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무게가 아닌 돈이 할 수 있는 일의 무게
사실 필자는
살면서 단 한번도
돈이 사람보다 중하다고 생각한적은 전혀 없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돈이 할 수 있는 일의 무게에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인생을 담보로 잡을만한 무게가 걸려있는 경우에 한하여
그 경우 그 무게는 그 돈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누군가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트러플의 가격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10g 에 2만원
검은색 프랑스 자연산 송로버섯의 가격이다.
이탈리아산 하얀색 송로버섯의 경우에는 조금 심각했다.
같은 크기의 덩어리 하나가 억대에 경매로 낙찰된다.
흔히들 프랑스 3대 진미중 최고로 치는 캐비아의 경우가 같은 무게의 황금의 가격의 절반정도 된다고 한다.
15g 에 30만원
그러나 600 g 정도에는 얼마냐 1천 200만원 정도 한다.
이탈리아산 하얀색 송로 버섯의 20분의 1 정도 되는 가격이다.
도대체 그것을 무슨생각으로 먹느냐
그런 생각이 안떠오르면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일반 시중에는
마치 향수의 원액을 희석하여 향수를 제조하듯이 오일의 형태로 판매된다.
물론 당연히 누군가는
그것을 자연산 버섯의 덩어리를 원물 그대로 먹는다.
그런데 그것은 과시가 아니라 의무인 경우로 한정된다.
(법으로 규정된 내용은 없으나 통상의 관례다.)
이를테면 국가간의 외교 협상 자리에서 실제로 국가 지도자인 수뇌부가
정말로 협상을 통한 국가간 의견의 조율을 위힌 자리가 열렸다거나 할 때
그 분들은 품위나 과시가 아니라 의무로서 그것을 드셔야 한다.
그 분들의 식사는 곧 그 국가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있으므로 내가 그것을 쓰는것은 나의 자유이다.
아주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그 돈을 그 사람이 써야할 의무자로서 합당한가
우리 그것을 생각하여 보자
일단 먹는 이야기부터 해 보자
내가 이탈리아산 자연산 하얀색 송로 버섯이 오늘따라 유난히 먹고 싶었다.
경매장에 사람을 보내어 수십억에 매우 큰 덩어리를 낙찰받아오게 한 다음
얇게 슬라이스를 내어서 요리에 얹어서 그 생물을 직접 먹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그 가격표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혹은 그 돈이 할 수 있는 현실상의 무게를 배제한 오로지 순수한 상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나는 그것이 목으로 넘어 가기 이 전에
지금 이 순간에 그 돈으로 살리는 것이 가능한 생명들의 숫자부터 떠오를것 같다.
그건은 타고난 간담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느냐 아니냐의 수준의 문제다.
따라서 반드시 누군가는 그것을 생물로 덩어리채 먹어야만 하는 누군가는 오로지 의무로서 그것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이율배반적인 내용에 도저히 납득은 잘 안될테지만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사람은 그 사람이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가능한 그 직무의 크기와 동일한 사람이라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의무로서 먹어야 한다고 매일 그런것을 먹는다면 당연히 국가 재정이 건사할 리가없는 노릇이므로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순간에 한하여
즉 그것이 정말로 그 사람의 직무의 수행에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돈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무한한 자원이 아닌 유한한 자원인데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그 돈이 정말로 집중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사회는 아무런 기능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사회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경우 정말로 이탈리아산 하얀색 송로버섯을 식재료로 구매해서 한끼에 먹을 수도 있을 만큼 사회의 자본이 집중되지 않을 경우
사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것이 그냥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그것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그 행운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사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않아도
사회라는것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하얀색 이탈리아산 송로버섯이라고 하는것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그것을 덩어리채 먹는다.
그냥 원래 그런 일이다.
그것을
그 행운의 차례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전제 왕권제도 하에서는 혈통으로 정한 일이다.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는 투표로 정한다.
공산주의 사회역시 투표로 정하지만 민주주의와는 그 작동의 방식이 조금 다르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서
정말로 민초의 고혈을 착취하여서라도 그러려고 하는것이 부당하였기 때문에
전제왕권제도가 지구상에서 도태된 사회제도가 된 것이다.
