 그 대상이 나였으면 좋겠다.
어찌 그것을 서슴없이 망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 창세기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그 바빌로니안 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것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이 사용해야 할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절대로 그 바벨의 탑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트릴 수밖에 없도록 구성된 말씀 입니다.
바벨의 탑
(신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사회를 무너트릴 신벌)
창세기 11장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은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실제 창세기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그 바빌로니안 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것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이 사용해야 할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절대로 그 바벨의 탑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트릴 수밖에 없도록 구성된 말씀 입니다.
(신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사회를 무너트릴 신벌)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모순
기준과 사회는 사람의 위에 존재한다?
사람은 기준과 사회의 위에 존재한다?
전자를 선택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기준과 하나의 사회 조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선량함 이라는 가치가 모든것의 가장 최정점에 설 수 있는 사회도 가능하죠.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이
사람의 위에서 사람을 지배하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 했을 때
비로소 사람과 사람간에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후자를 선택하면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판단 기준이 공통의 기준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누구말이 맞는가 보다
누가 하는 말 이냐가 더 중요해지게 되며
결국 대화가 단절되게 됩니다.
단순히 부조리가 발생하고 불행해지게 될 수도 있는 그런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탁! 하고 탁자를 치니!
억! 하고 죽더라!
그게 왜 내잘못이냐!
누가하는 말 이냐가 더 중요할 때
그 누군가가 했던 실제의 말
즉 현실입니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전자와 후자의 모든 선택자들이 한결같이 말 하는 내용
현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어느 한 쪽은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현실 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쪽의 주장을 망상이라고 서슴없이 선택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나의 인생의 화두였습니다.
나는 사람보다 기준과 선과 악과 사회가 더 위에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해 왔었습니다.
도덕과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사회를 비로소 공정 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무릇 현실주의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현실적인 목표이자 이상 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구축한 것은 사람 이지만 사회에 속하고 난 뒤부터 사람이 사회의 지배를 받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준과 법과 도덕과 관념 위에서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비현실적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하다.
얼핏 그럴듯 한 말 입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거나 범죄자이며 사악한 목적으로 하는 말 일때에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없다는것에 대한 동의가 포함 된다면,
사람이 법이나 도덕 보다 더 중하니까
내가 당신의 물건을 좀 가져가겠소
(권력자로써의 횡포이거나 궁핍이나 원한 기타 충동등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적 요인이 발생할 때마다.)
농담 같겠지만
현실이 되는 이야기라는것입니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부터
그에 반해서
도덕과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할 경우
범죄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 됩니다.
(그래도 범죄할 자들은 범죄를 하겠지만 잡기가 훨씬 수월해지고 그 숫자도 줄어들 것이며 따라서 공정한 판결이 발생하겠죠)
그것이 사회가 존재 시초부터 품은 모순입니다.
사회라는 시스템이 그 시작부터 떠안은 구조적 모순
사람을 위에 둘거냐
사회를 위에 둘거냐
그것이 바로 바벨의 탑입니다.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은 현실적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 벽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 할 능력이 부족함을 사유로 하여
타인의 창의성을 도둑질 해야만 할 현실적 필요성을
창의성이 풍부한 사람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되며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창의성을 타인의 창의성으로 억지로 부품을 갈아끼웠을 때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또다른 현실적 벽에 끝없이 부딪혀야 하며
그 때마다 끝도없이 타인의 창의성을 도둑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도덕과 법과 기준이 사람을 지배 하게 할 것인지
사람이 도덕과 법과 기준을 지배 하게 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위의 부족한 창의성을 가진 사람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고 함께 대화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사람이 기준보다 중할 때
저마다 다른 개인적 기준들은 완벽한 상호간의 대화의 단절을 불러오며
그 대화의 단절은 각자의 인생이 보다 더 중하다는 현실과 맞물려서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현실로 만듭니다.
언어가 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일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탁자를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과는
대화 그 자체가 그냥 불가능합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라는 소설은 바로 그 바벨탑의 구체적인 청사진에 해당하는 소설 입니다.
옴니버스형 소설이라서 일반 대중들이 읽기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또 작가분이 처음부터 저와 같은 주제의식을 가지신 것은 아니시지만
실제로 바벨의 탑의 가장 구체적인 청사진에 해당하는 소설 입니다.
기실 그 대화의 단절의 사유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나는 법이고 도덕이고 사회고 깡그리 무시하고 다 내멋대로 주물럭 거리고 싶어
라는
어떤이의 어린애같은 망상이 제때에 통제받지 못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 일 뿐입니다.
모두가 나면서 부터
통제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자제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웁니다.
사람은 머리를 쓰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쓰는 생명체에게
도덕도 법도 무슨 기준도 다 초월한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하고싶다
해놓고 보니 그 대상이 나였으면 좋겠다.
어찌 그것을 서슴없이 망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 창세기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그 바빌로니안 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것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이 사용해야 할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절대로 그 바벨의 탑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트릴 수밖에 없도록 구성된 말씀 입니다.
바벨의 탑
(신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사회를 무너트릴 신벌)
창세기 11장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은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실제 창세기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그 바빌로니안 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것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이 사용해야 할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절대로 그 바벨의 탑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트릴 수밖에 없도록 구성된 말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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