위의 상황에서 중요한것은
결국 저울의 무게추의 균형이다.
사실 필자가 창안한 경제 정책에서는 단 한가지의 문제가 있는데
최저가 입찰제를 폐지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최저 이윤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갈 경우
정작 타국에서는 최저가 입찰제를 고수 하여서라도 이쪽을 이기려고 드는 경우가 문제다.
지금까지 이 지구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 원인은 바로 위의 문제다.
내 나라 안의 문제라면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타국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는 순간 국가의 경쟁력이라는것이 유명무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누군가는 정말로 의무로서
한 끼 식사에 몇 억을 쓸 수도 있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최저가 입찰제가 폐지되지 않을 경우
다른 부차적인 원인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정작 실제 시장을 형성하는 시민들의 자본 총 량의 부족의 문제로 인하여서
그 어떠한 신 성장 동력이 나타 나더라도
세계의 경제는 앞으로 10년 내에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것은 코로나 19따위가 원인도 아니고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발생하여서도 절대 아니고
중국이 패권을 쥐기 위한 행보를 하여서도 절대 아니다.
그냥 시장의 전체 소비 주체가 되는 소비자들에게 정작 자본이 충분히 환원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모든 국가가 동시에 함께 서로를 온전히 믿고 모든 국가가 동시에 최저가 입찰제를 폐지할 수 있을 것인가?
위의 모든 내용들이 싫다면
국가도
사회도
법도
도덕도
윤리도
모조리 다 깡그리 내어다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로 되돌아 가야 한다.
즉
자연 상태로 회귀 하여야만 한다
사기를 잘 치면 되겠지?
그만 두라는 뜻이다.
모든 위선도 가식도 거짓도 모조리 다 깡그리 내어다 버리고
진실로 하나님앞에 겸손한 인간으로서 진실한 양심부터 되찾아라
그러면 길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굳이 대중 가요를 인용을 하려니 조금 그렇지만 내용을 전달 받아야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려니 어쩔 수 없고
다만 전달 하려는 내용이 꽤 중요하니 아래 가사를 해석하는 과정부터 이해를 하고
문학이 사기인지
아니면 본인들이 사기꾼 같은 생각들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것인지
다시 한 번 더 생각 해 보아주기를 바란다.
정규 시 문학을 소개를 해 주기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댁들이 이해를 전혀 못할것 같다.
새는 날아서
그곳을 향해 가고
꿈은 멀리서
조용히 눈을 감고
떠나 왔어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다시 너를 묻게 하고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우림 4집
무언가
시 였으면 좋았겠지만
지금 적당히 어울리는 내용의 시는 없고
나도 지은적이 없다.
다만 그 내용이 부합한다 생각하여 인용한 것이다.
의심 나거든 찾아보라
비슷한 내용은 있을수 있어도 핵심은 다른 것이거나
상황과 전체 분량이 달라야 한다.
그것이 저작권 이다.
솔직히 나도 조금 애석하지만
(더 품격있는 작품을 소개하고 싶기는 하지만)
내용이 일단 부합하는지
그리고 독자 제현들이 일단 읽고 이해는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정말로 이 지구상에
하필이면 지금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고 소리내어 울면서 말하고 싶고
내 친족을 하늘로 떠나 보내듯 곡을 하며 말을 하고 싶은
아래의 내용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이
정말로 이 지구상에 지금 현재에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위 작품 하나 뿐인 것이다.
사람을 울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머나먼 타향의 먼 지방의 어딘가로
마치 애끓는 연인과 생이별하듯 억지로 떠나보내고도
매일 또다시 그것을 억지로 다시 땅속에 파묻어 버려야만 하는 서러움
그러고도 기어이 남은 서러움
언젠가는 다시 그것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작품 중에서 위 내용과 비슷한 작품은 아래의 작품이다.
다만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그것을 땅에 파묻어 버리는 내용은 아니고
지속적으로 타인의 가슴의 문을 두드리려면 무엇으로 두드려야 하겠는가 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정말로 위 내용과 동일한 내용의 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표절이다.
당연히 시인분들이 실력이 떨어져서가 절대 아니고
문학에서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기지아니하는 완벽한 절망을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
취급할 경우 그 대상을 반드시 철저한 악역으로만 인용하거나 오로지 반면의 교사로서만 활용한다.
한여름 밤의 꿈 속에 등장하는 오베른 처럼
문학속의 비극은 경우에 따라서 자극이 좀 심각할 수 있다.
즉
같은 내용의 문학작품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고
비교적 규율이 자유로운 대중가요라서 탄생할 수있었던작품이다.
셰익스 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이 위 작품속 내용과 상황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인데
사실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무엇이 비슷하냐면 작품을 쓴 이가 자신이 타고난 시대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것이 비슷하다)
다만 화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마지막의 결론이
그걸 (오베른 따위를) 본받아서야 되겠느냐는 경고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것이 위 작품과는 다른 내용이다.
(물론 그 분이야 필자처럼 정치나 경제에는 무관심한 분이라서 그런 작품을 쓰신것이고)
당연히 그것과 똑같은 내용을 도돌이표 마냥 카피한 후대 문장가들도 없다.
필자도 같은 내용의 작품을 더 읽어본 기억은 없다.
비극이야 많이 읽어 보았지만
형태가 전부 전혀 다르다.
특히 망국의 한이나 시대의 비극을 노래하는 모든 작품들이 사실 거의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것들을 정말로 땅에 파묻겠다고 주장한 작품이 있을 리가 있겠나
(자신이 타고난 시대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쓰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조금 시대를 거슬러 올라서
춘추 전국시대의 고사나
그리스 로마신화 시대처럼
정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해당 시기의 비슷한 작품들중에 유난히 막장 스토리가 많은 시대적 배경들 중에는 비슷한 다른 작품들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중세 유럽쪽 문학이라던가
흔히 고전문학이라고 하는 1800년대 이후 정규 문학들 중에는 확실히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요즘시기에도
물론 고의로 튀려고 자극적인 문제작을 쓰는 사람들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정규 문학중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시문학에서는 거의 없다.
시는 대중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더 그런데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층의 인식 수준의 차이 때문에라도
위 작품과 동일한 내용 혹은 비슷한 내용은 최소한 요즘 시 문학에는 사용이 될 수가 없고
현대의 시 문학의 체계가 완전히 확립되기 이전의 보다 자유로운 표현들이 많았던 오래전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는 비슷한 다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매우 긴 노래가사의 형태들이거나 서사 문학작품들이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고사중에는 비슷한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시중에서 찾아보겠다는 망상은 버려달라
(보통 누군가들로부터 너무 큰 원망을 품을만한 사연이 있다 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작품들이 주로 등장할만한 시대적 배경들을 좀 되짚어 보면 왜 필자가 그 중에서 현대의 정규 시 문학작품들 중에는 있을리가 없다는 수준으로 거기서 배제시키려고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비교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작품 수준이 차이가 나거나
그와는 반대로 사이비 작품들이거나
(만약 비슷한 수준이라면)
정말로 내용때문에 인용을 한 것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고결함을 억지로든 무슨 사유로든 나는 땅에 파묻었다는식의 거의 망상에 가까운 작품을 정규 문단에 등단을 시킨 단체가 있을리가 있겠나?)
(다만 그것이 정규 문학에 포함될 수준이 안되는 작품일 지라도 그내용에 요즘 깊은 공감을 느낄만큼 시대가 망가졌다는 내용을 말 하려는 것이다.)
(생각을 해 보라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에 이미 신물나게 써 먹은 스토리들을 현대 시 문학이 지금 쓰고 있을지를)
김소월 백석 시대의 문학을 지금 어떻게 찾아달라는 말이겠나.
배우는 사람들 중 혹은 시민 공모전 중에서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내용들이 있을 수가 있기는 하는데 굳이 인용을 할 필요가...
현 시대의 정규 시 문학은 신파나 지나친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고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내용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품들 또는 지금까지는 발견한 사람이 없는 새로운 철학적 화두를 탐구하는 작품들의 시대다
하필 그 내용이 저것 밖에는 없고 나도 지은적이 없는 황당한 상황일 뿐 ...
다만 지금 필자는
정말로 그 모든 것들을 땅속에 파묻어버려야 하는것 아니냐는 수준의 심각한 우려를 느끼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지구상의 무형의 가치들을
모조리 다
앞으로의 상황이 실제로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뜻이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지나친 비관으로 비뚫어지려고만 하기 때문에
없는 것은 있을것이라고 억측을 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
가슴의 문을 두드리다 fin.(Knock on the door to your chest fin.)
슬픔의 바위사막 외전 제 22편(Abduction of the “Rock desert of sorrow” part. 22)
구월의 햇살이 한가로운 버스정류장을 사선으로 침범하여
공용 의자위에 앉아 오가는 행인의 줄에 매인 강아지와 소통하는
하염없는 기다림을 감내하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어긋남이란 인식할 수 없는 접점에서 교차하여
마치 햇살과 나의 조우처럼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한번쯤 한마디씩 하고는 한다.
“내가 기다려 온 것은 네가 아니야”
사실 내가 기다려왔던 것이 구월의 햇살이 아니었던 것은 맞다.
심지어 그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보이던 야트막한 동산도,
갈대와 가을 풀들과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운데,
내리는 땅거미와 함께 풀벌레 우는 소리들이 타오르는 지면을 따라 낮고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것조차도
모두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날 구월의 햇살이 가슴을 졸이며 나를 기다려 왔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내가 거절당할 까봐 애간장을 새까맣게 태우며
간절하게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지난 시간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다.
단지 햇살은 무심하게 지평선을 넘어갔을 뿐이다.
황혼을 투과하는 ,
오랜 기다림에 지치고 힘든 내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편안히 기대어 앉은
어느 이름 모를 정류장의 차가운 유리(琉璃) 구조물,
그 투명하여 빛으로부터 유리(流離)*된 숨막히는 침묵의 벽을 따라
저물어 가는 노을빛과 함께
한낮의 따스한 햇빛 아래 의도치 않게 침묵해온 모든 날벌레들과,
역시 함께 의도치 않은 그 침묵을 우연히 유지하여온 야트막한 동산과 이름모를 초목들과 가을 귀뚜라미들은
그 형태와 모양과 유지해온 침묵의 양상을 차츰 밤에 어울리도록 바꾸어가고
나는 문득 그 모든 침묵의 시간들이 지나치게 서러운 마음에
다가오는 밤을 향해 막힌 둑을 터뜨리듯, 매우 큰 오열(嗚咽)을 방류하였다.
무기질의 유리알 처럼 변해버린 나의 망막 위를 흐르는 밤 하늘의 그 모든 별빛들은
그날 그 구월의 햇살 아래에서 나 역시 의도치 않게 침묵해 왔어야 했었던 그 모든 시간들의 횟수들만큼
나의 심장의 내부 깊숙한 곳, 그 심층부 내부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쪼개어지며 그 숨막히는 오열(嗚咽)의 열원(熱源)을 만들어 내었고
사람이기 보다는 마치 음력 초 하룻달 신월(新月) (朔月) 아래의 달그림자 같은 형상으로
그 날 그 자리에서 그 달 그림자의 숨 구멍을 통하여 세상으로 토하여진 ,
지나치게 어둡고 음침하여 도저히 그 형상을 형용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 사이로,
절대로 내것은 명백히 아닌 그 모든 것들의 사이로,
마침내 진실로 나의 것이라 할 만한 나의 눈물이,
그 날카로운 유리질의 막을 깨고 나의 눈물이 마침내 흐르자
차분한 그날, 밤 하늘의 총총한 모든 별빛들은,
나의 눈물 속에서 기꺼이 무수한 지류들이 되어 주었다.
마치 동양 여인의 눈동자 속에 숨어있는 어둠만큼이나
오로지 단 하나 진정코 유일하여 홀로 고요히 맑고 깊은,
거대한 대자연의 밤하늘 가득히,
한낮의 따스한 햇살 아래의 그 모든 침묵을 녹여낸 수많은 눈물들은,
나의 망막 위로 흩어져 가는,
밤 하늘 별빛들의 세세한 지류들을 따라서,
차츰 시야를 가로질러 사라지듯 그러나 정작은 나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나는 오로지
그 날 그 구월의 밤 하늘 아래에 아직껏 홀로 외로이 남아
이미 화석이 되어 깊이 잠들어 있는 알 껍질 속 작은 공룡의 심장만큼만 고요히 맥동하고 있었다.
일단 과거의 필자의 작품들중 위 인용작품과 비슷한 작품이 하필이면 현대 문학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아 낮에 일 차리를 마친 후 저녁무력 급하게나마 수정작업을 마쳤다.
(2022.11.17 오전 재 수정)
나는 지금 당대에 살아있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나
내 친족과도 같은 사람들의 작품은 굳이 공개 커뮤니티에서 절대 거론하고 싶지 않다.
필자는 타인의 답안지를 베끼는 취미가 없다.
그림은 태생이 피사체를 그리는 작업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그리나
직접 피사체를 보고 그림을 그리나
물론 어렵기는 후자가 훨씬 더 어렵지만
정작 그리는 사람이 그림을 그릴 줄을 모르면
즉 애초에 그리는 자가 실력이 미숙한 경우는
모방을 하려 한다고 그게 되는 일이 아닌 경우에 속하는데
문학의 경우는 다르다
그것이 단지 텍스트로 구성되기 때문에 모방에 상당히 취약하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위는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최소한 내가 배우고자하는 그 분야는 빼고 소개하는 것이 정석이다.
배우는 자가 단지 소개하는것이 가능 하다고 덥석 소개부터 한다면
그게 ...
최소한 내가 그것을 인용하거나
소개하는 행위가 누군가의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 밖에는 안되는 그런정도 수준은 간신히 면할수 있는 그러한 수준에서 인용작을 결정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양쪽 모두에게 공격당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위 주제에 대하여
즉 본문이 거론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하여
최대한 긍정적 효과를 얻기에 충분한 내용의 부합도를 보고 인용작을 결정 하였다.
위 인용작에 결점이 있다면 단 하나다
문학적 세련미의 추구가 다소 부족하다
다만 그 간결한 내용속에 담긴 전체적인 함축성은 정규 문학 작품에 비교하여 크게 뒤떨어지는 수준은 확실히 아니다.
또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충실한 고뇌와 결론 역시 함께 담겨 있다.
단지
막연히 기다리는것
그리고 너무 폭력적인것이 문제다.
*유리의 한자를 일상적 언어와 다르게 표기하였습니다.
서로 분리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의미 입니다.
빛은 그 자리에 언제나 항시 있으나
그 빛을 받고 있는 혹은 그 빛을 받아야 하는,
내가 기대어 쉴 나만의 아늑한 공간이어야 할 무엇인가들이
마치 투명한 유리의 벽과 같은 공간이 되어
나를 보호할 모든 능력들을 점차로 상실해 가고 또한 나를 점차로 공개시켜가고
정처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그 상황속에서 각자는 서로에게 주변에게
강요된 침묵 까지는 아니더라도
배려로서의 침묵을 간혹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따사롭고 풍요로운 구월의 찬란한 햇살 아래의 침묵이며
가장 고요하고 가장 침묵하는 그리고 가장 인내하는 대 자연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한, 구월의 어느 날의 밤 하늘 아래의 오열이다.
구월의 찬란한 햇살과 대 자연이 품어낸 밤 하늘은 내가 살아가기 위하여 이 세상에 가장 먼저 지어진 첫번째 으뜸의 주춧돌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정작 그것이 나의 삶 이라고 하는 미시적인 세상 속에서는 결코 가장 중요한것이 될 수가 없는 어떤 아이러니 속에서
정작 빛은 언제나 항시 그 자리에 있으나
그 거시적 세상에는 도저히 거할 수가 없고 오로지 그 미시적 세상속에만 머물러 있어야 생을 영위할 수 있는 나는 결국 그 빛으로부터 정말로 유리(流離)* 되고
내가 거하는 미시적 세상의 어느 삼차원공간상의 어느 시간대에 잠시잠시 비추어지고는 하는 바로 그 거시적 세상에서 비추어준 빛과 빛 사이를 정말로 유랑하게 된다.
처음의 나는 오로지 그 빛에 대하여서만이 투명한 유리와같은 거처안에 거한 것이다.
(위 까지가 원작이고 아래와 서두는 추가되어 수정된 내용들)
그러나 나의 미시적 세상의 거시적 세상속에서의 유랑이 거듭되면 거듭될 수록
그유리와같은 투명한 거처는 점차로 내것이 아닌 다른것들을 내가 거한 공간과 외부 양쪽 모두에 다소나마 보이게 한다.
오로지 빛에 대하여서만 투명하여도 되는데
그게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나의 미시적 세상이 거시적 세상속의 유랑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그 와중에 서로 의도치 아니하게 오고간 침묵은
어느 날 밤 하늘 아래에서 오열이 되었다.
솔직히 완성도가 조금 부족하다.
정말로 위와 아래의 저작의 의도로서 시문학의 원리와 기법에 따라서 창작된 사실은 분명히 맞지만
완성도가 부족하고 엉성하다.
(무언가 그물의 코가 훨씬 더 촘촘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매우 성긴 그물망에 비유할 수 있겠다.)
시문 내의 모든 단어가 시어가 되어 활어처럼 펄떡이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한 것이다.
좀 더 배워야 하는 입장이다 필자는 그래서
이를테면 이중의 비유를 위하여 전체 문장 구조가 전반부는 평이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단지 배열이 평이하지 않은 구조로 배치 되었고
(일반적인 다른 시 들처럼 모든 단어를 시어 로서 함축과 비유를 위한 배열을 하는 대신)
(문장 하나를 시문으로서 그 시 문의 배열을 기존의 다른 시들의 시 어의 배열처럼 교묘히 배열한 것이 전반부다.)
(그것은 시 어 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로는 함축하는것이 불가능한 보다 더 높은 함축의 효율을 위한 작업이다.)
(물론 당연히 시 문 내부의 모든 시어들을 정말로 시어로서 창작할 수 있느냐는-아래 신춘문예 당선작- 필자 아닌 다른 분- 위 내용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
그 한 중간에서 유리라는 한자의 다른 한자로의 표현이 의미를 한번 꼬집어 주면서
글의 후반부 시어들과 함께 2중의 은유 2중의 비유를 완성 시켜 보았다.
즉 전체 문장을 그 모든 비유를 하나의 내용이 될 수 있도록 처음 내용을 풀었을 때에
최초에 완성되는 전체 내용의 모든 문장들 속에 다시 한 번 더 가벼운 은유로서의 시어들을 포함시킨 또 하나의 이중의 시로서 전체 문장 구조를 실제로 창조한 것이다.
왜 그렇게 하였느냐?
너무 짧은 단문의 시어 속에는 아무리 함축의 기법을 쓰더라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의 분량 자체가 지극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냐면 시 안에 어떠한 철학적 화두를 담고 싶은데 분량 제한이 너무 작으면 어쩔 수 없이 단적인 예시만을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화두의 단면만을 표현)
그것은 단지 스냅사진 한 장으로서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정작 표현하고자 하는 화두에 대한 입체적 접근이 가능한 연속적인 서사의 구축이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위와같은 문장 구조를 창조한 것이다.
(전체 서사의 완성을 시 한 수 안에 완전히 압축하여 보다 입체적인 화두에 대한 고찰을 유도)
그것은 그냥 단지 시를 길게 쓰기만을 하여서는 불충분하고
최초의 원문상의 시와 해석 되어나오는 해석문 속의 시들이 시간대상으로 서로 전 후의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각각의 의미들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하였을 때
최소한 필자의 기준으로는 충분한 분량의 서사를 통하여 어떠한 화두 하나를 시어들만으로 표현함에 큰 부족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작업이 마무리 된다고 느꼈다.
처음 저작 의도가 정확히 그것이 맞으며
초창기에는 후반부가 모방문학이었고 중간 중간 시어로서 적절치 않은 단어들이 사용되어 있었다.
적합한 시어의 창작과 배치에 어려움을 느끼던 시기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공인된 문학체계는 아니며
필자만의 독자적인 체계다.
일단 습작이라 하기에는 다소 아깝고
실험작 이라고 겨우 지칭은 해 볼만 하다.
그러나 위 내용은 아래 신춘문예 당선작 수준으로의 모든 단어의 시어로서의 창작과 그를 통한 시 문의 배열이라고 하는 현대 문학이 탄생시킨 시 문학의 기본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사실 아래 당선작 역시 상자라는 단어의 키워드 가 다소 강하다.
(시 문학의 기본형을 최대한 유지하되 대중성을 대단히 많이 고려한 매우 우수한 작품)
(리본과 상자의 키워드만 알면 접근이 가능 할 수 있도록 고의로 그렇게 창작)
(읽어보면 안다 나머지 시어들과 시 문의 배치와 배열들을)









솔직한 이야기로 아직 배우는 입장에서 아래의 평론을 하려니 낯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지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평을 해 본다.
위 인용 당선작에는 전형적인 현대 시문학의 정수가 녹아 있다.
쉽게 말해서 글 쓰는 스타일이 정규 시 문학이다.
권장 문장 구성 방식
권장 단어 선택 방식
(어떤것도 직접 대놓고 그것이라고 직유로 말하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단어가 전부 직유가 아닌 단어들인데 그것들이 문장을 이룬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문장 속의 단어의 조합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각각의 단어들의 배치가 앞 뒤 문장속의 대구와 운율 속에서 명백히 하나의 의미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인 배치 보다는 감성을 따라서 써 낸 글에서 단어와 문장의 배치를 재배열 하는 방식으로 보통 시를 쓰게된다.)
(익숙한 사람들은 일필 휘지에도 그것이 된다.)
즉 표준중의 표준이면서 매우 신선한 충격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작가만의 독자적 감성이 함께 담긴 작품이다.
하지만 꼭 위와 같은 스타일의 시 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솔직히 아래 소개되시는 분은
뭐랄까 ....
원로하신 분의 열정이 뜨거우신 작품이지만
비슷한 연배의 다른 여류 시인분들 중에는
아래 소개되는 시 문장의 문장 스타일을 현대적인 시의 감성으로 실제로 녹여내신 분들도 많다.
물론 그 기본은 위 시와 비슷 할 것 같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문장의 구성 방식이 전혀 다르다.
시적 함축과 단어가 은유로 또 연상작용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 자체가 전혀 다르다.
도저히 그 내용까지는 말 해줄 이유를 못 느낀다.



우리 양심이 있으면
책 정도는 사서 보자
저 책들을 그 내용들을 꺼내어서
이런곳에 공개를 하여 달라
난 안하련다.
진심으로 배우려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책을 사거나 구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진심으로 책을 사서 읽어라
내 작품들이야 이곳에서 처음 시작할 때의 수준과 지금 수준이 차이가 너무 커서 그렇지
도저히 다른분들의 피와 살을 빼어먹고 팔아먹는 짓은 난 도저히 못하겠으니
그냥 가라
(아직도 본인들의 머리 속에는)
(아 그까짓 몇억짜리 이탈리아산 자연산 송로버섯 그까이꺼 하나 슬라이스 쳐서 음식에 뿌려 먹어보지도 못할쏘냐?)
(오로지 그런 종류의 생각들만 가득한가?)
(귀한 것들은 귀한 것이므로 귀하다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사회가 인고한 인고의 무게가)
그 이탈리아산 송로 버섯 하나가 귀하기 위하여 나머지 다른 것들이 그것보다 덜 귀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을 자연이 감내한 것 처럼
사회속에서 귀한것이 탄생 하기 위하여서는 사회가 감내하여야 하는 인고의 무게가 존재한다.
다른것이 그것보다 덜 귀한것이 되어야지만 그것이 귀한것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귀하다 생각하나 지금 이 순간에
귀한 것이 그것이 귀한 것으로서 가치를 지니기 위하여서는
먼저 첫 번째
그것이 자연 속에서는 정말로 희귀하거나 생명체로서 잘 기능하거나 하는등의 원초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작 사회 내부에 적용을 시키고자 할 때에는 그것만으로는 불 충분하거나 대상에 따라서 그 기준을 적용시키려고 할 경우 사고가 난다.
사회라고 하는 집단 내부에서 어떤 한 구성원 또는 그 구성원의 업적을 귀한 것으로 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다른 사회 구성원을 보다 덜 귀한 구성원으로 내리 눌러야만을 하는데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을 정할 것인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거나 낮출수 있는 그 기준을
자연속에서가 아닌 사회 속에서는 무엇을 첫 손에 꼽을 기준으로 정하여야 하겠는가
종국에 가서는 유형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의 규율이라고 하는 무형의 가치가 당신을 지배하는 것에 당신이 동의 하지 않는 다면
그러한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힌 구성원들의 숫자가 더 늘어날 수록
그 사회 그 집단은 정말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어디 노동 환경에서 무슨 사고가 났으므로 누군가를 책임자로 처벌 하였다.
혹은 처벌을 논의중에 있다.
검찰 수사는 과연 윗선 까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행위들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노동자는 살인자가 되어도 유죄인가?
관심의 수준의 폭의 문제다 단순히
그 관심사 수준을 벗어나지를 못하면 이 대한민국은 지금의 사회체제를 운영하여야 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냥 마피아나 갱이 지배하는 남미 국가 치안 수준으로 가던가
아니면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 통치를 받던가
누가 강한놈이 지혼자 다 해주길 바라는 그 수준밖에 안되는데
왜 누가 억울 하다는 이유로 다른 이를 또 더 억울하게 하자는 식의 비 생산적인 고정관념을 벗어 나지를 못하는가?
어느정도 임계점을 넘어선 단순 범죄 행위들은 당연히 처벌이 이루어 져야 한다.
살인을 저질렀거나 그 수준이거나
관심사를 조금만 초점을 옮겨라
그딴 자극적이기만 하고 원초적이기만 하고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이 무조건 마녀사냥이나 하자는 식으로 정작 네놈들의 위선과 위악과 범죄를 가리려 들지말고
무엇이 바뀌어야 사회가 정상적인 기능 수행으로 복귀 할 수 있겠는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것은 절대적으로 시민들이다.
그 다음 민사적 사안에 한하여 지나친 과실부담의 발생으로 인한 사회 자본의 총 손실 비율을 줄이는 방안이 논의되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도덕을 공부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문학과 예술과 과학 정치와 사회 경제 현안 그리고 스스로의 기량을 갈고 닦은 전문 분야를 공부 하라
아니면 이미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기라도 해라
협상과 토론의 기술 부터는
솔직한 이야기로 말을 섞기가 싫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시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고민의 주제는 하나이다.
누군가를 낮추거나 높이는 기준을
(본인들 혹은 본인들 주변의 다른 누군가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요구 되는 덕목은 꽤 많다.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
양으로 정하면 되겠나?



아니면 곰으로 정하면 되겠나?


댕댕이로 정해야 한다는 거냐?

아니면 귤로 정하면 되나?

고양이로도 정해 지기는 하더라

그나마 얘네들은 이쁘기라도 하지
누구집 고양이가 얼마나 이쁜가에 따라서
그 고양이 주인들 간에 간혹 높낮이가 정해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깊은 심층부를 논의하려 하기에
본인들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정신 상태부터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껏 무쇠로 된 나무와 같은 무엇인가에
나 홀로 혼자 만으로라도
그 나무에 새싹을 틔우고 싶었고
또 꽃을 피워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껏
이곳
나만의 정원에
정말로 그 꽃들을 피워 내고 가꾸어 왔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지만
요즘 걱정의 거리가 많고
우환의 거리가 또 많다.
제발 부디 ㅠ ㅠ
우환보다는 차라리 걱정거리가 ㅠ ㅠ